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네사는 오랜만에 밤비나타와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길을 따라 흩어져 있던 적을 치우고 난 뒤, 다소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이 가로수길 끝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련된 무늬 타일이 박힌 돌계단 구조물이 우뚝 솟은 첨탑에게 유니크하면서도 다가갈 수 없는 소외감을 선사한다. 브라운 컬러와 다크 그린 컬러의 페인트를 매치한 것도 황금시대에 유행했던 복고풍 컬러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이 복지시설은 나중에 쿠로노의 명의로 운영되었지만, 쿠로노가 인수하기 전에 이곳을 아늑한 시설로 만드려고 했던 건축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복지시설...만약 밤비나타가 부모에게 입양되지 않았다면 지금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바네사는 오랜만에 밤비나타와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오후 2시에는 탄소섬유 소재의 블라인드가 설정된 시간에 맞춰 자동으로 걷히며 밝고 눈부신 모조 햇빛을 거실에 들여보낸다.


본래 이 시각에 낮잠에서 깨어나야 할 바네사는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한 번 세수를 하고, 어머니의 끈질긴 권유로 어린이용 커피우유를 마셨다.


일부러 도자기 잔을 책상 위에 둔탁하게 내려놓았지만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생각만큼 어른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바네사는 소파에 괴로워하며 가느다란 종아리가 초조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페트라

바네사, 왜 아직도 소파에 앉아 있어?


바네사

엄마, 걔가 집에 안왔으면 좋겠어!!


페트라

바네사, 지난번에 이미 이야기했잖아. 이제 셔츠를 정리하렴. 그 사람들이 도착할 거야. 집안 망신 시키지 말고.


바네사

아빠...



레이몬드

바네사, 이리 오렴.


레이먼드는 거울을 보며 옷깃을 여민 뒤, 바네사가 들뜬 셔츠 자락을 정리하는 것을 돕기 위해 몸을 굽혔다.


레이몬드

이러니 훨씬 보기 좋네. 일주일 전에 엄마가 너에게 얘기했지?


레이몬드

이제 곧 너에게 여동생이 생기니 기뻐해야 돼. 네 여동생에겐 말할 것도 없고...어쨌든 모두 널 위해서야.


페트라

시간 됐어. 주택가 입구로 가야 해. 그 사람들은 여기로 못 들어와.


페트라

바네사, 예의를 갖춰. 엄마가 평소에 어떻게 너에게 말했는지 잊었니?


바네사

하지만 나는 여동생을 원하지 않아!


페트라

지금 엄마 화나게 하지 마.


어머니가 정성껏 다듬은 얼굴이 금세 차가워지자 바네사는 차마 고개를 쳐들고 어머니의 표정을 확인하려 하지 못하고 주눅이 든 채 입술을 깨물었다.


레이몬드

가자.


다가오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어린 아이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하는 것은 아무런 지연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갖고 싶지 않은 '여동생'을 향해 어른들과 함께 따라갈 수밖에 없다.



공중정원은 본래 이민함선으로 설계되었기에 지나치게 호화로운 설계기준으로 주거 구역을 계획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며, 특히 인류의 방주로 기능이 바뀌면서 주거 지역은 입주민 수와 쾌적함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소박한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은 눈앞의 홀로그램 연못 풍경과 자동으로 빛의 투과율을 조절하는 건축물에 여전히 충격을 받았다. 같은 간이 거처인데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은 몰랐었다.


정신을 차리고 침을 삼키자 멀찍이 떨어진 유리문 안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자 그는 뒤에서 홀로그램 연못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 소녀를 툭툭 치며 정신을 차리라고 손짓했다.



페트라

정말 오랜만이야! 오는 길 힘들었지!


페트라

어때, 아직 연구는 잘 되어가?


쿠로노 연구원

그럭저럭이죠. 페트라 씨와 함께 했을 때보다 눈에 띄게 추진되긴 커녕 오히려 더 많은 문제가 생겨버렸어요. 뭐, 예를들면 이 아이의 기억상실증이라든가.


레이몬드

현재 이런 의식 질환에 대해 내부적으로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습니까?


쿠로노 연구원

네, 레이몬드 박사님. 그녀의 실험 데이터 일부를 백업해놨고, 모두 짐 속에 있습니다.


쿠로노 연구원

멍하니 있지 마, 밤비나타. 자, 이분들이 이제 너의 아빠와 엄마야.



연구원은 밤비나타를 뒤에서 두 어른 앞으로 끌어냈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 아래에 있는 소녀는 앙증맞은 사슴과 같았다.


페트라

우릴 봐봐. 일따윈 모두 잊으렴. 이름이 밤비나타 맞지?


밤비나타

네...엄마.


페트라

참 착하구나. 자, 어서 바네사 언니를 보렴. 바네사, 이리 와.



페트라와 레이몬드 뒤에 있던 소녀가 마지못해 앞으로 나섰고, 그녀는 화가 난 듯 목을 뻣뻣하게 세운 채 밤비나타를 바라보는 것을 거부했다.


밤비나타

...바네사 언니...


바네사는 성가심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밤비나타가 연구원 뒤로 물러나려다 버티는 모습을 보며 더욱 경멸적인 눈빛을 보냈다.


바네사

흥.


레이몬드

바네사 언니는 이제 막 낮잠에 깨서 조금 피곤한 모양이야.


페트라

바네사, 밤비나타에게 제대로 인사하렴, 예의 안 갖출 거니?


바네사는 고개를 숙인 채 마지못해 밤비나타의 손을 잡고 흔들어 그것을 악수로 간주했다.


쿠로노 연구원

...하하하, 아직 어린 얘잖아요. 낮잠을 자다 깨우면 기분이 좋지 않은게 정상이죠.


쿠로노 연구원

밤비나타, 앞으로 넌 아빠, 엄마, 언니와 함께 공중정원에서 살게 될 거야.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만 바랄 수 없는 행운이란다. 그러니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어야 해, 알겠니?


밤비나타

네. 아저씨, 이제 가시나요?


쿠로노 연구원

그래. 넌 이제 실험하러 돌아오지 않아도 돼.


밤비나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전에 고개를 숙이고 감정을 감추었다.


쿠로노 연구원

밤비나타는 언제나 가장 말을 잘 듣는 편이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박사님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쿠로노 연구원

다음 연구에 어떤 진전이나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십시오. 당신 같은 전문가가 힘을 내는 것을 그쪽에서 모두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일에 대해 이야기하자 바네사는 곁의 '여동생'을 곁눈으로 살며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거추장스러운 땋은 머리, 애처로운 표정, 대충 차려입은 옷...하지만 엄마 아빠는 그녀에게 친절하고 상냥하다...


ㅡㅡ일부러 말을 잘 듣는 모습을 보여주며 엄마, 아빠의 시선을 빼앗는 게 역겹다.


아, 그녀가 봤어! 짜증나, 날 쳐다보지 마!


페트라

아참, 밤비나타를 환영하는 의미로 새 가족사진 찍는 것좀 도와줄래?


쿠로노 연구원

좋습니다. 여기서 찍을까요?


페트라

이리 와봐. 여기 배경이 좀 예뻐. 자, 얘들아.


레이몬드

밤비나타, 자, 내 앞에 서렴.


레이몬드는 온화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고 참을성 있게 여자아이의 반응을 기다렸다.


밤비나타는 아버지 앞을 향해 걸어갔고, 카메라를 향해 자세를 가다듬었다.


페트라는 바네사를 밤비나타 옆으로 데려가 버네사의 어깨를 움켜쥐고 카메라를 보라고 했다.


쿠로노 연구원

준비, 사진 찍습니다. 스마일, 3, 2, 1ㅡㅡ



바네사가 1만 번 원하지 않아도 밤비나타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번 주 들어 레이몬드와 페트라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집에 머물렀지만 낮에는 예외 없이 밤비나타와 함께 있었다.


바네사는 문틈으로 그들을 훔쳐봤고, 아버지가 부드럽게 밤비나타의 뒤통수에서 이음새를 떼어낸 후 어머니는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웃음은 페트라처럼 엄한 어머니에게는 흔치 않았다.


실험실의 낮부터 네 사람의 집에 속한 밤까지, 바네사는 더욱 심해진 제멋대로인 성질머리를 이유로 언제나 혼나고 야단맞는다.


레이몬드와 페트라는 실험이 추진되는 것에 기뻐했고, 밤비나타의 협력은 연구를 더 원활하게 만들었다.



퍼즐을 공략하는 짜릿함이 이들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동안, 과학의 범주 밖에서 생긴 내부의 균열을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탁ㅡㅡ


바네사

야! 누가 나랑 엄마 아빠 사진 바꾸라고 했어?!


바네사가 거실에 들어서자 밤비나타는 바뀐 가족사진 액자를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밤비나타 없이 찍은 세 사람의 사진은 현재 어디론가 사라졌다.


잔뜩 화가 난 바네사는 밤비나타의 품에 있던 액자를 밀쳤고, 액자는 단단한 바닥에 떨어져 아삭아삭 깨지는 소리를 냈다.


밤비나타는 바닥에 쓰러지고 어쩔 수 없이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밤비나타의 얄미운 표정을 지켜보던 바네사는 다시 한번 질문을 반복했다.


바네사

물어봤잖아! 누가 나랑 엄마 아빠 사진 바꾸라고 했어??


밤비나타

엄마가 새 사진을 넣으래서...그래서...


바네사

잘 들어, 난 네가 내 여동생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네가 나의 엄마 아빠를 뺏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야!


바네사

누가 너처럼 말 잘듣는 척 흉내내는 건지, 엄마 아빠는 연기하는 모습에 속아 넘어간 거야!


바네사

...난 니가 싫어!!


그때의 밤비나타의 표정은 어땠었지? 놀란 표정? 안절부절 못한 표정? 애처롭게 울 것 같은 표정?


바네사는 밤비나타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넣으면서도 어렴풋이 아련한 느낌을 받았다.



베라

이봐, 정신차려!


베라

멍때리지 마. 이미 예정된 장소에 도착했으니까. 청정백로는 윗놈이든 아랫놈이든 정신머리가 청정한 놈들이 하나도 없는 거야?


바네사는 곧바로 단말기를 들고 확인하며 때아닌 추억을 머릿속에서 다른 곳으로 던지려 노력했다.


바네사

작전 중 위험요소를 고려하고 있었어. 만일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내가 누구에게 퇴로 차단을 맡길지 맞춰볼래?


베라

밤비나타, 주인님이 널 부르잖니.


밤비나타

주인님?


바네사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먼저 정문을 피해 저쪽 창문으로 내부를 관찰한다.


바네사가 쪼그라드는 것을 보고 베라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이미 망가진 유리창 쪽을 향해 선두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