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어려운 작전을 마무리한 후 의회는 대부분의 지휘관들에게 며칠간의 휴가를 허가했다.


외근을 나갈 필요는 없었고 다만 책상머리에 처리해야 할 서류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휴가다운 휴가를 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평소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문서를 해결해야 겨우 연명할 수 있다.


이렇게 마치 고인 물처럼 도전도 탈출도 할 수 없는 나날들 속에서...



지휘관

뭐 특별한 거라도 없을까...


나나미

지휘관!


나나미

지, 휘, 관!


나나미

지휘관 있어?


누군지 보지 않았지만 소리만 들어봐도 영락없는 나나미 스타일이었다. 하필 이럴 때 여기로 오다니...


지휘관

이게 바로 그 특별한 거였나?


'펑!'


능숙하게 대문 수리를 마친 나나미는 씩씩한 모습으로 자기 앞에 다가왔다.



나나미

지휘관 역시 여기 있었구나!


나나미

오늘 나나미는 지휘관의 조수야~ 에헴...


나나미는 아주 그럴듯하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나나미

나나미,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지휘관, 무슨 분부라도 있어?





(1)

지휘관

(없어) ← 선택

(너가 조수라고?)


나나미

그렇다면 나나미는 지휘관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



(2)

지휘관

(없어) 

(너가 조수라고?) ← 선택


나나미

원래 아니라도 지금은 그렇거든. 나나미는 지휘관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서 그래.





이런 게 조수라고 할 수 있는 거 맞아? 마음속으로는 그런 의심을 품고 있지만 입으로는 솔직하게도ㅡㅡ


지휘관

무슨 일인데?


???

목표 인간의 말투와 체온 변화를 분석한 결과 목표 인간이 현재 일을 계속할 것이라는 기대치는 0.543%입니다.


찌릿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낯선 로봇의 목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얼핏 들으면 깜짝 놀랄만 하다.




(1)

지휘관

(?) ← 선택

(....)


나나미

하하하하 지휘관 재밌지? 요건 나나미의 새 친구 맥보야.



(2)

지휘관

(?) 

(....) ← 선택


나나미

하하하하 지휘관, 맥보 보고 놀랐지?



나나미는 사무실 주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덩치 큰 '사무용 의자'를 방 안으로 들여놓았던 모양이다.


지휘관

맥보...의자 이름이야?


주체는 사무용 의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주변에는 각종 번잡한 회로와 스크린, 작업대가 연결돼 있다.


낡아빠진 부품, 어수선한 페인트칠, 얼룩덜룩한 녹 자국….


마치 몇 세기 전의 낡은 차의 운전석을 나나미가 송두리째 뽑아 이곳으로 옮겨온 듯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작은 진공관 스크린에서 희미한 녹색의 웃는 얼굴 하나가 자신을 향해 번쩍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

지휘관

(이거 진짜 고문기구 아니야?) ← 선택

(이건 뭐야?)


나나미

아니야!



(2)

지휘관

(이거 진짜 고문기구 아니야?) 

(이건 뭐야?) ← 선택


나나미

정확히 말하자면, 맥보는...




맥보

맥보는 진정으로 인간성을 구현한 스마트형 가상 좌석입니다. 나나미 양은 당신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좋은 아이를 만들었습니다. 당신께서 즐거워했으면 좋겠습니다.


맥보

안녕하세요, 【지휘관 이름】.


맥보

당신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맥보

게임을 하고 싶습니다.


나나미

맥보! 대답 뺏는 것도 배운거야?!


맥보는 전류음을 줄줄 흘렸고 스크린의 형광 눈동자도 늘어져 서럽고 우울한 모습을 보였다.


맥보

지지지지직ㅡㅡ드르륵, 맥보가 틀렸습니다. 맥보는 좋은 아이입니다. 그러므로 나나미의 말을 뺏으면 안 됩니다.


나나미

크흠…. 아무튼 맥보가 말한대로 나나미가 여러 가지 장면을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지휘관

VR?


나나미

VR처럼 간단하지 않아. 사실 나나미는 맥보에게 약간의 지혜를 빌려줬거든!


나나미

그래서 맥보는 지금의 VR기기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많이 할 수 있어.


나나미

공중정원은 물자를 너무 빡빡하게 관리해서 나나미가 신청했었던 물자 보급이 모두 반려돼버렸어.


나나미

나나미는 폐품 처리장을 헤집고 나서야 겨우 맥보를 짜맞추어 충분한 계산력을 내게 만들었어.


나나미

지휘관은 나나미와 한 데이트 기억하고 있지?


갑자기 꺼낸 화두에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ㅡㅡ



나나미

첫 번째 스테이지! 회전목마! 말을 타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들었어!


나나미

두 번째 스테이지는 귀신의 집에 들어가기!... 그런데 영혼같은 건 전혀 현실적이진 않은데...


나나미

세 번째 스테이지는 롤러코스터 타기! 중간에 트랙이 끊겨져 있어서 엄청난 자극을 줄 거야!


나나미

플레이 도중 폐기처분 되겠지만 엄청 재미있을 거야!


나나미

으! 어서 나나미에게 손가락을 벌려 봐!


나나미

아...끊겨버렸어...



다행히 그 당시 나나미가 잡은 것은 가짜 인간 모형의 손이었다...


나나미

지휘관도 기억나지?




(1)

지휘관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 선택

(인상 깊었지.)


나나미

하지만 나나미는 아직도 그 때의 데이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2)

지휘관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인상 깊었지.) ← 선택


나나미

나나미도 잘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아!



나나미

지휘관과의 데이트는 즐거웠지만 나나미는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 들었어.


나나미

한참 생각한 후에 나나미는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았어.


지휘관

뭐 때문인데?


나나미

데이트 장소 때문이었어!


나나미

그동안 데이터베이스에서 봤던 데이트 장소는 모래사장, 영화관, 거리 등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없잖아.


나나미

그래서 나나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맥보를 만든 거야.


나나미

나나미는 맥보에게 지휘관과 함께 데이트하고 싶은 장소를 많이 추가했는데 다 합쳐서……그……그 얼마였더라?


맥보

보고드립니다. 나나미는 맥보의 저장공간 내부에 총 4294967296개의 장소와 6만5536개의 기후환경, 184467440737095516개의 돌발 이벤트를 업로드하였습니다.


나나미

아이쿠, 나나미가 그렇게나 많이 저장시켰어?


나나미

더 이상은 못 기다려. 지휘관 어서 앉아봐.


나나미가 맥보를 툭툭 치자 좌석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마구 교차하는 전선 사이로 가느다란 전류를 흘려보냈다.


맥보

^_^


지휘관

...


지휘관

그만두는 게 좋겠어.


나나미

어?


나나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지휘관

(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어.) ← 선택

(불안한 느낌이 들어.)


나나미

그런 건 잠시 접어 둬~ 지휘관도 이런 문서 싫어하잖아.


나나미

지휘관은 나나미와 함께 다니고 나나미는 이참에 지휘관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어.


나나미는 다짜고짜 자신을 맥보에게 끌고 갔다. 인간의 완력은 구조체와 맞설 수 없었고, 자신은 그대로 의자 시트에 쓰러졌다.


맥보는 낡아 보였지만 앉으니 의외로 편안했다.


이 잠깐 동안의 편안함은 나나미가 완전히 덮인 금속 헬멧을 머리에 씌울 때까지 지속되었다.



'철컥'


빛은 두꺼운 금속에 가로막혀 있었고, 느껴지는 것은 녹슨 비린내와 침울한 어둠뿐이었다.


나나미

지휘관, 준비됐어?


금속 헬멧에 들려오는 말소리가 철벽에 부딪혀 반사되면서 윙윙거리는 메아리가 자신의 두개골을 울린다.


하지만 상대방의 설렘과 초조함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오히려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지휘관

(다 됐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나나미

그럼 연결 시작!


나나미

지휘관 저쪽에서 다시 만나자!


그의 귓가에 긴 비프음이 들렸다. 착각이었는지 실제였는지 좌석이 등을 밀어올리는 느낌이 들었고, 의식은 깊은 바다나 먼 하늘의 허리케인 속에서 거대한 백색광과 부딪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