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나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



지하 밀실 입구의 존재는 알아냈지만 밤비나타가 밀실에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를 위해 바네사와 베라는 여전히 길을 따라 각 방을 빠르게 돌며 밤비나타의 행방을 확인했다.


잃어버린 감각이 바네사를 다시 찾아온다.


테슈가 떠난 뒤 '인형'의 부재는 이렇게 빨리 재연되었다. 바네사는 밤비나타가 당장 테슈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오랜 불안감이 누적돼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문을 열고, 수색하고, 문을 닫는다. 낡은 문짝이 돌면서 삐걱삐걱 소리를 내자 마치 바네사의 귓가에 다시는 돌아보기 싫은 어떤 꿈속의 말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바네사의 추억 속에서도 그 어느 문보다도 큰 소리를 울리는 문이 있었다.



밤비나타

바네사 언니? 자고있나요?


바네사의 마음을 느낀 것인지, 또 바네사의 숨소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인지한 것인지 모른다.


바네사

...


바네사

이젠 정말 너에게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을 것 같아.


밤비나타

아까 엄마 아빠 말이 고민이에요?


바네사

...밤비나타, 정말 아무 재능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


바네사

매번 내가 아직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걸까?


바네사가 한 명 차이로 실험실 조수 선발에서 탈락하자 레이몬드는 인맥을 동원해 공교롭게도 한 명의 인원을 더 뽑았다. 페트라는 파티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 화를 내며 바네사가 앞으로 한 달 동안 접하게 될 프로젝트를 집에서 잘 예습해 다시는 망신을 당하지 말라고 했다.


밤비나타

바네사 언니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밤비나타는 전부 알고 있어요.


바네사

재능이 없는 사람에겐 시간이 아무리 많이 주어져도 소용이 없어.


바네사

그때 발레를 배웠을 때처럼, 내가 옆에서 연습할 때마다 넌 사실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지.


바네사

넌 나처럼 바보같이 기초적인 것들을 반복해서 연습할 필요가 없었어.


밤비나타

바네사 언니는 실험실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나요? 엄마는 실험실에 들어오면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는데, 기쁘지 않나요?


바네사

나는 이 진로에서 발레를 하는 것보다 더 재능이 없는걸.


바네사는 마침내 몸을 돌려 밤비나타를 향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바네사

재능이 없으면 제아무리 가봤자 헛수고야. 최선을 다해도 남을 못 따라가는 모습에 나도 정말이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아.


밤비나타

그렇지 않아요. 바네사 언니는 그냥... 네, 그냥 좋아하는 걸 못 찾은 거예요.



바네사가 스스로를 그렇게 깎아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서둘러 부인해야 한다.


바네사의 정설에 따르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은 분명 그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밤비나타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면서 눈빛은 바네사의 눈에 감춰진 연약한 모습을 따라갔고, 절절한 시선으로 아까의 변명을 입증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시선이 너무 강렬했는지 바네사는 살짝 웃었다.


바네사

오직 너만이 내 말을 들어주는구나...하하, 내가 어렸을 때 널 집에 들여보내지 않으려 했던 기억이 나.


바네사

밤비나타…. 내가 진정으로 결과를 낼 수 있는 걸 찾길 바란다면, 넌 날 지지해줄거니?


밤비나타

네.


밤비나타

바네사 언니가 무엇을 하든, 밤비나타는 응원할 거예요.


군더더기 없는 말이없다. 더 많은 말은 이 순간 오히려 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바네사는 왼쪽 귀의 이어폰을 벗고 밤비나타에게 건넸고, 끝나지 않은 음악은 둘로 갈라져 서로 다른 구조의 두 심장에 동시에 울려 퍼졌다.




며칠 후.



페트라

뭐? 실험실에 가고 싶지 않다고?


바네사

네.


바네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바네사는 밤비나타에 비교했을 때 더 이상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때의 아이들은 이미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고 싶은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늙은 기수는 길을 안내하는 깃발을 기꺼이 내려 놓지 않을 것이다. 젊은 탐험가가 허락 없이 목적지를 벗어나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페트라

안 돼.


페트라

바네사, 네 아버지가 너의 일 때문에 몇 명이나 연락했는지 알아? 그저꼐 엄마가 또 밖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같이 웃고 지냈는지는 알고 있고?


레이몬드

바니, 너...


바네사

...말했잖아요, 별명으로 부르지 말라고요.


레이몬드

너의 지금 행동은 매우 비이성적이야. 엄마 아빠를 정말로 슬프게 만드는 구나. 너는 우리가 너를 위해 계획한 길이 반드시 가장 올바른 몇 가지 길 중 하나임을 알아야 해.


바네사

하지만 부모님이 원하는 보답은 제가 이룰 수 없어요. 저는 이 방면에 천재도 아니고, 저도 원하지 않아요. 저도 제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없고요. 그 사이에 들이는 노력과 시간도 의미가 없어요. 그렇다면 제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안 될까요?


바네사

부모님이 원하는 것도 제가 1등의 결과를 내는 거 아니었어요?


페트라

천재가 아니다? 싫다? 너가 누군데 이 세상이 네가 원하는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건데?


바네사

하지만 저 스스로 세계를 탐험할 권리는 언제나 있지 않나요?


페트라

가령 너의 안목으로 적성에 맞고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고 확실히 해낼 수 있을까?


페트라는 소파에서 일어섰고 그녀의 입술은 약간 떨렸다.


페트라

넌 내가 누굴 위해 나의 프로젝트, 학위를 포기했다고 생각하는건데?


페트라

만약 내가 너의 아버지와 그 해의 연구를 계속했다면, 지금 나의 주된 연구 방향이 다른 부잣집 아내와 어떻게 효과적으로 연락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었겠지.


페트라

너는 네가 크면 너의 날개로 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널 자라게 한 따뜻한 보금자리가 누구의 깃털로 만들어졌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페트라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마치 이곳의 모든 것이 그와 공명해야 하는 것처럼 달갑지 않은 느낌이 거실을 가득 메웠다.


레이몬드

바ㄴ...바네사, 아빠 말 들어, 엄마 화나게 하지 마.


레이몬드

다음 달에도 놀러 가지 못해서 기분이 나빠진 거니?


레이몬드

그럼 밤비나타를 데리고 3일 동안 쉰 다음 다시 일을 시작하는 건 어때?


레이몬드는 옆에 있던 밤비나타를 바네사 앞으로 데리고 가서 밤비나타에게 바네사를 달래라고 손짓했다. 밤비나타는 바네사의 손을 살며시 잡았지만 바네사의 눈빛은 더욱 강렬했다.



바네사

그래서, 엄마,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거야? 엄마 손아귀 아래서 나 스스로 포기한 꿈을 이루라고?


바네사

아빠, 실험실에서 프로젝트의 리더로서 명령을 내리는 건 아빠의 지위에서 나오는 표현일테고 확실히 아빠는 불필요한 항목의 세부 사항을 물어볼 필요도 없어. 하지만 여긴 집이잖아.


바네사

아빠의 인상 속에서 나는 도대체 몇 살인 거야? 지금처럼 아빠의 '프로젝트'가 발전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 말고 아빠는 내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어 본 적 있었어?


바네사

정말로, 좀 웃긴 질문이지만...하지만 난 엄마아빠가 여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고 내기할 수 있어ㅡㅡ엄마아빠는 정말로 날 사랑한 적 있어?


부모님은 나를 사랑할까? 질문 자체는 바보같지만 밤비나타는 바네사의 목소리에 담긴 떨림을 들을 수 있다.


방 안에서 가장 가벼운 개체는 바네사의 손을 꼭 잡고 그 작은 힘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한다.


페트라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럼 내가 왜 너를 위해, 이 집을 위해 이렇게 많은 것을 바칠 필요가 있어? 세상에, 바네사, 너는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


바네사

아니.


바네사

난 느꼈어. 부모님은...나에게 사랑받을 부분만을 사랑한다고.


바네사

당신들의 눈에는 가치 있는 부분만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아.


바네사

난 정헀어. 집을 떠나 파오스 사관학교에서 공부할 거야. 내가 정의하는 가치를 스스로 찾을 거야.


레이몬드

사관학교? 너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바네사

알아, 확실히 단말기에서 전황에 대한 설명을 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선택의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바네사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나만의 생각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거야.


페트라

제멋대로 구니까 좋아? 바네사?


페트라

허...네 눈으로 본다? 스스로 판단한다? 전쟁의 참상에 대해 넌 아직도 실험용 쥐새끼 한 마리만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도대체 어떻게 판단할 건데?


페트라

부모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자유로움,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


페트라

아니면 단말기에서 볼 수 있는 자료만으로도 너의 재능이 군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뜻이야?


바네사

엄마 말이 맞아. 난 할 수 없어. 하지만 난 통제에 실패한 꼭두각시가 된 느낌에 이미 싫증이 나버렸어.


레이몬드

바네사, 이걸 어떻게 통제라고 할 수 있지? 이것은 우리가 너의 미래를 위해 정밀하게 계산한 결과야.


레이몬드

진심으로 전쟁에 공헌하고 싶다면 연구의 방향 역시 다양할 거고 전투를 겨냥한 연구 역시 셀 수 없이 많을 거야. 그때쯤이면 우리 집안의 경력과 지원을 배경으로 쉽게 성과를 이룰 수 있어.


레이몬드

그때가 되면 누구나 너의 성취를 보게 될 거고, 너의 이름을 기억하고, 네가 얼마나 완벽한 과학자 가문에서 태어났는지 알게 될 거야. 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거니?


바네사

즉, 지금은 순순히 과학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해도 앞으로의 연구 방향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닌 거네. 결국 왕좌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미 포장된 길뿐이고. 그리고 난 왕관에 달린 보석일 뿐이고, 진정으로 왕관을 쓰는 것은 나의 성씨겠지.



바네사는 밤비나타를 붙잡고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바네사

됐어, 엄마, 아빠. 사실 처음부터 당신들이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하길 기대하지도 않았어.


바네사

이미 단말기에 서명해놨어. .지금쯤이면 이미 모든 준비는 다 끝났을 거야. 4일 뒤 아침에 파오스의 첫 수업이 시작될 거고.


바네사

짐은 사실 이미 거의 다 정리해놨어. 마지막으로 밤비나타는 나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녀의 메모리칩 유지방법을 알려주고 교체품을 줬으면 해.


페트라

바네사, 넌 정말이지...실망스럽구나.


페트라

이런 짓은 자신의 가치를 낭비할 뿐이야.


레이몬드

...


레이몬드

안 돼. 밤비나타...그녀의 프로젝트는 지금 이미 막다른 골목에 있어. 밤비나타는 떠날 수 없다.


레이몬드

게다가 나는 너의 행동에 동의하지도 않았고, 네가 실험의 중요한 멤버를 데리고 가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어.


바네사

실험의 중요한 구성원? 처음부터 끝까지 밤비나타는 당신들에게 있어 집에서 기르는 실험물이었어?


바네사

그리고 당신들을 대신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딸의 장난감이자, 동시에 '말 잘 듣는 아이'의 완벽한 예시일 뿐인 거야?


페트라

우린 밤비나타와 너에게 공평하게 대했어. 어려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우리는 조금도 밤비나타를 박하게 대한 적 없었다고.


페트라

밤비나타, 너도 바네사를 따라다니면서 엉터리같은 생각을 배웠지?


레이몬드

...밤비나타, 아빠는 네가 이렇게 말을 안 들을거라고 믿지 않아. 엄마 아빠가 실험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잖니?


레이몬드

어떻게 우리를 떠나 바네사와 함께 소란을 피울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바네사

밤비나타는 실험실에서 당신들의 실험만을 위해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야!



<//자신>의 생각?


금속과 각종 합성 재료를 엮어 만든 기체 한 가운데에서 한 번도 직시하지 못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발레실의 거대한 거울이 다시 떠오르고, 밤비나타는 작고 낯선 사람의 모습을 응시한다.



<//자신>은 어디에 존재할까? 의식의 바다? 합금 척추? 아니면...메모리 칩 안에?

    

밤비나타는 인형의 각 파츠를 찬찬히 살펴보며 <//자신>을 탑재한 부품과 <//자신> 자체를 찾으려 했다.



바네사

너는 발레를 좋아해, 내 말이 맞지?


그저 어떤 모습을 동경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것을 흉내 내는 것이 좋아하는 표현의 의미일까?



바네사

밤비나타…. 내가 재능이 있는 것을 찾길 바란다면, 넌 지지해줄거니?


바네사 언니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은 명령에 따르는 습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일까.



바네사

분명 악속했는데도 기억 안 난다면서...


무언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착한 아이가 되는 것과 반대되는지 알기를 <//원하는> 것일까?


완고한 껍데기 아래 부드러운 마음을 듣길 <//원한다>ㅡㅡ


방울방울 맺히며 흐르는 눈물을 멈추길 <//원한다>ㅡㅡ


결과 속에 빛바랜 노력을 매 순간 인정받길 <//원한다>ㅡㅡ


하지만ㅡㅡ



쿠로노 연구원

어떻게 한다라...스스로를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라고 여기렴.


그러니까...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세 사람은 밤비나타를 바라보며 자신 있게 그녀의 입에서 원하는 답을 얻기를 기대하고 있다.


밤비나타의 대답은ㅡㅡ


침묵이다.


착한 아이가 되려면, 그에 반하는 <//자신>은 잘못된 것이다.


<//원한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수천 일 밤낮 동안 올려다 본 그 눈을 감히 더 이상 돌아볼 수 없다고 해도, 침묵은 여전히 밤비나타가 줄 수 있는 정답에 한없이 가까웠다.


바네사

...


페트라

허. 보렴. 네가 지금처럼 행동하면 아무도 진심으로 너와 함께 있고 싶지 않을 거야.


레이몬드

바네사, 밤비나타는 어릴 때부터 너보다 말을 잘 듣고 우리를 배려할 줄 알고 있었지. 몇년이 지났는데도 왜 너는 조금도 배우지 못한 거니?


바네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밤비나타를 덤덤히 바라보았다. 마치 방금 논쟁을 벌인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는 듯이.


가볍게 손바닥을 풀자 작은 손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그래도 밤비나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네사는 눈을 돌려 다소 비꼬는 미소를 지었다.


바네사

그래, 나도 솔직히 옆에 자꾸 성가신 녀석이 있는 게 지겨우던 참이었어.


바네사

곁에 두고 싶은 것을 빼앗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면 되는 거야.


바네사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거역할 수 없게 할 거고, 그때 다시 돌아와서 내가 찾은 가치를 똑똑히 볼 수 있게 만들 거야.


바네사는 침실로 돌아와 자신의 캐리어를 꺼낸 뒤 고개를 돌리지 않고 현관으로 향했다.


레이몬드

바니...!


페트라

가게 둬!


쾅!!


자동으로 닫혔어야 할 대문이 일부러 세게 부딛혔고, 밤비나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


시간은 흘렀다. 시간은 공평하고 조용한 통치자이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 결심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고, 비겁한 사람은 자신의 미망에 계속 빠져든다.


유일한 차이점은 시간의 공백이 기억을 담은 작은 칩을 채우고 나면 밤비나타가 쫓을 수 있는 것은 환영만이 남는다는 점이다.



밤비나타

바...네사?


정기검사를 마친 페트라는 다시 백지가 된 밤비나타에게 돌아가 휴식을 취한다. 방문의 이름은 밤비나타에게 궁금증을 자아냈다.


이전 기억상실증과 달리 이번 재가동 이후 메모리 칩 속 바네사 관련 데이터는 새로운 일상으로 뒤덮였다.


페트라는 밤비나타가 바네사의 침실에서 계속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에 많은 불편함을 예상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바네사의 흔적을 집에서 지우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밤비나타가 기억상실증에 대한 특별한 피드백이 나타나는지 살펴볼 기회'라는 것이 페트라가 선택한 이유다.


페트라

바네사, 네 언니야. 그녀는...말을 잘 듣지 않는 얘였어. 지금 그녀는 집에 없단다.


밤비나타

바네사...


밤비나타는 낯설지만 기시감 넘치는 이름을 곱씹으며 의식에서 무언가 싹트고 있던 느낌이 들었지만, 잘려나간 출발점을 되찾을 수 없었다.


페트라

들어가서 쉬렴. 오늘 검사시간은 평소보다 30분 더 길어. 두 시간 동안 휴면할 수면을 취할 수 있어. 네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깨워 줄게.


페트라는 말을 마치고 방문을 닫았다.


하얗고 거대한 침대다. 밤비나타는 습관적으로 침대 한쪽에 가서 누워서 가운데 선을 넘어 반대편 공간을 차지하지 않도록 했다.


...처음에 왜 가까이에서 잠을 자지 않았을까? 분명 이것이 더욱 편리한 방법이다.


완전 휴면 상태에 들어가기 전에, 이 문제는 눈을 감은 뒤에 보이는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이 의도된 행동의 원인을 기억 데이터에서 찾아냈지만 해답은 얻지 못했다.


밤비나타는 신선하면서도 약간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 답을 찾고 싶었다.


전에 없던 용기로 침대에서 일어나 방에 무엇이 있는지 추측하며 투명한 그림자를 쫓았다.


옷, 액세서리, 향수…. 이곳의 디테일 하나하나가 머릿속의 혼돈에 대한 윤곽을 그려주고 있지만, 그 윤곽 속에 담긴 것들은 여전히 답을 필요로 한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


밤비나타는 침대 옆으로 시선을 돌렸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직감'으로 축 처진 이불을 살짝 들추었다. 그곳에는 자칫 무시하고 지나치기 쉬운 서랍이 있었다.


서랍 속에는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수집품 외에 접힌 종이 뭉치가 있었다.


밤비나타는 유일하게 스케치가 그려진 종이를 펼쳤고, 그 위에는 춤을 추는 소녀와 이름 모를 소인이 있었다.


햇빛, 방충망, 음악, 우아한 몸짓…. 밤비나타의 의식 바다에 잠시 파편들이 떠올랐다가 그녀가 그것들을 만지기 전에 사라졌다.


잊을 수 없다.


잊고 싶지 않다.


최소한 마지막 윤곽 만큼은 잡기를...


밤비나타는 여세를 몰아 서랍에 있던 펜을 집어 들고 허영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남길 수 있는 것을 남기려고 애썼다.



몇년 뒤.


구조체 군인

지휘관님, 저희가 여기 20분 동안 서있었는데...



바네사

...


바네사

너에게 말해도 된다고 허락했었나?


구조체는 입술을 오므리고 고개를 저으며 눈치 있게 바네사 곁에서 뒤로 물러났다.


바네사는 손에 긁힌 자국이 있는 마그네틱 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문을 두드렸다.


페트라

누구세요ㅡㅡ


페트라의 응대용 미소는 문을 여는 순간 굳어졌다. 바네사는 사람이 묻힐 정도로 공기가 굳어지기 전에 뒤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상대는 바네사에게 인터페이스 조정 단말기를 건넸다.


페트라

바네사...


바네사

이건 징집명령이에요. 조례에 의하면 구조체 밤비나타는 저희를 따라 집행부대로 돌아와 청정백로 엘리트 소대의 예비 멤버로 활동하도록 되어 있어요.


페트라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었고, 바네사의 기억 속 모습처럼 가슴 위에 팔짱을 꼈다.


페트라

안 돼.


바네사

군령 위반에 따른 처벌이 뭔지, 너, 그녀에게 알려드려.


구조체 군인이 입을 열려고 하자 페트라는 무정하게 말을 끊었다.


페트라

우리 가족 중 누구도 밤비나타를 군에 지원하지 않았어. 넌 그녀를 데려갈 권리가 없어.


바네사

제가 그녀를 신청했어요.


페트라

우리 집 구조체는 전투형이 아니라 실험 연구를 보조하기 위해 집에 머무르고 있어. 기능 적응을 고려하지 않고 징용하는 이런 비이성적인 결정을 군부 수뇌부가 내리지는 않았을 텐데.


바네사

군부는 당연히 군인들이 모두 표준 전투 능력에 도달하도록 보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페트라

너!


페트라

바네사, 밤비나타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억지로 끌고 가려는 거야?


바네사

징집령과 관련된 조항의 문제를 제외하고 저는 당신에게 어떤 것도 답하지 않을 거예요.


페트라

...바네사, 나는 일찍이 네가 집에 돌아온 모습을 몇 번이나 생각해 본 적 있었어. 네가 돌아왔을 때, 어른이 되고 사리에 밝아진 모습을 기대했었어. 지금 보니 내가 너무 과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네. 네가 남을 실망시키는 능력만큼은 결코 실망스럽지 않구나.


바네사

이게 바로 오랜만의 훈훈한 안부 인사인가요? 네, 페트라씨. 알겠어요. 이제 우리 대원과 함께 가도 되겠죠?


페트라

레이몬드 박사는 밤비나타를 정기 점검하고 있어, 데려가고 싶다면 끝날 때까지 기다려.


페트라

그리고 가족과 작별할 시간도 필요해.


페트라

들어와서 기다려, 이웃이 우리 집에 무슨 부끄러운 일이 생겼다고 오해하면 안 되니까 말이야.


페트라는 몸을 돌려 반쯤 열린 문과 바네사를 뒤로 한 채 계단을 걸어갔다.


페트라의 모습이 계단 모퉁이에서 사라지자 바네사는 병사들을 데리고 다시 이 오랜 문으로 들어갔다.



소파, 카펫, 조명의 색상은 방향제 냄새가 바뀌었지만 바네사가 기억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

바네사 뒤에 있던 구조체 병사들은 주택가에 들어선 것이 처음인 마냥 거실 쪽에 깐깐하게 서 있다가도 집안의 진열품을 훑어보았다.


바네사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구조체 군인

네, 지휘관님.


바네사는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지만 문 위의 마그네틱 명판에 여전히 익숙한 이름이 부착되어 있었고, 고정된 마그네틱 못이 하나 빠진 것 외에는 시간이 먼지를 뒤집어쓰지 않은 듯했다.



문을 살짝 밀자 익숙한 모든 것들이 들이닥쳤다. 방 안의 개량 식물조차 당초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넓고 부드러운 침대 위로 손끝이 살짝 스치자, 바네사는 학교 기숙사에 처음 왔을 때 침대가 너무 딱딱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럼 밤비나타도 익숙하지 않아 불편함을 느꼈을까? 


흥, 하지만 구조체다. 익숙하고 말고 할 게 없을 것이다.


바네사는 새하얀 이불에서 눈을 떼고 침대 옆 '비밀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 예상대로 엷은 먼지가 쌓여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서랍을 연 것은 매우 오래전인 것 같았다.


밤비나타가 일찍이 좋아했던 머리핀,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 밤비나타에게 버렸던 리본, 손가락 인형과 붓, 그리고 완성되지 않은 그림 10여 장이 있었다.


바네사는 종이를 펼쳤고, 첫 번째 장에는 발레를 추는 소녀와 아무 묘사도 없는 성냥개비 인간이 그려져 있었다.


두 번째 장에는 연습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소녀와 묘사없는 성냥개비 인간이 등장했다.


세 번째, 네 번째...한 장 한 장이 마치 어린 시절의 축소판과 같았고, 그리고 매 장마다 예외없이 비어있는 소인이 등장했다.


배경의 공백에 밤비나타는 파편화된 말들을 산발적으로 써내려갔다.


'언니'


'검은 나비 머리띠'


'밤비나타는 좋아해?'


'울지 마'


'실험'


'가지 마'


'기억해'


그 외에는 모두 바네사의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일관성이 있는 글씨체에서 갈수록 점점 주춤하고 무뎌져 아랫부분 글씨체의 절반가량은 더 이상 철자라 부를 수 없었다.



바네사

언제 그린 거야...


바네사는 종이에 흩어진 글씨를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시선을 거둘 수 없었고 그것들은 한 눈에 들어와버렸다.


거실에서 약간의 소리가 들리자 바네사는 즉시 도화지를 접었다. 서랍을 향해 2초간 머뭇거리다가 바네사는 슬그머니 도화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서랍 속에 들어 있는 다른 물건들을 살펴보니 밤비나타의 의식 안정에 특별한 도움이 되는 물건은 없어 보여 서랍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거실로 돌아갔다.



구조체 군인

...지휘관님!


바네사

무슨 일이야?


구조체 군인

방금 레...레이몬드 박사가 이 구조체를 저에게 안기고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페트라

최소 3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다시 기체 가동을 시도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바네사는 페트라의 무심한 얼굴을 힐끗 보며 뒤통수에 달려있던 슬롯을 어루만졌는데ㅡㅡ역시나 메모리 칩이 들어가야 할 곳은 텅 비어있었다.


페트라

레이몬드 박사가 어떠한 연구 내용도 누설할 리 없다는 사실은 너희들도 잘 알고 있겠지. 군령은 거역할 수 없지만 우리 연구 성과를 회수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어.


바네사

당신들...


페트라

욕심은 정도껏 부려, 바네사. 너도 애초부터 이런 상황을 초래할 거라곤 알고 있었겠지만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잖아.


페트라

네가 다른 사람의 노력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면, 내가 널 위해 바친 모든 것, 나와 네 아버지가 밤비나타에게 쏟았던 사랑은 헛되이 하지 않았겠지.


바네사

사랑? 하...



바네사

그녀를 차에 태우고 곧바로 과학 이사회로 향한다.


구조체 군인

네!


페트라

바네사!


바네사는 걸음을 멈추고 목이 쉬어버린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페트라는 여전히 차가운 모습으로 숨을 깊게 내쉬며 목구멍을 빠져나갈 듯한 쓰라림을 삼켰다.


페트라

가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마!


바네사

...네, 엄마.



아시모프

기체 혁신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밤비나타의 현재 기체 규격은 전투용 수준에 도달했다.


아시모프

교체된 일부 오래된 부품은 전에 말한 대로 보관해. 가능하겠지?


바네사

물론입니다.


아시모프

좋아.


바네사

메모리 칩은요?


아시모프

원본 칩이 없다면 너의 묘사만으로는 다시 새길 수는 없어. 인터페이스와 작동회로를 분석해 기억 데이터를 저장하는 외장 메모리 모듈을 새로 설계했어. 이론상 저장 효율과 안정성은 이전보다 높아지겠지.


아시모프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칩을 꺼낸 뒤에 정상적인 처리가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돼. 그녀의 남은 유효 메모리 데이터는 매우 작고 지저분해 1차 시험가동에서 간접적으로 의식의 바다가 이탈하는 증상을 일으켰지.


아시모프

이런 상황이 전투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외장 메모리 모듈에 별도의 파티션을 만들어 전투, 소속, 임무 정보 등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기록해서 어떤 이유로든 기억 데이터가 흐트러지거나 분실되면 기본 정보를 원활하게 읽을 수 있어.


아시모프

먼저 입력된 정보가 정확한지 확인해 봐.



바네사

이 호칭은...당신이 입력했나요?


바네사는 단말기 속 한 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 바네사 언니.


아시모프

일부 내용은 그녀의 남은 기억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동 정리되어있었어. 의식의 바다가 다시 이탈할 위험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물론 필요한 수정 사항이 있으면 단말기에서 바로 편집할 수 있지.


바네사

...그녀의 이전 기억 데이터는 복원이 불가능하겠죠?


아시모프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야. 개인적으로는 '그 실험'의 후유증일 수 있다고 추정하지만, 지금 내 손에는 실험의 상세한 데이터가 없어 더 정밀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


아시모프

밤비나타의 문제는 역원 장치가 어떻게 그녀의 의식의 바다의 충돌을 유발하는 것이고, 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시모프

하지만 역원장치 원리에 대한 연구는 아직 모색 중이라 현재의 조건에서 올바른 회피 방법이나 해결책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아시모프

역원장치의 비밀이 풀리면 거부 반응과 관련된 이론의 판을 보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지.


바네사

...


아시모프

단 하나의 희소식은, '기억상실'의 본질이란 데이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 데이터가 의식 속으로 빠져들어 스스로 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로 기억나지 않는 일이 많지만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지.


아시모프

즉,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 모든 과거 기억 데이터를 회상할 수 있음을 의미해.


바네사

그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현 상황에서의 가장 적합한 처리 방식이라면, 우선 그렇게 하죠.


바네사

그 다음은...구조체는 말을 잘 듣기만 하면 상관없습니다.


바네사

그렇지, 밤비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