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대방이 스스로 계획에 만전을 기했다고 여길 때, 그들의 통제를 벗어난 변수를 넣어주는 것을 즐기지.



졸렬하고 직접적인 접선자가 남긴 메시지를 따라, 롤랑은 작은 마을을 누비고 다녔다.


곳곳에 배치된 방해꾼들이 롤랑에게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롤랑이 지나가는 도로에는 이따금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는 침식체 외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롤랑

...


침묵 속에서 롤랑은 졸렬한 낙서 하나하나, 방향을 가리키는 흔적 하나하나를 따라 거리를 걸었다.


봄비가 채 가시기도 전에 철제 발굽이 시멘트 바닥을 계속 두드리는 소리가 양쪽 폐허에 메아리쳤다.


또 하나의 하얀 형상이 마을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홀로 방치된 지 오래되었지만, 대체로 멀쩡한 저택 앞에 다다랐다.


그 형상은 마치 롤랑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롤랑

(...분명 여기야, 상대방이 정말 알고 있는 모양인데...)


틀림없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이곳은 '루나 아가씨의 집'이다.


비록 인간 시절이지만,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루나는 아주 어릴 때 이미 이곳을 떠난 것 같다.


다만, 그 형상의 행동은 상대방의 목적이 단순히 자신을 사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롤랑

(그렇다면, 설령 이것이 홍문의 연회*일지라도 보러 가야 해.)


*초청객을 모해할 목적으로 차린 주연


롤랑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백색의 형상을 향해 조용히 걸어갔다.



침식구조체

...


롤랑은 하얀 형상의 실체인 침식된 구조체 앞으로 걸어갔지만 침식구조체는 다음 단계의 안내를 하지 않고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롤랑

쳇, 여기까지 데려왔으면서 이제와서 지멋대로 일을 그만두겠다고?


롤랑이 살짝 찌르자, 구조체의 침식된 관절은 갑자기 힘을 잃고 진흙탕처럼 땅에 쓰러졌다.


롤랑

그럼 이제, 상대방이 도대체 내가 여기에서 뭘 하길 원하는지 확인해야겠군...


???

젠장, 끝이 보이지 않아, 엑?


롤랑

?


롤랑이 저택을 살피며 가능한 한 조용히 진입로를 찾고 있을 때, 롤랑의 옆 모퉁이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길모퉁이에서 서너 개의 침식구조체를 몸에 두른 채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라미아

으아아아아아!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롤랑! 빨리 저 녀석들 쫓아내줘ㅡㅡ!


...하체가 상체보다 훨씬 큰 불균형 기체라 근접전에 서투른 건 어쩔 수 없다.


롤랑

(나머지는 끝나고 물어보자고)


롤랑은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맞이하러 갔다.



라미아

휴...덕분에 살았어.


롤랑

이렇게 경솔하다니, 너답지 않은 걸.


라미아

...으으...그건 롤랑 너가 부른 침식체 아니었어? 어째서 계속 날 공격하는 건데...


롤랑

...?


롤랑이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본 라미아도 이 화제를 미처 돌아볼 틈이 없어서 그녀는 곧이어 다시 입을 열었다.


라미아

난...난 봤어...


롤랑

?


라미아

...전에 그 집행부대에서 한 사람이 이미 이곳으로 왔다고.



조금 전


숲이 제공하는 편리함을 이용하여 라미아는 위쪽에서 마을로 들어갔었다.


라미아

그럼 위에서부터 살펴볼까ㅡㅡ



녹티

어이, 점검해봤는데 비록 좀 낡아 보이긴 하지만, 아직 시동이 꺼지지 않아서 엔진에 불을 붙일 수 있어...


라미아

(...이전에 봤던 집행부대...)



베라

내가 운전할 거야. 나는 네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어떤 교통수단도 타지 않을 거야, 알겠어?


녹티

좋아, 난 그리 인색한 사람이 아니거든. 그래도 베라의 운전 솜씨를 믿고 있으니까 말야. 아무리 못해도 설마 삼칠이보다 못하겠어?



21호

?


베라는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뒤 문을 무겁게 닫고 창문에 팔을 얹은 채 반대편을 향해 휘둘렀다.


베라

지휘관~ 케르베로스 소대의 열정을 만끽해 봐.


경찰차는 21호와 그녀의 협력 장치만 남겨두고 빠르게 떠나버렸다.


라미아가 들여다보는 가운데 나머지 집행부대원은 롤랑이 가는 방향으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라미아

그 중 두 사람은 차를 몰고 떠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롤랑 쪽으로 가는 걸까….


라미아

롤랑에게 이쪽 상황을 알려줘야겠어...


라미아는 롤랑과 통신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그녀의 주의력이 다른 쪽으로 분산되는 사이에 핵분열 원충 한 마리가 소리 없이 그녀의 발치에 있는 지붕 위로 기어올라왔다.



???

...돌아가세요.


가늘게 속삭이는 말이 라미아의 귀에 들어왔고, 그녀가 발 옆의 불청객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라미아

...이, 이건... 


핵분열 원충

ㅡㅡ!


라미아

꺄악ㅡㅡ!!


핵분열 원충이 라미아의 발밑에서 격렬하게 폭발하면서 지붕의 구조가 붕괴되었고, 지붕 위에 서 있던 라미아는 발밑의 발판을 잃고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집결하고 있던 침식구조체 무리 한 가운데로 떨어졌다


침식구조체

...


라미아

...


침식구조체

...


침식구조체에 의해 앞뒤가 막힌 라미아는 침식체를 조종하는 방식으로 길을 트게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더듬이를 내밀었다.


침식구조체들

...


라미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다른 승격자가 조종하고 있기 때문인가?)


라미아

(롤랑인가...롤랑이라면...)


길을 막고 있던 침식 구조체를 떼어내려고 손을 뻗었지만 라미아의 손이 침식 구조체에 닿자마자 침식 구조체의 시선은 동시에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침식구조체들

ㅡㅡ!


라미아

으악ㅡㅡ!



롤랑

그렇다면 일이 더욱 흥미진진해지는 걸.


라미아의 입에서 이 소식을 들은 롤랑은 긴장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분했다.


롤랑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여기서 뭔가 취하려고 하고 있어...)


롤랑

(하지만, 충분히 인내해서 무대 위의 배역들이 다 모이면…. 그때가 바로 내가 등장할 타이밍이야.)


롤랑

(그전에...너희들은 너무 소란을 피우진 말고, 이 홍문연에 먼저 발을 들여 볼래?)


롤랑

라미아, 올라가.


라미아

어?


롤랑

최적의 개입 타이밍을 결정하기 위해 연극 장면 전체를 훤히 내다볼 수 있는 특등석을 찾아봐.


라미아

그럼...롤랑 너는?


롤랑

그들이 이곳을 찾기 전에 나는 미리 장면을 익혀 둬야 해.


라미아

그들이 반드시 이곳을 찾을 거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야?


롤랑

직감? 아니면...


롤랑

상대방이 우리에게 그 집행부대를 보여 주고,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한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야.


롤랑

하지만 이 연극이 언제 반환점을 돌게 될지는 오직 내가, 너와 결정할 수밖에 없어.


롤랑

(그래야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의 일시적인 망상이 아니라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