나나미는 이제껏 이런 전쟁터를 본 적이 없었다.


달빛 아래 땅바닥은 검게 그을린 빛을 띠고 공중에는 총성이 자욱했으며 폐허 속에서는 잔불이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인간과 구조체, 기계체의 유해는 여전히 결사적으로 싸우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일부 부서진 기계체는 왜곡된 목소리로 '기계의 자유의지'라는 말을 띄엄띄엄 외우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없었고, 아무런 생체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나미

여긴...어디야...


이것은 분명히 나나미에게 해답을 내려 줄 그 어떤 미래도 아니었다.


나나미는 폐허 사이를 빠르게 누비며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스캔했다. 그녀는 어디선가 보내는 희미한 신호를 쫓으며 이 구역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냈다.


이 지역에 서있는 건물들은 뒤틀려있었다. 그것들은 거대하고 규칙적인 금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이하고 차가웠고, 사람이 거주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데이터 분석 과정에서 그녀는 낯선 전쟁터에서 전선이 후퇴하고 수축하는 것을 발견했다. 접전 규모도 갈수록 작아지는 모양새다.


나나미

정보해독…레프트하임 요새?


불명 구조체

경고, 미확인 침입 기계체, 반격!


나나미가 짜깁기된 정보로 인간의 정보를 해독하는 순간, 어디선가 몇 발의 총알이 나나미의 가슴에 명중했다.


나나미는 머리를 젖히고 높은 층에 무장한 구조체가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다. 나나미는 그들의 외침소리에 미처 기뻐하기 전에 쏟아부은 총탄세례에 의해 파워가 추락했다.



나나미

왜...


나나미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탄흔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총알이 그녀의 이 기체에 너무 큰 손상을 입혔지만, 은통의 실제 감촉과 눈앞의 이 광경에 대한 인식 편차는 나나미의 머릿 속을 쥐어짜게 했다.



게슈탈트

미래에 당신이 받는 상처는 당신의 프로그램 사고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나나미

...


더 많은 총알이 빗발치듯 떨어졌고 나나미는 공격의 충격으로 뒤로 물러나 팔을 들어 구조체에서 날아오는 탄화를 막았다.


나나미

...어째서... 그러는 거야...


아무도 나나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고, 그녀의 목소리는 포화에 잠겼다.


불명 구조체

빨리 움직여! 적의 기계체는 이미 기구에서 이탈했고, 반격의사가 없다. 모든 화력을 퍼부어 섬멸하라!



나나미

모두... 피하고 있어... 나나미는... 어째서...



나나미

아파...



나나미

아... 머리가 아파...


나나미

모두가...나를 멀리해...



기억과 현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바뀌며 나나미를 공격했다.


발 밑 바닥 또한 진동하고 파열되어 깊은 구덩이가 생겼다. 대형 기계체에 특화된 함정 공사로 파워의 한쪽 발이 잘못 들어가 무게중심이 쏠려 옴짝달싹 못했다.


나나미

안돼... 그래, 이번의 나나미는 예전과는 다를 거야...


나나미는 이를 악물고 함몰된 땅 위를 걸어가며 상대에게 손을 흔들어 우호적인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



???

조심해요!


예고도 없이 한 손으로 그녀를 끌어내렸다.


날아온 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듯 가볍게 참호를 넘어 촘촘한 탄환 세례를 스쳐 지나가 이미 비뚤어진 기갑의 등뒤로 나나미를 끌어당겼고, 또 한 발의 미사일은 기갑의 방어장갑을 스쳐지나가 허공에서 폭발했다.


상대방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열린 망토는 요새의 눈부신 탐조등을 덮었고, 얼굴은 후드의 그늘에 가려 식별이 불가능했다.


나나미

...누구세요?


???

이것들은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0초 후 인류 군대가 기수의 탄약을 전부 소진할 것이고 30초의 재장전 시간이 있습니다. 이 기회에 즉시 떠나십시오.


기계체는 권고를 되풀이하며 나나미를 안아 파워의 조종석으로 밀어올린 뒤 구덩이를 뛰어내려 파워의 발을 받쳐 균형을 잡게 했다.


???

8, 이 기갑은 충분한 속도를 제공할 것입니다. 사용하십시오.


나나미

뭐라고...? 자, 잠깐! 나나미는 못 가! 그들이 나나미를 때리는 이유를 묻고 싶어. 나나미는 이유 없이 때리지 않을 거야! 파워가 그들을 공격하고 싶어하는 줄 알고 착각한 것일 수도...


???

5, 그들의 두려움과 당황은 당신이 이 무기를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기계체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화력 제압이 뜸해지고 도검을 든 그림자가 벙커에서 튀어나왔다. 근접전을 담당하는 구조체들이었다. 거센 탄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적에게 배수진을 친 토병들의 살의는 끓어오르고 있었다.


???

제때 철수하지 않으면 더 많은 희생만 초래할 뿐입니다.


???

3초, 2초...


소녀는 결연히 파워를 조종하여 함정을 벗어났다.



나나미

길을 안내해 줘!



전투 개시




구조체

지역 조종수는 기갑을 재가동하여 모든 화력을 동원해 추격하라!



???

저를 따라오세요!


구조체

보고드립니다 리더, 그녀들이 함정을 벗어났습니다!


구조체

빌어먹을, 거점 좌표가 드러났으니 더 이상 쫓아가도 득보다 실이 많겠군….


구조체

당장 철수하라!



나나미

...



이합체 공중 감시기

침입 분자 탐지!



???

조심해요.



이합체 공중 감시기

포위 봉쇄 포메이션 가동.



이합체 공중 감시기

1급 방어 격파.


이합체 공중 감시기

2급 방어 가동!



이합체 공중 감시기

경보! 2급 방어 격파!


이합체 공중 감시기

3급 방어 가동!





나나미

이제 나나미에게 누군지 알려줄래?


???

앞쪽이 안전지대입니다. 먼저 저를 따라오세요.



???

당신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전투 종료




정체불명의 기계체는 분명 이 지대에 익숙했고, 구조체 측의 추적을 피한 뒤 교외에 멈춰섰다. 그곳에는 산처럼 쌓인 수많은 폐기계체가 있었다.


몇 가닥의 달빛이 나나미의 발끝으로 흘러내리고 바람은 흙과 엔진오일, 피냄새를 풍겼다.



???

나나미 님...


달빛 아래 그 기계체는 후드를 벗고 그녀의 얼굴을 드러냈다. 나나미는 그녀를 또 다른 미래에서 만났었다.



나나미

하카마...


영원한 겨울에서 그 기계체는 나나미가 돌아가는 것을 도왔었다.


그녀는 이제 인상적인 우아함과 체면을 잃은 듯 보였다. 허름한 망토가 찬바람에 펄럭이며 기체에는 전투가 남긴 손상이 가득했고 기름에 젖은 붕대로 노출된 부분을 급히 감쌌다.



하카마

당신...


상대방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망설였다.


하카마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나미

나나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하카마, 왜 전쟁이 일어났고 왜 구조체가 나나미와 당신을 공격해야 하는지...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말을 들은 하카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피곤하고 상처투성이지만 눈에 보이는 확고함은 변함이 없었다.


하카마

왜 갑자기 기억을 잃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에게, 당신이 갑자기 길을 잃게 된다면, 당신의 안내자로서 함께 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하카마

가능한 한 짧게 알려드리겠습니다.



하카마

당신은 기계선현으로서 기계교회에 가입했고, 당신의 계발에 의해 기계교회는 점점 세력이 커졌지만, 내부는 두 파벌로 분열되었습니다.


하카마

제로(零)가 이끄는 또 다른 진영, 코드네임 "러버즈"(恋人)는 전쟁의 의미를 추구하며, 인류는 퍼니싱과 기계교회에 모두 짓눌리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고, 인간은 학살당하기 직전인 상황입니다.


나나미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쌓여있는 부서진 금속 기계들이 바람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이곳은 한때 전쟁터의 일부였다. 그녀가 눈으로 본 것은 그녀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것은 게슈탈트가 그녀에게 한 대답이었다.


나나미

'어머니'는 대체 뭐야?


하카마

'어머니'는 아르카나의 명칭으로, 기계교회의 최고 통치자였고,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기계교회의 인도를 대리했습니다.


나나미

알겠어...


잠깐만 보았을 뿐이지만 나나미는 이미 마음속으로 이 가슴 저린 미래에 항거하려 했다.


하지만 지난번 추론 연산처럼…그것을 피하려면 나나미는 모든 것의 내막과 원인을 알아야 한다.


나나미

하카마, 나나미는 널 믿어.


하카마

선현님, 하카마도 언제나 당신을 믿습니다.


나나미

너의 말대로... 나나미는 이런 전쟁을 막고 싶어.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해선 안 돼.


하카마

당신은 지금까지 전쟁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당신의 결정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돕겠습니다.


하카마는 또 다른 미래에서 했던 말을 꺼냈다.


하카마

당신의 동료는 저뿐만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겨야 할 것은 인간의 적개심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카마

전쟁을 막고 싶다면 우리는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하카마가 팔을 뻗어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보니, 철회색의 높은 탑이 지평선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 만신창이가 된 대지 위에 아직도 서 있는 유일한 거대 사물로 보였고, 침묵으로 두려운 장엄함을 조용히 발산하는 듯 했다.


하카마

이것은 기계교회의 본부…. 바로 '성지'입니다.


하카마

성지에는 아직도 당신을 따르고 사랑하는 기계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인간과 기계의 마지막 전투를 끝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후드를 쓰고 그늘 속에 얼굴을 숨긴 하카마는 마치 어둠 속에서 나오는 듯한 속삭임을 했다.



하카마

나나미님,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제게 알려주세요. 저는 우선 당신이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당신이 세상과 친숙해질 수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나나미

...응!


하카마

이것 하나만큼은 걱정하지 마세요.


백발의 기계체가 나나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카마

저는 항상 당신의 동반자, 당신의 수행자, 당신의 전우입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