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0 p.m.


공중 정원의 불빛은 이미 어두워졌고, 대신 가상 하늘의 현란한 별빛이 떠올랐다.


이곳은 지상과 달리 먹구름이 사람과 하늘의 거리를 가리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가공된 밤의 장막은 별마다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어 마치 캔버스 위에 박힌 보석과 같다ㅡㅡ조금 더 나아가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드넓은 깊은 우주공간에 진짜 행성이 떠 있다.


그것들은 지척에서 손에 잡힐 듯한 희망처럼 한밤중에 사람들을 비추고 있다.


노안은 도서관 임시직원이 된 이후로 수십일째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훈련도, 연구도 필요 없을 때 찾아와서 몇 안 되는 방문객들이 책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고 발길을 돌린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도서관을 찾은 사람들은 이 '임시직원'에게 얽힌 비화를 알지 못했다.


여기도 시몬의 말처럼 손님이 별로 없었다.


한가할 때 서빙로봇을 따라다니며 음료를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책꽂이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눈길에 닫는 책마다 꺼내 읽으며 긴 시간을 소일하곤 했다.


노안

...


시간은 자정을 슬그머니 넘겼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낮 동안 실험 중 입은 손상으로 아직도 아픈 어깨를 주물렀다.


원래 이렇게 고요한 밤에 훈련실의 자유시간을 활용해 정해진 일정을 마쳐야 했지만, 지금은 늘상 위에 보였던 어둠이 눈에 띄었다.


인간으로서 지구에 있을 때는 항상 위험이 뒤따르는 밤이지만 공중정원에 오고나서 밤은 평온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낮에 접어들면 과학이사회의 점검과 실험에 응해야 한다.


...그런 과정은 결코 쉽다고 할 수 없다.


모의 환경 테스트와 스트레스 테스트를 해야 할 때는 엄청난 양의 전투와 손상까지 수반하기도 한다.


노안

...오늘은 그냥 쉬자.


그는 방금 읽은 책을 접고 이틀 전에 모아둔 종이쪽지를 꺼내어 오랫동안 펜을 잡지 못한 손가락을 움직여 밤하늘의 낙조를 그리려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망각자 거점 근처였으며 야간 경비로서 그는 밤새 깨어 있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펜도 종이도 없어 그을린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발라 시간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종이 위의 선들은 난잡한 건물들과 별이 총총한 하늘을 향하여 차곡차곡 배열되었고, 계속 다듬으려던 바로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뼈에 새겨진 삶의 본능처럼 방금 그린 밑그림을 얼른 구겨내며 일어섰다.


노안

어서오세요.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황급히 그 앞을 지나 책장의 가장 깊은 구석으로 향했지만 한밤의 도서관에 직원이 있는 줄 몰랐었다.


노안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시몬

오늘 수석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뭔가 한계상황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시몬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모양이었어.



노안

(자정에 도서관에 오다니...)


구석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시몬의 염려가 단순히 '걱정이 많아'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노안

(확실히 컨디션이 안 좋아보이는데...방해하지 말자...)


마침 그가 다시 앉으려 할 때 또 다른 손님이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노안

어서오세요.


이 손님도 노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언가를 찾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손님

저기, 실례지만 혹시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 보신 적 있나요?


손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던 것 같았는데…. 마침 선배를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선배'라는 단어가 나오자 노안은 파오스 사관학교의 학생으로 보이는 그녀의 교복을 알아차렸다.


노안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 말인가요...?


그가 곁눈으로 가장 깊숙한 곳을 바라보자 지휘관은 피곤한 표정으로 책과 단말기에 자신을 파묻고 있었다.


노안

...


노안

죄송합니다. 못 봤어요.


손님

알겠어요...


그녀는 실망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님

그 전설적인 수석 졸업생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노안

다음에 또 오세요.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본 노안은 다시 자리에 앉아 방금 걷었던 종이를 꺼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당황한 사이에 또 의식적으로 그림을 구겼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게 된 이후로 이런 버릇이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바르지 않은 일'에 대한 취미를 들켜 혼난 기억 때문이었을까?


노안

...


응대할 손님 없이 일하는 시간에도, '그림은 그리지 말아야 한다'는 자신의 잠재의식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청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종이를 다시 펴서 손바닥으로 평평하게 눌렀다.


구석에 있는 지휘관을 마치 만나지 못한 것처럼, 방해받지 않은 고요함을 지키며 이 꼬깃꼬깃한 종이 위에 지금 이 풍경을 계속 그려내었다.



이 즉흥적인 별하늘 낙서가 완성된 것은 4시간여가 지난 뒤였다.


종이를 접어서 탁자 위에 올려놓자 노안은 다시 한 번 인간 지휘관이 책상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노안

...


그는 일어서서 최근에 배운 레시피에 따라 바 안쪽에 음료수를 만드는 데 몰두하느라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언제 자기 뒤로 왔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지휘관

여기서 별하늘을 그리고 있었구나?


그 소리를 듣고 컵을 든 청년의 손이 눈에 띌 정도로 떨었다.


노안

아니, 그냥 종이 쪼가리야. 미안, 치우는 걸 깜빡했어.


그는 재빨리 다가와 자신의 그림을 다시 뭉쳐 쓰레기통에 버렸다.


노안

이제 돌아가게?


지휘관

(1)(아직 아니야)

(2)(아직 바빠)


노안

응, 이 음료수는 내가 쏠게.


지휘관

...


지휘관

아까 왜 거짓말 했어?


지휘관

너가 지금 솔직해져야 신뢰를 얻기 더 쉬울 텐데.


노안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은 것처럼 보였어. 그녀도 별로 급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고.


청년이 음료수를 가득 채운 잔을 반대편 앞에 놓았다.


지휘관

고마워.


노안

지휘관은? 왜 한밤중에 도서관에 온 거야?


지휘관

아직 일이 있어서.


노안

그레이 레이븐 소대 준비실이 여기보다 더 쾌적할 것 같은데.




[1]

지휘관

(1)(그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 선택

(2)(...)


노안

그들이란...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나머지 세 사람?



[2]

지휘관

(1)(그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어.)

(2)(...) ← 선택


노안

혹시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뛰쳐나온 건 아니겠지.




청년은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었다.


노안

그 어떤 일이라도 자신의 몸을 버려가면서 이루어야 할 건 없어. 그들이 지휘관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런 김에 그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지휘관

(1)(이미 그들에게 많이 의지했어)

(2)(이 일은 내가 스스로 해낼 수 있어)


노안

그래?


노안

그럼 지휘관은...지금 건강한 모습이라고 생각해?


앞에 있는 인간은 잔을 들고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잔에 담긴 음료를 마시며 대답하지 않았다.


노안도 추궁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손 옆의 책을 다시 펼쳤다.



두 사람은 가상의 공중정원 하늘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오랜 시간 침묵했다.


노안

만약 나에게 말해준다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몰라.


노안

당신에게 도움을 받았었고 지금은 할 일 없는 놈으로서 당신에게 기꺼이 다가와서 폐를 끼치고 싶어.




[1]

지휘관

(1)(그럼 미리 고맙다고 말할게) ← 선택

(2)(너의 도움은 필요없어)


노안

고맙다고 말해야 할 사람은 나야, 어쨌든 난 지금 한가해.



[2]

지휘관

(1)(그럼 미리 고맙다고 말할게) 

(2)(도와줄 필요 없어) ← 선택


노안

내가 필요해서 그래. 나는 지휘관을 돕고 싶어. 지금 매우 한가하다고.



노안

그나저나 이미 새벽 5시가 넘었어. 지휘관이 계속 여기에 있으면 그레이 레이븐 소대원들 걱정만 더 늘리게 될 거야. 쉬었다가 다시 얘기해도 되니까 먼저 가서 자.


지휘관

(1)(...알았어)

(2)(응)


인간은 반 잔 남은 음료를 들고 걸어왔다.


지휘관

음료수 고마워.


지휘관

사례의 의미로 이걸 줄게.


지휘관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 로고가 새겨진 노트와 잘 포장된 쿠키 하나를 건넸다.


지휘관

그리고 아까 그 그림...


노안

그건 종이 쪼가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휘관

이 물건도 딱히 귀중한 건 아니지.


지휘관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서 배급하는 평범한 노트일 뿐이야.


지휘관

쿠키도 지나가는 길에 샀어.


노안

L구역?


그는 시몬이 정례회의 때 릴리안에게 이 얘기를 꺼냈던 것을 떠올렸다.



시몬

L구역에 있는 가게가 있는데 가끔 쿠키를 팔아. 내가 수석과 함께 무심코 산 적이 있는데 아주 맛있었어.



노안

시몬 지휘관이 그쪽에서 파는 과자를 좋아한다고 얘기했었어.


지휘관

기억하고 있었구나...


인간은 웃으며 쿠키 하나를 다시 꺼내 노안에게 건넸다.


지휘관

이건 시몬에게 가져다 줘.


노안

알았어. 고마워.


노안

이제 들어가서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1]

지휘관

(1)(응, 안녕) ← 선택

(2)(응, 나중에 보자)


노안

안녕


[2]

지휘관

(1)(응, 안녕) 

(2)(응, 나중에 보자) ← 선택


노안

잘가.




그러나 막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인간의 몸은 비틀거리며 바 위에 쓰러졌다.


이내 미처 다 마시지 않은 음료수 반 컵을 든 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노안

...지휘관?!


노안은 곧바로 바를 넘어 깨진 유리잔 옆에 누워 있던 인간을 일으켜 세웠다.


노안

저혈당인가...?


다행히 그 의외의 사태가 오래가지 않아 그가 다음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인간 지휘관은 의식을 되찾았다.


지휘관

...으윽...


노안

괜찮아?


지휘관

...


그의 질문에 상대방은 바닥에 깨진 컵을 보며 수초간 침묵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뒤늦게 반응하는 듯했다.


지휘관

...


노안

분명 과로나 저혈당일 거야.


노안

일단 일어나자, 손 옆에 있는 유리 조각 조심해.


지휘관

(컵 조각을 정리한다)


노안

잠깐!


청년은 재빨리 인간의 손목을 잡았다.


지휘관

...아파!


노안

미안.


자신의 추태를 알아차리고는 이내 손을 떼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노안

일단 일어서면 괜찮을 거야. 바 뒤에 각설탕도 있으니까 좀 챙겨가고 빨리 들어가서 자.


지휘관

하지만...


노안

나머지는 내가 하면 돼. 계속 여기에 있으면 그레이 레이븐 소대원들이 더 걱정할 거야.


노안

당신도 그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잖아, 안 그래?


지휘관

...고마워.


노안

괜찮아. 혼자 갈 수 있겠어? 내가 데려다 줄까?


지휘관

괜찮아. 혼자서 갈게.


노안

응.


청년은 인간을 일으켜 세우고 고개를 숙여 바닥의 파편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발자국 소리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도서관 왼쪽 위를 쳐다봤다.


노안

...


ㅡㅡ책꽂이 구석에서 이곳을 주시하는 cctv가 차가운 붉은 빛을 반짝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