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효계한 19-15 : 각자의 길



아합

어때? 메시지를 보냈지만 회답이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아...공중정원의 결정을 기다려야 되나?



테디베어

고민만 하고 있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어요...만약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하기로 결정이 났다면 즉각 출발해야 합니다.


테디베어는 몸을 일으켜 단말기를 접고 출발하려 했지만 카레니나는 손을 내저으며 가로막았다.



카레니나

너와 엔지니어 부대 사람들은 부상자를 데리고 방호복을 챙긴 다음에 월면기지의 중력파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을 찾아 통신이 복구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중정원에 구조요청 메시지를 보내.


카레니나는 해머를 등에 업고 자신 있게 웃었다.


카레니나

참, 영점 에너지 엔진 파괴는 나 하나면 돼. 너희들이 있으면 거추장스러울 뿐이라고.


테디베어는 카레니나를 쳐다보고 잠시 침묵한 뒤 한숨을 쉬었다.


테디베어

맞는 말이야, 그리고 우리가 너를 데리고 죽을 필요도 없잖아. 만약 천국에 갈 때 옆에 줄 서 있는 사람이 너같은 놈이라면 도중에 말다툼을 해야 할지도 몰라.


카레니나

쳇...그럼 빨리 뺑이쳐.


테디베어

갈게. 아합 아저씨...당신쪽 사람들도 함께 데려오세요.


아합

어...?


테디베어가 정말 머리도 돌리지 않고 떠나는 것을 보며 아합은 3초쯤 양옆에서 머뭇거리다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테디베어를 따라갔다.


카레니나

좋아...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하기 전에 꼭 가봐야할 곳이 있어!


카레니나는 무기를 두 손에 꼭 쥔 채 스스로 자신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출발했다.



전투 개시




경고! 경고!


정상치 농도를 초과한 퍼니싱 바이러스가 검출되었습니다


비상 대책 실행, 모든 인원은 즉시 지정 위치로 복귀하여 도착 신고를 하십시오



카레니나

오히려 빨리 돌아가고 싶은 걸.


카레니나

하지만 이곳도 좀 시끌벅적하네.



카레니나

혹시 누가 와서 이런 놈들 처리할 방법이 뭔지 알려줄 수 없나? 없으면 내 맘대로 한다.



카레니나

이게 맞는 방법은 아니야. 한 번에 처리해야 해...


카레니나

맞아! 그게 있었지! 드론, 시설물 중력 시스템에 대한 접근 허가, 즉시 실행.


카레니나

거의 다 왔어! 드론! 서둘러!



카레니나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급하니까 다 함께 가볼까!




카레니나

휴...전부 처리했다.


카레니나

이제 구조체 실험실로 직진해 볼까.




전투 종료







공효계한 19-16 : 인류의 적


부풀어오른 인류의 희망을, 넌 정말 파괴할 용기가 있어? 인류의 적이 되더라도, 넌 인류를 보호해야 하는 걸까?



루나라는 이름의 대행자는 캄캄한 꿈에 웅크리고 있었다ㅡㅡ또한 이곳은 꿈도 아닌, 이미 희미해진 그녀의 의식의 바다의 경계일 수도 있다.


이곳에는 과거 승격 네트워크의 잡음조차 완전히 들리지 않아, 자신이 내는 것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루나

살아있어...의식이 아직 존재해.


루나는 승격네트워크에게 거절당한 자신이 왜 여전히 대행자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승격 네트워크는 루나에 대한 처분을 멈춘 것 같았다ㅡㅡ인간의 감정에 비유하자면 '승격 네트워크'는 뭔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루나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이미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고, 아무도 그 무례한 놈처럼 이 고요한 세상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다.



루시아

...


루나

언니...


자신의 환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루나는 참지 못하고 기억 속의 언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도움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려는 것도 아니다. 루나는 그녀를 다시 한 번 만져보고 싶은 마음뿐, 언니의 따뜻함을 느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루시아

...!


환상 속의 언니는 입을 다물며 루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말은 마치 입을 열자마자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고, 끝내 루나의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


루나는 다급하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언니를 보고,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인지 읽어내려 했다.


루나

'루....루나...'


루나

'깨...깨어나...'



루시아

루나...어서 깨어나!


루시아의 다급한 외침에 따라 캄캄했던 꿈자리가 물밀듯 물러가고 언니의 모습이 일그러져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루나를 끌어당겨 중앙에 서 있는 언니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듯했다. 두 손을 뻗어 언니와의 거리를 더 좁혀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깨어 있는 세상에는 이미 자신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 그녀는 마치 배회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처럼, 뒷길은 사라졌고,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오직 지금, 그녀는 약간의 온기만을 얻을 수 있다.


루나

왜...왜 나를 이 꿈속에서 죽게 하지 않는거야. 여기가 나의 종착지라면...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루나는 파탄 직전의 꿈속에서 다시 눈을 감았다. 다음번에 눈을 떴을 때 그 무궁무진하고 창백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숱한 반전을 겪은 그녀의 생각과 달리 이번에는 한결같은 고요함과 먼지 냄새가 아니라 심한 통증과 귀가 따가운 사이렌 소리가 그녀를 맞이했다.


루나

어...!


루나는 피와 살이 벗겨지는 듯한 아픔을 참으며 눈을 떴고, 여전히 그 익숙한 구조체 실험실에 있지만 주변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구속 장치의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손목을 비틀고 나서야, 끊임없이 붉은 퍼니싱이 자신의 몸에서 벗겨져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루나

이것이 전에 인류가 말하던 오메가 무기구나...



루나의 등뒤에 있는 거대한 오메가 무기가 어느새 선홍빛을 발하고 있었다ㅡㅡ그것은 그 자체의 색깔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에게서 흡수되는 퍼니싱 바이러스 특유의 붉은 빛이다.


루나의 전투태세를 구성하는 퍼니싱 이중합포식 외피는 이제 다 사라져버렸고, 이제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퍼니싱이었다.


대행자의 권능을 잃었지만 기체는 열화되지 않았고 루나의 몸속에도 여전히 다량의 퍼니싱 바이러스가 존재하지만, 한정된 퍼니싱 바이러스는 무한한 에너지를 가진 오메가 무기의 침식을 막아낼 수 없다.


루나

난...이대로 그냥 죽는 걸까...


루나는 대행자가 된 이후 지금까지 죽음에 이토록 가까이 접근한 적이 없고, 포식체에게 삼켜져도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었다. 이것이 정녕 승격자라는 이름에 맞설 수 있는 최강의 무기였던 걸까?


어쩌면…인류의 적으로서 인간을 죽이거나 혹은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도 승격자로서의 숙명이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문밖에서 울리더니, 곧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약간 가느다란 구조체가 구조체 실험실의 문을 박차고 지나갔는데, 그녀와 함께 '진입'한 것은 이미 찌꺼기로 변한 감염체였다.



루나

너였구나...


카레니나는 땅바닥에서 몸을 뒤척이다가 몸을 일으켜 먼지를 털고 나서야 비로소 여유롭게 몸을 돌려 루나를 마주했다.


루나

넌 이미 달을 떠난 거 아니었어?....아니면 지금 이 혼란스러운 장면은 너의 걸작이었던 거야?


카레니나

설명할 수 없는 퍼니싱 감염으로 인해 영점 에너지 원자로와 엔진까지 번져서 이 기지가 엉망이 될 수 있었지.


루나

그렇구나...


루나가 힘을 모아보니 깨끗하기 짝이 없는 달에서 번지고 있던 퍼니싱 바이러스가 끌리는 것을 발견했지만, 현재 그녀의 능력으로 모일 수 있는 퍼니싱 바이러스는 상당히 미약하고 곧 오메가 무기에 의해 소멸되었다.


카레니나

원래는 이 모든 것이 너와 관련되어 있는 줄 알아서 이 모든 것을 처리하기 전에 널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없는 것 같아.


카레니나는 루나의 상황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오메가 무기의 역할은 루나를 극도로 약하게 만든지 오래다.


루나

흥, 확실히...얼마 안 있으면 이 몸은 퍼니싱 고갈과 함께 죽게 될 거야. 네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이.


카레니나는 몇 발자국 왔다갔다하며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루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카레니나

나는 이미 이곳의 상황을 공중 정원에 보고했고, 곧 그들은 수송기를 보내 구조할 거야. 하지만 이전에 나는 반드시 가서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하고, 중력파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해.


카레니나

그렇다고 해도 넘쳐흐르는 영점 에너지는 축적된 중력파를 한꺼번에 방출할 수도 있어…. 우리가 빠져나갈 시간은 있을지 몰라도 중력파에 의해 월면붕괴와 마찬가지로 지구에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어.


카레니나는 심호흡을 하고 루나를 바라보았다.


카레니나

내가 계산해 본 결과, 만약 너가 대행자의 힘을 다시 얻을 수 있다면, 끌어들인 퍼니싱 바이러스는 오메가 무기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양의 영점 에너지를 소모시키게 만들 거고, 결국에는 중력파의 파괴력을 감쇄시킬 수 있을 거야.


루나는 황당무계한 말을 들은 듯, 황당한 눈빛으로 카레니나를 바라보았다.


루나

그러니까 네 말은...내 힘을 빌리겠다는 거야?


카레니나

왜...이상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빌릴 수 있는 모든 힘을 빌려서 전부 써봐야 한다고.


루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ㅡㅡ그 언니의 지휘관도 그랬던 것처럼 미련하게 적으로서의 힘을 빌리려고 한다.


카레니나

어이, 너도 이대로 죽고 싶지 않잖아...그렇다면...


그러나 루나는 고개를 저으며 카레니나를 중단시켰다.


루나

난 이미 승격 네트워크와 연결할 자격을 잃어 대행자의 힘을 사용할 방법이 전혀 없어. 그리고 가능하다고 해도, 내가 살기 위해 널 도울 생각은 없어.


그녀에게 있어 루나라는 존재가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두 언니 모두 더 이상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루나

그리고 난 너에게 공중정원에서의 구원에 희망을 걸지 말라고 충고할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에게서 버림받았을 거야...


루나

그들에게 달과 지구라는 소수자의 목숨보다 미래의 희망을 의미하는 영점 에너지 엔진을 보호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일 테니까.


그 아합이라는 인간이 무심코 언급했듯이 쿠로노는 이 엔진과 영점 에너지 원자로를 공중 정원에 태워 다시 성간 항해를 시도하려는 것 같았다.


영점 에너지 원자로, 구조체 개조 기술, 오메가 무기, 신형 특화기체…. 인간이 원하는 조물은 한편으로는 인류의 미래를 개척해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는 또한 그들에게 숨통을 조여 주었다.


루나

만약 너가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넌 인류 전체의 적이 될 거야...


루나는 빈정거림도 분노도 없이 냉정하게 사실만 진술하고 있었다.


루나

인류의 그 부풀어오른 희망을, 넌 정말 파괴할 용기가 있어?





공효계한 19-17 : 뒤엉킨 마음


눈빛조차 마주치지 않고, 쌍방은 서로 등을 돌린 채, 각자만의 전쟁터로 나섰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한 구석, 월면기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공중정원으로부터의 비행선 한 척이 무사히 월면 위로 내려앉았다.


선실 문이 열리고 힘찬 그림자가 선실에서 월면 위로 뛰어내리자, 극히 미세한 달 먼지가 살며시 피어올라 그만의 발자국을 남겼다.



롤랑

참…레드카펫을 길게 깔지 않았어도 모름지기 대스타 롤랑의 등장을 반겨줄 팬들이 두 세명쯤은 있어야지~


이곳은 사람은커녕 토끼 한 마리도 없을 정도로 고요하고 황폐한 달이다.


롤랑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멀리서 격렬한 폭발 불빛이 눈에 들어왔고, 구조체 소체의 팔 하나가 폭발한 곳에서 롤랑의 얼굴을 향해 고속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롤랑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가볍게 옆구리만 살짝 비켜서 이 팔을 피했다.


롤랑

이게 환영 인사인가...좀 과한 거 아냐?


역시 폭발로 근처로 날아온 구조체 소체가 땅에서 일그러져있다가 일어나 롤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때에야 그는 폭발로 인해 이 박살난 소체들이 퍼니싱에 의해 일찍 감염되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감염체로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롤랑

나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나보네…. 아니면 루나 양이….


롤랑은 느릿느릿 전진하면서, 산탄총의 총구를 감염체 한 쪽의 머리 앞에 살짝 밀어넣고, 그대로 머리의 3분의 2를 사라지게 했다.


총알의 거대한 운동 에너지는 심지어는 아주 낮은 중력에서조차 그 몸뚱이를 직접 날려버려, 일어서던 여러 감염체와 부딪쳤다.


롤랑

대체 누가 나의 모처럼의 출연 분량을 뺏어간건지...궁금하네.


롤랑은 팔에 안긴 저장탱크를 꺼내 불의 폭발을 통해 내부에 있는 줄기세포를 관찰했는데, 저중력 환경에서도 여전히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롤랑

하지만 이왕 역할을 맡았으면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게 배우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직업 소명이지.


롤랑은 눈을 감고 여전히 자신과 미약한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있는 루나를 감지했다… 거의 흐릿하게 보이던 실크 라인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역시 루나는 이 달 위에 있다.


롤랑

그럼 루나 양을 찾으면 운명과 선택에 모든 걸 맡기자고.


롤랑은 기지개를 켜고 감지된 루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롤랑

The show must go on....



루나에게 실패를 권유한 카레니나는 동력실험실로 돌아갔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여전히 루나의 마지막 말이었다.


'인류의 그 부풀어오른 희망을, 넌 정말 파괴할 용기가 있어?'


그것이 카레니나 자신과만 맞닿아 있다면 가장 유리한 방안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지만, 그 선택은 인류 전체의 몫이다.


카레니나

빌어먹을...


혼자 싸우고, 혼자 다치고, 혼자 투쟁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어울렸던 것이 아니었을까?


???

야, 너 왜 멍하니 있어...


카레니나는 어깨에 부딪히고 나서야 테디베어가 옆에 서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월면기지를 떠나지 않았었나?


카레니나

너 왜 여기 있어??



테디베어

뭔 귀신보듯이 쳐다보고 있어. 우리가 살아있어서 그래?...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거야.



아합

쓰읍...테디베어 양...이 부분의 시스템 본체가 퍼니싱에 침식되서 죽기 일보 직전인데 어떻게 하면 비껴갈 수 있을까?


아합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머리를 긁적이며 휴대용 단말기에 생긴 문제점을 물었다.


카레니나

왜 아합 아저씨도 돌아온 거야???


테디베어

우리는 두 그룹으로 사람들을 나눴어. 일부 비기술자들을 철수시켜 부상자들을 보호하면서 월면기지에서 떨어진 곳에 남아 구조를 기다리고 있고, 우리 기술자들은 급히 이곳으로 돌아와 계속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카레니나

【삐ㅡㅡㅡ!!!】 뭔 일을 쳐 해!!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할 사람은 나 하나면 충분하다고!


화가 난 카레니나를 보고 테디베어는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테디베어

흐흐, 자뻑하지마...우리가 돌아올 수 있던 건 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런 거라고.



기계 엔지니어

맞아요! 부대장님 말대로 우리가 그냥 도망가고 대장님이 부숴버리면 대장님이 영점 에너지 엔진을 깨뜨리도록 방조한 놈이 돼 문책당하는 거니까 아무리 위험해도 좀 괜찮은 물건을 골라서 비장의 카드로 써야하지 않겠습니까?


카레니나

너...


기계 엔지니어

그리고 카레니나 대장님, 저는 새로 들어온 신참이 아니에요. 엔지니어 부대에 입대한 지 2년...아니 2년 3개월입니다.


엔지니어 부대의 연구원들은 신속하게 보고를 마친 뒤 계속 말을 끊으려던 카레니나의 물음을 재빨리 차단하고 다시 작업대열에 복귀했다.


테디베어

우리는 이 기지에서 영점 에너지 엔진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여 향후 영점 에너지 엔진의 복원과 개선에 최선을 다할 거야.


카레니나

복원과 개선…? 이거 진짜 할 수 있는 거야??


테디베어

운과 속도에 달렸어. 예전에는 영점 에너지 엔진만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관련 정보를 조사하려는 쿠로노에게 차단당했었거든.


테디베어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할 필요 없어. 어차피 이 기지 다 터질 것 같은데.


카레니나가 테디베어의 단말기를 건네받아 살펴본 결과 공개된 연구자료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극비 내용이었고, 여기에 엔진이 작동하고 폭주하는 현장에서 관측한 수치까지 더하면….


카레니나

새로운 영점 에너지 엔진을 만든다는 게 불가능은 아닐지도 몰라...


카레니나는 야합을 바라보았다. 쿠로노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테디베어를 도와줄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아합

에휴...우주 쓰레기가 될까봐 두렵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쿠로노 내부의 제재니까 최소한 뭐라도 건져서 용서의 기초로 삼아야 해!


아합

특히 베살리 양이 연구담당 주사가 된 이후에는...이것저것 따져보면 그냥 돌아갈 수 없다고...


쿠로노 연구원

아합 주임님, 그들과 더 이상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마시죠.


카레니나는 현장에 남아 있는 다른 쿠로노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단지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테디베어

저기, 빨리 공구나 정리해 봐. 동력연구실에서 할 일은 거의 다 마무리됐어. 이런 수치보다는 우리는 영점 원자로 근처로 가서 에너지 출력과 변환을 기록해야 해.


테디베어

거기 있는 기구는 이미 다 감염되어서...그래서 아마 우리끼리 가서 기록해야 할 것 같아.


각 기술자들

알겠습니다!


테디베어는 카레니나 쪽을 바라보며, 연약해 보이는 오른손이 주먹이 되어 카레니나의 왼쪽 어깨에 가볍게 주먹을 날렸다.


테디베어

이 빡대가리야, 영점 에너지 엔진을 깨먹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괴로워 하는 것 같은데...주눅이 든 꼴을 보니 참 한심스럽다고.


테디베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꼭 필요한 일을 해내더라도...다른 일은 우리에게 맡겨. 네 곁에는 기꺼이 함께 싸워 줄 동료도 있잖아.


카레니나

너희...


멀리서 폭발하는 굉음이 들려와, 땅바닥까지 진동하기 시작했다.


테디베어

시간이 없어…우리는 서둘러 출발해야 해. 넌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하고 우리는 과학의 불씨를 훔쳐올 책임을 질게!



테디베어는 웃음을 거두고 서로 다른 조직에서 온, 서로 다른 신념을 갖고 있지만 서로를 향해 서 있는 기술자들에게 다가갔다.


카레니나는 아직 어리둥절하지만 무기를 들고 등을 돌리며 쉽사리 알아차릴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테디베어

기억해, 죽지 마. 우리가 한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면 지옥에 가서도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합

곰돌이 아가씨의 말이 왜 이렇게 불길한건지, 꼭 성공할거야, 꼭 성공할거야...


카레니나

흥, 두고봐!


눈빛조차 마주치지 않고, 쌍방은 서로 등을 돌린 채, 각자만의 전쟁터로 나섰다.



롤랑은 거대한 위력에 부딪혀 기괴하게 뒤틀린 대문을 넘어 구조체 실험실 안으로 들어갔다.


실험실 한복판에는 그가 찾고 있던 하얀 소녀가 있었다.


롤랑

루나 양...


루나

...


이름을 조용히 불렀지만 아무런 대꾸도 받지 못한 롤랑은 루나가 대행자로서 자신과 연결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ㅡㅡ이는 루나라는 대행자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몸에 있는 퍼니싱은 저 멀리 둥근 고리 모양의 장치에 끊임없이 흡수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롤랑

이게 바로 오메가 무기인가보네... 파괴하면 갇혀있는 루나 양을 구해낼 수 있지 않을까?


롤랑은 손에 들고 있던 산탄총을 들어, 눈앞의 또 다른 무기를 겨누었다.


롤랑

하지만 어쩌면... 그녀의 죽음을 재촉할 수도 있어...


롤랑은 웃으며 산탄총을 거두었다. 여기서 루나를 구출해낸다고 해도 그녀의 목숨을 잠시 동안 이어갈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롤랑

아무도 너만의 대본을 바꿀 수 없어. 그 몫은 오직 루나 자신뿐이야…. 너의 결말이 정말 이 추운 달 위에 조용히 지는 것이라면 그 또한 운명일지도 몰라.


롤랑

하지만 내가 직접 온 이상, 너만의 결말을 바꾸고 다시 한 번 여정을 밟았으면 좋겠는데…. 선물을 부탁한 사람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롤랑은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보호하던 메모리 셀을 꺼내 루나 앞에 있는 콘솔에 꽂았는데, 그 데이터는 루나의 의식의 바다와 연결되었다. 쿠로노의 기술은 비록 대행자의 의식의 바다에 침입하지는 못했지만 메시지는 보낼 수 있었다.


롤랑이 허리에 차고 있던 탱크가 심한 진동을 일으켰고, 안에 있던 내용물이 탱크에 계속 부딪히는 것 같았다.


롤랑

훗, 하마터면 본 네거트의 장난감을 잊을 뻔했네...하지만 이제 보니 설령 루나 양을 죽여야 한다고 할지라도 필요없을 것 같아.


롤랑

하지만 겉치레 정도는 해야 하니까, 너가 바라던 대로 달의 모든 것을 삼켜보렴.


롤랑이 저장탱크를 열자 안에서 용솟음치는 이형 생물이 오메가 무기에 연결된 에너지 공급 케이블을 향해 쏜살같이 올라가 영점 에너지 특유의 푸른 빛을 따라 벽의 갈라진 틈으로 파고들었다.


롤랑

그럼 시청자 여러분, 카메오 롤랑의 출연분은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롤랑은 웃음을 거두고 마지막으로 루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롤랑

루나 양...훗날 다시 눈을 뜨게 된다면, 그 미래에는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기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