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 속에서 자유롭게 웃던 사람들은 진영과 입장차이를 벗어던지고 기술의 돌파에 환호했다.



영점에너지는 황금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품고있던 미래에 대한 궁극적인 환상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영점에너지에 대해 알고 있고, 모든 사람들은 영점에너지에 대해 주시하고 있었다.


반면 진공 영점에너지에 대한 연구과정은 거의 모든 연구자료가 영점에너지의 존재를 기반으로 한 확장적 적용에 불과해 에너지 분야에 집중한 많은 전문가들도 무수한 시행착오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겪었는지 알 수 없는 동력 연구소의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모두가 인내심과 용기를 거의 잃고 낙담하는 무거운 분위기가 구석구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유독 아담한 모습 하나만이 홀로 모두의 앞에 서서 대담하고 세밀하게 여러 방안을 미세 조정하며 오메가 파일에 상기된 아틀란티스 원자로의 효과를 되살리려 했다.



카레니나

음...가상입자 검출 수치는 정상인데 에너지 출력 환경이 유지되지 않아...【삐】, 안되겠어!


아합

카레니나 양...정말 기운이 넘치는구나.



테디베어

익숙해지긴 했지만... 제가 지쳐 죽을 것 같을 때마다 그녀의 의욕 넘치는 모습을 보면 유독 화가 치밀더라구요.


테디베어

그러나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바보야말로 첫 번째 성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죠.


테디베어는 바닥에 앉는 바람에 더러워진 옷자락을 툭툭 치고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두 손으로 재빠르게 단말기를 조작했다.


카레니나

야, 저기 있는 놈, 진공실의 내압을 시험해봐. 그리고 금속 튜브를 가져와 교체해, 아까전 거는 내가 박살냈어...


쿠로노 연구원

...


테디베어

하하, 그 여자는 일단 일에 몰입하면 당신이 어떤 진영이든 상관하지 않거든요.


카레니나에게 불려간 쿠로노 연구원은 아합를 바라보았다. 이름만 내건 연구주임에 불과했지만 명목상으로는 모두 아합의 주관 하에 있어야 했다.


아합

우리는 지금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카레니나 양이 시키는 대로 합시다.


신비롭고 고급스러운 인상과 달리 과학의 개발 과정은 80%의 시간 동안 지루하고 쓸모없으며, 축하할 만한 성공은 수천만 번의 거듭된 테스트에서 비롯된 것이다.


카레니나가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인 캐논은 온갖 어처구니없는 실험을 하곤 했는데, 가끔… 아니, 자주 실패를 경험했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엄청난 폭발 끝에 온몸이 시커멓게 그을린 채 하얀 이빨만 드러내며 껄껄 웃고 있는 캐논이 연탄재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올 때도 있었다.


어린 카렌은 할아버지의 손을 조심스럽게 받쳐 맨 위에 묻은 연탄재를 가볍게 닦아내자 그 안에 더없이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숨어 있는 것이 보였다.


카레니나

가만히 있어!!!!!!!! 다 움직이지 마!


사람들이 다시 일에 뛰어든 지 얼마가 지났는지 알지도 못한 채, 카레니나의 갑작스런 울부짖음에 모두가 깜짝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었다.


카레니나는 탁자 위의 연필이 공중에 가볍게 떠오를 때까지 바라보았다. 중력이 지구의 6분의 1에 불과한 달 표면에서도 연필은 이유 없이 뜨지 않는다.


카레니나

테디베어, 기록해! 바로 이거야!


테디베어

알아, 알고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아합

카레니나 양, 무슨 일이야???


카레니나

나는 영점 원자로에 장착해야 할 엔진을 연결해 가장 예민한 검출기로 삼았어.


원래 월면기지의 영점 에너지 원자로는 예비적으로 공중정원의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성간운항의 가장 중요한 중력파 엔진을 구동하게 만들어 준다.


카레니나

이 엔진은 영점 에너지를 적용하기 위해 설계되어서 다른 일반 에너지와의 호환이 불가능해 원자로와 함께 머물러 있었잖아.


카레니나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주 미량의 영점 에너지만 가하더라도 작동한다고.


카레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디베어에게 마지막 지령을 입력하라고 말했다. 카랑카랑한 작동음과 함께 공중에서 출렁거렸고, 한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과 사물들이 마치 진짜 우주에 있는 것처럼 공중에 떠있었다.



아합

이, 이건...우리가 성공했다는 거야!?


카레니나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영점 원자로의 엔진효율은 정상 작동 시 이론치의 5할에도 못 미치지만, 원자로가 작동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모든 연구원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쿠로노 연구원이든 엔지니어 부대원이든 공중을 떠다니며 몸을 휘저었고, 아는 사이나 모르는 사람들이나 서로 주먹을 날리며 축하했다.


어쩌면 이 순간에 이르러서야 무중력 속에서 자유롭게 웃던 사람들이 진영과 입장차이를 벗어던지고 가장 순수한 연구자로 돌아가 비로소 기술돌파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테디베어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지만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영점 원자로 가동에 성공하고도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린스

드디어 오늘을 기다렸어… 리스트, 나한테 어디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와?


리스트

별거 아니야.


리스트가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린스는 질리지도 않는지 옷깃과 소매 끝을 여미고 있었다.


아합

그린스 씨, 이 대형 오메가 무기는 영점 에너지 공급 단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린스

카렌, 영점 원자로 상태는 정상이야?


카레니나는 구석에 서서 영점 에너지가 주입된 오메가 무기가 서서히 특유의 푸른 빛을 발하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이때는 아직 대기 상태에 불과했다.


카레니나

흥, 적어도 너희들 머리보다는 좀 정상적이야...


그린스

하하하, 그것으로 충분하지, 하지만 너희들은 전에 우리의 합작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었나?


카레니나

우주 엔지니어 노동조합은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기구라고 하지만 쿠로노와 협력할 생각은 없었거든?


우주 엔지니어 노동조합의 상대적 중립적 신분은 의회가 쿠로노와 어느 정도의 협력관계를 맺은 뒤 카레니나를 협조자로 선택한 이유였다.


카레니나

지상작전 지원에 시급히 필요한 Ω 무기의 대량 생산을 달성하기 위해 영점 에너지 원자로 재가동을 지원하는 것일 뿐이야. 괜히 김칫국마시지 말라고.


그린스

하지만 이합생명체와 감염체가 오메가 무기에 공격받기를 죽치고 멍하니 기다리지 않겠지? 절망적인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인류에게 더 결정적인 돌파구가 필요해.


그린스는 최근 쿠로노가 의회와 협의한 계획을 담은 서류를 카레니나의 단말기에 보냈다.


카레니나

신형 특화기체…만일 그렇다면 오메가 무기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는 소체는 대행자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제작된다…


카레니나는 아직 잠든 루나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윽한 푸른 빛에 비친 앳된 얼굴은 그녀가 승격네트워크의 최상위 존재인 대행자라고는 도저히 여겨질 수 없었다.


그린스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루나에 의해 만들어낸 소체의 기본 성능은 일반 구조체보다 높았지만 새로운 특화 기체에 필요한 요소인 흡인력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았어.


카레니나

【삐ㅡㅡ】, 어쩐지 너희들이 순순히 소체를 개조해주더니, 실험 데이터를 얻으려고 했던 것뿐이었잖아!


그린스

허,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난 너에게 우리가 비록 보물상자에서 요행으로 보물을 찾아냈을 뿐일지라도, 이미 이렇게 현저한 성공을 거두었음을 깨닫게 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린스는 카레니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시큰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린스

과학자인 너는 이 보물상자 안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궁금하지 않니?


그린스는 아합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루나에게 연결된 펄스 공급 장치를 작동시켜 그녀에게 활동 가능한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창백한 소녀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천히 눈을 떴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긴장한 채 무기 위에 손을 얹었다. 보험으로 오메가 무기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에게 주는 공포는 본능적이다.



루나

...


그린스는 기대감에 찬 눈으로 루나를 바라보며 반응을 보였지만, 루나는 그저 담담하게 모든 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린스

네 이름이 루나였었나…나를 기억하고 있니!


루나

...


그린스

그날 나는 너의 탄생을 목격했고, 추한 감염체에서 지금과 같은 하얗고 티없는 고등한 존재로 변모했단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너와 재회하는 상상을 해왔어.


여전히 싸늘한 표정의 루나의 눈빛에 작은 변화가 있는 듯했다.


루나

너가...날 감염체로 만들었어?


그린스

물론 아니지. 너가 감염된 건 사고였어. 혹은...필요한 희생이었을지도.


그린스

당시 구조체 개조 기술은 캐논 박사의 연구로 성공률을 크게 높였지만 여전히 결함은 남아 있었거든….


카레니나

'필요한 희생'...


루나

그래, 너희들은 그게 '사고'라고 생각하는데...하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루나는 승격네트워크에 연결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허가를 받지 못했다. 아마도 075번 도시에서의 행위로 인해 자신을 위협하는 이종(異種)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몸에 붙은 퍼니싱에 침식되어 감염체가 된 것은 아니다. 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부적격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며, 루나로서는 다소 의외였다.


루나

혹시 인간, 너희들이 나에게서 무엇을 얻으려고 해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나는 거의 보통의 구조체와 다를 바 없고, 퍼니싱을 끌어당기는 힘만 조금 남아 있어.


루나가 묶여있는 오른손을 살짝 들어올리자 어두운 붉은 빛이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병들을 긴장시켜 무기를 들기에 충분했다.


루나

여기엔 퍼니싱이 없어...


루나는 뜻밖에도 자신의 몸 안에 있는 퍼니싱 말고도 대기 중의 퍼니싱의 농도가 0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냈다.



리스트

경거망동하지 마. 여기는 달이다...너희 같은 승격자에게 흡수할 수 있는 바이러스는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네가 도망가려고 한다면, 뒤에 있는 대형 오메가 무기가 작동해서 모든 바이러스가 너와 함께 인멸될 것이다.


루나

도망갈 생각따위 없어...루나라는 존재는 이미 소멸했거든. 어디에도 내가 돌아갈 곳은 없어.


루나는 뒤에 있는 오메가 무기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루나

인류란...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건가...


루나

그러나 이건 여전히 무의미해. 인류의 파멸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야.


075번 도시 이후, 루나는 승격 네트워크에 어긋나는 결정을 내렸고, 결국 인간의 적으로서 그 언니를 선택하고, 자신이 믿었던 그 인간을 선택하게 되었다…그 이후로 이종이 된 그녀는 더 이상 머무를 곳이 없다.


루나

하지만 그 사람처럼 꼴사납게 발버둥치고 있더라도, 인류는...


루나의 마지막 말은 차가웠지만, 적개심 대신 그녀의 말에는 거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일말의 기대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