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https://arca.live/b/punigray/43395243


3-2화 : https://arca.live/b/punigray/44226433


"여긴?"


카레니나가 눈을 뜨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늘 보던 천장, 늘 보던 침대와 책상, 그녀는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공중정원 안의 자신의 방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돌아온 건가? 그럼 임무는 다 끝났겠네."


평소였다면 지금쯤 당장 임무의 기여도를 확인하겠다고 지휘관에게 달려가서 자신의 기여도와 리브의 기여도를 비교했겠지만, 왠지 오늘을 그러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흑염에게 조종당하던 순간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모두가 위험했었지… 나나미는 괜찮으려나? 지휘관이 치료했으니까. 아마 괜찮겠지?'


그녀가 스스로 한 짓을 떠올리며 후회의 늪 속에 파묻히려던 순간 문득 지휘관이 자신의 의식의 바다에 들어왔던것이 떠올랐다.

'맞아! 잘 빠져 나왔겠지? 지휘관의 의식이 아직 내 의식안에 떠돌아 다닌다거나 하진 않겠지?'


카레니나는 근심 어린 얼굴로 지휘관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녀가 기지 안에 발을 들여놓자 들려오는 나나미와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하니 다행히도 지휘관과 나나미는 무사한 것 같았다.

'다행이다. 무사한가봐.'


그때 나나미의 눈에 복도에 서서 자신들의 대회를 엿듣는 카레니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지휘관과 수다를 떨던 것을 멈추고 그녀에게 달려와 말했다. 


"카레니나! 일어났구나! 너만 눈을 뜨지 못해서 나나미가 방으로 옮겨줬다구."


카레니나는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듯이 작게 부푼 가슴을 내밀어 으스대는 그녀가 평소와는 달리 얄미워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 자신이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솔직하게 사과했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미안, 나 때문에 많이 다쳤잖아. 이젠 좀 괜찮아?"


그녀가 나나미에게 사과를 하자 나나미는 못 볼 것을 본 것 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휘관에게 말했다.


"큰일이야, 지휘관! 카레니나가 이상해! 아직 조종당하고 있나 봐!"


카레니나는 신기하게도 최고의 컨디션으로 자신을 놀려대는 나나미의 모습을 보고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런일이 있었는데도 변함없는 테도를 보여주는 그녀에게 고마움과 약간의 의아함을 느낄 뿐이었다.   

'나는 평소랑 똑같이 했는데?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참.'


"그래 장난치는 걸 보니까 멀쩡한 것 같네, 나는 지휘관이랑 할 말이 있으니까 넌 잠깐 자리를 비켜줘."


하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이대로 지휘관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나나미에게 보여줘서 또다시 놀림 받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나나미를 잠시 치워두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기지의 문밖을 향하도록 돌리고는 그대로 가볍게 밀었다.


나나미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또 기여도 확인하려구? 빨리 끝내달라구."


그녀는 평소 기여도를 확인하고 나면 짜증을 내는 카레니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도 지휘관이 고생 좀 하겠구나.' 하고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까? 하는 염려에 기지를 나가자마자 멀리멀리 도망쳤다.

 

카레니나는 나나미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대로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는 그녀를 보고 굳이 오해를 풀어일을 어렵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나나미에게 어서 나가라고 재촉을 했다. 


"그래 빨리 끝낼 테니까, 잠깐 요 앞에서 놀고 있어."


나나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카레니나는 지휘관에게 다가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미안해!"


지휘관은 그녀가 이런 식으로 사과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눈만 끔뻑 끔뻑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놀란 얼굴을 보고 가볍게 서운함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지?"


"네 괜찮아요. 카레니나야말로 괜찮아요? 이제 멀쩡한 거죠?"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안심이라도 하라는 듯 '씨익' 웃어 보이자 그도 그녀에게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그녀는 사과를 하고 나니, 돌연 지휘관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 카레니나가 좋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대체 왜 그런 말은 한 거지?'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주제에 자신을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내심 답답했다.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물어봤다가, 만약 내가 잘못 들은 거면 어쩌지? 잠깐, 정확히 들은 거라도 문제야, 그럼 난 지휘관이랑 사귀게 되는 건가?'


그녀가 갑자기 입을 달싹거리며 머뭇머뭇 거리자 지휘관은 나나미와의 대화를 들었을 때 부터 준비해 두었던 기여도를 기록한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은 기여도를 확인하면 평소처럼 날뛸 그녀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했는지 긴장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기여도 말이죠? 이거…"


그런 지휘관의 모습을 보고 내심 기회다 싶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 네가 뱉은 한마디 말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그냥 물어보지 말까?' 


그녀는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휘관이 전 소대원들의 기여도가 잘 보이도록 페이지를 펼쳐준 덕분에 무심코 눈이 갔다.

이번에도 그녀의 기여도는 리브의 기여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역시, 리브는 이길 수 없었네.'


평소라면 그녀와의 차이에 분해하며 속앓이를 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지휘관이 건넨 서류를 받지 않았다.


"괜찮아, 이젠 그런 거 확인 안 하려고. 이런 거에 집착하는 바람에 유물한테 조종당한 거니까. 바뀌어야지,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너무 꼴사납잖아."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항상 그녀의 불만 가득한 얼굴만 보아오던 지휘관은 그 모습을 보고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녀는 지휘관의 얼빠진 모습을 보자 용기가 났다. 그리고 피식 웃고는 그에게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래, 잘못 들었으면 어때, 그냥 잠깐 쪽팔리고 말지 뭐.'


그녀는 우물쭈물하다가 그를 놓치고 아쉬움에 불면증을 겪을 바엔 부끄러움에 이불 킥으로 잠 못드는 밤이 되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녀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지휘관에게 말했다.


"너 말이야… 마지막에 뭐라고 했었어?"


그녀의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린 지휘관은 의문을 표했다. 


"네?"


"내 의식의 바다에서 나가면서 했던… 아니, 그런 건 이제 상관없지, 네가 뭐라고 말했던 건지는 묻지 않을래."


그녀는 태연한 그의 태도를 보고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역시, 잘못 들었었나 보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널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분명 계기는 네가 한 말을 오해한 것이지만 지금의 내 감정은 진짜일 테니까.'


"지휘관, 나 말이야 널 좋아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너도 날 좋아해 줘."


지휘관은 그녀의 고백에 참새가 총소리를 들은 것 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그녀의 충격적인 발언에 놀란 사람은 고백은 받은 지휘관 뿐이 아니었다. 

마침 기체 정비를 마치고 돌아온 리브가 기지의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그녀에게도 카레니나의 고백을 들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에? 방금 카레니나가 뭐라고 말한 거지?'


하지만 상황을 살피기 위해 살짝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 그녀의 눈앞에 카레니나의 고백을 듣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지휘관이 보이자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리브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는데도 느껴지는 가슴의 통증에 놀랐다. 그녀는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이 마치 '뻥' 하고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왜!? 난 이렇게나 아픈 걸까? 분명히 정비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한 퍼니싱 바이러스가 몸 안에 남아있는 걸까?'


그녀는 자신이 아픈 이유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냥 카레니나가 지휘관의 연인이 된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동안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싫어! 지휘관님이 카레니나의 연인이 되신다니, 그건 싫단말이야.'


만약 그녀가 카레니나의 고백에 대한 지휘관의 답을 들었다면 조금은 침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렸다. 중요한 대답은 듣지도 못한채로… 


"미안해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만…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게요."


카레니나는 지휘관의 대답을 듣고 조금 낙심했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은 감추고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자신이 웃을 때, 그도 미소 지어 주었기에 분명 그는 자신의 웃는 얼굴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계획된 행동이었다.


"응. 괜찮아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하지만 고민해 본 끝에 네가 날 좋아하게 된다면 기쁠 거야."  


지휘관은 그녀의 미소를 보고 난처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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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니나의 고백 장면을 목격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 리브는 목적지도 없이 그저 흐느적흐느적 걷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눈에 초점이 없어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것만 같아 누가 봐도 위태로워 보였다. 

위태위태하게 걷던 그녀는 때마침 앞을 보지 않고 걸어가던 한 여인과 부딪치고 말았다.


"어딜 보고 걷는… 리브? 너 왜 그래?"


그녀와 부딪힌 여인은 다행히 안면이 있는 상대였다. 

여인은 리브에게 아는 채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에는 여인이 비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머리 속에는 온통 지휘관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해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리브가 넋을 잃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여인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녀는 그제야 눈에 초점이 돌아왔고 지금 자신을 흔들고 있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보았다. 


"베라? 저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요?"


"하? 너 지금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 거야? 지금 넋 놓고 돌아다니다가 먼저 부딪혀 온 게 누군데?"


리브는 베라의 말을 듣고 건성으로 사과했다. 


"그런가요? 죄송해요. 제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그만,"


그 말을 뒤로하고 리브는 다시 좀비처럼 멍하니 앞을 향해 걸어갔다. 


"아 진짜."


그런 리브의 모습을 보고 베라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끌고갔다. 


"너 당장 따라와!"


리브는 놀랐지만 강압적인 베라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별 상관없다는 듯 순순히 그녀에게 끌려갔다.

베라는 자신의 방에 도착하고 나서야 리브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녀의 방은 별다른 장식 하나 없이 살풍경했다. 그 안에서도 리브는 멍하니 있었다. 

리브가 잠시 멍하니 서있는 동안 베라는 작은 탁자와 방석을 들고 왔다. 


"앉아!"


리브가 자리에 앉히고 그녀는 심문 아닌 심문을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정신을 빼놓고 돌아다녀? 너답지 않게."


"아무일도…"


세상 관심 없다는 듯 입을 다무는 리브를 보고 화가 난 베라는 그녀에게 윽박질렀다. 


"아무 일도 없기는? 지금 당장 너네 지휘관한테 가서 물어봐야 말할래?"


베라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휘관에게 가려고 하자 리브는 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안돼! 지휘관님께는 말하지 말아요."


베라는 자신을 붙잡은 리브를 떼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빨리 대답해."


그녀의 재촉에 리브는 천천히 입을 땠다. 


"그게… 그러니까…"


리브가 여전히 우물쭈물거리자 베라는 자신을 붙잡은 리브의 손을 쳐내고 일어섰다.


"아 됐어. 너희 지휘관한테 물을래."


베라가 등을 돌려 나가려 하자 리브는 다급하게 외쳤다. 


"아?! 지휘관님이 고백받는 걸 봐버렸어요!"


그녀의 입을 열기 위한 연기를 했던 것인지 베라는 리브의 외침을 듣고서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이제야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 그래서 지휘관이 누구한테 고백받았는데?"


리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풀 죽은 목소리로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카레니나요."


"그 애가? 의외네, 그건 그렇고 그걸 보고 넌 어떤 기분이 들었어?"


"가슴이 아팠어요. 왠지 모르게 그녀가 지휘관님의 연인이 된다는 사실이 싫어서, 그래서…"


리브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고개를 숙였다. 

베라는 그런 리브를 보고 답답해서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평소 참을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녀는 그냥 속 시원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사랑을 알지 못하는 소녀에게 네가 지금 가슴에 품고 있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해버렸다.


"그거, 네가 지휘관을 사랑한다는 거야. 사랑이 별건 줄 아니? 그냥 보면 행복해지고, 안 보이면 보고 싶고, 그가 널 떠나는게 싫어지는 거 그게 사랑이야."


"네? 그럴 리..."


베라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리브의 말을 끊었다. 


"이 답답이가! 아, 정말 걱정해서 손해 봤어. 그렇게 평생 네 마음도 모른 채 살던가!"


리브는 베라에게 억지로 끌려왔던 것처럼 매몰차게 내보내졌다. 베라는 리브를 내보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 당장 기지로 돌아가! 시간도 늦었으니까." 


그녀의 말을 듣고 시간을 확인하니 정말로 꽤 늦은 시간이었다. 리브가 서둘러 기지로 돌아갔다. 제법 늦은 시간의 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반겨주는 것은 지휘관 뿐이었다. 


"안 오길래 걱정했어요? 정비가 오래걸린거죠? 나나미가 리브 혼자서 침식체를 전부 정화했다고 하던데, 많이 다쳤었나요? 이젠 괜찮아요?"


리브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지휘관을 보자 갑자기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 탓에 베라의 말을 떠올랐다. 

'그냥 보면 행복해지고…'


'그냥 이렇게 보기만 해도 행복해져, 그럼 나는 정말로 지휘관님을 사랑하는 거야?'


그녀는 새삼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차마 지휘관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아뇨! 오는 길에 베라를 만나서 이야기하느라 조금… 늦어서 죄송해요."


그녀에게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는 것에 안심했는지 그는 기쁘게 웃으며 배웅했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에요. 많이 피곤할 텐데 붙잡아서 미안해요. 먼저 들어가서 쉬어요."


리브도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그가 뭔가 떠오른 듯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아 맞다! 혹시 카레니나에게 2시간 정도 후에 제 방으로 와달라고 전해줄래요? 그녀에게 해줄 말이 있어서요."

 

리브는 가슴이 매여왔다. 그녀는 머리 속으로는 지휘관에게 몇 번이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입만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왜요? 지금 여기로 불러와도 되잖아요. 대체 왜 그녀를 지휘관님의 방으로 부르시는 건가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지도 못하고 지휘관은 그녀에게 등을 돌려 못다한 일을 하러 자리에 돌아갔다.


"그럼 부탁해요."


결국 그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그렇게 하겠다는 말 밖에 하지 못했다.


"네, 전해둘게요."


그녀는 카레니나에게 지휘관의 말을 전하지도 않고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2시간이니까 아직 괜찮아. 조금만 있다 가자.'


그녀는 아직 자신의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감정을 좀 추스를 생각이었는데 혼자가 되니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주채할 수 없었다.

이 가슴의 아픔이 어디서 오는 건지 몰랐을 때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이유를 알고 나니 그 고통이 수천 배는 커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꾿꾿하게 무너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지휘관님을 영영 못 보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날 사랑해 주지 않으시는 건 슬프지만, 이대로 곁에 있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난 괜찮을 거야.'


그녀는 괜히 지휘관에게 선물로 받은 생태 구체를 하나하나 건드렸다. 

'그동안 이렇게나 많이 받았잖아. 앞으로는 받지 못하겠지만 이미 지휘관님께 받은 추억과 호의는 이 안에 가득하니까. 난 괜찮아.'


그녀는 구체 하나하나에 담긴 지휘관과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까마귀 소대가 해체되는 날, 그동안 익숙해진 둥지를 떠나야 하는 아기 새처럼 '다시 또 이렇게 마음 편했던 장소를 만날 수 있을까?' 하고 막연한 불안감에 떨고 있던 그녀에게 지휘관이 찾아왔다. 

그는 정말 열렬하게 그녀를 원했다. 처음으로 만난 자신을 간절히 원해 주는 사람, 그녀는 그 사람이 조금 신기할 뿐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당시의 그녀는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보단 정들었던 까마귀 소대가 산산조각 난다는 것이 더 슬펐기 때문에 아직 그녀의 마음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상부의 명령이었으니까 그냥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오게 된 새로운 보금자리는 이전에 머물던 곳보다 훨씬 따스한 곳이었다.


'피닉스'라는 소대명을 받아 수행하는 첫 번째 임무, 피닉스 소대의 지휘관은 지휘관으로서는 처음 출전하는 것이라서 본인이 가장 긴장했으면서 그렇지 않은 척 자신은 익숙한 척하는 것이 살짝 허세끼가 있는 귀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른 소대원들을 챙기는 다정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받은 선물, 그녀는 처음엔 거절하려고 했지만 받고 나니 스스로가 왜 이걸 받지 않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그녀가 구조체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에도 종종 시답잖은 이유를 붙여가며 그녀에게 선물을 안겨주었다. 

'전에 드렸던 생태 구체 시리즈에 새로운 생태계가 추가되었다고 해서 사 왔어요.'


살짝 부끄러운 듯 웃음을 지으며 건네는 그것들이 이제 그녀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되어 그녀의 방안에 하나하나 쌓여갔다. 어느세 꾸밈없이 단출했던 그녀의 방은 그에게 받은 보물들로 가득했다.

'생각해 보니 예전엔 다른 사람들에게 방 청소 좀 하라고 그렇게 닦달했었는데, 이젠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네…'


지휘관이 준 선물을 항상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싶은 마음에 소중히 전시해 놓는다는 것이 하나 둘 쌓이다 보니, 이젠 책상의 한구석과 창틀이 그에게 받은 것들로 가득 찼다.

'난 어느새 지휘관님을 이렇게나 사랑하게 되어버린 걸까?'


그렇게 지휘관과의 추억에 잠기고 나니, 그녀는 더욱 지휘관을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아직 그녀에겐 지휘관과 함께 해보고 싶은 일들이 잔뜩 있었다. 아니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점점 늘어가기만 했다.

'이건 '백야'의 덕분이려나? 전선에 나서게 되면서 다치는 일도 늘어나고 그 때문에 정비를 받는 일도 늘어났지, 그때마다 지휘관님이 날 걱정해 주시는 게 좋아서, 오히려 더 무리하곤 했었는데… 그렇게 무리해서 크게 다치고 그러지 말라고 크게 혼나기도 했지.'


이제부턴 그런 그의 호의가 전부 카레니나만을 향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처음엔 죄송한 마음뿐이었는데 점점 그게 기뻐져서 어느샌가 혼나는 도중에도 그냥 웃음이 나왔었는데, 이젠 그런 것도 할 수 없게 되겠지? 지휘관님껜 카레니나가 첫 번째 일 테니까.'


그동안 그녀가 나눠 받았던 호의가 이젠 한 톨도 남김없이 모두 카레니나에게 향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부럽고 또 원망스러웠다.

'이제 카레니나하고 지휘관님이 연인이 되면 휴일마다 단둘이 시간을 보내겠지? 옛날에 루시아도 그랬었으니까, 둘이서 대체 무엇을 했을까? 그리고 카레니나랑 지휘관님은 무엇을 할까? 나라면, 만약 지휘관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나였다면…'


사랑에 눈이 먼 탓일까? 지나친 질투가 문제였던 걸까? 그녀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결심을 했다. 

'단 한 번이라도 지휘관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지휘관님이 상대가 나라는 걸 알지 못하셔도 괜찮아. 그냥 내 마음속 한구석에 추억으로 남길 거니까. 그러니까… 미안해, 카레니나 오늘 하룻밤만 내가 지휘관님을 빌릴게.'


리브는 카레니나에게 지휘관님의 말을 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심을 한 그녀의 행동은 빨랐다. 그녀는 자신을 카레니나처럼 보이도록 머리모양도 바꾸고 옷도 갈아입었다. 


"비슷한가?"


리브는 거울 속에 비치는 어딘가 카레니나와 닮은 듯 닮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자 그가 금세 알아채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 죄책감과 기대감에 들떠 어느새 지휘관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그리고 복잡한 마음을 품은 채 지휘관의 방으로 향했다. 


"그래… 이렇게 허술한데, 못 알아채신다면 그건 지휘관님이 나쁘신거야. 전부, 연인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시는 지휘관님의 잘못인 거니까…"


비틀린 웃음을 짓는 그녀는 스스로도 지휘관이 자신을 알아채주길 바라는 것인지 못 알아채길 바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지휘관의 방문 앞에 도착해서 목소리 변조기를 달았다. 


"지휘관님, 만약 못 알아채신다면 그 벌로 저에게 안기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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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 https://arca.live/b/punigray/44226630


P .s 이거 나만 카레니나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