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희망을 잡기 위해서는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 말의 정확성을 의심한 자는 없었으나, 무엇이 진정한 희망이란 말인가?



하산 의장은 세계 정부 상무회의에서 예상치 못한 카레니나의 메시지가 이어지자 30분간 회의 정회를 선언했고, 이 짧은 30분 동안 리스트는 이 힘겨루기에 입각한 이론을 다시 찾아야 했다.


리스트는 카레니나의 녹음 메시지와 함께 보내온 지극히 간략한 사고 리포트를 내려놓았다. 거기에도 월면 기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퍼니싱 유출 사고가 발생해 영점 에너지 엔진이 통제 불능이 됐다는 내용만 대충 적혀있었다.



리스트

영점 에너지 엔진을 결코 망가뜨리게 해선 안되는데...


문가에 기대에 선 노르만은 눈살을 찌푸리며 전에 없던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노르만

이봐, 당신 그 엔지니어 부대 여자 말 못 들었어?…… 그 무슨 엔진인지 뭔지 파괴하지 않으면 달 위에 있는 사람 다 죽게 생겼다고!


리스트

아직 가능성에 불과해...그리고 그 엔지니어 부대장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어.


리스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손을 내밀었다.


리스트

카레니나는 달 위에서 그린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린스도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은데… 심지어 그 대행자와도 사석에서 교감을 나누었어. 우리가 그린스의 권력을 빼앗았기 때문에 그녀가 연기한 연극이 아닌 줄 누가 알겠나….


리스트

마침 우리가 의회에 의제안을 내민 순간 폭발한 퍼니싱...정말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지 않아?


리스트의 말에는 다소 주관적인 선동의 목적이 다분하다는 것은 노르만 역시 알고 있지만 그의 견해에도 일정한 도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리스트

그리고 월면기지에 퍼니싱 바이러스가 있는 흔적은 이 몇 년 동안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이전에 영점 에너지 원자로가 가동된 시점에서도 바이러스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는데… 게다가 검사는 그 카레니나가 직접 담당했다.


노르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월면기지에서 엄청난 사고가 있었는데… 그것도 퍼니싱 바이러스를 유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혹시나….


리스트

그것도 추측일 뿐, 정신나간 캐논 박사 하나만이 살아남았었다…. 그것이 퍼니싱의 유출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지만, 당시의 진실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권한이 높은 그린스가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리스트는 과거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


노르만

하지만 어쨌든, 내 여동생은 아직 달 위에 있어. 우린 그 위험을 무릅쓸 수 없...


리스트

착각하지 마...


리스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르만의 말을 끊었다.


리스트

그녀는 더 이상 너의 여동생이 아니며, 너의 여동생은 빅토리아 하나뿐이다. 네가 지금 너의 가족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의 결과를 똑똑히 분간해라.


리스트는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다가갔다.


리스트

의회의 결정을 차마 못 보겠다면 여기 남아라, 나 혼자… 모든 걸 해결할테니까.


노르만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차가운 벽을 향해 주먹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노르만

개자식...




휴회가 끝나고, 의회 홀에는 이미 현장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도착해 있었다. 아까 카레니나가 남긴 녹취록과 레포트를 바탕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토론하고 있었다.


하산은 한 바퀴를 둘러보고 다시 회의 진행 자리에 섰고, 가볍게 기침을 한 뒤 장내의 요란스러운 기척은 점점 누그러졌지만, 서로 다른 의견의 논쟁이 그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하산

그럼 이제 세계 정부 정례회의는 관련 회의 규칙에 따라 임시로 긴급 총회로 바뀌어서 월면기지의 돌발 위기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산

일단 리스트 의원님, 어떤 해명이라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산은 리스트를 향해 해명을 시작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트

엔지니어 부대 카레니나 대장의 전송 보고에 따르면 퍼니싱 바이러스가 어떻게 발생하여 영점 에너지 엔진까지 폭주할 수 있었는지 그녀도 우리도 알 수 없습니다.


리스트

그리고 현재 통신이 완전히 차단돼 있어서 카레니나에게 현장 상황을 더 물어볼 방법도 없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이 다음의 상황을 충분히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리스트의 말은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목적은 매우 명확했다. 이 위급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과연 공중정원이 내릴 최고의 선택은 무엇인가를 충분히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깨닫게 할 것이다.


리스트

다만 한 가지, 의원님들께서는 영점 에너지 엔진이 과거 최고의 과학자들을 모아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만들어낸 환상적인 기계라는 점을 잘 숙지하시고 인류를 희망의 저편으로 인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리스트

그리고 지금, 이 미래를 건드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과연 우리가 이대로 망가뜨려야 할까요?


리스트

우리는 과거의 모든 인류가 바친 희생을 짓밟아야 합니까?


리스트

미래의 모든 인류가 희망으로 통할 권리를 박탈해야 합니까?


리스트의 질문은 모든 의원들로 하여금 인간 전체를 저울 위에 올려놓지 않을 수 없게 했고, 그동안 영점 에너지 엔진 파괴에 찬성했던 의원들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리스트

그래서 어지됐건 저는 영점 에너지 엔진 파괴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바이며, 그걸 전제로 우리가 후속 논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하산과 니콜라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들의 표정에서 별다른 이질감은 보이지 않았으며, 원래 주전파였던 이들은 영점 에너지 엔진 파괴를 주장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영점 에너지 엔진이 가져올 수 있는 이익에 비해 인간이 인내해야 할 대가는...이번의 각축에서 이미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

죄송하지만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니, '우리'가 늦었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군요.



다소 늙어 보이지만 여전히 박력이 넘치는 남자가 그다지 느리지 않은 발걸음으로 회의장에 들어섰고, 그의 뒤를 따라 두 젊은이가 걸어왔다.


리스트

(그린스...역시 이렇게 쉽게 포기할 인간은 아니었지.)


리스트는 그린스가 직접 와서 판을 휘두를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그가 미리 준비해온 감사원 부하들을 향해 눈짓을 했다.


감사원 소속 의원

그린스 씨… 제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신은 그동안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을 불법 구금한 사안 때문에 내부 조사를 받아야 하므로 세계 정부의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하산 의장님, 건의드리건대….


그린스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에 대한 '감금'이 부당하게 이뤄졌다는 의혹을 받고 있어 내사를 받아야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공중정원 패거리들에게 잡힐 어떤 꼬투리도 걸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고, 책임을 지려고 해도 그것이 지금 당장 이를 필요가 없다면, 이들은 리스트가 자신의 수를 잃고 미리 쳐놓은 올가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린스

죄송하지만 뭔가 잘못 알고 계시나 보군요. 제가 회의에 참석할 생각은 없고, 기껏해야 아직 회의장에 와본 적이 없는 이 두 분의 젊은이에게 길을 안내해 줬을 뿐입니다.


그리고 리스트는 그린스 뒤에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그 중 한 명은 한양 소대 지휘관 시몬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그린스

제가 지금 세계정부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허가받지 못했고, 과거에도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지만, 군부의 수석고문으로 조그만 추천권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린스는 하산이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깊은 뜻이 담긴 눈으로 하산을 바라보았다.


하산

물론 더 많은 신뢰를 얻은 젊은이들이 추천을 받아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도 여러분이 원하시는 바일 것입니다.


그린스

(이 빌어먹을 늙은 여우같으니...)


그린스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그가 추천한 자가 다른 어떤 사람이라면 하산에게 많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원래는 이 추천권을 어느 날 써야 할 카드로서 소장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한 판 뒤집기를 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인지, 이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을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됐다.


그린스

제가 이번 긴급회의에 이분들을 추천하게 된 것은 최전선의 지휘관으로서 수많은 전투를 겪어왔고 현장 판단에 있어서 어쩌면 그분들이 전문가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린스

더욱이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은 여러 가지 막중한 임무에 참여한 '영웅'이기에 이 지휘관의 의견은 여러분에게 매우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린스

그동안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과 저 사이에 작은 오해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서로 교류하는 사이에 강한 우정이 싹트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거든요….


지휘관

...


그린스

어이쿠...제가 말이 너무 길었군요. 그럼 저는 그만 떠나겠습니다. 나머지는 당신들에게 맡기죠.


회의장을 떠나기 전, 그린스는 돌아서서 모두에게 등을 돌린 뒤 다시 한 번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린스

제발 부디 날 실망시키지 마...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



시몬

저기, 수석님...이런 회의는 처음이에요...


지휘관

나도 마찬가지야...


시몬

왜, 왠지 어지러워 토하고 싶어요...


감염체이건... 사람의 시선이건, 서로 일렬로 늘어선 인간의 의문스런 눈이건, 수많은 시선에 집중되는 느낌은 정말 익숙하지 않다.


지휘관

그냥 다 감염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는걸.


시몬

그럼 그냥 기절해버릴 것 같아요...


시몬은 어쨌든 숨가쁜 미소를 지었다...정말 '고맙게도' 그 쿠로노의 인간때문에 퍼니싱에 맞서 싸워야 할 두 군인이 이 낯선 전장 위에 세워진 것이다.



몇 시간 전 생명의 별의 치료실에 그 그린스라는 놈이 들이닥쳤는데, 닥터 히포크라테스 말고는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그를 감히 막을 사람이 없었다.


이런 엉뚱한 행동을 한 사람이 앞서 니콜라 사령관이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던 쿠로노의 관료라고 잘못 봤을 리 없다.



그린스

어이, 네가 바로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야?



히포크라테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 환자입니다만...무슨 장난인진 모르겠지만 제가 당신의 전두엽을 뭉개버리길 바라는 거죠?


지휘관

의사선생님, 잠시 단 둘이 있게 해주세요.


히포크라테스

그래...하지만 최대 15분이야. 부상이 악화되면 책임지지 않을 거야.


의사가 간 뒤 그린스는 카레니나가 달에서 한 일과 함께 의회의 현황을 밝혔다. 그의 말 가운데 진실과 거짓이 어느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카레니나와 루나의 정보만큼은 신빙성이 높았다.


지휘관

영점 에너지 엔진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린스

카렌 양의 보고서대로 월면기지의 사람만 죽는 게 아니라 엔진이 만들어내는 중력파에 의해 바위 덩어리가 지구에 부딪힐 수도 있지… 그때는 한두 명, 수십 명이 죽는 문제가 아니게 될 거야.


그린스

리스트라는 놈의 설계대로라면 지금쯤 아무도 카렌 양을 위한 발언을 할 수 없을 거고, 설령 그녀가 정말 영점 에너지 엔진을 부수고 돌아온다고 해도 무고한 죄를 뒤집어 쓸 수 있어.


만약 그 리스트라는 남자가 이것을 붙들고 늘어져 소란을 피운다면, 허락 없이 영점 에너지 엔진을 무단으로 파괴한 카레니나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빠져나올 방법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의회에 대한 불신이 군부와 의회 사이의 중대한 갈등으로 번질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시몬

방금 회의 내용을 계속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마치 이 그린스...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현장의 여론은 기본적으로 리스트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요.


그래서 아까 전에 시몬이 '카레니나'라는 구조체를 아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한두 가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린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나를 막아내기 위해 키웠던 이 '영웅'의 지위가 오히려 지금 내가 유일하게 빌릴 수 있는 힘이 되었지.


지휘관

미안하지만 제가 쿠로노를 도울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린스는 그런 대답을 받을 줄 알았다는 듯 별 근심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린스

넌 거절하지 않을 거야...넌 카렌 양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의 위기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지금 의회라는 전장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바로 너뿐이라고.


지휘관

카레니나와 그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습니까?


이 사람은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것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처럼 궁지에 몰린 사람이라도 그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되물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린스

허허, 정말 조심스런 양반이구만~ 사실 난 카레니나쪽 사람들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아. 카레니나가 그 거대한, 오메가 무기를 완성했으니 나한테는 더 이상 상관없는 일이거든...


그린스

하지만 내가 너에게 설명했듯이, 그 루나라는 대행자가 인류의 미래 진화를 밝혀줄 열쇠라고 굳게 믿고 있고,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그 황량한 위성 위에 그대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고 뼈저리게 생각하고 있지.


지휘관

이것이 당신이 믿는 이론입니까?


그린스

아니, 이건 직감이야…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일일히 계산하기보다 오히려 단순한 직감이 조금 더 믿음직스러울 때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지.


그린스

나는 그것이 더 큰 이상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희생이라고 믿고 있고, 카레니나뿐 아니라 내 삶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 해답을 찾아야 해.


그린스

하지만 넌 달라...너는 나보다 훨씬 거대한 욕심을 품고 있어...아무리 어려운 사정에 처하더라도 모두를 구원할 생각을 먼저 하지.


그린스

처음에는 그런 어리석은 친절에 너희들이 조만간 죽임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매번 언제나 네가 내 뺨따구를 후려 갈기는 것 같아. 정말이지....


지휘관

그런가요?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린스는 병상 의자에서 일어나 이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린스

내가 달에서 카렌 양에게 말했듯이 승격자도 쿠로노도 아닌...나약함만이 인류의 진정한 적이야.


그린스

너와 내가 너무 약하다면, 잠시 힘을 합치지 말란 법도 없지 않겠나?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해 승기를 만드는 것…. 설령 적이라도 필요할 때 반드시 활용해야 하는 것이 전술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다.


지휘관

(손을 내밀다)


그린스는 거리낌 없이 웃으며 여전히 경계가 서려 있는 이쪽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린스

자, '영웅'... 가서 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버젓한 예쁜 말뿐 아니라 모든 것을 찌를 수 있는 날카로운 칼이라는 걸 보여 주자고.



하산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몸은 정말 괜찮은가?


지휘관

하산 의장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몬에게 기대지 않으면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몸에 난 상처가 아프지만, 어쩌면 시의적절하게도 통증이 머리를 더욱 또렷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산

이렇게 된 김에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에게 우선 발언권을 줘도 괜찮겠습니까, 리스트 의원?


리스트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주도권을 내줬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뻔하다.


리스트

저도 이번 사건에 대한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의 의견을 꼭 듣고 싶었습니다.


어깨를 짚었던 시몬의 손을 살며시 풀고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갔다.


바로 단상의 마지막 계단을 올라갔을 때, 갑자기 머리 상처에서 심한 통증이 전해져 두 손으로 단상을 붙잡고 서야 했다.


시몬

저기...수석님!


시몬에게 도와주지 말라고 얼른 알렸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만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너무 늦은 듯, 늑대 같은 그 눈길은 이미 먹잇감의 허약한 자태를 포착하고 있었다.


리스트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 억지로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록 이곳이 전쟁터는 아니더라도, 결코 무리를 해야되는 장소는 아닙니다.


침착함을 가장하여 이쪽을 완전히 격파할 작정이라는 자신감을 간파했다. 결국 그의 눈에는 어쩌면 많은 전투를 겪어본 지휘관 두 사람조차도 자신만의 전쟁터에선 풋내기 신병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에 일부 의원들은 그렇지 않아도 회의 경험이 전혀 없는 한낯 지휘관이 발언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벌써부터 짜증을 내는 것 같았다.


그동안의 포석도, 초반의 표현도, 여전히 우위를 점하며 무엇을 해도 그의 논리를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우세를 점해 적에게 얕보여 승산이 있다고 느꼈을 때, 비로소 약간의 허점이 생긴다.


지휘관

걱정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그런데 억지를 부리는 건 리스트 의원님 아닙니까?


리스트

저라고요...?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리스트가 계속 피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두에게 좀 더 명확히 해야 할 것 같다...


지휘관

(1)(공중 정원의 안전) ← 선택

(2)(영점 에너지의 안전)

(3)(월면기지의 안전)


(아니...리스트가 신경 쓰는 건 그런 게 아니니까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자)


지휘관

(월면기지의 안전)


외래인에게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고 나만의 진지도 없다. 이것은 취약한 상대방의 지역을 먼저 공략해 치명적이지는 못해도 자신의 성에서 혼전의 늪으로 끌어들이는 작전이다.


'앞서 아틀란티스의 데이터를 토대로 월면기지의 연구성과가 영점 에너지 원자로의 재가동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안전성이 보장될 수 있을까요?'


'정말 광대한 우주를 항해할 때가 되면 이번과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지구에 의지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리스트

이것은 부질없는 걱정입니다. 영점 에너지 원자로의 가동은 일찍이 이론과 실습을 통해 이중으로 검증받았고 작동 과정에서도 어떠한 퍼니싱 바이러스도 진공 챔버에서 생성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네, 아마 그때 검사 결과는 카레니나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으리라 생각하는데, 이전 회의에서 리스트 의원님도 언급하셨다시피 그녀는 지금 영점 에너지 분야에 있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계획입니다.'


리스트

물론 이 모든 실험 데이터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이 안건을 발의한 근거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녀가 현장에서 내린 판단을 믿지 않는 겁니까?'


'우리가 여기서 담론을 나누고 있을 때, 그녀들은…. 죽음과 재난과 싸우고 있습니다!'


리스트는 그윽한 두 눈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며 다음에는 어떻게 주도권을 빼앗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리스트

보고서에 따르더라도 카레니나가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했다고 해서 이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고,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리스트

만일 양쪽 모두 리스크가 있고 꼭 선택해야 한다면, 영점 에너지 엔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달 위에 떨어진 그들과 지상의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도 있는 일일지라도요?'


리스트

이것은 '필요한 희생'입니다...지금 이 유일한 희망을 위해서라면 모든 희생이 값진 것이라 생각하며, 아무런 희생 없이 살아갈 권리를 얻기에는 오늘날의 세상이 그토록 순진하지 않습니다.


리스트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으로서 잘 아시겠지만… 그 신형 특화 기체의 사용자는 바로 당신의 소대원, 그 리브라는 구조체입니다.


리스트는 모든 의원을 향해 주먹을 반쯤 들고 차분하고 단호한 말투로 그의 말을 더욱 설득력 있게 보이게 했다.


리스트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그 희생이 없으면 인류를 위한 미래는 영원히 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유일한 희망은 바로 영점 에너지 엔진입니다!


단 하나의 희망을 잡기 위해서는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한다… 그 말의 정확성을 의심한 자는 없었으나, 무엇이 진정한 희망이란 말인가?


지휘관

(1)(미래로 향하는 영점 에너지 엔진)

(2)(최후의 에덴, 공중정원)

(3)(희망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 선택



'진정한 희망은 새로운 특화 기체라든가, 영점 에너지 엔진 그 자체가 아니라...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잃어버린 집을 우리는 다시 탈환할 수 있고, 쓰라린 실패는 다시 범하지 않는 경험을 총결산할 수 있으며, 절망적으로 보이는 미래도 함께 손잡고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인류는 그렇게 강하지 않지만, 과거가 남긴 희망을 품고 전진하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신형 특화 기체는 바로 그 사람들과 리브가 함께 만들어낸 새로운 희망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만들 수 있는 영점 에너지 엔진보다 월면기지에 있는 이 희망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믿고 싶습니다.'


회의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토론을 시작하며 그 말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산은 이쪽을 향해 손사래를 친 뒤 의회 홀 중앙으로 다가가 모든 시민 대표와 마주했다.


하산

토론은 이쯤이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카레니나와 월면기지의 위기에 대하여 의회에서 바로 결정을 내려야 될 것 같습니다.


하산

사건 처리의 최종 결론은… 전체 인류에게 맡겨봅시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지금의 인류 전체가 선택한 '미래'가 될 테니, 모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신만의 결정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시민 전체를 대표하는 별빛이 홀에서 반짝였고, 마지막으로 게슈탈트의 기계 합성음이 들려왔다.


게슈탈트

결의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