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서, 최근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게는 지상 파견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다. 


모처럼의 휴가에 루시아는 다시 훈련실에 처박혔고, 리브는 생명의 별에서 일을 거들었으며, 자신은 계속해서 복잡한 사건들을 처리했다. 


특화 기체는 약간의 의식 소란을 일으킨다. 그레이 레이븐에 머물며 휴식하기 위해 보고서와 자료를 잔뜩 썼지만... 왜 아직도 볼 자료들이 이렇게 많이 남은 걸까?


<구조체 보수 통지서 최신 개정판>, <공중 정원 신판 훈련 및 작전 안내서>, 그리고..


<특화 기체 적응설명 제 5판>


확실히 두꺼운 책이지만, 결국엔 다 읽었다. 



어제 이후로 리가 안 보였다. 구조체는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지만... 이렇게 처박혀 있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리가 있는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막 일어서자마자 뒤에 있던 구조체와 마주치고 깜짝 놀랐다. 



.....!! <-선택


리 : 공중 정원의 엘리트 소대 지휘관, 제가 나타나는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요?


리 : 정말 연약한 인간이네요...



이미 자신이 구조체가 되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듯, 리는 파일 서랍장 그늘에 서 있었고, 파란 눈동자에는 어색함과 앳된 기색이 서려있었다. 


그는 반 걸음 뒤로 물러서서 이미 처리가 끝난 서류 뭉치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리 : '특화 기체 의식 소란 증상에 대한 관찰보고'...? 굳이 이렇게 두껍게 써야 하나요?


리 : ...저랑 관련된 겁니까?



그냥 의례 보고일 뿐이야. <-선택



리 : 지휘관의 서면 보고 절차는 정말 장황하고 복잡하네요. 


리 : ...사과하러 왔어요. 


리 : 어제, 당신이 준 모든 파일을 전부 뒤져서 상황의 진실성을 확인했습니다. 


리 : 명확하게 상황을 확인하지 않고 당신을 다치게 한 건 분명 경솔한 행동이었어요.



신경 쓰지 마. <-선택



이틀 동안 리에게 사과를 많이 듣는 것 같다...


어쨌든, 지금은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런 일로 뒤끝을 가질 사람은 없을 테지만. 



리 : 저는... 계약을 어기고 당신을 다치게 한 셈입니다. 


리 : 그러니 보상으로 제가 한 가지 '의뢰' 를 받아드리겠습니다.



의뢰..? <-선택



자신의 놀란 표정을 바라보며, 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 : 제가 한 가지 '의뢰'를 수행해 드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치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고 오겠다' 라고 말하는 듯 푸른 생체 공학 모방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 



리 : 목표는 정하셨습니까? 



아니... <-선택



리:..지정하실 목표는 따로 없는 겁니까?


이런 대답이 그를 곤혹스럽게 만든 것 같다. 


리 : 개인적인 수준의 의뢰를 받은 건 처음이라, 목표를 정하는 과정은 저도 잘 모릅니다만...



그는 생각에 잠긴 채 '목표를 정하는 과정'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아무래도 그에게 할 만한 일을 찾아줘야 할 것 같았다.



리 : ...그러고 보니, 당신들은 '소대 임무' 같은 걸 일상적으로 하지 않습니까?



그 상태로 임무를 수행하려고? <-선택



말 속에 숨겨진 당혹감을 알아챘는지 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지금의 리'에게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총알이 없는 무기를 꺼냈다. 부품들이 나는 듯이 그의 손가락 사이를 약동했고, 순식간에 총기는 분해되어 하나하나의 완전한 부품으로 분해되었다. 


음... <-선택


자신의 망설임을 느끼며, 리는 무기를 보지 않은 채 촉각만으로 능숙하게 무기를 다시 조립해 나갔다. 



리 : 그럼요?



곧 무기는 다시 리의 손 안에서 온전하게 돌아왔다. 



역시 리라고 해야 할까. <-선택



리 : 기본적인 작업일 뿐이에요. 


리 : 구조체 몸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작전 능력은 나쁘지 않네요.




 공중 정원 군사 기지의 복도에는 인공 태양이 비추고 있어, 이미 정오 무렵이 다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 : 으으...


갑자기 마주친 빛에 의해 눈이 부셨는지, 비록 구조체는 더 이상 눈을 감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못하는데도 적응하지 못한 리는 어색하게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급하게 한 손을 뻗어 눈부신 빛을 차단하려고 했다. 



리 : 공중 정원은 초광속 우주 이민선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인공 광원이야. <-선택


생태를 유지하는 데 쓰이는 인공 광원은 지칠 줄 모르고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으며. 높은 머리 위 천막의 투영은 가짜 광원을 진짜 태양처럼 보이게 했다. 



리 : 지구 표면에서는 태양을 별로 본 적이 없는데 어두워야 할 우주에서 오히려 인공적인 빛에 눈부셔하고 있다니. 


리 : 제 직업에 딱 맞는 일이네요. 



네 직업? <-선택



리 : 알면서 물어보는 거에요?


리 : 파일에 적혀 있을 텐데, 모르는 건 아니잖아요. 


아니면 대낮에 활동하는 킬러를 본 적 있는 겁니까?



많이 힘들지, 이 일? <-선택



리 : 돈을 위해서일 뿐입니다. 머레이의 치료는 비용이 많이 들어요. 저는 제 동생의 병세가 악화되기 전에 반드시 그 돈을 모아야 합니다. 


리 : 계속 밤에 머물러도 상관없습니다. 머레이가 다시 햇볕 아래서 달릴 수만 있다면... 


리 : ...그거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머레이를 보지 못했잖아. 

<-선택



갑자기 이 말을 듣고, 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머레이는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 있었고, 리의 일정으로는 머레이와 자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리 : 생각해보면 정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군요... ...그의 병세는 괜찮을까요? 



머레이는 잘 지내. <-선택



리 : 당신은 머레이를 아는 것 같은데...

...아. 머레이 또한 공중 정원에 있겠네요!


리 : 구조체 개조 동의서 뒤에 있는 계약서에 따르면, 개조 조건은 머레이를 공중 정원에서 살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리 : 공중 정원에는 그를 치료할 의사가 있었겠죠. 

그럼, 그는 지금... 



평소에 이렇게까지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겉으로 드러내진 않아도 리는 언제나 머레이를 신경쓰고 있었던 것 같다. 



리 : 그런데,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모리를 걱정하면서도, 여전히 '임무 수행' 상태라는 것은 잊지 않은 모양이다.



그냥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돼. <-선택


오래 지나지 않아 단말기가 가리키는 위치에 도착했다. 




리 : 여긴... 어디죠?


문에 걸린 명패는 여기가 케르베로스 소대의 휴식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시간에도 머레이가 여기 있을 줄은...



머레이는 지금 여기서 일하고 있어. <-선택



리 : 네?


리 : 머레이도... 지휘관이 된 겁니까?


그는 문을 열려고 했다가, 무엇인가가 두려운 사람처럼 움츠러들었다. 



베라 : 쯧... 누군가 했더니. 오랫만이야. 친애하는 지.휘.관~



대문이 갑자기 열리자 베라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위협적인 눈빛으로 문 밖의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의식한 리는 천천히 문 쪽에서 벗어나 이게 대체 누군지 묻는 듯 이쪽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상을 느끼자 베라는 의심스러운 듯 리를 훑어보더니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평소와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베라 : 무슨 용무라도 있어? 최근에 너희 그레이 레이븐에게 협조하라는 임무를 받은 기억은 없는데.



지나가는 길이었어. <-선택



베라 :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기지를 반쯤 돌았으면서, '지나가기' 위해서라고?


베라 : 우리 지휘관을 찾는 거라면- 

저런, 정말 공교롭게도, 지금은 안 계신데. 


베라 : 지휘관 같은 건 중요한 순간에 유용하게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필요할 때 여기 묶어둘 수는 없어서 말이야. 


베라 : 평소 아무 일도 없어도 같이 지겹게 부대끼면서 지내는 건, 너희밖에 없거든.



리 : 작전할 때만 연락할 수 있는 리더인데. 어떻게 전투 중에 등을 맡길 수 있는 겁니까?



리는 마치 기억 속에 새겨진 말을 꺼낸 듯 베라에게 거침없이 반박을 날렸다. 


갑자기 의식이 돌아온 걸까? 라고 생각하며 리를 바라보자, 그 눈에는 굳건한 믿음만이 가득했다. 



베라 : 후후, 그야 공통의 목표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베라는 말을 끊고, 팔짱을 꼈다. 



베라 : 어쨌든, 머레이는 이쪽 기지에 있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여기로 와서 그를 찾는 것보단 직접 단말기에 메시지를 남기는 편이 좋아. 


베라 : 그게 아니라면, 다른 목적이 있어?




'베라가 지금 상황을 알면 곤란하다' 는 마음으로 급하게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다. 


베라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면... 아마 그녀에게 시간이 끝나는 날까지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너, 방금... <-선택



리 : ...그냥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리 : 킬러라고 해도 호흡을 맞춰야 하니까요. 이 문제 때문에, 그 때...*



호주머니에 넣어둔 손이 움직였다. 리는 눈을 돌리며 말을 멈추었다.


리 : ... 어쨌든, 지금의 제가 당신을 지켜준다면 당신은 제가 생각하는 그런 리더..... 지휘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색하게 '리더'를 '지휘관' 으로 고치면서 리는 고개를 돌렸다. 




>머레이를 못 만나서 아쉽네, 



리 : ...잘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 위의 인공 태양을 바라보더니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기지 변두리의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다 보면, 얼마 안 가 공중정원의 상업 구역이 나온다. 


비록 황금 시대 대형 상업 군락의 경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상업 구역도 공중정원의 발전에 따라 제법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유려하고 매끄러운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리는 내리쬐는 햇볕의 그늘 아래 얼굴의 호기심을 감추고 있었다. 



리 : ...여기가 임무 구역인가요?


리 : ...거리라... 목표지점과 임무를 제게 동기화시키세요. 임무가 완성되면 당신과 합류하겠습니다. 



그 전에... <-선택



돈을 지불하자 옆에 있던 아이스크림 가게 아저씨가 빙그레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아이스크림을 집어들고, 리에게 주머니에 넣은 손을 꺼내라는 신호를 보냈다. 



리:...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는 눈 가리고 아웅하듯 주머니 속에 숨겨둔 손을 뒤로 짊어졌다. 



더 녹으면... <-선택



인공 광원이라도, 아이스크림은 상온에 두면 천천히 녹는다. 콘 위에서 아이스크림이 달콤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리 : ...임무 중에 음식을 먹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망설였지만 이내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휴게실에서부터 꾹 쥐고 있던 주먹을 풀자 손에서 작은 부품 하나가 떨어졌다.

구조체의 부드러운 인공 피부 손바닥에는 무기의 용수철 자국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맛있어? <-선택



리 : .....달아요. 



이맛살을 찌푸리며 리는 이런 느끼한 맛에 대한 어색함을 표현했고, 그러면서도 곁에 앉아 그 아이스크림을 한 입 한 입 먹어치웠다. 




리 : 오랫만에 먹어보는 맛인데... 그다지 싫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손바닥을 꼼꼼히 닦은 후, 리는 다시 시치미 떼듯 앉아서 손에 든 용수철을 바라보았다. 



리 : 이 부품은...



아이스크림은 기계와 무기에 대한 관심을 돌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조금 망설이는 듯한 리는 이 무기를 다시 분해해서 연구하려는 듯 했다. 


용수철을 자신에게 건넨 것은 다소 의외였지만, 요청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이 스프링. 이렇게 달면 돼. <-선택



밝은 천막 아래 인공 태양은 이곳에 있는 모든 것에 한 층 부드러운 빛을 비추었다. 벤치에 청소용 천을 펴고, 몸에 지니고 있는 예비 도구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았다. 


작은 소리로 모든 부품의 위치를 하나하나 설명하며, 익숙한 무기를 해체했다. 


신형 무기의 조립과 기초 무기의 조립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신형 무기는 더욱 정밀한 부품을 사용해서 이 부품들을 연결한다. 


조립은 더 복잡해졌지만 출력과 명중률을 획기적으로 높힐 수 있는 설계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스프링의 위치는 여기쯤일 것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 스프링을 끼우면 무기는 다시 온전하게 복원된다. 



방금 조립한 거 기억 나? <-선택



그래도 참지 못하고, 리가 예전에 말했던 말투를 그대로 따라서 한 마디 했다. 



리 : 단말기 기록에 따르면... 이건 제 무기일 텐데. 

당신은 왜 거기 그렇게 익숙한 겁니까?



부드러운 햇살 속에서, 지금의 막막한 눈빛의 리와 한때 무기고에서 보았던, 각종 무기 구조에 익숙했던 리가 하나로 겹쳐졌다.




* 회상




리 : 방금 조립한 거 기억나세요?


리 : ...파오스에서는 전시 응급 상황을 대비한 수업을 하지 않는 겁니까...?



우리의 전시 응급 상황 대비 수업은 이런 방식이 아니야... <- 선택



리 : 기초 무기 사용, 긴급 치료와 부목 대는 방법만 배웠나요?


리 : 만약 정말로 긴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수중에 신형 무기와 부품을 가지고 있는데 사용할 줄 모른다면.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없을걸요.


리 : 저희가 당신을 그런 상황에 빠지게 두진 않을 거지만. 배워둬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리 : 저와 리브가 사용하는 무기의 기초 부품과 조립 방법만 익히라고 했을 뿐이에요. 

협동 작전에 대비해서... 흥. 



리는 가혹한 시선으로 옆에 있는 차징 팔콘과 케르베로스의 예비 무기를 쓸어내리고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끊었다. 



리 : 당신은 다른 무기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를 더 잘 보호할 수 있으니까요. 


리 : 전쟁터의 상황은 계속해서 변화합니다. 비록 저희가 목숨을 걸고 당신을 보호하겠지만... 



차가운 무기고 벽은 구조체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은빛의 별처럼 빛났다. 리는 눈을 내리깔고, 그 구조가 복잡한 무기를 분해한 뒤, 다시 복원했다. 


리 : 그래도 저는 당신이 좀 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


* 리가 언급하는 '그 때'는 21장에 나오는 쿠로노 시절 암살자 동료에게 배신당한 일임.


다음 장은 좀 늦을수도 있음... 암튼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