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라...인류의 적이 되는 것, 자신이 대항했던 것의 하수인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일까?



하늘은 흐리고 공기는 습하며 사방은 숨이 막힐 듯한 녹슨 냄새로 가득 차 있다.


번개가 치면서 구름이 찢어지고 '상처'에서 '피'가 솟구쳤다.


비였다...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빛바랜 긴 머리를 적신 빗물이 레이온 섬유를 타고 얼굴로 흘러내리며 그녀의 시선을 흐리게 만들었다.


목적 없이 폭우 속을 헤매다 보니 점점 높아지는 수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귓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와, 침잠에 빠진 의식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소리의 방향을 찾았고, 희미해진 기억들이 시간의 궤적을 이었다.



???

네가 바로 훈련 성적 3위 안에 들었던 루시아라고? 망했어, 무롤, 우리 둘이 발목이나 잡게 될 거야.


이날은 루시아가 정식으로 소대에 가서 보고를 올린 첫날이었는데, 들은 바로는 모두 신규 대원으로 구성된 소대라고 했었다, 이름은 그레이 레이븐이었다.


루시아가 대기실에 도착하기 전, 두 구조체가 안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

슌, 닥쳐봐. 루시아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어쩔줄 몰라하는 게 안 보여?


무롤

안녕, 나는 무롤이라고 해. 저 개소리만 지껄이는 녀석은 슌이라고 불러.


무롤

이제부터 우리는 전우야. 지구를 탈환하는 그날까지 함께 살아남아보자.


그렇게 정색하고 무거운 말은 하지 마. 오늘은 팀 결성 첫날이잖아, 그런 말은 너무 불길하다고!


루시아

슌, 무롤, 안녕하세요. 우리 모두 그날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루시아 너마저...다른 생각을 해보면 안 될까? 예를 들어 다른 보조형 대원은 누구일까?


루시아

또 다른 소대원 말인가요?


루시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트 소대의 표준 배치는 3인 소대에 지휘관 1명을 더한 것이었고, 4인 소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 루시아는 아직 모르고 있었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흥에 겨웠던 슌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고, 흔들던 손도 허공에 머물렀다.


무롤

숨길 건 없어. 사실 나랑 슌의 개인 성적은 형편 없었거든. 겨우 훈련소를 통과할 기준을 간신히 맞췄었지.


무롤

우리를 받아준 지휘관은 나와 슌의 시너지를 더 중시하는 것 같았고, 게다가 상부와 약간의 커넥션이 있어서 자리가 하나 더 생기게 되었어.


그러자 상대방도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무롤

아마 윗사람이나 지휘관이나 '낙제생'인 우리 둘을 합쳐야 1인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어쨌든 루시아와 함께라면 팀의 파워 밸런스도 맞춰야 할테니까... 하하하.


루시아

지휘관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루시아는 위로를 잘하는 타입이 아닌지라 상대방의 자기비하를 단호히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

여기가 아마 그레이 레이븐의 휴게실이겠지. 너희들이 바로 내 미래의 동료들인가?


차분한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려왔고, 구조체 한 명이 현관에 서 있었다. 답답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던 듯 한동안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히로

나는 히로,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보조형 구조체다.


문패에 적힌 글자를 다시 확인한 끝에 상대방이 들어와 자기소개를 했다.


어라, 아저씨 아니에요?


히로

구조체가 된 몸인데 나이라는게 의미 있겠나? 어디선가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구조체가 있을지도 모르지.


히로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다들 억지로 야채 주스를 먹은 것처럼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에휴, 간단히 설명하자면...


슌의 몇 마디의 묘사에서 히로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히로

이런 일이 있었군...사실 너희들은 그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아도 돼.


히로

너희들의 전입신청은 레븐쉬ㅡㅡ즉,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 직접 요청한 것이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으니까.


무롤

어떻게 알았지?


히로

나는 그 사람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고, 내 딸을 치료하는 의사도 그가 찾아줬거든.


히로

참, 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제 찍은 우리 딸내미 귀여운 사진 좀 봐볼까?


히로는 딸 얘기가 나오자 마치 무슨 스위치가 켜진 듯 열정적으로 변했고, 가장 신나던 슌마저 상대에게 기세를 제압당했다.


덕분에 답답했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루시아의 가슴속에 팽팽했던 긴장도 풀렸다.


이로 인해 그녀는 히로가 말했던 자신의 의견을 철저히 관철시키는 레븐쉬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없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 레이븐의 네 사람은 레븐쉬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레븐쉬

나는 너희들의 새로운 소대의 지휘관이다.


레븐쉬

내 팔 말인가? 내가 이전에 저지른 실책으로 인해 지휘에 실패하여 대오가 전멸해 버렸었지.


레븐쉬

침식체로 변한 대원에게 나의 팔이 잘려버렸고, 결국 내 손으로 그를 척결해야 했었다.


레븐쉬

나는 그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이 로봇팔은 내가 저지른 실수를 일깨워주고 같은 살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존재하지.


레븐쉬

그러니 내가 너희들의 힘을 사용할 있게 해주겠나. 그렇다면 나는 너희들이 바친 모든 힘이 제대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겠다.


레븐쉬

무롤, 슌, 너희들의 협력이 두 사람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 너희들을 무시하는 자들이 더 이상 '낙제생'이라는 꼬리표를 너희들에게 붙일 수 없게 해주지.


레븐쉬

히로, 네 딸은 내가 잘 아는 의사에게 요양을 의뢰할 거야. 그곳의 환경은 생명의 별의 공동병실보다 훨씬 좋지. 비용 문제는 걱정하지 마. 네가 그레이 레이븐을 위해 일하는 한, 이 모든 것은 마땅히 네가 받아야 할 것들이니까.


레븐쉬

루시아, 어리둥절할 필요 없어. 그레이 레이븐은 너의 집이다. 오로지 우리만이 영원히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고, 영원히 널 버리지 않을 거다...


레븐쉬

그리고 나는 너를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리더로 임명하고 싶다.


레븐쉬

질문이 있는 것도 정상이지만, 왜 그런지 묻지 말고 내 설명을 끝까지 들어 봐.


레븐쉬

히로는 예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임무 중 너무 많은 개인적인 친분은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리더로서 적합하지 않지.


레븐쉬

슌과 무롤은 최고의 집행자이고, 상대방이 뒤떨어지면 본래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이 크게 저하되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은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지만, 결단에는 적합하지 않다.


레븐쉬

그리고 루시아, 네 자료를 봤는데, 너의 현장 반응과 형식에 대한 판단은 탁월해. 나에게도 적시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레븐쉬

인간의 육신으로 인해 나는 너희들과 함께 전장에서 활약하기 어렵고, 안전 요새에서 내리는 명령은 지연될 수밖에 없어.


레븐쉬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널 정찰부대에게 빼앗겼을 가능성이 높았었지.


레븐쉬

그래서 너는 리더의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인 거야. 자, 이유는 전부 설명했다. 또 다른 의견은 있나?


레븐쉬

없는 것 같군. 그럼,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3일 후에 있을 첫 임무에 대비하도록.



진지하지만 다소 비관적인 무롤, 쾌활하지만 명성에 신경 쓰는 슌, 차분하지만 딸이라면 냉정을 잃는 히로, 온 마음을 다하는 듯한 레븐쉬, 그리고 오랜만에 소속감을 느끼는 루시아.


이렇게 다섯 명이 당시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결성했는데, 이후 이들의 결말은 어떻게 됐을까?



슌&무롤

끄아아악...치지직...



히로

미안, 루시아...미안, 슌...무롤...



레븐쉬

히로...그리고 루시아, 왜 순순히 죽어주지 않는 거지?


총성과 극심한 통증이 이어졌고, 비의 장막 또한 새빨갛게 변했고, 희미한 의식 속에 전류의 노이즈가 머릿속에서 그대로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

인류는 널 배신했어. 그들은 믿을 가치도 없고, 도울 가치도 없지.


???

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결국 무엇을 얻었지?


???

부? 명예? 마음의 만족?



루시아

아니, 난 그런 것을 위해 싸운 게 아니야. 내가 구조체가 되는 것을 선택한 이유는...


???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

동포를 지상에 남겨두고 그들을 버려진 아이로 삼아 스스로 도망친 것은 다름아닌 인간이야.



???

지구를 되찾길 바라면서 너를 수술대와 전장으로 보내려는 이들도 인간이지.


???

희생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희같은 사람들 아니었어?


루시아

...


???

아니면, 루나를 위해서야?



루나

롤랑, 가브리엘, 먼저 물러가. 언니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어.


가브리엘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루나 아가씨.


롤랑

감동적인 재회네. 엑스트라는 이만 퇴장해야 할 것 같아. 즐거운 담소를 나누길.


커다란 기계체와 시종일관 웃음 가면을 쓴 듯한 구조체가 떠나가고, 완전히 달라진 두 자매에게 텅 빈 장소를 물려주었다.


루시아

루나, 너 지금...


루나

맞아, 언니. 난 이미 퍼니싱에 침식되었어...아니, 그건 정확하지 않아.


루나

승격 네트워크의 선별을 통과하고, 퍼니싱으로 인해 더 이상 이성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제하고 몰아낼 수 있다고 말해야겠지.


붉은 빛이 루나의 은백색 기체 위를 스치고 지나갔고, 여러 침식체와 수없이 맞닥뜨린 루시아에게 이것은 낯설지 않았다. 바로 고농도의 퍼니싱 바이러스가 논리회로에서 만들어내는 특수한 전기 스파크였다.


하지만 이제 루시아는 익숙한 타는 듯한 통증도, 이상한 느낌조차 느껴지지 않았고, 눈앞에 있는 퍼니싱은 그녀에게 공기처럼 평범했다.


루나

롤랑과 가브리엘도 마찬가지로 선별에 통과했었고, 승격자의 일원이야.


루나

그 인간이 링크하려했던 구조체도 그랬었고, 언니...


루나

지금의 언니도 마찬가지야.


루시아

...


루시아

그 승격자가 누군지 알고 있니?


루나

아니, 서로 잘 모르는 사이야. 선별된 승격자가 모두 같은 집단에 소속된 것은 아니야.


루나

우리는 목적과 선별을 추진하는 방식도 다르고 일반적으로는 서로 접촉하지 않아.


루나

그 승격자와 언니 소대의 접촉은 누군가 일부러 한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그렇게 쉽게 들키지 않았을 거야.


루시아

넌 그 승격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 당시에도 거기에 있었어?


루나

나도 그때의 광경을 현장에서 침식체의 기억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되었어.


루시아

침식체의 기억을 읽는 것...그것도 승격네트워크가 부여한 능력이야?


루시아

루나, 그날 네가 공중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따라간 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루나

언니에게 이 일의 경과를 천천히 알려줄게.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나도 언니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어…


오랜만에 만난 훈훈함이 오래가지 않았고, 헤어지고 난 후의 경험도 둘 다 반가운 점이 별로 없었다. 하나는 배신 때문에 증오와 두려움의 길을 걸었고, 다른 하나는 쓰디 쓴 결말이 날 때까지 거짓말에 속았었다.


루나

미안해, 내가 좀 더 일찍 언니를 데리러 갔어야 했는데.


루나

하지만 괜찮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헤어질 필요가 없어. 언니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거야.



???

그녀는 너와 비슷한 피해자야.


???

이제 언니인 너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지 않니?


루시아

하지만 이 모든 비극을 초래한 것은 바로 퍼니싱이야...엄마...아빠...루나...퍼니싱이 없었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어.


???

퍼니싱은 인류의 무모한 행동으로 인해 초래한 벌이야. 너희들은 잘못된 결정의 피해자일 뿐이지.


???

왜 피해자인 네가 잘못된 결정을 한 사람의 잘못을 보상해야 하는 거지?


???

너의 진정한 소원은 도대체 무엇이니?


루시아

난...



루나

언니, 난 이제 언니를 지킬 수 있어...


???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또한 무엇일까?


???

약자는 소원을 이룰 수도, 미래를 선택할 권리도 없어...


???

온전히 나를 받아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줄게, 넌 그럴 자질이 있어...


루나

그러니까, 오늘부터...나 자신이 되는 거야...


노이즈가 점점 또렷해졌고, 점점 루나의 음색과 겹치자 루시아는 또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도 그녀는 그 소리에 자신의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루나

언니, 좋은 아침. 오늘 기분은 어때?


은백색의 기체가 루시아 옆에 얌전히 있었다. 루나는 떨어져 있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커졌지만 루시아는 상대의 미소에서 익숙한 느낌을 찾을 수 있었다.



루시아

루나...이번에는 얼마나 더 오래 휴면상태에 빠졌었지?


루나

한 시간밖에 안 됐어. 이전보다 많이 짧아졌네.


루나

언니, 이제 막 선별에 통과해서 아직 승격 네트워크가 부여한 힘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도 정상이야.


루나

괜찮아, 언니가 그것을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나는 언니와 함께 이 힘을 천천히 익히도록 도와줄게.


상대방의 얼굴에는 추억의 빛이 돌았고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루나

예전에는 언니가 가르쳐줬는데 이제 나도 언니를 도울 수 있게 됐어.


정말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루시아는 마음속에 의혹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루나처럼 주변의 퍼니싱을 통제하려 했고, 붉은 번개가 번쩍였다...


루시아

(윽...)


이미 승격자가 됐지만 루시아는 무의식적으로 그 힘을 배척하는 동시에 그 힘도 배척하고 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결국 상처만이 남았다.


루시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바다에서의 따가운 아픔을 다시금 아무렇지도 않게 참았고, 붉은 번개는 이미 낡아빠진 군복 위에 까맣게 그을린 흔적을 남겼다.


루시아

또 그 소리가 들려왔어...루나, 너도 매일 듣고 있니?


루나

난...가끔 듣긴 하지만 무시하면 금방 사라졌었어.


루시아는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자신이 들은 내용을 알리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의 내용이 입가에 와서는 도저히 발성 장치를 통해 전달되지 않았다.


모래시계 속의 모래알처럼 말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좀처럼 전달되지 않는다.


루나

그렇구나, 언니는 아직 선택을 못 한 것 같아, 그래서 언니가 들은 것을 아직 나에게 말할 수 없어.


루나

하지만 괜찮아, 언니를 핍박하는 사람은 여기 없어, 언니는 천천히 원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어.


루나

항상 기다리고 있을게.


선택이라...인류의 적이 되는 것, 자신이 대항했던 것의 하수인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일까?


루시아는 마음속의 의문을 털어놓지 않았다.



히로

하지만 어쩌면...우리는 이미 인류의 적일지도 몰라...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분히 오래 잠을 잤지만 지금은 깨어있음에 시달리고 있다.


루나

언니는 오늘도 나가서 걸어다닐 거야?


루시아

응, 나 혼자면 돼.


루나

...


루나

알았어. 조심해, 근처에 공중정원 부대가 있어.


루나

나는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