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https://arca.live/b/punigray/43395243


3-1화 : https://arca.live/b/punigray/44226405


지휘관은 의식의 바다에 접속되는 순간 느껴지는 어지러운 감각에 머리속이 아득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정신을 놓아 버렸다.


"으아악!!"


잠시 정신을 잃었던 지휘관이 눈을 뜨자 그가 쓰러져 있던 곳은 지상의 한 슬럼가의 공원이었다.


"여긴? 여기가 카레니나의 의식의 안인가?"

 

의식의 안쪽은 마치 연극 무대라도 된 듯 이야기를 필요한 공간 이외에는 어둠으로 가려져 있었다. 타인에 의식에 처음 들어와 본 지휘관은 처음보는 광경에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 그는 한 여자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투닥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 멈춰!"


그는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집단 폭행을 막기 위해 큰 소리로 위협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다른 아이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길 바라고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의 소리를 듣고 누구도 그 자리를 피하려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이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애들 싸움에 끼어드는 게 아니라지만 저렇게 여러 명한테 얻어맞는 건 위험해!'


가까이 가서 보니 상황은 그의 생각과 사뭇 달랐다. 불량한 아이들이 가여운 어린 소녀를 둘러싸고 집단 폭행을 하는 줄 알았던 것이 반대로 여자아이가 홀로 다른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최대한 아프지 않게 맞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했지만 소녀는 그들에게 무슨 원한이라고 있는지 도망가려는 아이에게는 더욱 용서가 없었다. 

도망가는 아이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고, 넘어진 아이의 발목을 밟아 제대로 걷지 못하게 만들어 도주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그녀의 모습은 주위의 소년소녀들을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게 두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멈춰! 이 이상은 이 얘들이 죽을 지도 몰라. 이제 좀 진정해."


그는 상상 이상으로 잔인한 소녀의 행동에 놀라 조금 거칠게 손을 썼다. 

소녀도 그에게 순순히 당하진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며 반격을 해보았지만 아무리 침식체와의 전투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그라도 민간인 하나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는지 소녀는 쉽사리 제압당했다.

그동안 여러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도 그들을 압도했던 소녀가 처음보는 어른에게 양팔은 붙잡혀 땅바닥에 처박히자 다른 아이들은 잽싸게 그 자리에게 도망쳤다. 

그들끼리 지킬 의리는 없었는지 다친 아이를 부축해 돌아가는 아이는 없었으며 다친 아이는 홀로 절뚝거리며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에게 제압당한 소녀는 공원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자, 사냥감을 놓친 것이 억울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너희 어딜 도망가는 거야? 거기 서! 거기 서라고!" 


지휘관은 제압한 소녀가 울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제압을 풀고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방금 전, 홀로 여럿을 상대하고도 여유로웠던 소녀를 상대로 경계는 늦추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소녀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 위해 힘을 단단히 주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앳된 소녀의 얼굴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누구지?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소녀는 지휘관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소녀는 이대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수는 없었는지 분한 표정으로 크게 외쳤다.

 

"이거 놔! 난 저 쓰레기들을 전부 죽여 버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또 할아버지가 죽는단 말이야!"

 

지휘관은 소녀의 말투에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네?'


그는 소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전에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와 질문할 기회를 놓쳤다. 


"떽!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반드시 인간성을 지키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또 그 소리구나! 저 아이들이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그리 안달을 못하는게야?"


노인의 엄한 꾸중에 소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나를 지키겠답시고 네 손에 피를 묻히지 말거라. 만약 네가 누군가를 해쳤다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두 번 다시 네 얼굴을 보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노인이 일말을 변명도 듣지 않겠다는 듯 매몰차게 말하자 소녀는 세상 서러운 표정으로 '으앙'하고 울면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할아버지는 바보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휘관은 노인의 갑작스런 등장에 놀라 자신의 손을 뿌리지는 소녀를 제지하지 못했다. 소녀를 놓치고 놀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는 지휘관에게 노인이 말을 걸었다.


"어이쿠 귀한 손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구먼, 그래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는가?"


노인은 방금 전 손녀를 엄하게 타이르던 사람과 동일인인 것이 의심될 정도로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이 사람 좋아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지휘관은 노인의 눈빛이 자신의 가슴속을 구석구석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카레니나의 의식안에 인물이니까. 굳이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지만… 왠지 이 분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아.'


"사람을 한 명 찾고 있습니다. 전 그녀를 꼭 데리고 돌아가야 해요."


노인은 무엇이 즐거운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하지만 꼴을 보아하니 원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겠구먼?"


지휘관은 노인의 의미심장한 위로를 듣고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답을 알려달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바라봐도 내가 자네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얼마 없다네, 그래도 좋다면 내 이야기를 듣겠는가?"


지휘관은 막막하던 차에 한줄기 실마리를 발견한 것 같았다. 


"네! 듣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범위에서 모든 것을 말해 주겠네. 대신 내 손녀를 부탁해도 될까? 뿌리는 착한 아이인데 상처가 많아서 말이야. 잠시 길을 잘못들은 것 같으이."


그는 노인의 부탁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긴 현실이 아니고… 나는 잠시 후엔 돌아가야 해. 이 분의 손녀를 책임질 수 없어.'


"제가 할 수 있는 한 손녀분이 올바른 길에 돌아오게 되도록 해보겠습니다."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노인은 그 말이 만족스러웠는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네가 마음이 가는 데로 움직이다 보면 찾는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될 걸세."


노인은 이걸로 이제 미련이 없다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둠 속에 묻혀 홀연히 사라져갔다.

지휘관은 기대하던 것과는 달리 뜬구름 잡는 소리를 듣게 되자 속이 터질 듯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노인에게 좀 더 자세한 것을 묻고 싶은 마음에 몸을 일으켜 노인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노인은 지휘관을 향해 크게 외쳤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 더 이상 따라오지 말게! 그럼 손녀를 잘 부탁하이!" 


그 말을 듣고 그는 노인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다 보면 만날 거라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우선 그분의 손녀를 타이르러 가볼까?'


지휘관은 할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 서럽게 울며 도망친 소녀를 찾아나섰다. 그러자 갑자기 소녀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홀연히 사라져 어디 멀리 간 줄 알았던 소녀는 여전히 공터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얼굴을 묻고 훌쩍이고 있었다. 

'찾았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는 '의식의 안에서는 원래 이런건가?' 하고 갸웃하며 울고 있는 소녀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살며시 움직였다고 해도 바로 옆에서 느껴질 인기척을 눈치 못 챌 소녀가 아니었다. 

소녀는 복수도 방해하고 할아버지에게도 혼난 것에 대한 원망을 가득 담아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왜 왔어?"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는 소녀를 보고 지휘관은 멋쩍은 듯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글쎄? 네 할아버지가 너를 잘 부탁한다고 하셨기 때문일까? 그냥 널 따라와야 할 것 같았어."


조금은 얼빠져 보이는 그를 보고 소녀는 피식하고 웃더니 눈물을 닦았다. 


"웃기는 녀석… 남에 일에 참견이나 하고 다니는 걸 보니 한가한 가보네?"


"한가한 건 아니지만 어린애들 싸움을 말릴 정도의 시간은 있어."


소녀는 지휘관의 장난기 어린 말투에 부루퉁해졌지만 이내 아련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지금 네가 한 일이 무슨 짓인지 알면 그런 얼굴은 못할 텐데…" 


지휘관이 궁금하다는 듯 바라보자 소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있잖아, 나는 그 녀석들 때문에 할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적이 있어. 단 하나뿐이 가족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난 가족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저 할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위해 그 죽어 마땅한 녀석들을 구하려 했지… 그런데 기적처럼 다시 기회가 왔어. 이번엔 달라! 난 할아버지를 죽게만든 녀석들을 전부 죽이고 할아버지를 지키고 말거야!"


양손에 꽉 힘을 주고 다짐하듯 외치는 소녀의 모습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을 전부 죽이려는 거야?"


"맞아! 그 녀석들이 할아버지를 죽게 만들었으니까! 그전에 미리 죽여 버리면 할아버진 무사하실거야!"


"그리고나서 할아버질 영영 보지 않으려고? 그분이 분명히 말씀하셨었지, 아이들에게 위해를 가하면 다신 널 보지 않으시겠다고."


"그건…"


소녀는 그에게 마땅히 되돌려줄 말이 없었는지 말없이 애꿎은 땅만 찼다. 지휘관은 그런 소녀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네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렴, 하지만 나도 네가 할아버지의 말처럼 인간성을 지켰으면 좋겠다."


소녀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불평을 쏟아 내려던 찰나, 갑자기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굉음과 함께 어둠속에 가려져 있던 세계가 확장했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과 노을빛으로 타오르는 화마에 집어 삼켜지는 마을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침식체다! 여기까지 침식체가 왔어!"

"살려줘!!"


소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큰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분명 놀랄만한 광경이긴 하지만 소녀가 놀란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어보였다. 


"이럴리가 없어… 어째서 벌써 나타난거야? 아직 습격당한 날짜가 되지도 않았는데 왜! 안돼! 할아버지!!"


소녀는 갑자기 미친 것처럼 노인을 찾는 고함을 지르며 달렸다. 그녀가 걱정된 지휘관도 갑자기 달리기 시작한 소녀를 뒤쫓아 갔다. 


"그쪽은 위험해. 방금 침식체가 나타났다는 말 못 들었어? 너도 어서 대피소로 가야 해!"


한참을 달리던 소녀는 어느 폐구조물 앞에서 멈추어 섰다. 소녀가 멈춰 선 구조물의 입구는 문짝은 떨어져서 경첩만이 삐걱이고 있었고 떨어져 나간 문은 한쪽 모서리가 찌그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강도가 빠루와 같은 것을 이용해 잠긴 문을 뜯어낸 모양이었다.  

소녀는 불안함 마음을 품고 '설마', '제발'이라고 중얼거리며 구조물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들어가자 노인이 차가운 시체가 되어 소녀를 맞이했다. 


"이럴 리가 없어! 할아버지는 내가 돌아올 때까진 분명히 살아 계셨었단 말이야! 그런데 왜? 벌써 돌아가신 거야!"


소녀는 노인의 시체를 부여안고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용서 못해! 또다시 할아버지를 죽게 만든 녀석들 전부 죽여버릴거야!"


노인은 소녀에게 소중한 가족인 동시에 그녀의 복수심을 막아주는 유일한 방패막이였다. 하지만 그 방패가 사라지자 소녀는 더 이상 인간성을 지켜야할 이유가 사라졌다. 복수를 다짐하는 소녀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뒤늦게 소녀를 쫓아 도착한 지휘관은 문 앞에서서 오열하는 소녀를 보고 얼이 빠져 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의 뇌리에는 미련을 다 털어놓은 것처럼 후련한 표정으로 걸어가던 노인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그럼 손녀를 잘 부탁하이.'


'알고 계셨던 건가? 본인이 죽을 것이라는걸?'


그가 당황해서 멍하니 서있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울고 있던 소녀가 그를 밀치고 달려나갔다. 소녀는 끈적한 살기가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지휘관은 그 눈을 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분명 그 아이들을 죽일 셈이야!'


그가 소녀를 쫓아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그의 시야에 분명히 죽어있었던 노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그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노인은 태연하게 일어나 엉망이 된 방을 정리해 자리를 만들어 앉더니 지휘관은 향해 말했다. 


"내 손녀를… 카레니나를 잘 부탁하네, 이 눈치 없는 사람아."


지휘관은 노인에게 소녀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왜 소녀의 얼굴이 눈에 익었는지 깨달았다.

노인은 그가 자신의 말을 듣고도 그 자리에 못박혀 서있자 어서 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는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소녀를 찾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카레니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카레니나! 들리면 대답해! 카레니나!"


지휘관은 그녀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마을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같이 가! 도와줘!"

"난 살고 싶어! 제발 살려줘!"


하지만 그에게 들리는 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는 마을 사람들의 비명소리 뿐이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찾아야 했지만 이들을 그냥 버리고 갈 수 없었다. 


"자 이걸로 괜찮아."

"정말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본인도 급한 와중에 한참을 붙잡혀 있었던 보람도 없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거나 도움을 받자마자 이제 자신은 알바 아니라는 듯 다른 이들을 구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급하게 대피소를 향해 달렸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보람 없는 일이었지만 지휘관은 사람들을 돕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 할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한번 목격하게 된 카레니나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이전에 할아버지를 습격했던 두 사람, 그녀는 '톰'과 '케이티'라는 이름의 아이들을 찾아다녔다.  

'나는 또 할아버지를 지키지 못했어… 하지만 이번엔 할아버지를 죽게 만든 녀석들 따위를 지키지 않아.반드시 그 녀석들에게 복수할 거야.'


그녀가 눈에 불이 켜고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미쳐 대피소로 도망치치 못한 소년을 발견했다. 그는 분명 '톰' 이었다.  

소중한 이를 잃고 분노한 그녀가 원수를 발견하자 그녀의 등 뒤에서 불길하게 타오르는 검은 불길이 나타났다. 그것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래 복수심이야말로 널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연료가 될 거야! 저 녀석을 죽여서 네가 얻게 될 힘의 제물로 삼아라!'


카레니나는 소년을 향해 살벌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톰! 너 이 자식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소년은 그녀의 살기 앞에 벌벌 떨었다. 그는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뒷걸음질 치면서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나, 난 아니야! 난 아무짓도 안했다고! 오히려 난 다른 놈들이 네 할아버지를 때리는걸 말리고 있었어."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이제 막 소년을 잡으려는 찰나에 한 채의 침식체가 골목의 벽을 부수고 나타나 소년과 소녀를 갈라놓았다. 

소년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바닥을 굴렀지만 일어나보니 소녀를 가로막고 있는 침식체가 보였다. 

소년은 이걸로 소녀는 절대 자신에게 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여유가 생긴 그는 소녀를 조롱했다. 


"하하! 너네 늙은이가 모아 놓은 것들 별것도 없더라 고작 며칠 분의 식량 정도밖에 바꾸지 못했어. 그건 전부 내가 써줄 테니까. 넌 여기서 안심하고 뒤져버려!"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은 뒤도 보지 않고 대피소를 향해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펑'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그 소리가 당연히 침식체가 날뛰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살아야 해! 저 년이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달리면 난 살 수 있어!'


소년은 그 소리가 끝이나면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해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달렸다. 

위기의 상황에 초인적인 힘이 발휘된 것일까? 다시한번 '펑'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함께 소년은 하늘을 나는 것 같은 부유감을 느꼈다. 그리고 주위의 시야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내가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었나?'


소년의 눈앞에는 이제 대피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살았어!'


이제 대피소가 눈앞에 보인다는 안도감에 방심한 걸까? 소년은 '털썩'하고 땅바닥을 굴렀다.

지면에 낙하하는 충격으로 잠시 정신이 멍해졌던 소년은 금세 상황을 이해하고 다시 일어서려고 했다.

'안돼!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대피소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하지만 그는 일어서지 못했다. 스스로도 왜 자신의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는지 이해할수 없었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왜 일어서지지 않는 거야! 그러고 보면 나는 왜 넘어진거지? 다리에 무언가 걸리는 감각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소년은 그제서야 지금까지의 일들에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왜 그렇게 빠르게 달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자신은 왜 넘어진 것인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소년은 스물스물 올라오는 불안감을 억누르고 팔로 바닥을 밀어 상체를 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그러자 소년은 왜 자신이 도망칠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체 언제? …"


소년의 다리는 어디로 갔는지 허벅지 아래가 사라져 있었다. 이제 소년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어디야? 내 다리 어디갔어?"


소년이 자신의 다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눈알을 돌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눈에 비친 것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신의 다리가 아니라 자기 키만 한 커다란 포신을 어깨에 들쳐 매고 자신을 겨누고 있는 카레니나의 모습이었다. 


"아, 안돼!"


소년의 마지막 단말마와 함께 카레니나의 포신은 불을 뿜었고 그것이 소년이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은 절망이었다.  


할아버지의 원수 중 하나를 죽이자 카레니나의 머리속에 흑염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원수는 저 녀석 하나가 아니잖아? 이대로 만족할 거야? 거기다 이번엔 그 둘만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고 했어, 이 마을 모든 사람들이 네가 죽여야할 복수대상일지도 몰라.'


"그래 맞아. 분명히 이전과는 달라, 만약 그 자리에 그 둘만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원래대로 죽지 않았을 거야."


마침 마을 사람들 모두를 죽이겠다고 결심을 하던 차에 그녀의 눈에 대피소가 보였다. 흑염은 그녀에게 다시한번 속삭였다.       

'침식체들을 대피소에 밀어 넣자. 과연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가 있을까?'


그녀는 머리속에 울리는 그 소리가 알려준 방법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맞아. 알아서 한곳으로 모여 줬겠다. 내가 한명한명 죽이고 다니는 것보단 단숨에 몰살시키는 쪽이 편하고 좋겠어.'

 

카레니나는 마을 안을 돌아다니는 침식체를 하나씩 유인해와 대피소의 문앞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모든 침식체가 대피소의 앞에 집결하고 나서야 그녀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잘 보이는 건물의 옥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하! 이제 구경하는 일만 남았네? 조금만 기다리면 할아버지의 원수들은 전부 이 자리에서 사라지게 될 거야!"


그녀가 통쾌한 듯 크게 웃자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군요. 한참 찾았어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니 지휘관이 있었다. 그의 모습은 이곳까지 오면서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은 듯 어디하나 성한 구석이 없었다.


지휘관은 드디어 카레니나를 발견해 반가웠는지 손을 크게 흔들면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어린 시절의 카레니나가 대피소 앞에 침식체를이 우글대는 것을 가만히 앉아 구경하면서, 

앞으로 몰살당할 주민들의 처참한 모습을 상상이라도 하는지 광소를 흘리는 것을 보자 그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늦장을 부린 탓에 조금 늦어버린 모양이네요… 카레니나, 정말 이럴 거예요?"


그가 실망한 듯한 얼굴을 하자 그녀는 잠시 풀이 죽은 듯 했지만 금세 광기의 찬 눈으로 돌아왔다. 


"응…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녀석들을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그리고 저 녀석들을 죽이면 내가 강해질 수 있데, 이런 걸 일석이조라고 하나? 그러니까 날 방해하지 마!"


"전에도 말했죠?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라고, 저도 제가 하고싶은데로 할테니까, 카레니나도 하고싶은데로 해요. 단 그게 정말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 잘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휘관은 건물을 내려가 대피소의 입구로 향했다. 


침식체들은 더 많은 인간의 피 맛을 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것들은 오로지 대피소의 안에 갇혀있는 인간들을 학살하고자 그 입구를 굳건히 막고 있는 문을 부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그런 침식체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침식체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방해하는 그를 살려두려 하지 않았고 아무리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원래 약한 축에 속하는 지휘관이 침식체를 직접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는지 그의 몸에는 점점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저 바보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어딜 끼어드는 거야?" 


그녀가 그 모습을 보고 그를 구하러 가기 위해 일어서자 흑염이 소리쳤다.


'설마 저 녀석을 구하려는 거야? 네 복수를 방해하는 녀석인데, 살려 둘 필요 없잖아!'

"그렇지만 저 녀석은 내 복수랑 관계없잖아… 이대로 죽게 놔둘 순 없어."


'그럼 복수를 포기하는 건가? 그렇게 되면 앞으로도 나약한 채 살아가게 될걸? 그래도 좋아?'

"하지만…"


'그래, 저 녀석을 구하기 위해 내려가면 결국 넌 희생될 거야. 그럼 결국 똑같은 과거를 반복하는 거지. 결국 바뀌는 건 없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냥 애꿎은 네 할아버지만 다시 한번 죽은 게 되어버리는데, 그래도 좋아?'

"안돼! 할아버지를 다시 죽게 했는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니 그건 절대로 싫어!"


'그래, 그럼 저 녀석이 죽든 말든 무시해! 넌 너의 복수를 완수하는 것에 집중하라고!' 


머릿속에 울려펴지는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가 계속 그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녀의 시선을 지휘관에게서 돌리게 만들었다. 

'그보다 저길 봐! 저 도움 안 되는 침식체들이 아직도 대피소의 문을 뚫지 못했어, 하지만 너라면 어떨까? 여기서 살짝 도와주는 게 어때? 기다림의 시간을 짧을수록 좋지 않겠어? 복수의 맛은 아주 달콤할 거라고.'

 

흑염의 목소리에 그녀가 바라본 곳에는 정말로 대피소의 문을 쉽게 열지 못해 낑낑대는 침식체들이 보였다. 그녀가 그것을 보자 흑염은 다시 말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지금 대피소의 안에서는 침식체가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오고 있어, "휴… 다행히 여기까지 들어오진 못 할 것 같아." 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지.'


구조물 철거의 전문가인 카레니나에게 대피소의 문 따위는 얄팍한 종잇장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침식체들의 답답한 행동을 보고 뭔가에 홀린 듯 포신을 쥐었다. 그리고 자세를 잡아 대피소의 입구를 향해 포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발포할 것만 같았던 그녀는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달이 난 흑염은 그녀를 재촉했다.

'어서 쏴! 문 앞에 모여있는 침식체 몇 마리가 기능 정지되더라도 그 뒤에는 그보다 몇 배나 많이 남아있으니, 그대로 쏘아도 괜찮아! 대피소 안의 인간들은 절대 살아서 나가지 못할 거야. 어서 복수를 해, 그리고 나에게 제물을 바쳐!'


그 말에 그녀는 마지못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포구에서 불꽃을 뿜으며 몇 개의 포탄이 날아갔다. 

대피소의 문짝 따위는 그녀의 포탄의 위력을 조금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단숨에 날아가 버리는 것은 누가 보아도 당연히 찾아올 미래로 보였다. 하지만 한 사내의 노력으로 인해 그 당연한 미래가 바뀌었다. 


"휴우~  다행이야. 아슬아슬 하게 맞췄어."


그녀가 잠시 눈을 돌린 사이 지휘관은 대피소의 문이 침식체의 공격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덜컹거리는 것을 보고 침식체를 처리하는 것을 멈추었다. 다행히도 침식체들은 그가 더 이상 방해하지 않자 관심을 잃은 듯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대로 찔끔찔끔 처리해 봤자 아무 소용없어 사람들을 지키려면 저 문을 뚫을 수 없도록 막야야겠어.'


그는 그동안 자신이 박살 낸 침식체의 잔해를 이용해 수많은 간이 바리게이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생체공학 도롱뇽의 레이저나 감시기의 기관포 등 폭발시킬 수 있는 건 모조리 모아다가 터트려 그것들을 대피소의 입구까지 날려 보냈다. 거기에 마침 그가 쏘아 올린 방벽중에 하나가 그녀의 포탄의 궤도를 가로막아 성공적으로 대피소를 지켜낸 것이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대피소를 나올때는 고생 좀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침식체로부터 안전해졌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지휘관은 위험해 졌다. 침식체들은 더 이상 대피소안의 인간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곳에 도달하기가 너무나 힘겹다는 것을 인지 한 듯 했다. 그 대신 손쉽게 죽일 수 있는 표적, 바로 지휘관을 향해 살의를 내비쳤다. 


결국 그는 다른 사람들 지킨 대가로 자신이 위험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사람들을 구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는지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카레니나는 그의 모습이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겹쳐 보였다. 

'바보같이… 자기가 얼마나 위험해졌는지는 알지도 못하고 뭐가 그리 좋다고 웃는 거야.'


자기 생일선물로 폭발하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화려한 폭발을 터트려 준 할아버지, 그러다 크게 다쳤으면서도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영락없이 똑같았다. 


"나 역시 지휘관을 내버려 둘 수 없을 거 같아… 미안하지만 복수는 포기할래."


그녀가 복수를 포기할 결심을 하자 검은 불길은 점점 작아졌다. 

'언젠간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야.'


"괜찮아! 지휘관을 내버려 두고 복수를 하더라도 후회는 할 것 같으니까." 


그 말과 함께 검은 불길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포신도 함께 사라졌다. 

그녀는 아쉬운 듯 포신을 쥐고있었던 손을 가볍게 쥐었다 피고는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휘관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어차피 원래도 없었으니까. 지휘관 먼저 돌려보내고 원래 했었던 대로 하면 돼.'  


그녀는 건물을 내려오자마자 지휘관에게 가서 물었다.


"야! 괜찮아?"


그는 그녀의 분위기가 방금 전과 달리 밝아진 것을 느끼고 기뻐했다.


"방금 전까진 힘들었는데 카레니나의 모습을 보니까,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녀는 그 대답이 내심 맘에 들었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괜히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실없기는, 그러기에 대체 여긴 왜 들어와서 고생을 하는 거야? 내 복수를 방해하기나 하고 말이야."


지휘관이 '아야!'하며 엄살을 부리자, 그녀는 가볍게 웃더니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날 구하기 위해 와줘서 고마워..."


소리의 크기도 작은 데다가 말끝도 흐려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분위기로 보아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눈치 없는 지휘관은 그걸 다시 물어봐서 초를 쳤다. 


"뭐라고요?"


그녀는 똑같은 말은 다시 들려 주기 싫었는지 웃음기 있는 얼굴로 큰 소리로 외쳤다.

 

"네 덕분에 두 번 다시 할아버지를 보지 못하게 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고맙다고!"


"그쵸? 할아버지도 복수 같은 건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그리고 강함만을 추구하다가 흑염에 조종당하는 카레니나의 모습도 보고 싶지 않으실 거고요."


카레니나는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녀는 조금 더 이 즐거운 시간을 즐기고 싶었지만 바로 뒤에 침식체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아쉽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래… 할아버지라면 그러실 거야. 그리고 너에게 폐를 끼치는 걸 원하지도 않으실 거고 그러니까 넌 빨리 돌아가."


"네? 같이 가야죠!"


"난 여기에서 아직 할 일을 마치지 않아서 못 돌아가. 그러니까, 너 먼저 빨리 돌아가라고!"


그녀는 빨리 가라고 재촉하며 지휘관을 힘껏 밀었다. 지휘관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자세로 넘어졌다. 그러자 지휘관이 부딪히게 될 지면이 갑자기 갈라지더니 웜홀 같은 것이 열려 지휘관을 '쑤욱' 하고 빨아들였다. 


지휘관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것으로 그녀의 의식의 바다에서 빠져나가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소리쳤다. 


"꼭 제정신으로 돌아와야 해요! 저도 평소 그대로의 카레니나가 좋으니까요!"


그의 외침은 그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지막의 '카레니나가 좋으니까요!' 라는 말만큼은 귀에 쏙쏙 박혔다. 


"저 녀석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는 잠시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지만 뒤쫓아 오는 침식체 무리를 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그럼 나는 할아버지에게 돌아가 볼까?"


그녀는 쫓아오는 침식체들을 보며 '씨익' 하고 웃더니 목청이 터져라 크게 외치고는 할아버지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그래! 이대로 술래잡기 시작이다!"


그녀의 말을 끝으로 대피소의 모든 침식체들이 그녀를 잡기위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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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도망쳐 다닌 끝에 할아버지의 시체 앞에 도착했다. 


"이곳은 어떻게 보면 내 꿈 비슷한 곳이라 내가 간절히 원하면 혹시나 할아버지가 살아있어주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현실은 가혹한 법이네."


카레니나는 아쉬운 듯 불평을 말하며 할아버지의 시체 옆에 앉아. 마치 죽음을 각오한 듯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됐네, 할아버지 미안해. 약속... 못 지켰어. 하지만 마지막에 지휘관이 붙잡아줘서 돌아올 수 있었어. 이젠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앞으론 안 그럴 테니까.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 무표정했던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작은 미소가 마치 자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는 듯해서 눈물을 터져나왔다. 


"고마워, 고마워 할아버지… 컥!"


그렇게 그녀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받는 감동의 순간, 분위기도 읽지 못하는 침식체 하나가 나타나 그녀를 향해 날카로운 강철 팔을 뻗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을 뚫었고 그녀는 피를 토하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원래대로 됐어, 결과적으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니까, 이대로 전부 되돌아갈 거야.'


이후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되어 구조체 수술을 받아 지금의 모습이 된다.

 

이것으로 그녀의 기억과 똑같은 결말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복수극의 첫 희생양이 된 '톰'이라는 소년, 원래라면 그는 여동생과 함께 도망쳐 살아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모두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흑염의 재물이 되어 그녀의 의식의 바다에서 사라져, 그녀의 기억에서도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식에 남은 자그마한 균열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스스로의 의식의 바다에서 빠져나왔다. 


"지휘관, 나도 금방 돌아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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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이 카레니나의 의식의 바다에 들어가고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눈을 뜨지 못하는 지휘관을 보자 리브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왜 아직도 안 나오시지?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역시 지휘관님 혼자 들어가게 두는 게 아니었는데…'


지휘관의 곁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서성이는 그녀에게 자가 치료를 하고있던 나나미가 소리쳤다. 


"그만! 정신 사나워서 집중을 할 수가 없다구!"


나나미의 외침에 리브는 말없이 서성이는 것을 멈추고 지휘관의 곁에 앉았다. 평소라면 가벼운 사과라도 한 마디 했겠지만, 그녀는 지금 지휘관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나나미에게 말을 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나미는 리브가 지휘관의 옆에 앉은 것을 보고 다시 자가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나미는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를 듣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리브! 왜 자꾸…"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지휘관의 곁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리브를 보고 그녀는 놀란 눈으로 말했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가 들리고 있는 거지?"


리브는 지휘관의 걱정을 하느라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처음에는 나나미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착, 착, 착' 하고 울려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예감했다. 


"네 저도 들리네요."


귀를 기울여보니 발걸음 소리는 입구 쪽 통로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유물의 방의 입구로 갔다.


"왜 이제 와서 이 녀석들이 우릴 쫓아오는 거야!"


그곳에는 셀 수도 없는 수의 산액 일개미 무리가 바글바글하게 모여 통로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은 관심도 없다는듯 유적을 망가트리는 일에만 집중하던 침식된 일개미 무리의 목표가 되는 것은 썩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미 한 차례 전투를 통해 소모될 대로 소모된 상태에서라면 더욱 그러했다.


"나나미! 불평할 시간은 없어요. 우리가 막아야 해요."


"응 지금 준비 됐어! 지휘관이랑 카레니나에겐 털끝하나 대지 못하도록 만들게!"


그녀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일개미 때를 향해 달려나갔다. 하지만 그녀들의 굳은 의지와는 다르게 둘은 일개미들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고 수비라인을 점점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라인이 뒤로 밀려 한 발짝만 더 뒤로 가면 유물의 방의 입구가 뚫리는 상황이 되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좁은 통로를 벗어나 넓은 방안으로 들이닥치는 산액 일개미들에게 둘러싸여 필시 좋지 못한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애초에 이미 둘 다 카레니나에게 치명상을 입고 임시로 때워 간신히 움직일 수 있게만 치료해 둔 상태로 도저히 전투를 할 수 있는 몸 상태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 점을 감안하면 둘은 충분히 잘 싸우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잘 싸우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반드시 이것들을 막아내지 못하면 움직이지 못하는 카레니나와 지휘관이 위험해지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순간, 리브는 잠시 뒤돌아 쓰러져있는 지휘관을 바라보고 마음을 굳혔다. 

'그래 할 수 있어! 저 정도되는 수를 정화했다고 해서 감염되진 않을 거야. 분명 잘 버틸 수 있어!'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외쳤다. 


"나나미 지금 당장 지휘관님과 카레니나를 데리고 가요."


"엣? 저걸 혼자 막으려고? 무리야! 너 설마 희생할 셈이야?"


"아뇨, 절대로 여기서 죽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빨리 지휘관님을 모시고 가요!"


그녀가 살벌하게 윽박지르자 나나미는 마지못해 카레니나와 지휘관을 들쳐매고 출구로 향했다.


"꼭 쫓아와야 해! 안 그러면 평생 원망할 테니까. 알았지?"


리브는 나나미에게 들려서 떠나가는 지휘관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제발 무사하세요. 저도 반드시 돌아갈 테니까.'


사실 그녀는 사지가 멀쩡한 상태로 그에게 돌아가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일개미의 일부를 정화하고 나면 그 일개미에 막혀 오지 못하는 침식된 일개미를 정화하고 다시 그 일개미를 방벽 삼아 정화하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기만 하면 될 뿐인 단순한 전투가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자신은 없었다. 

그녀는 '내가 침식체가 되어서 카레니나처럼 나나미와 지휘관을 공격할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그들을 내보내지 않고는 도저히 정화를 시도할 수 없었다. 


나나미가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그녀는 정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싱겁게도 2분도 채 걸리지 않아 유물의 방을 가득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 입구 쪽의 통로까지 가득 매운 산액 일개미들이 모두 퍼니싱으로 부터 해방되었다.  

어찌나 빨리 끝났는지 다른 이들을 피신시키기 전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 전투 시간보다 더욱 길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다. 수많은 산액 일개미들을 감염시켰던 퍼니싱을 그녀의 작은 신체 안에 받아들인 지금, 이제는 그것들을 Ω무기를 이용해 파괴해 나가야 한다. 


그녀는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체내의 퍼니싱 바이러스를 차근차근 소멸시켰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그녀의 안에서는 아직 소멸되지 않은 퍼니싱 바이러스가 날뛰었다. 

'괜찮아. 아직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


그녀는 전신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소대원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통로를 따라 출구를 나오자 다행히 밖이 보였다. 


"리브! 다행이야. 무사히 돌아왔구나!"


나나미가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보고 달려와 부축했다. 


"도와주러 가려고 했는데 나나미가 돌아갈 세도 없이 끝내고 오다니 굉장해! 어떻게……"


나나미는 그녀의 곁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댔지만 이제 한계에 다다른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나미의 부축을 받아 임시 거점에 도착한 그녀는 아무 탈 없이 잠들어 있는 지휘관을 발견했다. 

그는 아직 카레니나의 의식의 바다에서 나오지 못했는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지휘관님은 아직도 깨어나시지 못하신 건가요?"


리브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한참을 떠들어대던 나나미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고생을 하고 온 그녀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 주었다.


"지휘관은 이미 카레니나의 의식의 바다에서 나왔어. 지금은 지쳐서 잠든 것 뿐이야."


그 말을 듣고서야 리브는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


지휘관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긴장을 놓은 탓일까? 

그녀는 체내의 남은 모든 퍼니싱 바이러스의 소멸을 확인하지도 않고 의식을 놓아버렸다.

지휘관의 곁에 잠이 들듯이 쓰러진 그녀를 보고 나나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리브? 피곤한 거야? 아아… 다들 잠들어 버리면 나나미가 임무완료의 보고를 해야 하잖아?"


나나미는 귀찮은 듯 투덜거리며 본부에 연락을 하기 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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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 https://arca.live/b/punigray/44226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