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p.m


노안은 평소처럼 30분 일찍 한양소대 준비실에 도착해 시몬을 비롯한 동료 두 명과의 정례회의를 기다렸다.


공중정원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면서 점점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구조체가 되면 잠에 빠질 필요가 없어지게 되어 하루가 길어진다.


매일같은 정규 훈련과 가끔의 기체 점검 외에는 일정한 스케줄이 없다.


훈련실에 좀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계속 그곳에만 있으면 다른 사람이 다가오지 않는다.


결국 노안은 혼자 방을 독차지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몰리게 된다.


시몬 지휘관과 팔루마 대장에게 이것에 대해 물어본 후...



시몬

...너의 기체와 승격자의 일은 분명 비밀로 부쳐졌어야 했는데, 누군가가 고의로 이 사실을 누설한 게 아닌 이상...


팔루마

쳇, 비밀을 누설한 사람이 없다고 해도 너는 '정상적인' 놈들과는 섞일 수 없어.


노안

어째서지?


팔루마

너는 외부인들이 재편된 한양소대를 어떻게 부르고 다니는지 알아?


팔루마

'검은 양 소대', '사회악'...우리 셋은 각자 문제가 있지. 그런 눈으로 릴리안을 쳐다보지는 말고...


릴리안

팔루마 대장...!


팔루마

흥, 애당초 남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환상따위 버려.



그 말은 마치 알 수 없는 슬픔을 숨기며 자신에게 타이르는 것 같았다.


그동안 사람들이 지상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부랴부랴 수송기에 오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방금 귀환한 그레이 레이븐 소대도 곧바로 몸을 돌려 다음 임무에 투입됐다.


시몬 지휘관에게 임무에 언제 참여할 수 있는지를 물을 때마다 '아직은 휴식 기간이다'라는 답을 듣는다.


ㅡㅡ도대체 언제가 되야 전선에 나가 도울 수 있는 걸까?


ㅡㅡ아니면 지금 상태로 있는 것이 폐를 끼치지 않고 도와주는 건가?


노안

...


훈련실뿐 아니라 길만 걸어도 뒷모습의 시선이나 속삭임이 느껴진다.


노안은 그들이 악의도 없고 그를 배척하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지나친 예의는 아련한 소외감을 주었다.


그것은 그가 외부인이라는 사실, 즉 승격자와의 지나친 관련성 때문에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임을 항상 상기시켜준다.



노안

...


노안

이것이 나의 선택이 가져온 대가 중의 하나야.


그는 조용히 자신에게 충고하고 있으며, 결코 이것 때문에 어떠한 불평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시몬

노안? 오늘은 네가 제일 먼저 도착했구나.


노안

응, 딱히 별일 없었어.


시몬

훈련실 쪽은...여전해?


노안

맞아. 아무래도 사람이 없을 때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시몬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시몬

내가 방금 이곳에 왔을 때 수석을 만났었어.


시몬

이제 막 임무에서 돌아온 뒤 새로운 임무에 합류하는 모양새였지. 한 달쯤 지나면 더 위험한 대규모 임무가 한 차례 더 있다고 했어.


노안은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시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는 항상 이랬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한양소대의 과거 경력과 자신의 거동, 노안의 근황에 비하면 가장 안전한 공통의 화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 괜한 말을 하지 않을 뿐더러 한양 소대의 과거 이야기 때문에 괴로운 추억에 빠트리지 않으려고 한다.


시몬

...


그런데 오늘, 그는 이 화제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지 않았다.


시몬

참, 할 일 없으면 근처 광장에 가서 산책이라도 할까?


시몬

반년 전에 파오스 학교 외곽의 온실도 문을 열었는데, 그 안에는 귀중한 식물들이 많이 자라 땅에서도 흔치 않은 것들도 있어.


시몬

K구역에 있는 도서관도 있고...


시몬

지금은 사람들이 자료를 볼 때 모두 단말기를 사용해. 그 도서관은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지. 3년 전에 커피숍을 개조해서 만들었지만 여전히 사람이 없더라고.


노안

좋아, 한번 가 볼게.


노안

그런데...무슨 일 있었어?


시몬

어...무슨 소리야?


시몬

...아무 일도 없어.


노안

오늘은 왜 말 안 했어?


시몬

...정말 예리하구나.


시몬

얘기하다 만 건 내 주관적인 견해일 수 있기 때문에 그랬어.


시몬은 자신의 손가락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했다.


시몬

오늘 수석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뭔가 한계상황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노안

한계상황?


시몬

그냥 괜한 생각을 한 걸지도 몰라.


그는 또 이 말을 강조하였다.


시몬

하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모양이었어.


노안

그 지휘관은 임무에서 돌아왔지?


시몬

그래, 내가 임무배분을 알아봤는데 확실히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그렇게 많이 배정된 건 아니었지만 공중정원에 남아있을 때도 정신없이 바쁜 모습이었어...


시몬

수석이...일부러 그렇게 바쁘게 지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시몬

에휴, 내가 걱정이 많아서 그런가 봐.


노안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


시몬

...맞아.


시몬

수석은 오랫동안 의식을 잃었고 풀리아 숲 공원 유적지 작전 당시에 뇌 손상을 입어 거의 3개월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었어.


노안

응, 그건 알고 있어.


시몬

깨어났을 때 만신창이가 된 대지, 수많은 사망자, 자신의 가장 믿음직한 동반자마저 거의 죽어 가는 걸 보았었어….


시몬

나였더라면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던 자신이 확실히 원망스러웠겠지.


노안

...


시몬

최선을 다해 리브를 구한 뒤 다시 한번 혼수상태에 빠졌었어.


시몬

다시 깨어났을 때, 상황은 더 악화되었어…. 탈주자가 잇따랐고, 이로 인해 리브의 치료가 늦어졌지.


시몬

부대를 재정비해 탈주자 추적에 나섰고, 비앙카는 그레이 레이븐과 떨어져 있는 사이에 중상을 입었어.


시몬은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쉬었다.


시몬

너를 데려온 것은 어쩌면 그동안의 몇 안 되는 희소식일지도 몰라.


시몬

그 후 수석은 자신을 바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양이야….


노안

걱정이 된다면 직접 가서 물어보시는 게 낫지 않겠어?


시몬

됐어...


시몬

그 사람은 모두의 롤모델이자 영웅이야. 지나친 걱정은 일종의 불신이고, 부담만 키울 뿐이지.


노안

..


하지만 영웅도 인간이고 상처받으면 울고 싶을 때도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노안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시몬을 전혀 모르고,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도 마찬가지다. 그 '수석'에게 자신은 그저 우연히 만난 과객(过客)에 지나지 않는다.


전자의 신뢰를 의심할 자격도, 후자의 강인함을 걱정할 자격도 없다.


시몬

아까 말한 거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래?


시몬

내가 권한을 신청해 줄 수 있어. 임시직으로 머무르는 것도 괜찮아. 너가 좋아하는 물건으로 교환할 수 있는 보수를 챙기는 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것보단 나으니까.


노안

온실과 도서관에 가는 거? 좋아, 고마워.


시몬

별말씀을. 내가 널 도울 수 있는 몇 안되는 일인걸. 너 같은 성격의 사람이라면...그래도 사람들 속에 머무르는 것을 좀 더 즐거워할 것 같아.


노안

이미 나를 많이 도와줬어.


시몬

아니야, 차징팔콘 소대나 그렇게 한산하지 않은 곳에 배치받았더라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텐데...


노안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노안

내가 어떤 신분이든, 어디를 가든,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해.


노안

어디든지 당신처럼 나에게 말을 걸려는 사람이 있을 거고, 팔루마 대장처럼 경계하는 사람도 있겠지.


노안은 시몬이 그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음을 다소 눈치챘음에도 무방비 상태로 두 눈을 감았다.


노안

당신이 말한 소대에 내가 갔어도 이런 경우는 있었을 거야.


노안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고 믿어줄 시간이 필요하고 나도 여기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지. 공평하잖아.


시몬

...공평?


노안

맞아, 그래서 난 여기 있는 게 좋아.


시몬

...


시몬이 안경을 벗고 콧등을 문지르는 동안 두 사람은 조용히 있다가 약속시간 2분을 넘기고 나서야 문 앞에서 다른 두 사람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팔루마

너희들은 왜 또 먼저 도착한 거야? 매일같이 빈둥빈둥 놀아서 할 일이 없어?


노안

맞아, 잘 맞추네.


팔루마

이건 칭찬이 아니야. 욕을 먹었으면 얼굴 좀 구겨. 무슨 말이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시늉 하지 말고 그렇게 징그럽게 쪼개지 좀 마.


시몬

오늘 지각한 이유는 또 뭐지?


팔루마

네가 알 바 아니야.


시몬

팔루마, 어제 우리가 상의할 때 너는 가장 기초적인 협조를 할 것이라고 약속했었고, 나도 네가 제시한 조건을 승낙했어.


팔루마

...


팔루마

쳇, 모의 작전 때 호적수를 만났어.


시몬

릴리안은?



릴리안

...밖에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을 만나 조금 늦었어요.


시몬

수석?


릴리안

네, 그 지휘관님이 원래 자신이 오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릴리안이 위약 한 병을 건네주었는데, 시몬이 평소 먹던 약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릴리안

약이 거의 다 떨어졌죠?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약을 받았다.


팔루마

그놈도 제법 한가하나 보네, 네가 약을 구하는 걸 도울 여유도 있고 말이야.


그 말에 시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몬

수석은 분명 요즘 매우 바쁠 거라고.


릴리안

리브를 만나러 생명의 별에 방문했을 때 리브가 그것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어요.


시몬

...그렇구나.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는 말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