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너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지만, 그러지 않을 거야.



21호

ㅡㅡ나도 혼자가 아니야.


베라

녹티, 21호, 최후의 일격이다!


부두가 케르베로스를 당해내지 못한 채 도마에 오른 물고기가 되어버린 순간, 패배는 거의 필연적인 결말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의외의 사건이 있다.



롤랑

Laguz.


롤랑의 말은 나지막했고, 롤랑을 본 적이 있는 베라만이 곧 일어날 일에 대해 순간적으로 반응했다.



베라

모두, 청각을 닫아!


롤랑

그래도 소용없어.


거역할 수 없는 힘이 갑자기 21호를 뒤로 끌어당겼고, 곧이어 녹티를 비롯한 모두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무기를 손에 놓친 채 곤두박질쳤다.


녹티

으ㅡㅡ잠깐ㅡㅡ


21호

...윽...!


베라조차 채찍의 속박에 갇혀버렸다.


애써 못이기는 척을 하다 간신히 주저앉은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롤랑

멋져라...참으로 훌륭해.


롤랑은 우아하게 걸어가다가 허무한 모자를 벗고 달 아래서 마치 커튼콜을 치는 마술사처럼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롤랑

땡땡ㅡㅡ연극이 끝났습니다~


롤랑

공연장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티켓을 끊지 않고 공연장에서 무단관람한 관객들에겐...작은 벌칙을 내려줘야겠지.


그러나 롤랑은 부두를 속박하려 하지 않았다.


한편, 롤랑과 케르베로스를 내리 상대한 부두에겐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다.


이와 함께 부두의 반응을 통해 롤랑도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녀가 패배했다는 좋은 징조이자 상대방이 예상한 바였다.


그는 부두에게 향했다. 아까와 같이 저항할 만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보였다.


롤랑

이제 그만 입장 티켓을 반납해주지 않겠어? 아가씨.


말을 마치고 그는 부두에게 다가가 옆사람이 듣지 못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롤랑

다른 한 명은 어디에 있지? 졸개랑 이야기를 나누는 건 영 흥이 나지 않거든.


롤랑

만약 너희들이 나를 끌어들이고 싶다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나와 이야기하도록 해야지.



부두

...본 네거트 선생은 너의 활약에 만족할 것이다.


롤랑

그는 어디에 있지?


부두

...알게 될 거야, 곧.


롤랑

말 돌리지 마.


롤랑은 손을 떼고 총을 꺼내 부두의 부서진 가면을 겨누었다.


롤랑

왜 설계자가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 핵심소자를 인간의 생리구조와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머리에 배치해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롤랑

하지만 오히려 잘 됐어. 안면 마스크 보호 장갑 없이는 군용 합금 두개골로도 산탄총의 탄환을 막을 수 없겠지.


롤랑

그러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다른 녀석더러 나타나라고 해.


부두

...


롤랑

3.



회언

...


롤랑의 한편에서 마치 이전에 본 듯한 검은 옷을 입은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롤랑

쳇, 재미없군.


롤랑

좋아,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잖아, 안 그래?


롤랑

네가 말한 그 선생, 나를 데리고 가서 보여줘.


부두

그런 일...나는 할 수 없어.


롤랑

?


부두

왜냐하면...나는 지금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부두

비상용 로켓 엔진, 점화.


부두의 넓은 검은 날개 아래서 갑자기 몇 개의 커다란 발화점이 솟아올랐다.


발화점에서 엄청난 양의 화염과 가속기류가 뿜어져 나와 부두를 받쳐들고 비스듬히 공중으로 솟구쳤다.


부두가 롤랑의 사정거리를 벗어나기 전 그녀가 롤랑에게 한 마지막 말은...


부두

네가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면, 너는 너의 생각을 바꿀 것이다.


부두

너와 나같은 사람에게...그곳은 우리가 자신의 존재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니까...


롤랑

재밌군...재밌어...


정말 흥미롭다. 이번 대국은 정말 재밌었다. 롤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롤랑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린 그는 아직도 땅에 박혀 있는 21호를 돌아보며 조롱 섞인 눈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21호는 롤랑의 눈에서 조롱과 경멸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목구멍에서 으르렁거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지만, 이것은 롤랑으로 하여금 21호와 그녀와 연결되어있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에 대해 더욱 비참함을 느끼게 만들 뿐이었다.


롤랑

정말 재밌어...지휘관, 정말로 보고싶어.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롤랑

(이 세상은 역시나 언제나 그래왔듯이 어둡기 그지없어. 나에게나, 당신에게나.)


롤랑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면...당신을 내 앞에 묶어서라도 운명에 희롱당한 두 사람의 영혼끼리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은 걸.)


하지만 그것도 나중의 일이다. 롤랑은 21호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부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두가 안전한 하늘로 달아나자, 롤랑은 시선을 낮추어 방금 본 검은 옷의 소녀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은 옷의 소녀는 다시 사라졌다.


롤랑

...쳇, 눈속임에 능한 녀석이군.


롤랑

그럼, 나도 따라가도록 하지.


롤랑

강아지들, 그럼 나중에 보자고.


롤랑은 고개를 돌려 오솔길을 따라 골짜기를 떠났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헬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마도 공중정원의 지원군일 것이다.


만약 아니라면? 아니라고 한들, 롤랑은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분명 케르베로스 녀석들은 이것이 영화의 샛별에서의 똑같은 수법이 아니라 방금 전 전투에서 내팽겨진 전자기 구속장치에 의한 효과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롤랑에게 필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회언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는 건가요?


회언

패배했군요. 괜찮습니다. 이 또한 계획의 일환이니까요.


회언

네, 그 다음에 오세요.


회언

다음 일은 저의 몫입니다.


회언

...


회언

이것은 선생님의 의견입니다.


회언

네.


회언

이것은 당신이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