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오스 사관학교부터 공중정원 준비실까지 걸리는 20분의 거리가 이토록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시몬

학교의 초청으로 강연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인데, 이렇게 '환대'를 받을 줄 몰랐어요.


옆을 걷고 있는 시몬은 자신을 향해 쓴웃음을 짓고 있다. 자신의 표정도 아마 그와 같을 것이다.


학교에서 보내온 두툼한 강의 자료들이 있었다. 문화 과목의 기초가 깊은 시몬조차 난색을 표할 정도였다.


지휘관

시몬 선생님, 나 좀 도와줘.


시몬

어떤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시몬

당신은 학교의 수석이니까 보고서와 강연에 대해 미리 숙지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졸업 후 파오스 사관학교에서 매년 졸업식과 입학식을 할 때마다 자신을 강연자로 초청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강연일 뿐, 이렇게 많은 좌담과 토론, 보고내용은 없었다.


전쟁이 긴박해지고 지휘관의 인명피해율이 높아지면서 지휘관 양성을 담당하는 사관학교에 가해지는 압박도 거세지고 있었다.


아마 사관학교는 신입생과 졸업생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아직도 공중정원에 머물고 있는 지휘관들을 일일이 붙잡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지휘관

그때는 이렇게 많지 않았어. 기껏해야 평범한 연설 한 번 하면 끝이었는데.


시몬

학교에서 보내온 이야깃거리만 해도 작성 원고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것도 초보자에게는 너무나 불친절한 일인 걸요.


시몬

그리고 이렇게나 많이 요구하는 걸 보니...학교에서도 굉장히 중시하거나, 아니면 긴박한 모양이에요.


시몬

요즘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휘관들 중에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40%도 채 안 된다는 말을 오늘에서야 들었어요.


시몬

아직 못 본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데...


시몬, 바네사, 그리고 도요새의 해리조는 모두 같은 학기의 졸업생이며, 바로 나머지 40% 중 한 명이었다.


크롬은 아직 임무가 남아있어 학교의 초청을 받지 못 했고, 해리조는 애초에 지상에 머물러 있어 공중정원에 있지도 않았다.


시몬

그런데 바네사는 왜 못 만났을까요?


시몬

청정백로는 지금도 재정비 중이겠죠? 바네사는 성적이 좋았으니 학교에서도 그녀를 깜빡 잊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시몬의 말처럼 버네사는 오전 학교에서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동안 만나지 못 했다.


바네사의 성격상 이런 행사에는 꼭 참여했을 것이다.


혹시 또 다른 임무가 있던 것일까? 시몬과 자신은 같은 생각을 했고, 또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그들은 별의 별 잡담을 나누면서 시몬의 한양소대 대기실에 돌아왔고, 자신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 대기실에 돌아가기까지는 조금 더 걸어가야 했다.


공중정원에 있는 집행부대에 배정된 대기실은 대부분 비슷하다. 외부에서 보면 모두 옅은 회색빛이 감돌고 냉엄한 격식을 갖춘 합금 문벽에 신분 확인을 위한 출입문이 달려 있었다.


소대를 구별하기 위해 각 소대의 출입문에는 고유한 명판이 달려 있었는데, 예컨대 한양소대의 명판에는 한양의 휘장이 새겨져 있었고, 청정백로 역시 마찬가지다.


지휘관

(아마 휴가중이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청정백로의 출입구를 지나칠 때, 문듯 문 앞 벤치에 서류 하나가 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생명의 별 표시가 어렴풋이 보였다.


지휘관

(서류를 방치하는 건 좋지 않아...)


서류를 줍고 주인에게 다시 돌려줄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자신은 그것이 생명의 별 검사 예약 통지서임을 알아차렸다.


지휘관

(수검자...밤비나타?)


밤비나타?



이름 하나가 마치 과거에서 현재로 향하는 총알처럼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기억을 뒤흔들었고, 그리고 그 총알이 닦아낸 피의 온기가 함께 걸려들었다ㅡㅡ


몇 년 전, 자신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이끌고 첫 합동작전에 나섰었다. 한번은 자신에게 폭격 사실을 알리지 않자, 자신의 총구는 청정백로를 향했었고, 청정백로의 예봉 또한 그레이 레이븐에게로 향했었다.


다행히 실질적인 소대간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칼날은 이미 그 당시 연합작전에 대한 최종인상이 되었다.


밤비나타의 모습과 그녀가 자신의 목에 겨눈 칼날은 그 마지막 인상의 일부가 된 채 마음 한구석에 새겨졌다.



폐허에 묻힌 아픔을 떠올리기 전에 잠시 생각을 멈추고 손에 쥐고 있던 통지서에 시선이 꽂혔다.


지휘관

(검사 기간은 이틀 전?)


이 통지서에는 검사 시점이 이틀 전으로 되어 있었고, 일반 검사 시 주의사항과 함께 수검기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당부 외에 자세한 진료실 위치와 동선이 적혀 있다.


이것은 바네사 자신이 밤비나타를 위해 예약한 기체 검사인데 왠지 모르게 이곳에 남겨진 모양이다.


자신과 바네사 사이의 한바탕 행사가 소대원들에게까지 영향을 줘선 안 될 일, 하물며 이것은 구조체의 기체 건강에 대한 검사와 관련되어 있다.


소대의 사건 때문에 못 본 척 해버리면 자신이 원망을 사게 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지휘관

(겸사겸사 도와주는 걸로 치자.)


그런 마음으로 청정백로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지휘관

(아무도 없나...)


아마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 예약 통지서가 문 앞에 놓여있던 모양이다.


마지막 시도라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려 할 때, 문득 앞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가녀린 소리가 그 틈새 반대편에서 울려 퍼졌다.


???

안녕하세요...?


목소리의 주인은 문 안쪽의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었고, 희미하게 하늘색만 보일 뿐이었지만, 이를 통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증할 수 있었다.


지휘관

밤비나타...?



밤비나타

밤비나타입니다...당신은 누구죠?


밤비나타는 여전히 문 뒤에 숨어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을 들은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도 훨씬 맑아졌다.


지휘관

나는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 【지휘관 이름】이야.


밤비나타

지휘관?


대문의 틈이 조금 더 벌어지자 밤비나타는 겁에 질린 아기 고양이처럼 푸른 눈으로 문틈 사이를 내다보았다.


밤비나타

그레이 레이븐? 주인님이 아니야...


밤비나타

지휘관이 아니야...주인님이 아니야...당신은 누구죠!?


자신이 바네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조금 열려 있던 틈이 다시 처음의 크기로 돌아갔고 밤비나타의 눈빛은 더욱 경계가 서려있었다.


지휘관

너 나 모르겠어?


밤비나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틈 사이로 고개를 저은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낯선 자신을 경계하면서도 그 눈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밤비나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바네사는 여기에 없다.


지휘관

나는 바네사의 동료야.


지휘관

바네사는 어디에 있는지 아니?


밤비나타

바네사 주인님!


밤비나타

하지만...밤비나타는...주인님이 어디에 있는지...모르는데...


밤비나타

여기에...없다는 것만...알고 있고...주인님을...기다리고...있으라고...


밤비나타는 산발적인 단어들을 쓸쓸히 되새기며 마치 자신의 말 한마디에서 어떤 진리를 끄집어내려는 듯했다.


그녀가 몸을 바짝 붙들고 있던 문이 마침내 틈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녀도 문 뒤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왔다.


공중정원에서의 집행부대를 위한 대기실은 보통 비슷한 구도로 구성된 경우가 많아 필수 계측장비를 제외한 나머지 조립품은 작전소대의 취향에 맞게 자체 설치할 수 있다.


청정백로의 작전실은 대개 '바네사 스타일'로 구성되어 있다.


방 안의 각 스타일의 기구와 장비는 모두 최고 효율의 원칙에 따라 있어야 할 위치에 놓여 있다.


방 한가운데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분명 집행부대 표준의 것은 아니었다. 심플하면서도 정교해 가격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티 테이블 한쪽에 있는 방문 맞은편 벽에는 여러 개의 짙은 자주색 넥타이와 끈이 달려 있고, 넥타이에 바짝 붙어 있는 짙은 색깔의 안대, 그 아래로는 부대 지휘관에게 공통적으로 보급하는 표준 무장이 있었다.


또한 밤비나타가 말했듯이 바네사는 이곳에 없었다.



밤비나타

주인님...없어...


밤비나타는 고개를 숙이고 문 앞에 서서 방금 한 말을 조용히 되풀이했다.


지휘관

이것은 바네사가 너에게 예약한 검사서야.


망설이다가 밤비나타에게 검사 통지서를 맡기기로 했다.


결국 바네사의 대원은 물론이고 기체 검사를 위해 다른 소대의 대원을 데려갈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밤비나타

바네사 주인님의...검사?


밤비나타

주인님의 검사? 주인님...검사?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바라본 그녀의 눈빛은 하늘처럼 맑고 살얼음처럼 연약했다. 이 기이한 청량감은 즉시 자신의 등뼈를 타고 몸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자신마저도 방금 가볍게 떨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지휘관

여기에 써있는 대로 준비해서 내일 진료실로 가면 돼.


밤비나타

이것도...명령인가요?


그러나 밤비나타는 자신이 건넨 검사 안내문을 피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밤비나타

바네사 주인님의 명령은...대기하기, 어제의 명령.


밤비나타

어제?


밤비나타

어제였어요! 주인님이 떠나기 전에...바네사 주인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그전 일을 기억하지 못해서...그래서 어제였어요.


그녀의 기억은 어제, 충실한 집행자인 주인이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명령에 머물러 있었다.


밤비나타는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얼굴을 들어 자신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지휘관

요컨대 이것은 너의 기체 검사 통지서야.


지휘관

잘 받아 둬, 함부로 잃어버리지 않게.


밤비나타

네.


밤비나타는 샹들리에의 희미한 불빛으로 앳된 뺨의 윤곽만 볼 수 있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건네준 검사서를 받았을 때 어렴풋이 턱이 약간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림자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등불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 얼굴은 자신이 떠날 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시선 속 마지막 장면은 차가운 빛과 시간 속에 식각된 듯한 그녀의 실루엣뿐이었다.





커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