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드리워진 어두운 구름을 뚫고 철회색의 거인이 나타나 초고속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 위에 분무되어 있는 표지는 이것이 공중정원의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 순간, 큰 배 위에는 선원이 하나도 없고 허세를 부리는 선장만이 선두에 서서 광풍을 맞으며 마침내 중력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롤랑

정말 나 홀로 이 비행선을 성공적으로 작동시킬 줄이야…. 옛날에 캐릭터 때문에 익혀야 했던 비행선 조종 지식을 다 잊어먹진 않은 모양이네.


롤랑

《금성 구조》였었나, 아니면 《와일드 호 탈출》이었나?...아, 너무 오래전 기억이야. 인간은 항상 편향되어있지.


롤랑은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뽑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했다ㅡㅡ이또한 당연했다. 그때의 그는 천재 아역배우로 불렸지만 작품의 유일한 주인공으로서는 결코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그가 이슈의 주역이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진정한 배우라면 대본, 리허설이 없어도, 어떤 무대를 밟은 순간...무슨 일이 있더라도 모든 것을 끝까지 마무리지어야 한다.


롤랑

오늘이 구출하는 기사님의 역할을 맡는 거라면, 발밑에 있는 비행선은 말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 음, 참으로 기품있어라.


롤랑은 품에서 저장탱크를 꺼내 들어올렸고, 그 속에서 용솟음치는 살점은 끊임없이 자태를 바꾸고 있었다.


롤랑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 내가 받은 공연 스케줄은 동화 이야기가 아닌 무서운 이야기란다… 공주에게 독이 든 사과를 먹이는 뱀 이야기 말이야.


롤랑

하지만 동화가 되었건, 무서운 이야기가 되었건, 클리셰대로 이제 나를 막아설 추격자가 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롤랑의 말에 호응하듯 우주선의 선체가 격렬하게 진동했고, 이내 방위 시스템의 경보음이 구석구석을 울렸다.


롤랑

옳지, 옳지, 그래야지, 위급하게 하늘로 올라가는 비행선, 갑자기 나타난 험상궂은 괴물, 홀몸의 남우 주연… B급 영화의 팝콘 클리셰는 항상 불쾌하기 짝이 없어.


롤랑은 순식간에 사복검과 산탄총을 들고 고속으로 낙하하여 비행하는 이합생명체들을 향해 폼을 잡았다.


롤랑

하지만 학살과 학살 당하는 대상이 반드시 극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거든...



전투 개시





롤랑

원맨쇼를 즐길 시간조차 없이 군중이 모여들다니, 참으로 심기불편한 손님맞이야.



롤랑

소중한 무대를 더럽힌 관객은 강제로 퇴장당해야지.


롤랑

진공 환경에서 발생하는 적조거품인가...재미는 재미일 뿐, 청소하는 사람한테는 큰 골칫거리야.



롤랑

정말 난장판인데, 이걸 어떻게 끝내야 하려나.


롤랑

하지만, 마침 본 네거트의 이 "선물"을 시험해 볼 수도 있겠군.


롤랑

비장의 무기를 등장시켜야 할 때야.



롤랑

아까전부터 퍼니싱이 함유된 개체에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거든.


롤랑

동족상잔....분명 재미있는 연극이 될 거야.



롤랑

지나가다 놓치지 말라고! "깜짝" 레퍼토리가 시작됐어.


롤랑

힘내, 꼬맹아. 남아있는 '잔재'들이 네 입맛에 딱 맞았으면 좋겠는데.



롤랑

이렇게 많은 양을 흡수한 후에도, 겉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롤랑

본 네거트가 뜻밖에도 나에게 이런 "귀중한 선물"을 아끼지 않았을 줄이야.


롤랑

이 다음에, 우리의 "작은 공주님"을 마음 편히 맞이할 수 있게 되었어.


전투 종료





곧 현장에 남아 있던 이합생명체의 잔해는 저장탱크에 있던 괴물에 의해 완전히 삼켜져 퍼니싱 바이러스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롤랑

정말 깨끗하게 먹어치웠네...


롤랑은 저장탱크를 손에 쥐었다. 이합생명체를 모두 집어삼킨 뒤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


롤랑

후후...이까짓 게 입맛을 채우기는 역부족이지?


나머지 이합생명체들도 순항한계에 이르러 추격을 멈춘 듯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아하니 롤랑의 수중에 있는 자신들보다 더 적임자인 '괴물'이 더 두려웠던 것 같다.


롤랑

겉모습만 생물처럼 나타난게 아니라 생물의 생존본능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걸까.


죽음을 두려워하며 구차하게 살아가는 것은 생물의 본능이지만 인간의 이성이 발전할수록 생물로서의 본능을 통제할 수 있었다.


롤랑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하는 거라고...


과거에 그는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고, 유일한 답을 찾지 못한다면 그렇게 죽는 것은 아름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우주선의 속도는 이합생명체로부터 벗어나자 점점 빨라졌고, 롤랑은 고개를 들어 멀리 매달려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ㅡㅡ거기서 나만의 답이 또 있을까?


자신은 독단적으로 그 백발의 소녀의 곁에서 함께하는 것을 살아갈 이유로 들었을 뿐이다...그녀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하는 한, 당연히 도와주어야 한다.


롤랑

하지만 승격 네트워크 대행자인 그녀도 이미 살아있을 이유를 잃었다면...


'루나가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가'는 본 네거트가 자신에게 판단을 맡긴 명제다.


롤랑은 알파가 맡긴 것을 팔에서 꺼냈는데, 그것 또한 아주 얇은 메모리 셀이었다. 가볍고, 얇고, 너무 약해서 조금만 힘을 가해도 먼지가 되어 복원할 수 없을 것 같다.


한때 그에게도 남동생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인간이 만든 우스꽝스러운 사념에 불과했고,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자신도 그 감정의 진위를 분간할 수 없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대본에만 존재했던 이 '캐릭터'를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


롤랑은 자조적인 웃음을 거두고 그대로 비행선의 함수에 앉아 왼손에는 알파가 그에게 맡긴 메모리 셀, 오른손에는 본 네거트가 그에게 이합생물 줄기세포를 준 저장 탱크를 쥐었다….


롤랑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도와주는 것일 뿐... 루나 양, 너를 구할 수 있는 건 결국 너 자신 뿐이야. 이대로 무너질건지… 아니면 새로운 삶을 맞이할 건지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