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오는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침실에 있었다.


커튼 밖 세상은 이미 어둠이 깔렸고, 흩어진 별빛과 반달만이 지키고 있었다.


그것들이 제공하는 희미한 빛 아래서 더듬거리며 펜던트의 스위치를 켰다.


침실의 디자인은 매우 심플했다. 1인용 침대 하나, 2층 옷장 하나, 책상 하나, 의자 하나가 전부다.


몸에 걸친 옷은 더 이상 언제나 똑같은 전투복이 아니라 부드러운 천으로 된 평상복으로 대체되었다.


들고 다니던 군용 단말기는 작은 민수용 단말기로 교체되었고 공중정원의 미니멀한 스타일과는 달리 화려하고 번잡한 무늬가 가득했다.


지휘관

황금시대의 유산 같군.


귀에 뭔가 이물감이 느껴져 살짝 건드려보니 미니 이어폰이 귀에 감겨 있었다.


책상 위 알람이 표시한 시간은 20:00이었다. 알람 옆에 가만히 누워있는 파란 빛의 장막이 눈길을 끌었다.


가까이 가서 똑똑히 보려는데 이어폰에서 갑자기 차가운 기계음이 들려왔다.


기계음

시스템 온라인 상태입니다.


기계음

안녕하세요, 시민 【지휘관 이름】.


오랜 세월 동안 공중정원에서 살아온 자신에게 이 소리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게슈탈트'라는 슈퍼 Al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지금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진짜 게슈탈트가 아니라 맥보의 시뮬레이션 내용 중 하나다.


'게슈탈트'

우선 생일 축하드립니다.


귓가에 짤막한 불꽃 소리가 들려왔다.


'게슈탈트'

세계 정부 국민복지법 제3장 제291조에 따르면 게슈탈트에 접속하는 시민은 연령이 18세에 도달하면 시스템을 통해 다른 사람과 매칭할 수 있는 합법적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게슈탈트'

당신은 이미 매칭 자격을 충족합니다. 매칭하시겠습니까?


'게슈탈트'는 질문을 마치고 소리 없이 조용히 답장을 기다렸다.


잠시 생각을 한 뒤 회답을 했다.



지휘관

거절합니다.


함께 들어간 나나미는 지금 행방이 묘연해 당장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게임용어로 메인 퀘스트를 먼저 완수하는 것이다.


'게슈탈트'

알겠습니다. 실행 중단...


차가운 기계음에서 약간의 지연이 발생하고, 짧은 무질서한 잡음이 있은 후, '게슈탈트'는 흔들림 없는 어조를 되찾았다ㅡㅡ


'게슈탈트'

당신은 이미 매칭 자격을 충족합니다. 매칭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이미 매칭 자격을 충족합니다. 매칭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이미 매칭 자격을 충족합니다. 매칭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이미 매칭 자격을 충족합니다. 매칭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이미 매칭 자격을 충족합니다....

 

감정없는 반복 재생기가 되어버렸다.


지휘관

이것이 이른바 '돌발 이벤트'라는 건가?


나나미와 맥보의 대화가 떠올랐고, 아직도 귀에 대고 재잘거리는 '게슈탈트'를 향해 어쩔 수 없이 매칭을 선택하고, 옷장 안, 침대 밑 천장 같은 곳에서 나나미의 모습을 찾아 헤매야 했다.


결국 나나미는 숨바꼭질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출신지'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게슈탈트'

권한을 부여받아, 시민 【지휘관 이름】에 대한 매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게슈탈트'

매칭이 성사되었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리며 두 분의 행복한 교류를 기원합니다.


'게슈탈트'

시스템이 오프라인 상태가 됩니다.


'게슈탈트'가 통신을 끝내는 순간, 활기찬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ㅡㅡ


'앳된 목소리'

안뇽!!!


너무 흥분해서 발음이 약간 변형된 것 같다.


지휘관

안녕.


'앳된 목소리'

난 매칭은 처음 해보는 거지만…. 그래도 목소리가 차분하고 믿음직스러운 걸 보니 꽤 능숙한 것 같은데.


지휘관

아니야...


'앳된 목소리'

어라, 너도 처음 매칭한 거야? 그럼 우리 완전 천생연분인데!


'앳된 목소리'

좋아하는 동물 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우리 집 강아지야. 나랑 엄마 아빠 모두 미미라고 불러, 이름 잘 지었지?....


자신의 취향을 집요하게 소개하며 말참견할 틈이 전혀 없는 소녀의 소개에서 자신의 머릿속에도 서서히 상대방의 모습이 그려졌다.


상대방의 이름은 아직 알 수 없었고 나이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현재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외동딸이다.


집 근처 고등학교에 다니고, 성적이 중위권이며, 18m 높이의 '범용인간형 결전병기'를 어떻게 만들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고 한다.


늦잠을 자지 않고 탁월한 수면 시간을 유지한다. 잠들기 전 직접 만든 운동증폭장치를 착용하고 항공유 1리터를 소모하며, 미미를 데리고 나가 고속도로를 따라 쭉 뛰어다니다가 몸을 추스르고 잠을 자며 어머니가 깨울 때까지 숙면을 취할 수 있어 피로가 남지 않는다.


언제나 모험심을 추구하는 사람. 승부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고민은 하지 않으며, 애니메이션으로 《가면을 쓴 모터라이더》를 가장 좋아한다.


자칭 발랄하고 활동적인 보통의 소녀다.



지휘관

...


자취를 감췄던 나나미의 행방에 왠지 감이 잡혔다.


'앳된 목소리'

아, 참, 네 이름은 아직 묻지 않았어.


'앳된 목소리'

이름이 어떻게 돼?


지휘관

【지휘관 이름】.


'앳된 목소리'

【지휘관 이름】... 【지휘관 이름】이구나...


단말기에서 갑자기 통신 요청이 왔다.


지휘관

(접속)


나나미

안녕, 【지휘관 이름】, 내 이름은 나나미라고 해.



빛의 그림자가 눈앞에서 소녀의 형상을 하고 있다. 마주보는 모습이 나나미와 비슷하지만 머리 위에 역원장치를 달지 않았고 두 손으로 잡고 있는 거대한 전기톱도 들지 않았다.


소름 돋는 자기소개를 무시한다면,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평범한 이웃집 여자아이로 당장의 알 수 없는 인연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녀는 먼저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심호흡을 한 뒤 이쪽을 향해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어 조용히 마음을 여는 듯했다.


'배경음'

'청춘이라면 누구나 연정을 품고, 다정다감하지 않을까?'


'배경음'

'소녀를 처음 만났을 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었다: 증기선이 자철 광산을 만난 것처럼 가장 작은 나사까지 끌렸다.'


눈앞의 광경에 시선이 쏠려 나나미에게 다가갔다.


'배경음'

skip.


지휘관

?



'배경음'

'소녀는 충분히 존경과 온유를 베풀었고 더 열심히 노력하면 여신을 얻을 수 있을지도... skip.'



'배경음'

'방해는 많고 지지는 얼마 안 되는 두 사람의 관계는 밤이 되기 전에 거친 악의에 가루가 되어버릴 지도…. skip.'



'배경음'

'고향을 벗어나 활로를 찾으려다 보니 더러움과 사기가 난무하는 세상을 목격했다. 소녀에 대한 작은 기억은 내면의 녹을 씻어주는 맑은 샘물... skip.'



'배경음'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을 뿐더러 심지어는... skip.'



'배경음'

'...skip...총을 들어 자신의 머리에 겨누었다.'


나나미

【지휘관 이름】, 하지마!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처음처럼 손을 내밀었지만 그때의 소녀는 무언가를 건드리려 했던 것이 아니었고 수줍음이나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녀는 힘차게, 그녀는 히스테리적으로, 두 손을 뻗어 힘없이, 눈앞의 흩어질 생명과 추억을 붙잡으려 했다.


그리고 어느새 손에 권총을 쥐었고, 차가운 총구가 관자놀이에 닿아 총연기를 머금은 채 사신의 강림을 호소하는데….



지휘관

잠깐 기다려!



나나미

와, 지금 분위기 딱 좋은데!


나나미

지휘관, 갑자기 끊지 말아봐!


나나미

여기서 분명히 나나미는 사랑을 이용해 너에게 살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데 어째서 지휘관은 정해진 루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거야??


나나미는 어디선가 푸른 빛의 장막을 꺼내 손으로 알쏭달쏭한 글씨를 두드렸다.




(1)

지휘관

(난 해피 엔딩이 좋아.) ← 선택

(난 도망치지 않을 거야.)


나나미

지휘관은 원래 비극을 싫어했었나?....


나나미는 고개를 숙이고 광막 위에 황급히 몇 획을 기록했다.



(2)

지휘관

(난 해피 엔딩이 좋아.) 

(난 도망치지 않을 거야.) ← 선택


나나미

원래 지휘관이라면 그렇게 선택하겠지….


나나미는 마음의 싸움을 하는 듯 눈을 감았다.





나나미

나나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달았어.


나나미

나나미는 지휘관을 알고 싶고, 가장 솔직한 지휘관과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


나나미

그러니까 이제 나나미는 지휘관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을 거야. 지휘관도 자신의 역할을 잘 해야 돼!


소녀는 자신을 향해 눈을 깜박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기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두 손을 뻗어 천천히 자신의 뺨을 휘감았다ㅡㅡ


분명 허망한 빛의 그림자일 뿐이지만, 자신은 진실된 온도와 감촉을 느꼈다.


손바닥의 부드러운 온도가 손가락을 따라 올라갔지만, 따뜻한 봄 나들이에 우연히 샘물이 얼굴에 튀기듯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꽃의 향기와 여린 풀의 싱그러움.


상대방이 살짝 힘을 주자 손가락 끝에 자신의 볼이 살짝 움푹 패이고 손바닥이 밀착되었다ㅡㅡ


지휘관

나나미...?


그리고 탁상용 집게처럼 힘껏 자신의 머리를 고정시켜 약간의 회전조차 버겁게 만들었다.


지휘관

!


나나미

하지만 분위기를 망친 벌은 줄 거야.


지휘관

잠...


나나미

흐아압!


나나미의 머리 박치기에 이마가 착실히 부딪쳤다.







나도 노노미랑 데이트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