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해성화 15-7H : 출항



행정부서와 보급부서가 잇따라 보급을 끊으면서 결국 의료부서의 보급이 중단되었다.


묵묵히 마지막 식사를 마친 의료진 전원이 기지 언저리로 모였다. 이곳에는 바로 외부 바다로 통하는 출구가 있다.


날이 저물고 음울한 비가 내리는 것이 마치 지금 인류가 직면할 미래와 같았다.


연구원들은 우산을 쓰고 빗속에 서 있었고 행렬의 맨 앞쪽에는 라스트리스와 이미 물속으로 들어간 라미아가 있었다.


수면 위의 유일한 광원은 저멀리 아틀란티스 별관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흔들리고 희미한 반딧불 같았다.



라스트리스

라미아, 넌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라스트리스

우리는 널 바깥 바다로 보내기로 결정했어.


라스트리스

너의 임무는 외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퍼니싱 재난이 끝나고 세계가 평화로워진다면ㅡ그건 불가능하겠지만ㅡ그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우리에게 돌아와서 알려주어야 한다.


라미아

네.


라스트리스

이제 끝이야. 하고 싶은 말 있니?


하고 싶은 말? 누구한테?


라미아는 약간 당혹스러웠다.


라스트리스

할 말이 없는 모양인데, 너희들은?


그녀는 의료부서의 많은 사람들을 돌아다보았다.


의료부의 의료부서장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의료부서장

우린 더 이상 너를 도울 수 없어. 가렴, 라미아.


라미아는 마지막으로 모두를 한 번 깊이 바라보았다. 그들 뒤에는 하늘 높이 솟은 철회색의 아틀란티스가 있었으며, 꼭대기는 먹구름과 하나가 됐다.



그녀는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수면 위에 거대한 물결이 일었다.


물결이 걷히기도 전에 라미아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갈 때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았다. 물론 이곳은 그다지 배회할만큼의 가치가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잠시 후.



의료부서장

하, 하.


라스트리스는 그를 흘겨보았다.



라스트리스

왜 웃어?


의료부서장

별거 아닙니다. 성경 이야기가 생각나서요.


의료부서장

대홍수가 일어나자 노아는 비둘기 한 마리를 풀어주었는데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가져온 것을 보고 노아는 홍수가 끝난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의료부서장

우리는 방금 비둘기를 풀어주었습니다.


라스트리스

아마 그녀는 올리브 가지를 가지고 오지 못할 것이고, 우리도 홍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어.


의료부서장

하지만 그녀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는 건 아무래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라스트리스

그런 연약한 놈이 '사명'을 마음에 둘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의료부서장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목적 없이 세상을 떠도는 것보다 목표가 있는 것이 낫습니다.


라스트리스

너는 줄곧 그 아이를 돌보고 있었지.


의료부서장

돌보기는커녕 건강 상태를 유지시켰을 뿐이었습니다.


라스트리스

어째서? 나는 결코 널 임명하거나, 누구에게 이 임무를 맡긴 적이 없었는데.


의료부서장

저도 모릅니다. 다만 이 아이가 제 앞에서 죽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라스트리스

이것이 그녀를 위해 수술을 준비했던 이유인가?


의료부서장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한 말씀 여쭤보겠습니다만, 당신은 애초에 왜 그녀를 구하기로 결정했습니까?


라스트리스

인간이니까.


의료부서장

아마 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라스트리스

이 아이는 똑똑하긴 커녕 멍청할 정도였어.


의료부서장

네, 그녀는 반응이 상당히 느리고 감정적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소질은 전혀 없습니다.


라스트리스

체력도 형편없어 막일도 도와주지 못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작은 녀석을 돌보는건 귀찮은 일이야.


의료부서장

귀찮지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에게 딱히 큰 폐를 끼친 적은 없었으니까요.


라스트리스

그녀는 언젠가 내 사무실로 뛰어들어와 어머니 사진을 가져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나에게 소리를 질렀어.


의료부서장

그런 일도 있었습니까? 하지만 그게 엄마를 그리워하는 정상적인 아이의 반응이 아닐까요.


라스트리스

아마도. 나는 '정상'인 인간사회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나봐.


의료부서장

이제 '정상'적인 인간 사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스트리스

그녀는 확실히 우리에게 결핍된 것을 가지고 있었어.


의료부서장

그게 뭐죠?



라스트리스

연약함.


의료부서장

그것은 좋은 특질이 아닙니다.


라스트리스

하지만 '보통 사람'의 특질이기도 하지. 아틀란티스는 보루였고, 우리는 전사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그 아이는…. 우연히 이 전쟁에 휘말린 평범한 사람일 뿐.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선택할 수 없었어.


의료부서장

저도 아틀란티스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포기했던 무언가를 떠올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라스트리스

이상하군, 그렇지 않아? 미련하고, 겁이 많고, 망설이고, 심지어는 우매하기까지...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완전히 포기하고 스스로 버틸 수 있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지.


의료부서장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라스트리스

바로 이것이 아틀란티스 이외의 세계가 파멸한 원인이다.


의료부서장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악착같이 일하고 있는 것은 그런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잖아요.



라스트리스

개조 수술, 정보수집 같은 이유...전부 다 핑계지?


의료부서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의료부서장

역시 속일 수가 없군요.


라스트리스

개조 수술의 유일한 의미는 그녀가 기지를 떠나 퍼니싱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거겠지. 이것 말고는 그녀를 구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스스로 나가서 먹이를 구해야 하고 앞으로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지는 모두 그녀의 운에 달렸어.


의료부서장

제가 듣기에 당신은 처음부터 그녀가 홍수가 가라앉았다는 소식을 보고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라스트리스

당연하지. 퍼니싱 재난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우린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의료부서장

하하, 아직 희망이 좀 있으신 것 같군요.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라스트리스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동료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이해했다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라스트리스

돌아가려고 하는데, 나한테 더 얘기하고 싶은 말 없어?


의료부서장은 복도 밖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 수평선 위로 구름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비치는 듯 하늘에 은밀한 은빛 테두리를 입혔다.



의료부서장

죄송합니다 주무관님. 하지만 제 진심을 담아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의료부서장

솔직히 말해서, 이곳의 풍경에는 이제 싫증이 났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보고, 또 한 번 더 보고 싶습니다.


의료부서장

그 아이가 고압 탱크에서 허우적거릴 때, 살아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의료부서장

슬퍼할 수 있고, 고통받을 수 있고, 화를 낼 수 있고, 내일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의료부서장

이성적으로 저는 이미 깨달음을 얻었고, 모든 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임을 알고 있습니다.


의료부서장

그런데 그 아이처럼 저도 죽고 싶지 않더군요.


의료부서장

우리에게 결코 '연약함'이 없던 게 아니었습니다.


라스트리스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기슭에 서서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조그마한 한숨 소리를 내어 대서양의 바닷바람에 녹아내렸다.






절해성화 15-8H : 또 다른 여정




분명히 바다 속에 있지만 몸은 자꾸 아래로 처진다.


라미아는 자신이 울고 있을 거라고 여겼지만, 그 붉은 머리 구조체 때문에 생긴 상처가 너무 아파서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가슴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잊어버렸을까? 언제 모든 것을 버렸을까? 왜 결국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라미아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는 진짜 대륙에 도착한 뒤 한참을 전전했고, 이인형의 구조체 기술이 그녀의 의식바다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역원장치가 없던 그녀는 얼마 후 퍼니싱에 감염됐다…그 뒤 어떻게 승격자 라미아로 바뀌었는지 이미 잊고 있었다.


다만 자신에게 이루지 못한 '소원'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 섬을 밟는 순간 모든 것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너의 임무는 외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퍼니싱 재난이 끝나고 세계가 평화로워진다면ㅡ그건 불가능하겠지만ㅡ그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우리에게 돌아와서 알려주어야 한다.'


그것은 당부이자, 저주였다.



그녀가 이 도시의 가장 깊은 곳을 찾아 아틀란티스의 중앙 제어 시스템에 접속하자 시스템이 그녀의 생체인식 코드를 인식한 뒤 자동으로 한 편의 비디오를 팝업했다.



라스트리스

어떤 희망도 갖고 있지 않지만, 천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시도해봐야 한다는 생각에 이 말을 녹화하기로 결심했어.


라스트리스

이 영상은 오직 너만이 볼 수 있어. 그리고 네가 그것을 볼 때 넌 이미 긴 여정을 끝냈을 거야, 라미아.


라스트리스

넌 돌아왔고, 아주 잘했어. 넌 스스로의 사명을 다했다. 넌 유용한 아이였어.


라스트리스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



라스트리스

그리고, 넌 자유야.


그 순간 라미아는 다시 모든 희망을 잃었다.


그녀는 이 도시에 대해 이론적으로 어떠한 감정도 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냉혹하고 무자비하며 그녀에게 진정한 온기를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기억이 하나 둘 떠오를수록 가슴은 점점 망가지고 라스트리스가 남긴 마지막 말을 듣고 결국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


그래서, 라미아는 침몰 명령을 내렸다.


결국 이렇게 되었다면, 모든 것을 바닷속으로 가라앉혀버리자.


다시 햇빛을 보지 않는 한,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한, 그것은 언제나 영원한 이상이 되고 그녀는 여전히 이 도시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여기며 그들의 미완의 연구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광기 어린 고요의 바다, 슬픔의 죽음의 바다.



그러나 물속에 떨어져 바다에 완전히 잠긴 도시를 보았을 때, 그녀는 수압 3천 미터보다 더 고통스러운 압력을 느꼈고, 자신의 가슴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정말 무엇이 사라지려는지, 그리고 그녀가 더 이상 멈추지 않는다면, 정말 중요한 무엇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들이 존재했다는 증거, 그들이 싸운 흔적, 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묘비.


그래서 도시 깊숙한 곳으로 헤엄쳐 들어가 명령을 해제했다.


아틀란티스는 존재했고 그들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비린내 나는 바닷물과 하나가 됐다.


도시는 다시 솟아올랐고 라미아는 돌아서서 절해를 떠났다.


그녀의 슬픔과 회한은 결국 시간의 긴 강물 속에서 조용히 흘러갈 것이다.


멈추지 않는 눈물과 함께.


바다 건너편 나루터를 향하여...


그리고 마지막 순간 평온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