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여전히 달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가소롭지만 언젠가는 과학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낼 것이다.



구조체 실험실의 어두운 불빛 속에서 아합은 힘차게 단말기에서 데이터를 채우고 있었고 홀로그래피 화면에서는 순백색의 구조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합은 신형 특화기체 설계 작업을 받은 뒤 이 구조체 실험실에 머물러야 했다.


아합은 자신의 일에 충분히 집중하면서도, 주위에 실바람이 불면 고개를 들어 전방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 다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아합

휴...괜찮아…펜이 바닥에 떨어졌을 뿐이야.


지금의 반응으로 보아 연구소 중앙에 있는 소녀, 루나라고 하는 승격자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승격자에 대한 이해는 많지 않지만 미치광이가 무리지어 있는 쿠로노 내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소개자료에서는 예외 없이 위험천만한 존재로 분류된다.


이유 없이 그는 과거 자신이 개조한 또 다른 흰색 구조체가 첫 테스트에서 자신을 놀래키던 일도 떠올렸다.


아합

빌어먹을…다음에는 반드시 그 하얀 놈과 관계를 맺을 일은 없을 거야.


그는 단말기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얀 구조체에 시선을 두고 한숨만 쉬었다.


아합

에휴, 이 기체만 완성하면 쿠로노따위 그만둬야지...


???

여어...


아합

으아아아악!!!


아합이 연구개발 작업을 다시 시작하려고 할 때, 뒤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단말기를 놓쳐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날아오르던 단말기가 하늘하늘거리며 지상으로 떨어지며, 달의 자연 중력이 지구보다 훨씬 작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아합은 단말기가 잘 살아 있는 것을 보고, 그 틈에 그에게 인사한 사람이 카레니나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합

카레니나 양...어떻게 여길 온 거야?


카레니나는 아합을 도와 바닥에 떨어진 단말기를 주웠고 위에 떠있는 기체에 주의를 기울였다.



카레니나

이봐, 이게 그 신형 특화기체 설계안이야...?


아합

그래. 이 대행자에게서 얻은 자료를 이용해 광범위한 퍼니싱 바이러스를 몸속으로 끌어들이고 몸 속에 내장된 오메가 무기의 효능으로 제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어. 기존에 예상한 디자인과 크게 다르지 않아.


카레니나

너희 쿠로노 놈들이 꼭 이걸 비밀로 숨기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합

결국 바깥의 경비들이 널 들어오도록 허락한 이상, 그것은 그린스 씨가 너의 행동을 묵인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카레니나

흥, 확실히 그렇지. 역시 그 아저씨한테도 이 오메가 무기의 운용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굳이 시동을 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루나가 깨어난 이후 냉랭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았고, 아합이 신형 특화 기체에 필요한 기술적 데이터를 묻는 데도 협조했다.


아합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필요해! 카레니나 양, 가능한 한 자세히 확인해 줘...


그러나 모든 두려움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언제 순한 소녀가 사람을 죽이는 괴물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카레니나

진짜...그렇게 겁이 났으면 그 때 왜 이 일을 맡은 거야.


아합

이 기체를 사용하는 건 과거 내 지인이니까, 될 수 있는 대로 그녀를 위해 최선의 준비를 해주고 싶어. 그래, 너도 그녀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아합은 신형 특화기체 시험자 명단을 발표했다…처음이자 유일한 지원자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원, 리브였다.


카레니나

리브라고!? 하지만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지면에 있잖아. 왜...


아합

그들은 최후의 노력을 기울여 리브와 그들의 지휘관을 공중 정원으로 돌려보내 리브의 마지막 적응작업을 하는 한편, 가능한 한 그 지휘관을 치료하고 리브의 신형 특화기체 교체의 연결대상 역할을 맡을 계획이야.


카레니나

하지만 그 지휘관이 미처 깨어나지 못한다면...


카레니나는 이전 파일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새로운 특화기체의 의식의 바다를 안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적응력이 뛰어난 지휘관이 없다면, 그러면...


아합

그러면 신형 특화기체 사용 대상자는 의식의 바다에서 알 수 없는 증상을 보이다가 최대 3시간 뒤 사망하게 돼.


카레니나

리브는...걔도 알고 있어?


카레니나의 질문에 아합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합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남을 위해, 전 인류를 위해…. 그 '필요한 희생'이 되려 하고 있어. 그녀는 여전히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보다는 울면서 도움을 청하는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싶어해.


들고 있던 주머니에서 작은 탄피를 만져내는 것은 아합에게 있어 나약함의 증명이었지만 지금은 그를 지지하는 작은 용기가 됐다.


아합

그래서 나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최대한 도와야 해. 쿠로노에서 이렇게 떳떳한 일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정말 드물어.


아합은 머리를 긁적이고 웃으며 단말기를 덮고 '데이터 분석부에 가서 자료를 제출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카레니나

이게 그 '필요한 희생'이라는 거야...?


비록 카레니나는 아무도 다른 이들의 희생 없이는, '방법이 없다', '별 수 없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인류는 꼭 리브가 아니더라도 루시아, 비앙카, 그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카레니나 자신일 수도 있는 가장 씁쓸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 희생이 그녀의 책임…. 혹은 모든 인간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너무 약하고도 너무 약했기 때문에 희망을 잡기 위해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인류는 이런 희생 없이 전진할 수 없어.


카레니나는 이 실험실 안에 또 하나의 두려운 존재가 있다는 것을 잊을 뻔했다.


고개를 들어 말하고 있는 루나를 바라보았다. 푸른 빛은 순백의 소녀의 모습마저 가물가물하게 만들었다.



루나

수많은 인류가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소수의 운명을 희생시켰고, 절대이성에 의해 구축된 과학으로 살아남았어.


카레니나

너도…과학으로 희생된 소수야?


카레니나는 루나가 감염체가 된 것도 당시 구조체 개조 기술의 결함으로 비롯되었으며, 구조체 개조 이론을 세운 것이 바로 카렌의 할아버지라는 그린스의 말을 떠올렸다.


루나

그런건 나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 남자의 말처럼, 이것도 단지…불행일 뿐이니까.


어쩌면 지금의 루나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운명의 불공정이든, 자업자득이든, 어쨌든 그녀는 과거로 돌아가 다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루나

하지만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너가 습득한 인간의 이성의 절정을 대변하는 과학기술은 희생이 필요없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어릴 적부터 굶주림과 죽음으로 얼룩진 그 빈민굴에서 카레니나는 착한 아이가 되어 다른 사람과 어울리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카레니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나중에는 단순한 싸움으로 번지는 이유를 몰랐다.


카레니나는 이전에도 인류와 함께 발전해온 과학이 싸움만 잘하는 자신처럼, 순수한 파괴의 저주에 불과해 자연을 파괴하고 지구를 파괴하고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했다.



캐논

카렌! 어서 와보렴. 오늘은 보름달이구나! 지난 보름달로부터 정확히 29일 12시간….


카레니나

29일 12시간 43분이 맞아. 할아버지가 짜증을 냈던 걸 꼭 기억하고 있었어.


캐논

그렇니? 아하하하, 기억이 안 나는구나! 하지만 상관없어. 내가 까먹으면 네가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만 하면 되잖니.


캐논

참, 기억나는 김에 내가 달과 토끼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께...옛날에 행복한 토끼들이 있었는데... 


카레니나

할아버지, 왜 날 혼내지 않았어...오늘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랑 싸웠는데...


캐논

카렌, 다른 사람과 싸우는 건 재밌니?


카레니나

싸움…맞는 건 아프고 때리는 데 쓰는 주먹도 아프지만 그걸 알면서도 참지 못했어…사람들은 나보고 싸우고 파괴하는 것밖엔 모르는 미치광이, 할아버지와 같은 미치광이래.


캐논

참 지루하지 않니! 이런 일보다 차라리 달을 보러 가는게 더 재밌는걸......


캐논

자, 질문! 카렌은 달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니?


카레니나

달...원래 거기에 있던 거 아니야?


캐논

당연히 아니야. 사실 달은 아주 오래 전에 거대한 운석이 '꽝' 소리를 내며 지구를 들이받았고, 마침내 그 조각이 달로 변해 버렸단다.



카레니나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발밑에 있는 땅은 오래 전에 하늘의 달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거야?


캐논

하하하 그렇지! 파괴가 없으면 달의 탄생도 없잖아, 대단하지, 그러니까 봐봐라, 파괴 자체가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


캐논

달뿐만이 아니야. 카렌, 너 알고있니? 어떤 이론에서, 우주의 처음은 고요한 특이점이었는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모든 아름다운 것이 탄생시켰다고 한단다. 그래서 폭발은 가장 위대한 힘이란다, 하하하하!


카레니나

응...알고 있어.


캐논

자, 그럼 계속 질문하마!


카레니나

잠깐, 할아버지!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카레니나

과학의 발전은 항상 알 수 없는 것들을 수반해. 진공 영점 에너지 연구와 같이 수많은 재앙을 가져올지도 몰라. 어쩌면 너와 같은 '필요한 희생'을 많이 낳을지도 모른다고...


카레니나는 미소를 지으며 루나의 눈길을 맞이했다.


카레니나

오늘날 우리가 아직 강하지 않아서 그런지, 최고의 기술자들은 여전히 달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무지하고 가소로워.


카레니나

하지만 우리가 매일 쌓아온 지식은 결코 무용지물이 될 수 없어. 마침내 파괴에서 태어난 과학의 힘을 새로운 희망으로 만들어 낼 날이 올 거야.


루나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카레니나는 처음으로 그에게서 인간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루나

...어떻게든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집착은 정말 언니와 꼭 닮았어.


카레니나

루시아는 지상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을 거야… 흥, 나도 질 수 없어!


전사들의 전투는 점점 종반으로 치닫고 있지만 기술자들의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캬루 루나 인성 새하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