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신인 시인의 노랫소리


이리 오라, 행복한 청년이여, 이 서광, 이 새로운 진리의 모습을 보아라.




셀레나, 너에게 또 다른 희소식을 전해줄게.

내가 최근에 쓰고 있는 연극이 드디어 완성되어 리허설을 준비하고 있어.

그리고 나에게 나쁜 소식이 하나 있어.

이 연극을 완성하기 전, 내 눈앞에는 지나갈 수 없는 안개가 날 가로막고 있었어.

그동안 헤맸던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내가 이 안개 속에서 힘차게 나아갈수록 앞길이 더욱 막막해졌어.


그래서… 이번에는 앨런 회장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그분이 이 연극을 좀 더 지도해 주셨으면 좋겠어.

셀레나, 널 모티브로 한 이 연극을 보았다면 넌 어떤 생각이 들까?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 앞에서 탐침을 품에 안았을 때, 넌...어떤 생각이 들었니?

'희생 뒤에는 고통뿐만 아니라 비바람을 직시하는 용기, 그리고 비바람이 지나고 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셀레나 플로라, 나의 진실한 벗.

나에게 알려줘, 나에게 대답해줘.

너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노래로 화답해줘.




아이라

너에게 진심을 담아, 아이라...



앨런

아이라, 멍때리고 있었니?


아이라

아...아, 정말 죄송합니다.


젊은 예술가는 눈을 깜박였다.


눈앞이 탁 트이고 환한 오페라홀에는 우아한 신사 한 사람만이 객석에 앉아 자신이 들고 있는 대본을 끝까지 경청하며 읽고 있었다.


앨런

괜찮아. 넌 방금 전 대본을 전부 읽어냈고 계속 되새기고 있었으니까.


신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아까의 어색함을 가뿐히 풀었다.


앨런

단지 네가 한 소절 읽을 때마다 자꾸 시선이 옆에 있는 편지 뭉치로 향했던 이유가 좀 궁금했거든.


앨런

편지지라, 이 시대에는 흔치 않은 물건이지. 그게 너의 영감이었나?


아이라

부정할 수는 없겠네요...하지만 어쩌면...스토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앨런

음...개인적인 경험인가? 그럼 나의 호기심을 이만 거둬야겠군.


신사는 지팡이로 바닥을 쿡쿡 찔렀고 얼굴에 미소가 살짝 드리워졌다.


앨런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연극에 대한 나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앨런

좋아! 브라보! 풋내기치고는 꽤나 참신한 레퍼토리였다.


앨런

젊은 오페라 작가가 한 소녀를 찾다가 예술적 표현에 목마른 사람들을 만나 알게 되고, 결국 과거의 자신을 구하게 된다.


앨런

자아를 찾는 여정은 오페라에서도 고전적인 클리셰지만,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면 충분히 새롭게 느껴지지.


앨런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린 걸 보니 역시 아이라다워.


앨런

물론, 아이의 심정에 대한 묘사는 다소 당연스레 받아들여질 수 있어. 그러나 초보자에게 그러한 흠이 보이는 건 지극히 정상이지.


앨런

이것은 아마도 네가 창작할 때 자신도 모르게 보이는 습관일 거야. 그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에 개요를 쓴 다음 대조하여 보고, 그런 서술을 피하도록 해.


아이라

고맙습니다, 회장님. 하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원하는 것은 이런 간단한 평가뿐이 아닙니다.


앨런

대본 수정 말이니? 걱정 마, 네가 대본을 읊었을 때 어느정도 파악해놨어.


앨런

그런데…그 전에, 아이라가 나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게 이게 전부니? 오늘 이 연극을 들려주려고 나를 찾아왔는데, 단지 나와 이 연극의 수정을 의논하려는 거였니?


아이라

음...물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전....회장님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또 있어요.


아이라는 고개를 숙였지만 눈길은 옆에 있는 한 사람에게로 갔다.


그 사람은 선실에 누운 채 아랫배 앞에 두 손을 깍지 낀 채 눈을 가늘게 감고 입술 언저리에 있는 듯 없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유려한 긴 머리를 옆으로 늘어뜨렸다.


아이라

...


아이라는 입을 열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람이 여기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앨런

환주 기체는 몇 번을 보더라도 참으로 정교하고 감동적이야. 아이라의 추진과 디자인 덕분에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지.


앨런

새로운 도색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그녀를 여기로 데려온 거니?


아이라

하하, 회장님,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니에요.


아이라

그녀가 여기에 있는 건...그냥....단지...


아이라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목소리는 떨렸고, 후반의 말은 허공에 억눌렸다.


ㅡㅡ다만 그녀가 이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앨런

...하하, 긴장 풀고, 우리 화제를 좀 바꿔볼까.


앨런은 가볍게 웃으며 지팡이를 땅바닥에서 몇 차례 돌린 뒤 객석에서 일어나 무대 앞에서 서성거렸다.


앨런

요즘 살롱에서는 아이라가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밤을 새느라 살롱을 찾는 횟수가 줄었다고 하더군.


앨런

그 사람들은 너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네가 평소 남들에게 보이던 열정을 다른 일에 모은 것 같아.


앨런

그 일은 바로, 네가 방금 전 낭독한 《야생화의 연주》, 맞지?


아이라

....네, 틀림 없어요.


아이라의 시선은 다시 옆의 몸체 쪽으로 이동했고, 선실 표면의 투명 소재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리움과 아쉬움이 담긴 얼굴이었다.


아이라

...그나저나 회장님, 고래의 노래를 들어본 적 있나요?


앨런

이건 나에게도 문제야. 일찍이 탐사의 명분을 빌어 몇 주 동안 해안가에서 탐지기를 대고 앉아 있다가 하마터면 얼어 죽을뻔 했지만 고래의 노래를 한 번도 듣지 못했었어.


아이라

이야, 예술의 경지를 체득하기 위한 회장님의 전설적인 행보가 또 한 획을 그었군요.


아이라

하지만 제가 말하는 노랫소리는 그런 의미로 한 게 아니였습니다.


아이라는 허리춤에서 컨트롤러를 꺼냈고, 들고 있던 작업실 단말기를 켰다.


컨트롤러에서 느린 템포의 부드러운 아리아가 울려 퍼졌다.


셀 수 없이 많은 자연의 소리에 세례를 받은 앨런도 처음 들었을 때 살짝 놀랐다.


음조가 점점 높아지자,  그 순간 광활한 바다가 실제로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여성의 노랫소리는 실제 고래를 모방하지 않았지만, 듣기만 해도 선율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ㅡㅡ외로운 대왕고래가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다. 해구 한가운데서 노랫소리가 울려퍼지지만 아무런 메아리도 들리지 않는다.


영탄의 끝에서, 곡절이 끝나기 전까지, 외로운 대왕고래는 끝내 자신의 동족을 찾지 못했다.


앨런은 잠시 동안 자신이 어디서 이 아리아를 들었는지 떠올렸다.



앨런

《제 654번 습작》....그녀의 미완의 아리아.


아이라

네,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라

그녀는 아직 진짜 바다를 본 적이 없어 이 노래를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생각지도 못했다고 했어요.


아이라

언젠가 진짜 바다를 봤다면 이 곡의 후반부를 다 썼을 거예요.


아이라

...이렇게 말입니다.


아이라는 목청을 가다듬고 두 손을 들어올리더니 갑자기 경쾌한 노래를 불렀다.


똑같이 음조가 점점 고조되었지만, 그 고래가 노니는 방향이 갑자기 바뀌었다.


아이라는 노래에 그다지 조예가 없지만, 가장 보편적인 가창력을 가지고 있었고, 앨런은 그 선율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


ㅡㅡ저 외로운 푸른 고래가 깊은 바다로 떨어지고 있다. 점점 좁아지는 바닷골에서 계속 울려퍼져야 할 노랫소리는 결국 자신의 목소리로 짜여진 죄수 우리에 닿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죄수는 어김없이 오지 않았고, 오히려 바닷가에 빠져들수록 그 소리는 한 줄기의 메아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고래가 해구에 떨어지지 않고 더 깊은...우주에 빠져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족속도, 그 동포도, 심지어 그와 비슷한 생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도 공허한 중력 속에서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그것의 노랫소리가 점차 잠기더니, 나중에는 일말의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곡조가 끝나고, 아이라는 노래를 멈추었다.


그녀는 앨런에게 잠시 그 아리아를 음미할 시간을 주고 입을 열었다.



아이라

회장님, 적조작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앨런

응, 그 사건은, 사실 그녀의...


앨런은 사건의 모든 결말을 전부 말하지 않았다. 이 결말은 누구에게도 꺼내려 하지 않았다.


아이라도 말을 잇지 않았지만,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말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아이라

그 사건이 일어나던 중, 차징 팔콘 소대의 정찰병은 그때의 감염체...세이렌의 노랫소리를 기록하고 자료를 대조하였습니다.


아이라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공중정원의 소나탐지기에게 뜻밖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음파 모양을 과거 자료와 비교해보니 세이렌이 내는 노랫소리와 비슷했습니다.


아이라

이건…. 집행부대의 한 친구가 저에게 알려줬어요. 인맥을 동원해서 이 음성을 얻었으면 좋겠지만…. 결국 제가 받은 것은 노이즈가 잔뜩 낀 장황한 음성이었습니다.


아이라

하지만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직감이 왔어요.


아이라

저는 그 음성을 복원했습니다. 이것은 고고학 소대의 기본 소양이죠.


아이라

마침내 제 귀에 들어온 것은 바로 이 노래였습니다.


아이라는 마치 허무한 고래의 노래를 다시 듣는 것처럼 컨트롤러를 귀에 대고 말했다.


아이라

음원에 대한 탐지와 추적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과학이사회 사람들이 알려줬어요.


아이라

음파 감쇠에 따른 오차로 레이더는 매우 포괄적인 영역까지만 위치를 특정지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런 음파가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긴 시간의 오차 때문이었습니다. 이 노랫소리를 탐지기가 받았을 때 그 노랫소리를 내는 사람은 이미 멀리 이동했을 겁니다.


아이라

종적을 알아낼 수는 없지만, 저는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수신장치에서의 잡음이 고래의 노래로 잘못 들리는 걸까, 그것은 어떤 공중 정원이 밝혀지지 않은 기계가 우연히 연주한 곡조일까, 아니면…. 어느 지구에 남아 있는 외로운 푸른 고래가 희미하게나마 울부짖는 비명일까?


아이라

기술자들은 저에게 온갖 추측을 해 주셨지만, 전 오직 이 한 가지만 믿을 것입니다.


아이라

그것은 바로 그녀의 신호, 그녀가 부르는 고래의 노래입니다.


앨런은 잠에 빠진 듯한 옆의 기체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기체 가슴에는 금속으로 조각된 아이리스 꽃이 피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공연에 특별히 고안한 장식이었다.


아이라

회장님, 왜 제가 이 기체 개발을 추진해야 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아이라

그 이유는, 고래의 노래를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구에서 온 고래의 노랫소리로 그녀의 노래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요.


아이라는 다시 작업실 단말기를 열어 앨런 앞에 지도를 펼쳐놓았다. 그 위에는 마치 대지에 뿌려진 꽃씨처럼 여러 개의 원형 점들이 수놓여 있다.


아이라

이 고래의 노랫소리의 원천지로 추정되는 구역이 나타날 때마다, 그녀가 이 지역을 여행했다면 무엇을 겪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라

그녀는 친절하거나, 음흉한 사람들을 만났을까? 그녀는 험악한 폭풍우를 만났을까?


아이라

그녀는 양들이 노닐고 있는 무성한 산비탈을 보았을까? 그녀는 입금화와 갈대가 자라는 둑을 보았을까? 그녀는…광풍이 지나간 후 하늘을 가로지르는 무지개를 보았을까?


아이라

이런 상상, 이 길을 따라가는 풍경은 곧 환주 기체에 입력되는 자료가 됩니다.


아이라

이 이야기 속의 그녀가 지구를 떠돌아다니는 그녀와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아이라

그때 그녀는 먹고 웃으며 제가 묘사한 인물의 본성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의논하고, 기체를 개조할지도 모릅니다.


아이라

몇 년 전, 저는 그녀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에서 그 고래 노래의 행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녀의 아름다운 미래를 허락하고 싶습니다.


아이라

그녀는 '햄릿'을 통해 저에게 영혼을 물려주었습니다. 이 영혼의 조각이 절 위로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마땅히 같은 위로로 돌려줘야 합니다.



앨런

그래서, 그녀의 과거를 소재로 이야기를 만든거지?


앨런

네가 살롱에 오지 않는 동안 넌 그녀를 아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지. 며칠 전 네가 그렇게 많은 질문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어느 정도 그랬을 거라 짐작했었어.


아이라

이런, 역시 회장님을 속일 수 없네요.


아이라

맞습니다. 그녀의 생각은 언제나 활발하고, 그녀가 남긴 작품을 그대로 반영하려면, 이 이야기를 썼을 때의 그녀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의논해 보아야 합니다.


아이라

제가 놀란 점은 그녀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 중에 그 지휘관이 있었다는 것...아차차, 이건 말하면 안되는 비밀인데, 안한 걸로 쳐주세요.


아이라

본론으로 들어가서, 저는 스스로 이미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정말 그녀가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온 마음의 길에서 저는 정말로… 그녀를 꼭 껴안고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를 통해 느꼈던 저의 심정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라

그녀가 보고 싶었던 지구극장이 이제는 이곳에 복각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라

그녀가 썼던 오페라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앙코르를 고대하고 있으며, 여전히 그녀의 어머니의 자랑이자 저의 자랑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라

그녀가 복원했던 오페라를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라

그녀가 한때..그 외로운 우주정거장에서 불렀던 노래를 이제야 찾아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라

저는 그녀에게서 그녀의 고통을 보았고, 그녀의 강인함과…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는 그녀의 정신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라

하지만 그녀는 여기에 없어요...그렇다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이라

물론 그것은 바로... 그 마음을 이야기에 담는 것입니다!


아이라

이 《야생화의 연주》는 그 고래의 노래 신호가 아카디아의 퇴각 지점 유적지로 향할 때 쓰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아이라

그녀의 어린 시절을 개작해 보육구역 184번을 무대로 다시 한 번 재연했지만…. 이번에 그녀는 캐릭터로서 자신의 이야기에 동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라

비록 수많은 설정과 아이디어가 혼재되어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실존했던 원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실연될 때의 이름은 좀 바꿔놨지만요.


앨런

원형이라...단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바로 그녀의 부친인 플로라 씨였어. 그는 예술협회 내부에서도 전설적인 인물로 꼽히거든.


앨런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예술적 감화를 받아 전쟁터에 투신하였고…영예롭게 전사했다. 그의 행적은 딸에게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아내에게도 큰 타격을 줬었지.



앨런

플로라 부인은 오래전부터 정신과 상담실을 자주 찾아왔었는데, 이런 정신상태는... 이른바 생존자의 자책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라. 아마도 남편을 잃은 고통과 뒤섞인 이런 자책감은 아이에게 적용되었을 때 오페라의 부정으로 바뀌었을 거야.


아이라

맞아요. 그 시기에 그녀는 매우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이라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정신과 상담을 중단했고, 그 후 상태가 호전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부인을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을 받아주던 선생과 함께 딸에게 자장가를 합창하고 있었습니다. 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원망도 아픔도 없었어요.


아이라

이 모든 것은 그녀 스스로 쟁취한 것입니다.


아이라

그 뒤 그녀는 어머니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어떤 말로 어머니 마음을 움직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허락을 받아 그 뒤에도 자유롭게 오페라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이라

그날 그녀는 '가출'하여 극장으로 향했고, 어머니가 그녀를 찾아오자 1인극으로 플로라 씨의 유작을 연출했었습니다.


아이라

그녀가 가출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때만큼은 그녀는 어머니의 역경에 맞설 용기와 말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라

그녀의 말을 듣게 된 것도 '가출' 이후 단독으로 무대를 펼치는 그녀를 발견하고 지도해준 한 관객 덕분이라고 하더군요.


아이라

그분이나 여사님은 아마 잘 모르시겠지만... 만일 그 두분이 이 연극을 보신다면 저도 이 이야기를 통해 감사의 인사가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앨런

하하, 인연이 있다면 반드시 만나게 될 거야.



아이라

네...그리고 원형이 있는 캐릭터 한 분의 경우엔, 회장님도 짐작하셨겠지요. 보야드 씨 말입니다.


아이라

제가 100만명의 천재 예술가들을 만났다고 한다면 그 분은 단 한명의 천재 예술가였습니다. 그가 쓴 오페라는 그녀를 포함한 수많은 예술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었죠.


아이라

제가 놀랐던 것은, 황금시대부터 잘 알려진 극작가임에도 묻혀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ㅡㅡ아, 아뇨, 그가 저에게 여러번 강조한 점은 그것이 결코 묻힌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이라

그를 찾아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도 셀레나가 쓴 대본을 읽은 뒤 여가 시간에 저의 창작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제가 이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도움 덕분입니다.


앨런

그리고 보야드 씨도 대본을 아직 마무리하지 않았을 때 날 찾아온 이유 중 하나였지?


앨런이 적시에 끼어들자 아이라가 움츠러들었다.


앨런을 따라 이 극장으로 와서 아이라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아이라는 도망친 흰토끼마냥 제멋대로 달리면서 화제를 밀어붙였었다. 그런 흰토끼에 맞서 앨런도 시시각각 흰토끼와 나란히 몇 마디 말을 건네면서도 흰토끼의 발걸음을 막지 않는 인도자와 같은 태도를 보였다.


지금 이 인도자는 흰토끼보다 한 발짝 앞서 그녀 앞에 울타리를 치고, 그간 흰토끼가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길을 바로잡았다.


아이라

하하… 참, 회장님을 속일 수 없군요. 그 얘기는 정말 꺼리고 싶네요.


앨런

예술가들은 모두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지. 이 방면에서 아이라도 으뜸이야.


앨런

처음부터 그녀의 이야기를 메인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이야기 속 그녀의 내면에 대한 표현이 많이 빠져 있었음을 쉽게 알아차렸지. 오히려 보야드의 존재가 돋보였었어.


앨런

이런 안배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연극을 처음 배우는 아이라만이 드러내는 독특한 스타일이 아니야.


아이라는 한숨을 쉬었다.


아이라

네 맞아요.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그런 스타일을 향해 무작정 달려들었죠.


아이라

절대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을 때, 저는 어떤 느낌에 압도당했습니다.


아이라

이런 느낌은, 으으, 그녀라면, 뭐라고 불렀더라...


아이라는 한 손을 들고 허공에서 머뭇머뭇 거리며 그 손으로 의식의 바다에서 그 적절한 단어를 고르려고 애쓰는 듯, 또 그 단어를 찾은 듯하면서도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이라

막막함이랄까.


한참 동안 손이 축 늘어졌다.


아이라

맞아, 막막함, 막막함이 제 얼굴에 녹아내려 써내려가는 대사 한 줄마다 떨어졌습니다. 캔버스에서 녹아버리고 시나리오에서 떨어져나와 펜을 타고 제 팔에 흘러 손에 응어리졌죠.


아이라

어떻게 쓰는지 모를 때가 없진 않았지만, 언젠가 저의 캔버스와 대본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 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그림이 완성됐을 때의 모습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어요.

 

아이라

저는 《아카디아 대퇴각》 공연날 그녀가 어떤 일을 당했고, 또 무엇 때문에 전쟁터에 나갔는지 여러 번 짐작해봤습니다.


아이라

결국 전 그녀의 심경을 '오만'으로 돌렸어요...그럴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아이라

하지만 진실은 과연 제가 상상한 것과 같았을까요?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깨달음을...정녕 제가 느꼈을까요?


아이라

저는 단지 자신의 일방적인 희망에 의지하여 제가 원하는 결말로 모든 것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이라

캔버스 앞에 나설 때마다 저답지 않은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아이라

이야기 속의 그녀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이라

그래서 저는 그녀의 마음을 외면한 채 주인공에게 무작정 이야기를 밀어붙이게 해버렸죠.


아이라

저 또한 보야드씨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신호가 보육구역 근처에서 끊겼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어요. 그 보육구역은… 바로 184호 보육구역, 아카디아 대퇴각의 유적지 근처, 그 고래의 노랫소리의 마지막 장소였습니다.


아이라

이 소식을 접하는 순간 막막함이라는 이름의 이 감정은 일시에 배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이라

하아, 솔직히 말해서 이 결말을 마무리 지은 후 저는 이런 막막한 감정에 며칠을 시달렸지만 단 한 번의 수정도 가하지 못했어요.


아이라

이런 침체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요. 더 이상 사람을 찾아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저의 영감이 고갈될 거예요.


아이라

그러니 회장님, 저에게 어떤 말이라도 해주세요. 더 이상 고인 웅덩이 속에 머물고 싶지 않아요.


이 말을 한 흰토끼는 걸음을 멈추고 무대에 서서 앨런에게 손을 내밀며 이 인도자가 풀숲에서 자신의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리고 앨런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앨런

그렇다면 이야기의 한 구절로 대답해 줄게.


앨런

극 중 플로라는 아버지, 보야드, 그리고 그녀 또한 모든 진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진실 자체가 그들을 처음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이유는 아니다.


앨런

그들이 처음 자신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감동, 이야기에서 얻은 감동이며,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었다. 그리고 그 감동은 또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 만들어져 이야기에 담겨 있다.


앨런

이 감동이야말로 그들의 행동을 촉발하는 중요한 원인이자, 그들이 진정으로 행동하는 원인이 된다.


앨런

이 또한 아이라, 너가 이 이야기를 만든 이유 아니겠니?


아이라

으음....


앨런

너는 그녀를 아는 사람들을 방문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어. 만약 내가 잘못 짚지 않았다면, 너도 작업을 하면서 아마 이 이야기들을 마음속에 기억하고, 매 시간마다 그녀를 세세하게 짚어보고, 생각해 보았을 거야.


앨런

넌 그녀가 가는 길을 지나면서 그녀의 충만한 마음을 알게 되었어. 그녀가 어떤 스트레스 때문에 망연자실한지, 그녀가 망연자실할 때, 흔들릴 때 어떤 굳은 결심을 다지게 되었는지 넌 알고 있어.


앨런

네 말대로, 이야기 속의 그녀가 맹목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을까? 아니, 결코 아니야. 넌 이야기 속의 그녀에게 충분한 활력을 주었어.


앨런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의 결말은 두 사람이 극장에 들어가 플로라를 구해내는 것, 그것뿐이었겠지.


앨런

하지만 넌 극중 플로라를 미래의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고 서로에게 깨달음을 주고 마음을 풀어주었어.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아마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앨런

이렇게 과거와 미래의 자신이 부딪히는 이야기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아. 하지만 넌 이미 모든 인물에게 영혼을 불어넣었고, 네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은 진정한 자신을 보여주었어.


앨런

완전무결한 그녀를 만들지 못했을진 모르지만, 완전무결한 그녀가 원래 작품 속에 끼여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앨런

그것으로 충분해. 그들의 마음이 너에게 그 감동을 표현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해.


앨런

만약 그녀가 여기에 있었다면 반드시 이렇게 말했을 거야.


앨런

넌 이미 처음부터 바랐던 작품을 만들어 낸 거야, 아이라.


아이라

...그런가요.


아이라

회장님,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앨런

편할 대로 하렴.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엘라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심호흡을 하는 듯한 몸짓을 했다.


그녀가 말하는 결례는 대화를 끊는 것뿐만 아니라 다음을 위해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아이라가 손을 흔들며 몇 번의 손짓을 하자 극장 불빛이 지휘를 따라 차례로 꺼졌고 어둠이 객석을 한 걸음 뛰어넘어 무대로 향했지만 무대 중앙의 한줄기 빛이 내렸다.


아이라는 마치 그 빛이 그녀로부터 나온 것처럼 그 빛 속에 서 있었다.


아이라는 낯선 환경을 자신만의 작업실로 만드는 데 능했었고,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빛은 좁지만 생각에 잠기기 좋은 작업실을 만들어줬다.


만약 객석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다면 예의상 아이라는 그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어둠은 영문도 모르게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앨런은 그런 아이라의 모습에 익숙한 듯, 불쾌한 기색은커녕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단정하게 서 있는, 머리를 살짝 치켜든 흰토끼를 바라보았다.


아이라

휴우...


아이라는 이 어둠을 오래 응시하지 않고 어둠 속에 비친 별빛을 따라 극장 아래에 있는 통유리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통유리창에 가득 찬 별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과거 아이라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밝고 눈부신 것을 느꼈지만 지루하다고 여겼었다.


그 별빛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녀의 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빛뿐이고, 그 빛은 몇 년 전에 발현되었는지 모른다.


항성들은 자신을 뜨겁게 달구고 생각의 광자를 사방팔방으로 깊은 허공에 던졌다.


광자의 여정은 이렇게 멀고 길었다. 이들은 얼음같은 추위 속에서 몇 년 동안 계속 걸어오다가 어느 실체에 부딪힐 때 그 위에 항성의 모습을 비추면서 반사되어 흩어진다. 이때 빛을 발하는 그 별은 이미 식어 죽었을 것이다.


저 별들이 빛을 기대하며 화답할까? 저 별들의 빛이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그 수많은 적막한 빛을 바라보면서 아이라는 까닭없는 경의를 느낀다.


이에 비해 자신이 빛을 던지는 대상은 자신과 이렇게 가깝게 밀착돼 있다.


그녀는 바로 그 푸른 행성 위에서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 대상을 향해 빛을 투사했다.


그녀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영감이 모여 소녀가 그 속에서 생생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이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별빛은 이미 지구에 투사되어 언젠가는 그 사람의 눈에 들어갈 것이다.


그 언젠가는 과연 언제가 될까? 내일? 다음달? 몇 년 후? 아이라는 알 수 없다. 그리움의 별빛은 반드시 수천 수만 광년의 거리를 뛰어넘을 필요가 없으되, 길고 짧음을 가늠할 수 없는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상념이 여기에 이르자, 아이라는 문득 손을 들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자 작업실 단말기가 다시금 환기되고 홀로그램 화면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고래의 노랫소리의 궤적을 그리며 반대편에서 미끄러져오는 것은 소녀가 꽃밭에 서서 그곳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장면이었다.


아이라

셀레나...




황홀경에 그녀는 그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꽃밭의 소녀가 그녀에게 미소짓고 있다.


그 소녀가 떠날 때, 그녀에게 미소지었던 것처럼.


이것은 그녀가 떠날 때 남긴 단 한순간의 빛이다. 아이라는 이 빛을 양손에 들어 그 별을 향해 굴절시켰다.


지구상에서 천천히 움직이며 조용히 읊조리는 그 항성은 도대체 언제쯤 이 빛을 만날 수 있을까?


그때...서로를 비추는 이 두 별은 지금의 모습 그대로일까?



ㅡㅡ시간 차이가요? 네. 그러면 아쉬울 수도 있겠죠. 그러나 소멸된 문명은 그 흔적도 남게 마련입니다. 다른 쪽의 문명은 오랜 시간에 걸쳐 그 흔적들을 볼 수도 있습니다.


ㅡㅡ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한, 이 예술들의 빛은 여전히 우주를 누비고 있는 한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간, 이야기 속에서 아이라가 쓴 대사가 갑자기 그녀의 마음속에 메아리쳤다.


어째서일까? 분명히 자기가 쓴 대사인데 왜 이제와서 그 진의를 알아차린 것일까?


별하늘과 화면 사이를 맴돌던 시선이 뜻하지 않게 옆의 얕은 잠에 취한 소녀에게로 떨어졌다.


아이라

...하하, 그래. 정확히 그건 내가 쓴 게 아니기 때문이었지.


그 소녀는 조용히 웃으며 아이라에게 답을 알려 주었다.



그렇다. 그 대사는, 철저히 자신의 손을 거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추억의 그녀, 자신의 손을 빌려 쓴 그녀의 말이다.


아이라는 손가락을 단말기 위에 떨어뜨려 자신의 그림을 어루만졌다. 한순간 화면 너머로 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꽃밭으로 손을 뻗은 듯했다.


ㅡㅡ거리를 모른다면, 그 대상의 눈을 비출 수 있을 때까지 별은 언제나 계속 빛날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그 빛은 영원할 것이며, 유구한 생명을 그리워할 것이다.


아이라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며 손을 들었다.




온화한 불빛이 다시 켜지자 앨런은 기대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라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이라

기분이 많이 풀어졌어요.


인도자의 기대에 흰토끼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앨런

그래, 바로 이 웃음이야. 마침내 이전의 그 모습을 되찾았구나.


앨런

살롱 사람들의 표현에 따르면 뭐랄까, 음...그래, '이 웃음을 짓는 사람이야말로 직설적으로 자신을 그림 속에 다 보여 주는 아이라 양이야!'


아이라

하하하하, 못말리겠네요. 회장님 성대모사가 너무 리얼한거 아세요?


아이라

이 대본을 다듬고 나면 저도 살롱에 가서 얼굴을 내밀 생각이에요. 회장님이 살롱 사람들을 만나면 회장님한테 인사 좀 해 달라고 부탁할게요.


앨런

영광일세.


아이라

음…그 밖에 고민할게 있는데 배경이야기는 어떻게 해야할지…. 관중 단말기를 통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배포해야 할지….


아이라

참, 좀 더 교묘한 방식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라

아! 영감이 온다. 먼저 가볼게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 기체는 좀 이따가 개조해야 되니까 여기에 놔두고 갈게요.


아이라는 무대 아래로 세 발짝 연이어 뛰어내려 극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곳에는 그녀의 진짜 작업실이 있었다.


토끼처럼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앨런은 시선을 거두고 눈앞의 무대를 주시했다.



수 년 전, 이 무대에서 한 소녀가 서서 보는 이 없는 와중에 레퍼토리의 커튼콜을 내렸다.



몇 년 전, 이 무대에서 소녀가 오페라 작가로서 처음으로 연극을 한 적이 있었다. 갈채를 받은 소녀는 홀로 폭풍우를 만났다.



며칠 전, 이 무대에서 연극 기계의 도움으로 소녀의 영혼은 환상의 레치타티보를 펼쳐놓았다.



몇 달 후, 이 무대에서 또 다른 소녀의 그리움을 담은 또 다른 작은 뮤지컬이 공연될지도 모른다.



앨런

후...정말이지 나도 모르게 과거가 떠올랐군.


앨런이 무대 위에서 엷게 웃으며 내뱉은 말들은 마치 수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자기 곁에 남아 있는 신비한 유령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앨런

어린 시절 셀레나…. 이곳에서 만났을 때 나도 마찬가지로 성숙한 극작가가 아니었고, 말하는 관점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그녀의 열정이 불타오를 줄이야.


순간 앨런은 몇 년 전의 꽃밭 속으로 돌아왔다. 자신은 풀밭 위를 달리는 한 마리의 토끼와 같았고, 그 뒤를 따라오는 느릿한 발걸음의 인도자의 눈 밑에는 오늘날의 자신의 눈속에 있는 것과 같은 빛이 서려있었다.


앨런

하하, 무심코 뿌린 꽃씨가 어느새 꽃밭으로 자라났구나.


앨런

플로라 씨, 저를 이 길로 인도해 주신 당신이 이 꽃밭을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히든 : 옛 시인의 메아리


그녀는 텅 빈 우주를 홀로 거닐며 밤을 지새웠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모른 채 오랫동안 걸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지역에 왔을 때, 어느 순간 자신이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폐허를 지나 그 위에서 그녀가 가까스로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을 자세히 헤아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아카디아 대퇴각 184번 철수 지점'이라는 불쑥 튀어나온 간판까지 찾아냈다.


폐허를 따라 계속 앞으로 나가자 그녀가 찾은 것은 지하극장이었다. 넓은 지하 공간과 허물어진 장식이 옛적의 광활함을 호소하고 있다.



극장에는 노랫소리가 없었고 목숨이 위태로운 두 사람만 있었다. 한 사람은 아직 어리고, 한 사람은 늙어보였다.


어린 소녀의 몸에는 병리 증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고, 가쁜 호흡은 죽어가는 자신의 생명을 날려버리는 듯했다.


부패한 장막에 기대어 있는 늙은 군인들의 몸에 드러난 파손은 그가 겪었던 치열한 전투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고, 균열에서 뿜어져나오는 붉은 빛이 유난히 눈부셨다.


그들은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았다. 그녀는 마땅히 돌이켜 기억해내야 했지만, 결코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군인

크윽...호출, 보육구역 184번 부대 호출 요청, 실종자를 찾았다...


군인

임무수행 중 감염체 피격…피해율 한계치 초과…지원 요청…



그녀는 이 구절에 익숙하다. 분명 본디 그것을 들어보았어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그 비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녀가 두 사람의 곁에 다가서려 하자 소녀의 숨결이 가빠졌고 군인의 녹초가 된 몸뚱이가 갑자기 움츠러들었다.


그것은...그녀가 다가와서 그런 것인가? 그녀는 의구심을 품고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의 병세가 심해진 모습에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갑자기 군인이 한 손을 들어 몸을 일으키려는 듯했다. 그러나 망가진 몸은 몇 번 움직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녀는 그의 손끝이 자신의 방향으로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래를 바라보자 자신의 발 옆에 장치가 하나 떨어져 있다.


그녀의 기억의 진흙 속에 빈자리가 생긴 것 같다. 이 순간, 바로 이 장치의 형상으로 채워졌다.


그것은 발신기였다. 그녀는 의식했다.


그녀는 군인이 미처 켜지 못한 장치를 누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앞선 군인의 비명을 다시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기억이 그녀에게 오기 전에 서둘러 떠났다.



...


그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녀는 오랫동안 걸었다. 심지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몰랐다.


그녀는 마치 망망한 우주에 있는 것 같았다. 우주라는 말의 의미조차 생생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말을 생각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그 끝없는 공간에 떠돌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저기 연보라색 꽃잎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펼쳐진 우주에서 번쩍 뜨인 보라색 눈동자처럼, 그녀를 끌어당겨 가냘프지만 단단한 중력으로 살며시 잡아당겼다.


그녀는 그 눈동자 속에 떨어졌고, 꽃잎이 그녀의 발끝을 문지르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한순간 중력이라는 이름의 사랑에 둘러싸인 그녀는 끝없는 우주를 떠나보냈다.


이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고개를 돌렸다.



수천만 년 동안 이 별을 지켜봤던 별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눈길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아득함과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별들과의 눈맞춤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또 하나의 별을 훑어보고 또 하나의 눈을 뛰어넘었다. 결국 어느 한 쪽을 가로지르다가 멈췄다.


그녀는 그 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고,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그녀에게 읊조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 별빛에 응답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 별빛을 향해 가볍게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