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소리가 기억과 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 울려 퍼졌다.


비록 구조체는 빗방울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치코는 겉옷을 벗어 마치 인간처럼 머리에 얹었다.



치코

최악이네.


친구의 어투에 불평이 가득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비앙카의 주의를 끌었고, 비앙카의 시선은 앞 여성의 얼굴로 향했다. 차가운 빗물이 그녀의 팔에 닿고 있었고, 그녀가 시선을 점점 집중시키자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며 치코가 그녀를 끌고 비 속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앙카

그러게.


치코

그리고 아까 그 영화의 결말은 너무 형편없었어.


비앙카

그랬어? '법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의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 살인은 하나님의 교리를 거스르는 걸까….?', 나는 꽤 괜찮았는데.


치코

단지 영화일 뿐이잖아. 왜 굳이 결말을 이성에 맡겨 관객들이 '도덕적 윤리'를 논하는 처지에 놓이게 만들었을까? 해답을 줄 수 없다면 이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주지 말아야 하는 거 아냐?


비앙카

그것도 맞아...그런 식이라면 교리에 의해 벌을 받아야 할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우리같은 사람들이겠지.


치코

허, 아직도 그런 말을 하고 있구나...


비앙카

...응?



두 사람은 전철역 승강장 앞 갈림길에 멈춰 섰다.


치코

우리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우리 손으로 죽여야 할 만큼 불합리한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모두의 운명이 되지 않기 위해 이 세상은 우리를 필요로 하는 거야.


눈앞의 치코는 시큰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너무나 익숙했다.


비앙카는 그런 말을 언제 들었던 것일까...? 그날에도 하늘에서 비가 내렸었나?



다가오는 전차의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전장의 화염이 비앙카의 동공 깊숙한 곳에 터져나오기 시작헀다.


비앙카는 활과 화살을 손에 쥔 채 평온한 모습으로 전쟁터에 서 있었고, 사방의 화약 연기와 시신의 부패한 냄새가 코를 가득 메웠다.


잿빛 하늘에는 여전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인간의 피와 구조체의 순환액이 그녀의 발 옆에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었고, 그녀의 심장고동 소리처럼 빗방울이 그 안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찌그러진 형상의 구조체가 있었다. 치코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퍼니싱 침식을 상징하는 화염이 상대방을 거의 집어삼키기 직전이었다.


그 침식된 구조체는 고통스럽게 뒤틀려 있었고, 마치 업화 속에서 탈출한 조난자처럼 철두철미한 괴물로 변해 비앙카를 향해 비틀거렸다.



치코

나는 줄곧 후회하고 있어.


치코

그날 내가 좀 더 과감한 결단을 내려 내 여동생을 죽였더라면...그 사람들은...죽지 않았을 텐데.


치코

하지만...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고 그만 흔들려버렸어.


치코

난 줄곧...능숙하게 감정을 내려놓던 사람은 아니었어.



치코와 비슷한 구조체

안 돼...언...언니...


치코와 비슷한 구조체

살...려...줘...


치코와 비슷한 구조체

으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선홍빛 장막 뒤에서 침식된 자와 탈주자들이 뛰쳐나오며 가엾은 구걸이나 맹렬한 욕설을 중얼거렸고, 처형된 자들의 진심 어린 목소리는 마침내 몇 번이고 반복되는 통곡으로 수렴되었다.


군중

살고 싶어...우리는 살고 싶어...!!!


치코

미안해...나의 동생.


귓가에 들려온 치코의 속삭임과 함께 그녀의 친구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손을 잡았고, 그녀의 손에 핏자국이 묻은 총 한 자루를 손바닥에 넣었다. 치코의 팔은 그녀에게 바짝 달라붙었고, 그녀는 망자에게 향하고 있던 무기를 들어 올렸다.



치코

...나의 약함과 망설임은 돌이킬 수 없는 희생과 비극을 낳았고, 내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또 다른 중요한 사람들을 죽여야 했어.


비앙카와 치코의 기억과 모습이 뒤섞였고...일제히 동료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비앙카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길을 택했어.



칼바람이 공기를 가르며 비앙카의 뺨에 튀긴 것은 피가 아니라 코를 찌르는 강한 오일 냄새가 나는 탁한 액체였다.



비앙카 앞에 쓰러진 자는 정화부대원이었다. 그녀는 몇 년 전 그 설원으로 돌아가 신부를 죽인 그 순간으로 역류하는 듯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하얀 안개 때문에 그녀의 시선은 흐려졌고, 매서운 눈보라가 그녀의 입김을 휩쓸었다.


그녀는 숨을 무겁게 내쉬며 총을 든 손을 놓고 눈보라를 뚫으며 주변의 시체와 침식체, 동료들을 보았다. 이들은 퍼니싱에 완전히 침식당하기도 전에 이미 눈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


치코

그동안 나는 그들의 유골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어...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전우를...


비앙카<//치코>는 눈 위에 스러진 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치코

비앙카의 경험을 처음 들었을 때, 너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당시에 내가 너만큼 잔인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어.


눈 위의 '시체'가 흔들리며 일어선 뒤 고개를 들자, 얼굴은 끊임없이 변해갔다. 일부는 비앙카의 기억에서, 일부는 치코의 기억에서 투영된 것이다.


치코

나도 모르게 되돌아올 수 없는 길에 들어선 이유는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결국 다른 한 쪽을 포기해야만 하고, 단지 죄책감을 안으며 살얼음판을 걷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어.


치코

하지만 이런 죄책감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던 것은 바로 감성이 이성적 판단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어. 그 후 나는 가장 쉬운 삶을 선택했지. 감정을 버리고 '어떤 감정도 없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어. 인간성을 잃게 된다면 삶에서 '고통'의 질감을 잊을 수 있으니까...


따스한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자 비앙카</치코>는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에 피가 아닌 투명한 액체가 닿아있음을 발견했다. 인간의 몸을 가진 기억은 너무나 오래전의 이야기라, 인간의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잊고 있었다.


정화부대원

인간성?



정화부대원의 질문이 귓가에 맴돌았다.


정화부대원

이런 말세에도 인간성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정화부대의 대장으로서 아직도 그런 천진난만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인에게 싸움에는 가치가 있고, 전장에는 선악이 존재한다는 헛된 믿음을 새겨준 다음, 목숨을 헛되이 잃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비앙카

전쟁터에서 아무리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도 전투는 인간의 행위인 만큼 인간성과도 관련이 있기에 결코 저버려선 안될 이념을 최후의 보루로서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통해 인간성은 더욱 타락하게 될 것이고, 이 다음의 전쟁은 더욱 비인간적일 것입니다.


정화부대원

이런 지옥에서 선을 갈구하는 행태만으로 전장의 본질을 바꿀 수 없어!


비앙카

세상은 각각 독립된 복수의 가치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치는 다원적이며, 상호 간의 대체가 불가능합니다.


비앙카

인류 사회가 위태롭고 무질서한 상태일지라도, 파괴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정화부대원

네가 중얼거리는 도의라는 것이 정말로 전쟁을 멈출 수만 있다면 참으로 좋겠군.


그 대원의 어조에는 약간의 분노와 권태감이 역력했다. 그는 비앙카를 힐끗 쳐다보더니 더 이상 비앙카와 다투지 않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치코

비앙카, 너는 어때? 너도 정화부대의 대장은 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


정화부대의 휴게실 벤치에 나타난 치코는 조용히 비앙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앙카

모든 사람이 너의 실력과 결단력 있는 태도를 인정하고 있어.


치코

모두가 강인함을 동경하고 있지만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나의 마음이었어.


치코

살육에는 죄악이 뒤따르고, 선택을 할 때마다 죄악의 어둠이 묻어나.


치코

하지만 너는 결코 자신이 무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고, 퍼니싱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이 잘못된 세상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겠지.


치코

자신의 죄악의 깊이를 느끼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 죄악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원의 목소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어.


치코

구원의 목소리에 응하면서도 그 구원이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 그것을 잘라내고 그 죄악을 품으며 계속 나아갔어.



치코

영화에서 했던 말 기억나? '우리 모두는 악한 자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또 다른 종류의 악이 있는데, 그것은 선한 사람들의 무관심입니다.'*


*영화 『분닥세인트』(1999) 대사 중 일부


치코

비앙카, 외부 세계로부터 절대 더럽혀지지 않는 소중한 존재...이것이 바로 '냉혈한'이 가장 부러워하는 부분이야.


전철이 역에 도착하자 치코는 부드럽게 비앙카의 귓가를 정리했다.


치코

미안해, 그만 참지 못하고 너무 말이 길어졌네.


비앙카

치코...


치코

그래도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비앙카는 치코의 시선에 화답했고,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이 기체의 본 모습, 그것은 바로 '마녀'로서의 자신의 이면이었다.



치코의 눈빛에는 또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비앙카는 몇 년 전 설원 어디선가 비슷한 모습을 본 것 같았다.


ㅡㅡ그녀의 고통.


ㅡㅡ그녀의 몸부림.


ㅡㅡ그녀의 날개.


ㅡㅡ그녀의...미련.


치코

...


치코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름 없는 열차를 타고 비앙카에게 작별인사를 남겼다...마치 '내일 봐'라고 말하는 친구처럼.


오늘도 평범한 하루였다. 임무 수행 후 한 번도 허투루 웃지 않았던 치코는 정화부대 휴게실에 다시 들어가 '비앙카'에게 미소를 짓는다.


...그러고 나면 휴게실에 앉아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가끔 휴가 때 황금시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한다.



이별의 꿈에서 깨어나면서 의식의 바다도 잠시 안정을 찾았다.


눈을 뜬 비앙카는 기체를 재가동했고, 자신이 박물관이 무너지지 않은 구석에 사방에 적조가 만연한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발견했다.


입가에 온기가 남아 있었고, 옆에는 치코의 귀걸이가 흩어져 있었다. '그녀'가 곁에 있던 흔적이었다.


비앙카

...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비앙카는 추적장치를 들어 옛 흔적을 찾아 나섰다.



어린 소녀는 적조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인간형 이합생명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리브와의 비장한 전투에서 이 무시무시한 이합생명체조차 큰 타격을 입었다.


지금은 양수에 빠진 태아처럼 적조에 잠긴 여성형 이합생명체만이 남아있었다.



회언

인간형 이합생명체의 잔해를 회수했지만 적조로 복구한 이후에도 그저 껍데기로만 남아있어.



혹사

괜찮아...실험물로서는 충분해.


혹사

이 계획이 성공하면 구조체가 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계획으로 더 완전한 재생을 이룰 수 있어.


혹사

너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회언.


회언

...고마워, 혹사.


혹사

이리 와, 그레이스.



그레이스

...이것이 설마...


혹사

맞아. 구조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육신을 벗어던지고 다시 태어나는 거야...그녀와 하나가 되자.


그레이스

이런 모습의 저를 여전히 저라고 할 수 있습니까?


혹사

물론이야, 약속할게.


그레이스

...약속?


그레이스

아니, 거짓말이야!


혹사

...또 다른 선택지는 있고?


혹사

넌 이미 지쳤어, 그레이스.


혹사

기나긴 도피, 적조, 침식체…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지.


혹사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믿길 바라잖아...그것이 신이든, 손에 든 무기든, 안 그래?


혹사

너는 수많은 사람들을 속여 그들을 여기로 오게 만들었어. 사실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레이스

나는...


혹사

만약 네가 그녀의 몸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너의 말, 신의 계시, 정체는… 모두 검증되겠지. 그리고 앞으로 퍼니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거야. 괜찮지 않아?


그레이스

...


혹사

자, 그레이스. 그 기나긴 두려움과 작별을 고하기 위해 너는 이 고비를 넘겨야 해.


그레이스

...좋아.


그레이스가 자신의 결말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을 때, 닫힌 문이 물리력에 의해 갑자기 열렸다.



델라포어

승격자다...! 그리고 인간?!


줄지어 들어온 정화부대가 방 안을 에워쌌다. 모두가 무기를 들고 경계하며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다.


그레이스

...당신들은??


델라포어

비켜! 승격자의 손에 죽고 싶은 거야?!


그레이스

하지만 그녀가...



치코

사기꾼, 혹사...너도 그의 말에 넘어간 건가?!


치코

아직 목숨이 붙어있을 때 어서 가!


혹사

...


혹사는 별다른 행동 없이 완전무장한 정화부대를 향해 돌아섰다.


치코

이건...인간형 이합생명체...네놈들은 여기로 사람을 유인해 또 다시 추악한 작은 실험을 하려는 속셈이었나?


우두머리인 치코는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냉소를 지었다.


그녀가 노리스와 눈빛을 교환하자 상대방은 즉시 치코의 명령을 알아차렸다.


ㅡㅡ혹사를 죽이고 인간형 이합생명체의 모든 재생 가능성을 차단하라.


혹사

추악한...작은 실험...?


치코의 말에서 어떤 단어가 혹사의 금기를 건드린 듯, 자신의 처형의자에서 일어나자, 발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이 전해져오는 무형의 진노가 느껴졌고, 곧장 먼 곳에서 파도가 밀려올 것만 같았다.



혹사

그 사람들이 한 짓에 비하면…. 나는 거짓말도, 추악한 짓도 하지 않았어.


혹사

그런데 너희들은 그들과 같은 진영에 서서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지.


치코

무슨 소리지?


혹사

쿠로노 쿠루카와...


회언

...


혹사

다이달로스...?


치코

...!


혹사

안심해, 난 복수를 위한 싸움에 관심 없어.


혹사

그런데...너는 이 계획을 '추악하다'고 했었지. 그럼 한번 직접 경험해봐. 그 녀석들만큼 추악하지 않을 테니까.


치코

응전 준비!



ㅡㅡ전투가 끝난 뒤 대부분의 정화부대원들은 해저에서 밀려온 이합생먕체에 의해 잔해조차 남기지 않고 포식되었다.


치코

이제 됐어...죽일 거면 지금 당장 해.


전투 중 만신창이가 된 치코는 물고기처럼 보이는 이합생명체를 향해 죽음에 얽매여 발버둥치려 하지 않고 혹사를 차갑게 직시하며 두려움 없이 바라보았다.


치코

목숨을 구걸하는 꼴을 보고 싶은 건가? 승격자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괴벽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네.


혹사

...나에게 그런 괴벽같은 것은 없어.


혹사

비록 네가 나의 적이라 할지라도, 나는 네가 너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혹사

자, 내가 지금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도와줄게.


치코

원하는 게 뭐야...!


혹사

두려워 하지 마...행복한 꿈을 꾸게 해줄게.


결국 한 가닥의 감정의 허점을 드러낸 치코는 승격자가 지닌 한 가닥의 연민을 바꿀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의 인식 속에서...그런 행위 자체가 연민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사

도망친 인간 대신 이 실험을 해보는 거야ㅡㅡ


치코는 모태의 인간 형체에게 억눌리며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혹사

그것의 성공을 기도할게. 그렇게 된다면 너의 생명은 더욱 뛰어난 형태의 몸에 의해 운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


혹사

너를 축복할게...



회상 장면이 뚝 끊겼고, 치코가 인간형 이합생명체에게 녹아 들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에 멈추었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 있던 것은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변함없는 단호한 모습이었을까, 아니면....일말의 아쉬움이었을까?



치코?

...


비앙카는 알 수 없었다. 치코의 환영은 처음 이곳에 발을 디딘 순간으로 되돌아갔고, 그저 침묵하며 비앙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비앙카는 이곳이 바로 치코가 살해당한 곳이자 치코의 의식이 녹아있는 인간형 이합생명체가 자신을 구해준 곳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치코의 환영을 끌어안았다... 치코의 환영은 그녀의 품에서 잿더미조차 남가지 않은 채 사라졌다.


치코가 사라진 장소는 박물관의 거대 유리벽이었고, 비앙카는 그 안에서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심흔 기체의 코팅이 퍼니싱에 의해 부식되어 벗겨지면서 코팅 밑에 숨겨진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검장을 든 마녀였다.



비앙카

하지만 보다 더 친숙한 모습이 의식의 바다 안정에 도움이 되는 점을 고려해서 임시 코팅을 제작한 것입니다...


비앙카는 귓가를 만지며 두 사람이 처음에 난투극에서 조우했을 당시 치코가 귓가를 정리해 주며 '이래야 정화부대의 대장 답지'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비앙카는 헝클어진 긴 머리를 정리하고 치코가 남긴 귀고리를 착용한 채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고 코팅을 다시 가다듬은 뒤, 사라진 치코의 환영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비앙카

내 존재는 변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를 비웃는 건...여전히 못하겠어. 미안해, 치코.


비앙카는 눈을 감고 치코가 전하는 추억과 감정을 회상했다.



비앙카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변화를 받아들이겠어...


다시 눈을 떴을 때 비앙카의 눈 밑에는 결의로 번뜩였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마녀'의 이면으로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서 무기를 들어올려 무너지는 심해박물관을 떠나 바다의 빛을 향해 나아간다.



전투 개시




비앙카

적조가 여기까지 번진 건가...


비앙카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해.


비앙카

이합생명체들이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막다니, 마치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것 같아….


비앙카

혹사...너야?



적조 환영

비앙카...어디 가?


적조 환영

너를 대신해 임무를 인계받지만 않았어도, 치코는 죽지 않았어...너 때문에 치코가 죽었어!


적조 환영

나야, 대장, 델라포어라고...무서워, 누가 날 구해줘...나를 여기 두고 가지 마...제발...


적조 환영

비앙카...여긴 너무 추워...죽음이...이런 느낌인가? 너무 불안해...


비앙카

이 목소리는...


비앙카

...안 돼, 여기에 머무를 수 없어.



비앙카

결국 움직이는 건가?


비앙카

하지만 고작 그걸로 나를 막을 수 없어...!




비앙카

...여러분, 편히 쉬세요. 저는 이 삶의 무게를 짊어질 것입니다.


비앙카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전투 종료




???

...선홍빛 바다야.



회색의 긴 머리를 한 소녀의 환영이 창가에 조용히 앉아 유리 너머 은하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구상에 사는 주민들에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절망을 떨쳐버린 전투는 역사가 되었고, 역사는 전설로 바뀌며, 전설은 문명의 전승 속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비석에 새겨졌고, 결국 아이들의 머리맡에 있는 동화가 됐다.


'그들'에게 다음 '도약'까지 얼마 남지 않은 자유시간이 찾아왔다. 우주선이 먼지구름을 질주하면서 시간과 거리의 척도가 무한히 뻗어나갔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수천 년을 뒤쳐지게 할 정도였다.


DeLorean - 디스커버리호는 여전히 별들 사이를 항해하고 있다.


소녀의 주체 의식은 이 함선의 코어였지만, 자신의 사소한 계산력의 일부를 떼어내 투사 형식으로 이 '도서관'으로 옮기곤 했다.


이곳에 기계체가 발을 디디는 경우는 드물었고, 9.8의 시뮬레이션 중력 가속도를 영원히 유지하면서도 먼지 한 톨의 위치도 바꾸지 않았다.


얼마 전 한 소녀의 의식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곳에 왔었고, 오랜 이야기 끝에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그녀는 망설임 없이 정해진 미래를 향해 계속 나아갔다.


그래서 그녀들이 결국 여기에 왔던 된 것이다.


이제 도서관은 다시 고요해졌다. 창가에 앉아 있던 소녀의 눈에는 은하계 가장자리에 있는 별이 비치고 있었고, 이 별 표면에는 일년 내내 선홍색 파도가 일어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끝없이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인 것 같았다.


우주선 여행 중 지나친 평범한 행성 중 하나일 뿐, 어떤 형태의 생명도 살아남을 수 없었으며, 기계들이 원하는 답 또한 없었다.


다만 그 빛깔은 소녀에게 오래전, 게슈탈트의 연산을 통해 바라본 미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모리

정화부대의 대장 비앙카는 퍼니싱으로 만든 무기를 쥐어버린 바람에 완전히 '마녀'가 되어버렸어. 결국 퍼니싱에 오염된 깊은 바다에 빠졌지.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의 눈빛은 죽음과 가까울 정도로 고요했고, 마치 그 처절한 전쟁이 먼 세계의 황당한 꿈인 듯했다.




치코

저는 정화부대의 부대장입니다. 지금부터 '붉은 목소리의 신의 계시' 수색 임무에서 실종된 비앙카 대장의 뒤를 이어 임무를 계속 수행하겠습니다.



여성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체 상태를 한 채 해변에 서 있었고, 붉은 바닷물은 이미 그녀의 발목을 가늘게 때리고 있었다.


바닷물과 함께 살아남은 동료들이 치코의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었고, 구조체의 몸은 더 이상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었으며, 고장난 스피커에서는 분간할 수 없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델라포어?

'구...ㅈ....으겍...'



치코의 시선에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고, 그녀는 침묵하며 손을 들어 발밑에 부서진 인간 형체의 동력 코어를 꿰뚫었다.



바닷물이 머리까지 밀려오자, 끈적끈적한 붉은색은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고, 붉은색에 녹아든 무언가는 수많은 침식체, 숙성체, 적조 환영으로 변해가며 재형성되었다.


키가 크고 마른 인간 형체가 바다에서 나오자 부서진 랜턴이 '그녀'의 허리에서 떨어졌고, 곧이어 해안을 밟는 의식집합 숙성체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마녀!' '마녀다!' 피와 살이 떨어져 울부짖는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그녀는 인간이 이렇게 울부짖는 것을 들었다.


단말기에 동기화된 생체신호 수가 급속히 줄어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도, '그녀'의 적수가 될 사람도 없었다. 치코는 고개를 들어, 파도를 타고 자신을 뒤덮으러 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치코

네가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서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


'그녀'의 눈 아래에서 무언가가 발버둥치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의 자줏빛 입술은 기이한 미소를 그렸지만, 그녀의 눈가에는 선홍색 눈물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죽었을 때 대장이 우는 모습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아.'



치코

날 비웃는 거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날카로운 손끝으로 미끄러지듯이 치코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를 조였고, 치코는 자신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것을 느꼈다.


'…친한 친구를 죽이는 건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단말기에서 생체신호가 한 자릿수로 떨어졌고, 자신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은 치코는 웃음을 터뜨리며 눈을 감았다.



뿜어져 나온 순환액은 무기와 함께 검은 바닷물에 떨어졌다.



하늘 끝까지 진홍빛이 비치는 가운데, 청년은 공중정원 함교에서 자신을 둘러싼 구조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방에서 찾아온 칠흑 같은 총구가 이미 그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미안해...모든 게 늦어버렸어.


그도 총을 들었다.


이것이%¥—최후의...■■작별...



???

나나미님?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소녀를 추억에서 끌어내었다. 디스커버리호 관리AI가 자주 쓰는 사운드 라이브러리였다.


'나나미'

엣?


???

목표 웜홀에 접근하기 시작했으며 다음 도약은 40분 후에 시작할 예정입니다.


나나미 옆에 백발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고, 연한 금색 눈으로 근심 어린 기색을 내비쳤다.


???

무슨 일입니까?


'나나미'

아무것도 아니야. 옛날 생각이 났어.


소녀는 손을 들어 '코퍼필드 해양박물관 전투'라고 표기된 파일을 꺼냈다.


현실은 추론된 궤적을 따르지 않았다. 치코는 비앙카의 부상 이후 그녀를 대신해 해저로 들어갔었고, 해당 임무 배치에서 알아채기 어려운 교체와 조작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기에 추론 중 피할 수 없는 재앙을 바꿀 수 있었을까?


무심코 랜턴을 들고 있는 사진 위에 시선을 떨어뜨린 소녀는 손을 흔들며 화면을 닫고 새로운 시공간 지도를 꺼내 시공간 좌표를 입력했다.


빛의 점은 나무 형태의 정보 흐름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결국 표시된 위치에 멈추었다.


'나나미'

하카마, 제 2143호 자료를 4차원 통신으로 전송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줄 수 있어? 지구로 보내고 싶은 게 있어.


'하카마'

알겠습니다.


'하카마'

...이 내용이 확실합니까?


관리 AI는 소녀가 필요로 하는 데이터를 불러오고는 망설이며 물어봤다.


'하카마'

현재 지구상의 인류는 그와 관련된 모든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자료는 그들에게 있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입니다.


'나나미'

틀림 없어.


소녀는 광스크린 위의 시공간 좌표를 가리켰다.


'나나미'

보낼 곳은 여기야.


'하카마'

그 시점에서의 인류는 아직 4차원 통신을 받을 능력이 없습니다...게다가...


'나나미'

알고 있어.


소녀는 찬연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입을 다물라는 손짓을 했다.


'나나미'

기회는 이 순간뿐이야.


'나나미'

추적장치, 대량의 퍼니싱 집합체...


'나나미'

나머지는 4차원적 특성을 가진 파편만 있으면 정보를 전달하기 충분해.


'나나미'

게다가 '문'은 여전히 그들 스스로 찾아야 해. 나는 열쇠의 파편만을 보낼 거야.


'하카마'

...알겠습니다.


소녀의 웃는 모습에 관리AI도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카마'

데이터 밀봉이 완료되었습니다. 시공간 좌표는 잠겨 있으며 디스커버리 호의 웜홀 도약 중에 정보가 동시에 전송될 예정입니다.


'하카마'

잠시 후 엔진이 가동되니 저희는 제어실로 가야 합니다.


'나나미'

그래.


소녀는 시공간 지도를 닫고 일어섰고 광 스크린은 대기 상태로 돌아갔다: 짙푸른 별의 그림자가 별들의 빛 속에서 천천히 회전한다.


그녀는 마침내 그 정교한 푸른 별을 돌아보았다. 디스커버리호는 수많은 은하의 천체를 넘나들었다. 그녀는 수많은 화려한 별에 도착했고, 수많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으나, 그것만큼 아름다운 행성은 없었다.


'나나미'

...이것은 나나미가 모두에게 주는...'미래'라는 이름의 선물이야.


소녀의 투영이 점차 사라지자 소녀는 속삭였고, 마지막 말은 텅 빈 도서관에 천천히 울려퍼졌다.


메시지를 담은 역행 유성은 앞으로 넘긴 페이지를 지나 목적지를 향해 질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