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


검은 옷의 소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바닥에는 어딘가로 쭉 뻗은 퍼니싱 자국이 나타났다.


퍼니싱에게 친화적이지 않은 녀석들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의도적으로 롤랑에게 보내기 위해 남겨둔 메세지다.


표식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오솔길을 따라 뻗어, 숲 너머의 깊은 곳을 향해 갔다.


롤랑

...


롤랑은 몸을 돌려 라미아가 있는 곳을 살펴보았지만, 지붕 위에는 이미 라미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롤랑

(숨은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어...)


롤랑

(쳇...아무래도 도망쳤나 보군.)


롤랑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이미 그런 시나리오도 염두해 뒀지만…. 뭐 됐어.)


롤랑

(그럼 이제, 혼자 할 수 밖에 없겠네.)


롤랑은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보이지 않는 퍼니싱 흔적을 따라 집을 나섰다.



???

...


검은 옷의 소녀는 절벽 꼭대기 원형 구역 한가운데 조용히 서서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었다.


롤랑

여어.


???

...


롤랑

어디 한 번 해봐. 모습을 드러낸 이상, 너희들의 시나리오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계획대로 흘러갔다는 뜻이겠지.


롤랑

간부가 등장했는데 괴인이 등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너희들이 무엇을 하고 싶든지 간에, 자, 나는 준비되어있다고.


롤랑은 마지막 카드를 던졌고, 그는 상대방이 카드 더미 밑에서 맞은편의 마지막 카드를 뽑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


검은 옷의 소녀는 롤랑의 운명을 단언하듯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부두.


???

똑바로 처리하세요.


부두

...(어수선하게 파편화된 기계 노이즈에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 뒤섞인다)


???

...당신은 피를 원하죠, 여기에 더 훌륭한 것이 있습니다.


부두

회언...죽여도...되지? 죽여도...되지?


소녀는 말이 없었고 조금도 말릴 기색이 없었다.


회언

아마도 선생이 당신을 작전에 투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 같아요.


부두

방금 전 '로키'를 다시 한번 제압했다ㅡㅡ부두, 목표지점 진입.


ㅡㅡ회언의 뒤에 있는 절벽에서 거대한 형체가 튀어나왔다.


검은 형체는 절벽의 연장선을 따라 고공으로 치솟아, 떠오른 달을 세로로 가른 후 멈춰섰다.


ㅡㅡ그리고 아래로 내려와 긴 인공근육 날개를 접고 숲을 가르고 롤랑과 회언의 머리 위를 휩쓴 뒤 다시 호버링했다.



부두

이것이 목표인가? 선생께서 끌어들이고 싶어하던 목표?


회언

네,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세요. 이번에는 제발 임무 외의 목표를 건들지 마시고요.


부두

아주 평범해 보이는데, 적당히, 힘을 덜 쓰고, 시체를 온전히 남겨 두고, 선생님께 바쳐주지.


롤랑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회언

...


부두

너를 우습게 보든 말든, 우리만의 판단이 있다. 네가 보기 보다 강하다면———우리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부두

내가 전력을 다해 '로키'가 마구 날뛰도록 만드는 건, 너로서는 결코 보고 싶어하지 않을 거야.


롤랑

엄청 세보이는 말투네, 그럼 마지막 질문밖에 없겠군.


회언

...


롤랑

만약 내가 그 집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면 너희들은 어떻게 할 셈이지?


회언은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계속, 조용히 롤랑을 응시했다.


롤랑

...


이전과 같이 회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두

회언? 이제 손 좀 써도 될까?


롤랑

...너희들이 말한 '선생'을 꼭 뵙고 싶군.


롤랑

만약 내가 그 '선생님'을 만난다면, 불법 호객행위에 대해 고소장을 제출했으면 하거든.


롤랑

고소 사유는, 호객꾼의 태도 불량.


소녀는 대답 대신 몸을 약간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공중에 비친 검은 그림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롤랑

불발탄에 미치광이까지, 이 구도는 아무리 보아도 나와 대화하려는 것 같지 않아보이는군.


롤랑

...뭐 좋아. 그럼 일단 서로 무력을 겨뤄보자고.


롤랑은 손을 들어 낫총을 내던지며, 하늘에 있는 부두를 가리켰다.


부두

'로키'가 날 귀찮게 만들거야.


부두

그러니까 '로키'를 나랑 살짝 번갈아 가면서...놀아야겠어.


부두

혹시라도 힘 조절에 실패하게 되면 네가 선생과 대화하는 걸 도와줄 거지?


회언

...


말은 안 했지만 부두의 요구를 묵인한 셈이었다.


회언이라는 이름의 검은 소녀는 롤랑의 눈앞에서 모습을 감췄고 그 자리에서...


'부두'가 다시 한 번 하늘 높이 날아올라 달을 배경으로 롤랑의 현재 위치를 향해 고속으로 급강하했다.


부두?

이 느낌이야! 너에게 억제되지 않는 느낌...좋아! 좋아 죽겠어!


부두?

누굴 죽여야 돼! 누구야? 저 녀석이야? 저 녀석이지?!


부두

그래, 만약 그가 너무 약하다면ㅡㅡ그 녀석을 죽여, 우린 교대로 간다.


롤랑

쳇, 정말 제멋대로인 구도구만.



전투 개시




부두?

나를 이기면 선생은 너를 만날 것이고, 패배하면 너는 '로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질 것이다.


롤랑

그래?





롤랑

어떤 수작이든 상관없어, 모두 털어놔.


부두?

...네가 선택한 거야.




전투 종료




부두

선생께서 주신 것...너에게 보여주마...


부두

'로키'는 이미 너에게 보여주었다.


부두

그런데 이제 보니 로키는 너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군.


부두

그러니까, 여기서 끝이다.


부두의 가면에서 불빛이 계속 반짝이고 색이 변했다. 롤랑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움켜쥐었다.


부두

만약…네가…살아남을 수 있다면……


부두

널...다시...보마...


부두?

흐흐흐흐....흐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부두의 냉철한 목소리는 왜곡되어, 다시 공포스럽게 읊조리는 듯한 왜곡된 소리로 변했다.


부두?

기껏해야 네 시체를 해체해서 선생 앞에다 버리는 것뿐이잖아! 그 사람은 개의치 않을 거야. 약자는 살려둘 가치가 없으니까!


한 차례의 접전을 거친 후, 롤랑은 눈앞의 거대한 형체가 때로는 냉정하게, 때로는 미쳐보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고 느꼈었다.



롤랑

기껏해야? 아까 한 말로 미루어보면...난 그래도 소위 '선생' 앞에 살아있는 채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야.


부두?

...


부두?

젠장...어째서...이럴 때...네놈의 거짓말로 스스로를 방어하려 하는 걸까...?


부두?

우으으....아....


롤랑

?


부두

'로키'가 예측 범위 이상으로 폭주해 통제불능 상태에 빠졌다. 순환액에 첨가된 억제 시뮬레이션 성분을 재조정해야 할 것 같군...


부두

...하지만 임무는 계속된다.


부두

'롤랑'이라는 개체, 너에게 시련을 내리는 것이 나의 임무다.


부두

하지만 방금 전의 행동을 보면, 더 이상 시련을 내릴 가치가 없는 것 같으며, 너의 전투 퍼포먼스는 선생께서 계획한 지표 수치보다 낮다.


부두

선생의 말처럼 전력차를 역전시킬 만한 지능도 보이지 않아.


롤랑

...예습을 많이 해왔구만.


부두

선생은 무엇이든지 다 알고 계신다.


부두

그래서, 이 다음...나는....안 돼...


'부두'가 내민 손에서부터, 그녀의 온몸은 점차 떨리기 시작하여, 몸의 광점은 끊임없이 색깔을 변화시켰다.


부두

로...너...이건....배...신이잖...


부두

배신....배신...배신...


부두?

...배신...그래서 어쩌라고? 너 자신을...처단할래? 아니면...실험대에서 너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주인공을 니 머릿속에 처박아놨는데, 정말 나와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거니?


부두?

'부두', 아니...연구원 인증번호 RIKD-042...혹시, 우리 사이 관계를 착각하고 있니?


롤랑

쯥...너희들의 정체성을 놓고 다투는 건 너희들의 문제니까 난 먼저 가봐도 괜찮겠지?


부두?

...


'부두'는 말 없이 배후의 미사일 운동 기관으로 미사일을 조종하여 롤랑을 다시 고정시켰다.


부두?

...지 금 뭐 라 고 했 어?


부두?

나, 시체 한 구랑 손 하나를 가지고 갈까, 아니면 네 머리통을 가지고 돌아갈까?


...무기와 포화로 몇 차례 겨루어봤지만, 부두의 절대적인 공중상의 우위 앞에서 롤랑의 대응은 헛수고였다.


롤랑의 사슬을 맞으면서도 부두는 날개와 미사일로 롤랑의 생존 공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듯 롤랑은 낫총을 휘둘러 '부두'라는 적의 또 다른 공격을 모질게 걷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쌍방의 거리가 총의 사정거리에 접어들자, 롤랑은 주저하지 않고 마지막 슬러그 탄 여덟 발을 부두가 쓰고 있는 헬멧을 향해 모두 발사했다.


부두의 머리가 세차게 뒤로 젖혀져 공중에서 반 바퀴를 돌았는데, 본체의 균형이 잡히지 않음을 감지한 후, 기체에 설치된 자동 균형 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했고, 전력으로 엔진의 분사량을 미세 조정하였다.


덕분에 머리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부두'는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부두?

아파...너무 아파...


부두?

흐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씨[ㅡㅡ삐], 아프잖아!


부두?

날 때렸어! 죽여버릴 거야! 찢어버릴 거야! 내장을 뽑아서 니 면상을 덮어버리겠어!


반면 롤랑은 땅바닥에 듬직히 내려앉아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의 맞은편 '상대방'은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롤랑

이런이런...날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고작 한 방 세게 때리기 위해서였어?


애써 여유로운 말을 한 뒤 이어진 것은 그보다 더 나아간 도발이었다.


롤랑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앉아서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자고. 이런 짓은 내 신사다움에 어울리지 않거든...


도발 이후, 상대방의 행위에 대한 반박과 폄하는...보아하니 필요 없어 보였다. 부두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라 다시 한번 급강하했다.


부두?

개소리 지껄이지 마! 임무가 뭔데! 그냥 널 죽이고 싶어ㅡㅡ


롤랑

...


말이 흘러나오자 더욱 맹렬한 짐승 같은 공격이 롤랑을 덮쳤다. 시야가 절반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롤랑은 자꾸만 뒷걸음질치면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롤랑

...


그 순간 부두는 달빛 아래서 롤랑의 그 웃음기 어린 시선을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한순간 만에 너무나 빨리 사라져버려 그것이 단순한 착각이었는지 의심했다.


롤랑

쳇, 임무가 뭔지도 모르나 보네...상대방은 왜 이런 정신병자를 보낸건지 원...


방금 전 롤랑의 아리송한 시선에 대해 탐구할 겨룰이 없었다. 사실 이미 광분한 로키의 인격에 의해 몸을 빼앗긴 부두 또한 이 문제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날개와 분사기가 내는 추진력을 따라 부두의 다리가 롤랑의 몸을 매섭게 가로질렀다.


공격으로 잠시 튕겨나간 롤랑은 주저앉았다. 힘겹게 손사래를 치며 끊임없이 기침을 했고, 그의 입가에서 순환액이 흘러내렸다.


롤랑

설령 죽더라도, 똑똑히 깨달으라고.


이 순간 롤랑의 구도는 누군가 불가피하게 이곳의 움직임에 이끌리면서 완성되었다.


롤랑

너의 주인께서 너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던 거야?


롤랑

아니면...쿨럭, 목숨값을 얻으러 온 용병에 불과했던 건가?


롤랑의 말은 맞은편을 잠시 멈추게 했다.


롤랑

(효과가 있었나?)


그러나 잠시 주춤했을 뿐, 그 뒤를 이어 무언가 숲에서 날아올랐다.


그것은 숲과 절벽을 넘어 롤랑의 정수리를 넘어 빙빙 돌면서 고열을 내뿜는 제트였다.


한편, 도착부터 말수가 적었던 21호는 몸을 바짝 조였고 위험에 대한 경각심으로 그녀의 의식이 미쳐가고 있었다.


뜨거운 공기가 주변의 나무들을 날려 버리고, 날아간 가지와 잎사귀 사이에 눈에 띄는 흰색이 나타났다.



21호

21호, 들켰다...!


롤랑

(바로 이거지.)


베라

...쳇.


부두?

...


부두?

이 냄새는...이 냄새는? 이 냄새는!


회오리바람이 휙휙 소리를 내며 척박한 땅 위에 자갈이 계속 무너져 내렸다. 강철의 거대한 짐승이 '그녀'의 칼날 같은 날개를 휘날리며, 회오리바람이 부는 자갈과 잎사귀가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고, 붉은 달은 '그녀'의 관자놀이처럼 떠올라 있었고, 핏빛 달빛이 이 끔찍한 것을 뒤덮으며 '그녀'의 그림자를 한없이 길게 늘어뜨려 마치 달에서 뻗어나와 우뚝 솟은 발톱 같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갑자기 왜곡된 웃음 소리를 내며, 몸이 계속 경련을 일으키며 거의 끊어질 듯한 아치 모양으로 뒤틀려졌다.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사람들은 막막함을 금할 수 없었다.


부두?

키키, 키키, 키키키....


음침한 소리가 그 거대한 물건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마치 뽕잎을 잠식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처럼, 천천히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들려왔다.


아니, '그녀'는 웃고 있다...'그녀'는 너무나 신났기 때문이다.


그것은...곧 살육이 시작될 것이라는 흥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는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는 길고, 단조롭고, 가냘픈 공포로 가득 차 있어서, 마치 하수구 안의 갓난아기의 울음 같았다.


부두?

크흐흐...하하하하하하!!!


그 소리는 순간 연속적인 고음의 포효로 변했다. 그 소리는 비정상적이고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공포와 만족감이 뒤섞인 채, 오로지 지옥에 떨어진 죄의 원혼만이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부두?

왔다, 왔다! 왔다!


부두?

그 마음에 들었다는 놈이 고작 일격도 못 견디는 쓰레기였다니, 선생께서 실망하실 거야!


부두?

하지만, 하지만, 부두가 새 장난감을, 살려서 가져간다면ㅡㅡ즐거워 하실 거야! 선생께서 즐거워 하실 거야!



녹티

저 미친놈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냐?


21호

선물?


베라

모두 뒤로 물러서ㅡㅡ'그녀'가 우리를 가리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