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체의 성공은 곧 인류가 퍼니싱 바이러스를 대항하는 데 있어 최소한 더는 위축되지 않음을 예고하며, 진정한 의미의 반격을 개시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3시간 전



레베카

이렇게 한가하게 지내시는 걸 보니 정년퇴직할 때가 다 된 모양이네요.


레베카는 자료가 담긴 서류 가방을 티테이블 위에 찍어 그 위에 놓인 컵을 전율케 했다.



그린스

정년퇴직이라, 그건 선택을 고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다만 내가 있는 자리는 은퇴해도 지금처럼 차를 마시며 죽을 날을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야.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좀 쉬고 싶구만.


그린스는 담근 홍차 한 잔을 눈앞에 있는 이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건넸지만 상대방은 불행히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레베카

리스트의 계획은 당신이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을 불러 한바탕 벌인 덕분에 좌절되었지만, 당신 쪽에 피해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죠.


그린스

맛 좀 봐야지...쓰읍ㅡㅡ역시나 너무 쓰구만. 요 녀석이 지금 레베카보다 기분이 더 안 좋은 모양이야.


레베카의 얼굴에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고 그녀는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를 태세였다.


레베카

달에 있는 기지는 거의 수리되어 가고 있으므로 리스트가 다시 권토중래할 기회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상기하세요. 공중정원이 월면기지와 영점 원자로 관리권한을 넘겨받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노르만 가문이 그렇게 쉽게 권리를 넘겨주지는 않을 겁니다.


그린스는 미소를 지으며 잔에 담긴 홍차에 설탕을 듬뿍 넣고 촘촘히 섞으며 녹기를 기다렸다.


레베카

도대체 당신이 왜 이렇게 냉정을 유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어쩌면 이대로 가다가는 저의 계획을 재고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본질적으로 이해관계과 관련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일 뿐입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누가 되었든 저에겐 상관없죠.


그린스

물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자유였지. 자네까지 포함해서...리스트가 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자네가 그의 곁으로 가는 것을 기쁘게 환영하지. 결국 나는 감미료로서 다소 어리석은 단 맛을 위해 세계의 적이 될 준비가 되어 있어. 거기에 너 하나 더해진다고 달라질 건 없을 테지.


그린스는 껄걸 웃으며 레베카 잔의 홍차에 설탕을 듬뿍 넣었다.


그린스

하지만 난 자네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한 잔 하고 다시 얘기 좀 하자고.


그린스는 옆자리를 두드렸고, 레베카는 원치 않았지만 얼굴을 찡그리며 앉았다. 그녀가 찻잔을 들려고 하자 그린스는 아리송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린스

리스트 그 자식이...솔직히 좋은 타이밍을 잡은 건 맞았어. 정말이지 감탄할 수밖에. 루나를 잠시 잃었지만 그의 '배려'가 없었다면 상부에서 승격자와 관련된 내 수중의 모든 프로젝트를 직접 중지시키지 않았겠지.


그린스

하지만 아, 언젠가 쿠로노가 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릴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고, 그래서 내가 완전히 패배한 건 아니야…. 너에게 부탁한 이 자료가 바로 내 카드지.


그린스는 레베카가 방금 책상 위에 두고 간 서류를 집어 들고 천천히 서류 봉투를 열며 깊은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막 병마개를 연 향기로운 숙성물이 세월의 축적으로 점점 더 깊어가는 것 같았다.


레베카

당신이 내놓은 카드라는게 과거 실험의 기록들인가요? 제가 들은 바로는 이런 실험들은 효과적인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고 하는데...설마 안에 들어 있는 것조차 까먹을 만큼 늙어버린건 아니겠죠.


그린스

까먹었다고? 난 지금도 매번 참관하러 왔던 실험을 기억하고 있어. 다만 이걸 내가 나서서 묵은 장부를 들춰내면 이목을 끌지 않을까 싶어 너에게 부탁한 거지.


그린스

초기에 얼마나 많은 인력과 물자를 투입했는지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지. 역원 장치의 원리를 알아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실험의 중간 산물, 예를 들어 루나는 내 마음속에 그녀가, 나아가 모든 승격자의 출현이 역원장치의 변수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추론을 계속해 왔어.


그린스

애석하게도 그 당시 캐논 박사는 역원장치의 원리를 풀어내지 못했었지...그래서 이 모든 것이 자료로 뒷받침되지 않고 내 개인적인 추측에만 의존하고 있는 거야.


그린스

하지만 앞서 우리가 월면기지에서 루나와의 접촉 및 대화에서 역원 장치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추측은, 역원 장치의 원리가 승격 네트워크와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라는 것을 보여주지.



루나

너가...날 침식체로 만들었어?


그린스

물론 아니지. 너가 침식된 건 사고였어. 혹은...필요한 희생이었을지도.


그린스

당시 구조체 개조 기술은 캐논 박사의 연구로 성공률을 크게 높였지만 여전히 결함은 남아 있었거든….


카레니나

'필요한 희생'...


루나

그래, 너희들은 그게 '사고'라고 생각하는데...하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그린스

월면기지의 사고로...우리는 루나를 잃었고 어쩌면 그 답은 더 이상 그녀의 입에서 나오지 않게 될지도 몰라.


그린스는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이 가혹한 사실을 잠시나마 잊으려 애쓰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린스

따라서…승격자의 프로젝트가 일시 정지되는 것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아. 이제 당분간은 역원장치라는 길에서부터 새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역원장치라는 큰 산을 오르는 방법을 강구해야 해.


그린스

과거에 투입한 비용, 그것들의 남은 온기는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거지.


레베카

그런데 이전에도 실험 데이터 일부를 회수하지 않았습니까? 기체 개발팀에서는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역원 장치 연구를 담당하는 팀은 여전히 큰 진전이 없었죠.


그린스

일련의 실험 데이터는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었고, 베살리가 갖고 있는 것은 회수 우선 순위가 가장 높거나 외부인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지.


그린스

그들에게 별다른 진전이 없기 때문에 그에대한 후속 조치로 실험 데이터 회수 우선순위를 낮춰버린 거야.


그린스

두 개의 머리를 맞대면 하나의 뇌보다 똑똑해지는 법, 베살리가 제아무리 구조체 연구 분야에 출중하다고 하더라도 실험 데이터만 가지고 혼자서 해낼 수 없어...그리고 그녀가 과학이사회에 협력해 달라는 요청을 받더라도 그녀라면 결코 원하지 않겠지.


그린스

의회 측에서는 선역의 체면을 유지해야 하니까 스스로 실체 실험을 할 수 없겠지만, 이 데이터에 관해 사적으로 문의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 적어도 이 데이터들은 데이터 추론으로 잘못된 해답을 일부 배제해 줄 수 있을 거야.


레베카

잘못된 해답? 그 말은...의회 쪽에서도 이제 역원 장치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린스

'이제'가 아니야….'언제나'였지. 어쨌든 구조체 이론의 기초가 되는 이 장치에 대해 과학 이사회는 그 원리를 완전히 알고 싶어할 것이 뻔하지만, 역원장치를 아무리 끊임없이 조정해도 이론의 기초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이 자료 또한 그들에게 가치가 있어.


레베카

그렇다면…. 이걸로 의회 사람들과 거래를 해서 협력을 얻어내겠다는 건가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들은 그러한 명확하지 않은 정보를 위해 연구 결과를 우리와 공유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린스

거래한다고 말한 적 없어. 의회가 그들의 연구 성과를 보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배웅해 주면 되는 거지.


레베카

그럼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죠?


그린스

보물의 열쇠는 일부만 우리 손에 있는데 이 일부를 바쳐 보물을 열면, 우리가 보물 자체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최소한 보물의 실체는 볼 수 있을 거야.


그린스

아직도 모르겠나? 역원장치의 비밀은 우리가 직접 밝힐 필요가 없어. 어차피 이 분야의 첫 개척자가 누가 되었든, 결과는 공유하게 되어있으니까.


전 인류의 생사가 걸린 이 수수께끼는 누군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세계정부에게는 이를 공유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그린스

역원장치의 작동 원리, 거기에 루나로부터 받은 승격자의 정보, 이것이 우리의 퍼즐의 두 가지 핵심 요소지.


그린스

일을 한다는 것은 차를 마시는 것과 같아. 조금 식고나서 다시 전개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


그린스는 반쯤 식은 홍차를 단숨에 들이키고 통신을 연결했다.



세리카

...연구팀이 보내온 주간 보고 총결산입니다.



하산

연구진은 현재의 인력 투입 상황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효율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 같군.


니콜라

또한 다시 말해, 여전히 돌파구가 없다는 얘기다.


하산

역원장치 연구는 그동안 운에 의존해 왔고,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운명과 게임을 해왔었지.


니콜라

애당초 그 기체에 대한 계획에 도달하기 위해 역원장치를 공략하는 것은 결코 놓칠 수 없는 문제다.


하산

그래, 알고있네.


그레이 레이븐 소대원을 적응자로 한 새로운 특화 기체는 시급하면서도 지지부진한 연구 과정에 놓여있다.


거의 자해에 가까운 대가를 치르는 백야 기체와 달리 새로운 특화 기체는 사용자가 퍼니싱 바이러스에 완전히 면역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기체의 성공은 곧 인류가 퍼니싱 바이러스를 대항하는 데 있어 최소한 더는 위축되지 않음을 예고하며, 진정한 의미의 반격을 개시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백야 기체가 적응자의 쓰라린 경험을 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기체에 탑재된 역원장치 작동 효율이 퍼니싱 바이러스를 흡수하는 특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오메가 무기의 흡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면 축적된 바이러스에 의해 적응자가 감염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역원 장치의 파라미터를 좌우하여 적응자의 필요에 따라 맞춤형으로 최적화할 수 있다면, 새로운 특화 기체는 퍼니싱 바이러스의 침입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역원장치 원리를 푸는 문제가 다시 한 번 우선순위가 올랐다.


하산

지상에 좋은 소식은 없나?


세리카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세리카

더 나쁜 소식은 없으니...좋은 소식이라고 할 수 있겠죠?


회의실은 잠시 침묵에 빠졌고, 커피의 모락모락한 열기와 환기 시스템이 보내온 찬바람이 뒤섞여 잔 속의 열기를 서서히 식혀갔다.


세리카

잠깐, 통신이?… 쿠로노 쪽에서 왔습니다. 제가 먼저 거절할까요?


하산

아니, 받게.



그린스

오랜만이네, 의장 어르신. 그리고 닉...흐음,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도 묵직한 분위기게 느껴지는군.


니콜라

그린스, 무슨 용무지? 단지 옛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면 필요 없다. 우리는 너와 달리 매우 바쁜 상황이다.


월면기지에 대한 긴급회의가 끝난 뒤 그린스는 마치 회의장에 깜짝 등장했듯이 한동안 잠적해 있었다.


'그린스의 세력은 서서히 잠식되고 있었고, 쿠로노의 형세는 리스트 측에 기울어지고 있다'는 말은 사실무근이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그린스가 어떤 짓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니콜라와 핫산 역시 이때 그가 나타난 목적을 곰곰히 따져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린스

확실히 옛날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오늘이 지나면 닉이 나에게 밥을 한 턱 쏴줄지도 모르겠는데...결국, 나는 두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될 테니까 말야.


암호화된 파일 내용이 전송 준비 중이라는 안내문이 화면에 뜨자 하산과 니콜라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세리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보라고 지시했다.


하산

좋은 소식? 그야말로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격이군.


그린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자료는 쿠로노의 초기 비밀 연구 기록, 주제지. 아마 너희들도 짐작하실 수 있을 거야. 바로 역원장치를 겨냥한 것이다.


하산과 니콜라가 재빨리 눈빛을 교환하자 그린스의 말투는 더욱 즐거워졌다.


그린스

이 자료는 가장 초기의 실험 기록으로, 이 안에는 모두 가장 사실에 입각한 데이터가 있으며, 현재 추계한 실험 결과와 본질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이해해야 해.


하산

...실체실험의 기록?


니콜라

구조체에 대한 실체실험은 불법이다...이걸 감사원에 제출하면 다음 생애까지 감옥에서 식사를 할지도 모르겠군.


그린스

그래서 소중한 자료라는 거다. 이런 실험들은 모두 구조체 보호 규정이 생기기 전에 일어난 것이니 오해하지 마. 개인적으로는 진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법을 잘 지키는 모범 시민이기도 하지.


니콜라

무엇을 원하지?


그린스

닉, 내가 봉사같은 걸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나?


그린스

난 분명 인류의 진보를 위한다고 말한 바 있었지. 내가 원하는 것은 인류가 역원 장치의 비밀을 푸는 데 도움을 주는 것뿐이야.


니콜라

...


그린스

데이터가 조작됐다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데이터를 하나 더 받아보기로 하는 건 어떨까? 성의 있지? 마찬가지로 나도 의회가 반드시 백업본을 회수해 돌려줄 것이라고 믿고 있어.


하산

회수? 그 말은 이 데이터가 현재 지상에 있다는 뜻인가?


그린스

그렇지. 전쟁 초기에는 많은 사회복지기관들이 생겨났는데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언한 수많은 어린이들이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와 역원장치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 음, 이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감동시킨구만.


그린스는 마치 슬픔이 묻어나는 장면을 연기하는 듯 고개를 떨궜다.


그린스

애석하게도 철수를 위한 준비 시간이 부족했고, 많은 귀중한 것들이 땅에서 다시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린스

다음에 내가 한 복지기관의 좌표를 보내주겠네. 사람을 보내면 그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게야.


니콜라는 그린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호의의 이면을 찾으려 했다.


그린스

닉의 이런 표정을 날 참말로 슬프게 만드는구만, 우리 사이에 약간의 믿음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그린스

아니면, 자네들은 나에게 조금이나마 기여해주기를 원하는 건가? 음...그렇다면 차라리 회수 임무에 참여할 대원을 내가 지목하는 건 어떨까.


몇 초 동안 잠시 생각에 잠긴 그린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린스

닉...케르베로스의 베라는 어떨까?


니콜라

베라? 왜 그녀를 선택했지? 그녀는 더 이상 쿠로노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린스

알아. 하지만 과거 쿠로노의 시설을 조사하는 거라면 그녀가 가장 적임자일 테니까.


니콜라

흥...세리카, 베라는 최근 임무로 바쁜가?


세리카

베라 양은...이틀 전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고 대기중입니다.


하산

좋다. 다른 소대에 대기 중인 구조체는 있나?


세리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현재 청정백로 소대 밤비나타 양, 그리고 한양소대….


하산

그래, 밤비나타가 베라와 함께 동행하도록 하지. 현재 지상의 상황은 엄중해 2인이 함께 수행하는 것이 효율과 안전성을 더 높일 수 있는 방법이네.


세리카

알겠습니다. 즉시 임무 브리핑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린스

그럼 거래는 끝난 건가? 오, 아니지, 잊고 있었네. 이건 거래가 아니지. 그럼...희소식을 기다리마.



니콜라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이건 너무 위험해.


하산

알고 있네. 그러나 호리병 안에 어떤 약을 팔고 있는지 알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행동거지를 똑똑히 보는 걸세.


하산

쿠로노의 그 실험들 중 일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데이터는 확실히 참고할 만하지. 우리도 이전에 논의한 바 있지만 그린스 혼자 올 줄은 몰랐네. 베라 쪽에 제안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니콜라

그 계획 말인가? 내가 그녀에게 전달하지.


하산

그래.


니콜라

청정백로의 구조체...베라와 함께 가야 하는 건가?


하산

그녀에 내력에 대한 인상이 아직 남아있나?


니콜라

그렇네. 하지만 그녀의 현 상태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군.


하산

이것은 하나의 게임인 만큼, 차라리 숨겨진 모든 변수가 작동하도록 하는게 낫네.



레베카

케르베로스 소대의 대장? 설마 지난번에 의회의 집행부대와 관계를 걸쳤다는 말인가요?


그린스

나는 줄곧 베라양에 대해 좋은 인상을 품고 있었지.


레베카

그렇다면 왜 특별히 그녀를 보내 회수에 참여하게 한 거죠? 만약 당신이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안고 싶다면, 의회가 그녀를 주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때 아틀란티스에서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건대...


그린스

그녀와 닉은 모두 쿠로노에서 나온 자들이지. 잠깐뿐이지만 그들은 가장 견고한 유대란 바로 이익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을 거야. 자신의 이익이 훼손되지 않길 원한다면, 강아지는 당연히 말을 들어야 해...그들의 '유대'가 얼마나 단단한지 잠깐 떠봤을 뿐이라고.


그린스는 하산이 아까 지명한 어디서 본 듯한 이름의 또 다른 구조체를 떠올렸고, 옅은 인상으로 또 다른 자료를 찾아낸 그린스는 두 페이지를 넘긴 뒤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린스

밤비나타? 하하하하ㅡㅡ


레베카

뭐가 웃긴가요?


그린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베라

이 임무에 반드시 2명의 구조체가 참여해야 하는 건지 궁금한데?


수송기 문이 천천히 열리자 미풍은 수송기 특유의 소독제 냄새를 풍기며 베라의 빨간 머리를 살랑살랑 불어댔다.


세리카

베라 양...지상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하산 의장님과 니콜라 총사령관님은 당신과 밤비나타 양이 서로의 안전을 도모하며 속전속결로 처리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베라

나뿐만 아니라 조용한 인형도 같은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베라는 밤비나타를 향해 단말기를 겨누었다.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임무에 어떠한 이의도 없습니다.


밤비나타

하지만 필요하다면 밤비나타 혼자서도 임무를 완수할 수 있습니다.


베라

봐봐.


???

세리카, 나에게 넘겨.



니콜라

임무가 갑작스럽게 진행돼 사전에 목표지점에 대한 선발정찰을 실시하지 않았고, 현재 파견 결정을 내린 것은 회수 과정에서 이변이 없길 바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콜라

궁금한 게 있다면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방법으로 답변해주지. 이상.


베라

...


세리카

...부탁할게요. 베라 양, 밤비나타 양.


세리카의 말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베라는 니콜라의 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부분을 느꼈다. 그리고...


어쩌면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이는 이 임무는 한치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하나의 게임이었고, 그녀는 강제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 인형처럼 차려입은 구조체는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 특별히 배치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통신에서 니콜라가 마지막으로 말한 '적절한 시간'과 '적절한 방식'은 그 총사령관이 단순히 자신의 명령을 설득하기 위한 위로의 표현으로 쓰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베라는 이미 짐을 꾸리고 대기 중인 동료에게 눈길을 돌렸다. 수송기가 도착한 후, 그녀는 줄곧 얌전하게 뒷칸에 앉아 베라의 통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베라

...넌 어느 소대지?


밤비나타

주인님의 소대명은 청정백로입니다.


베라

주인님? 하하하하하하하하ㅡㅡ꽤나 괜찮은 호칭이네. 녹티 녀석도 배워둘 필요가 있어 보이는걸.


베라

너의 주인님이 널 이렇게 차려입혀줬구나. 임무가 없을 때 청정백로 사람들은 궁전에서 지내고 있나봐?


밤비나타는 베라의 농담에 대해 가타부타하지 않았고, 베라 역시 아예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고, 수송기의 문이 위로 젖히기 시작할 때, 한쪽 발이 천천히 움직이는 문짝을 밟았다.



밤비나타

주인님? 어떻게...



바네사

이번 임무는 내가 임시 지휘관 자격으로 파견되었어.


바네사는 점등된 단말기를 베라에게 보여주며 지금까지 누가 이곳을 장악했는지 상대방에게 납득시키려 했다.


베라

청정백로의 지휘관? 아~생각났어. 너희 팀에는 한 명밖에 없는 것 같은데? 너의 주인님이 어여삐 여긴 모양이네. 하늘같은 지휘관이 일개 구조체를 위해 직접 임무를 신청할 줄이야.


베라는 바네사의 눈을 마주하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베라

마침 잘 왔어. 안 그래도 너의 소대원과 교류하려고 진을 빼던 참이었거든.


바네사는 우아하게 단말기를 접은 뒤 돌아서서 밤비나타 옆에 앉았다.


밤비나타는 바네사의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밖에서 출발을 지시하는 안전요원에게 게이트를 계속 조종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바네사

그럼 케르베로스의 대장과 내 소대원 사이에 어떤 교감이 오고갔을까?


베라

시작은 순탄치 않아. 하지만 우리는 다음에도 시간이 많이 있잖아,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