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그녀가 한 모든 일은 운명이라는 조롱 아래 무의미한 소용돌이에 흔들리고 있던 걸까.



루시아는 도시의 폐허 속을 무작정 걸었다.


비가 온 후의 도시에는 흩날리는 모래 먼지가 없어져 오히려 훨씬 상쾌하고 깔끔해 보였다.


구조체가 돼 훈련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군 복무를 시작한 뒤 루시아는 한 번도 걸음을 멈추고 형체도 없는 이 땅을 천천히 걸어다닌 적이 없었다.


레븐쉬는 엘리트 소대의 지휘관 중에서도 포석을 계산하는 데 가장 능했다.


그는 구조체의 모든 역량을 계산에 넣고, 계속되는 전투에 휴식 시간을 적절히 삽입해 효율을 보장하면서 사상자를 최소화하였다.


과감하고 능력도 뛰어나며 부하들을 잘 대한다…. 이것이 집행부대의 레븐쉬에 대한 인상이자 루시아를 비롯한 이들이 그에게 느낀 인상이었다. 본인의 행동 역시 그런 평가를 받을 만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구조체 의사

기체의 손상이 매우 심각합니다. 특히 오른팔의 경우 이 정도의 손상은 완전히 교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서명하십시오.


레븐쉬

그렇다면 그녀에게 얼만큼의 휴식이 필요하지?


구조체 의사

일부 비생산 부품은 일단 신청하고 대기해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일주일 뒤에야 작전을 재개할 수 있을 겁니다.


구조체 의사

또한, 현재 전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사방에서 당신들을 비롯한 엘리트 소대의 지원을 필요로 합니다.


구조체 의사

하지만 소대원들에게 더 많은 휴면을 취하게 하는 것도 잊지 마세요. 그들의 의식의 바다 상태는 지난번 검사 때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레븐쉬

이 건에 대해서 내가 신청서를 제출하지. 자네 말대로 지휘부 사람들도 내 휴가 신청을 진지하게 고려하겠지?


구조체 의사

그건 모를 일이죠.


의사는 손상이 심한 루시아를 동정어린 얼굴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구조체 의사

비슷한 말을 여러 번 했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너무 적어요. 대부분의 지휘관과 지휘부 사람들은 의식의 바다가 그저 사소한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조체 의사

그러나 의식의 바다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손상과 피로가 축적되고 충분한 휴면이 없으면 의식의 바다는 계속 피로 상태에 놓이게 되며, 의식 연결을 통해 일시적으로 의식의 바다를 평온하게 만들 수 있지만, 잠재적 위험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상대방은 서명된 작업판을 접고 몇 마디 더 부탁한 뒤 자리를 떴다.



루시아

지휘관님, 저는 계속 싸울 수 있습니다.


레븐쉬

이 일은 너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야. 의사, 나, 그리고 다른 대원들의 의견을 종합한 거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무롤

미안해, 나와 슌이 그 침식체들을 제대로 막았더라면...


레븐쉬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그 침식체들은 원래 다른 소대의 요격 표적이었고, 원래 계획 밖의 일이었지.


레븐쉬

나는 015번 도시로 향하는 작전을 잠시 중지하도록 상부에 신청할 테니,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잠시 여기에 남아서 정리하도록.


루시아

하지만 그쪽에 증원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텐데….


레븐쉬

루시아...


레븐쉬는 한결같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븐쉬

사람을 구하고 싶은 마음도 알고, 너의 강함도 이해하지만,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을 반드시 네가구해야 하는 것도 아니야.


레븐쉬

뿐만 아니라 그레이 레이븐 소대 외에도 공중정원에는 여러 엘리트 부대가 있지. 그들은 구조 임무를 완수할 거다.


레븐쉬

너의 전우를 믿고, 공중정원을 믿고, 그리고...


레븐쉬

내가 너를 가장 신뢰하는 리더로 생각하는 것처럼 내 판단을 믿어주길 바란다.


루시아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롤과 슌에게 제지당했다.


루시아

알겠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휴식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레븐쉬

그래, 무롤과 슌,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레븐쉬

나는 우선 상부에 가서 이번 작전을 보고하고 휴식 시간을 신청하도록 하지.


레븐쉬는 단말기를 열면서 야전병원 밖을 향해 걸어갔다.



무롤

이제 됐어 루시아, 지휘관 말이 맞아.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질 필요는 없어.


무롤

그리고, 이번에 고마웠어.


상부는 진짜 인간도 아니라니까. 구조체가 됐을 때 황소 노릇을 할 각오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인간들이 우리를 이렇게 부려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고.


무롤

자, 불평은 여기까지 해. 적어도 그레이 레이븐에는 아직 큰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잖아. 그것만으로도 이미 다른 소대보다 훨씬 낫지.


난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지휘관에게 불평하는 게 아니라 지휘부의 인간들을 말하는 거야. 그 자식들은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고 다니는지 전혀 몰라!


무롤

어차피 지휘관의 권한도 한계가 있어.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뛰어난 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지휘부는 지휘관과 관련된 의견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거지.


무롤

그러나 중요시만 할 뿐이야. 지휘관도 상부의 생각을 뒤흔들 수 없는 거곘지.


무롤

기껏해야 임무 중 더 나은 방향을 쟁취하는 정도려나.


에휴, 우리 지휘관은 언제 지휘부로 승진할 수 있으려나. 그가 있으면 우리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을 거야.


무롤

이것은 지휘부의 고위층이 간섭할 일이 아니야. 게다가 지휘관이 승진하면,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지휘관을 바꿔야 해. 그 바뀐 사람이 지금의 지휘관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


무롤

우리 같은 군용 구조체는 후방의 지휘관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없어. 똑똑하고 손재주가 뛰어났다면 엔지니어링 부대나 고고학 부대로 갔겠지.


무롤

그치만 스스로에게 물어봐, 넌 그 조건에 해당될까?


참나, 지휘관을 바꾸고 싶진 않다고...그래도 승진하는 건 그 사람한테 좋은 일이기도 하고, 참 고민되네...


이번 그레이 레이븐의 낭패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여겨질지 모르겠구만.


일찍이 질투하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소리를 들었어. 뭐 그레이 레이븐이 임무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만 한다고 그런다나 뭐다나. 그러고는 그레이 레이븐은 매번 운이 좋다… 이런 거 말이야.


루시아

미안해요, 제가 그때 좀 더 빨리 대처할 수 있었다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루시아, 너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고 있어.


무롤

그래, 지휘관이 말했잖아. 모든 일을 자신이 짊어질 필요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을 믿어줘.


루시아

하지만 지휘관님은 침식체를 빨리 물리칠수록 지구를 더욱 빨리 탈환할 수 있다고도 말씀하셨어요.


무롤&슌

...


무롤

이것은 우리 같은 소규모 집행부대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무롤

솔직히 말해서, 나의 가장 큰 소원은 정년까지 살아남고 훈련소에 가서 교관 일을 하는 거였어.


나도 비슷해, 루시아, 계속 전선에서 싸울 생각은 아니지?



루시아

저는 그날이 올 때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싸울 거예요.


무롤&슌

...


무롤

정말 너답네. 네가 이러는 걸 보니 정말로 그날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아.


무롤

그렇다면 나와 슌도 힘을 내야겠네. 항상 너에게 짐을 떠넘길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왜 자꾸 나 대신 결정하는 거야? 원래 나도 그렇게 말하려고 했어.



히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내가 뭘 놓친 거지?


그때 미리 불려갔던 히로가 대기실로 돌아왔다.


오, 히로, 마침 잘 왔어. 우린 지금 침식체를 박멸하고 지구를 탈환하는 일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었어.


무롤

너무 많이 생략했잖아...


히로

지구 탈환...



몇 분 전, 야전 병원 밖.


히로

루시아의 부상은 공중정원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는 것이 가장 최선이다. 왜 정위치 휴식을 신청한 거지?


레븐쉬

...


히로

그 특수한 구조체를 위해서인가?


히로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레븐쉬

그는 지구를 되찾을 열쇠야, 반드시 우리 손으로 잡아야만 해!


히로

정말 자신 있어?


레븐쉬

상부에 지원을 요청할 거다. 만일 그가 인류에게 적대적인 존재라면, 무력으로 포획하거나 파멸시킬 수밖에.


히로

상부가 정말로 믿을까?


레븐쉬

만약 네가 말한다면 아마 믿어주지 않겠지. 결국 그 당시 너의 기록 기기는 손상되었었고, 그들은 너의 일방적인 주장을 믿지 않을 거야.


레븐쉬

하지만 나는 그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기 위해 내 모든 명예를 걸 거다.


레븐쉬

그건 그렇고, 이 일은 중대한 사안이니 당분간 루시아에게 말하지 마.


히로의 얼굴에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레븐쉬는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레븐쉬

히로, 대장인 루시아보다 사실 네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야. 네 딸도 나의 인맥을 동원해서 개인병원에 입원한 거 아니었나?


레븐쉬

너와 나야말로 무거운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지, 안 그런가?


히로

알겠네...


레븐쉬는 후속작전을 신청하고 배치해야 한다는 몇 마디 말을 더 강조하며 서둘러 떠났고, 히로는 동료들에게 숨긴다는 생각에 무거운 마음으로 대기실로 향했다.



비록 그가 레븐쉬를 위해 숨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말이다.


루시아

히로?


히로

아, 별거 아니네...슌의 말이 맞아. 침식된 개체를 모조리 제거해야 우리는 지구를 되찾을 수 있겠지.



과거에 그녀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퍼니싱은 그녀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갔었다.



인간일 때는 루나를 생존시키고 보호하기 위해 비수를 휘둘렀다.



구조체가 된 후에도 퍼니싱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의 장검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이제, 생존의 걱정은 없어졌고 루나도 자신보다 훨씬 강해졌다.



이상과 믿음은 배신당했고, 자신과 루나는 인간의 희생양이 되었고, 오히려 퍼니싱은 두 사람이 배신당한 뒤 살아남게 만들었다.



그녀는 또 어디에 머물러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며, 왜 검을 휘둘러야 할까?



그녀의 한, 그녀의 이상, 그녀의 믿음은 또 어디에 걸어야 할까?


아니면 그녀가 한 모든 일은 운명이라는 조롱 아래 무의미한 소용돌이에 흔들리고 있던 걸까.


루시아

...


한 발의 총성이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


루시아는 별다른 생각 없이 습관에 이끌리며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쪽으로 달려갔다.



전투 개시




저기! 너 공중정원에서 왔지! 빨리 와서 도와줘!


루시아

(제복 때문인가...)



알 수 없는 소리

힘...통제...미물...


루시아

(윽...또 그 소리가...)


알 수 없는 소리

배신...무력...결말...




도와줘서 고마워. 하지만 역원장치가 없으면 나는...이 마크...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루시아였어!


하지만 넌 아직 공중정원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지 않아?


루시아

...


말할 수 없는 비밀임무인가…… 으윽…


시간이 별로 없어...우리는 예비팀인데 이미 대포사료로 버려졌어...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승격자'라고 부르는 이상한 놈을 만났고,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현혹되어버렸어!


공중정원에 빨리 알려서 그들을 막아줘...나의 마지막 부탁이야...그들은 D11구역에 있어..


루시아

버텨, 내가 의료 리소스를 찾아올게.



루시아

이 의료용 로봇은 완전히 분해되어서 사용할 수 있는 부품이 모두 소실되었어.



【공지】

본 협동 조합 커뮤니티는 회원에게만 의료서비스를 개방하고 있으니, 필요시 케어로봇에게 등록하여 권한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루시아

경보 프로그램이 발동되었어...!




-공중정원 징집 광고-

구조체가 되어 지구 수복을 위해 싸우자! 당신의 가족이 더 이상 침식체에게 마음 졸이지 않도록 하자!



루시아

일찌감치 도태된 간호형 로봇이군…수중에 권한 카드가 있어.


루시아

저 문을 여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 거야...





【공지】

금일부터 전 구성원은 이 지역에서 철수하오니, 모든 스마트 기기 제품을 집합 소각장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선반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였고 뼈대인 쇠막대까지 뜯겨 나갔다.



루시아

역시 여기에 의료용 로봇이 있었군… 혹시나 쓸만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루시아

권한 변경...성공했어.


루시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루시아

어서 돌아가자.



루시아

(동력코어가 뚫려있어. 옆에 떨어져 있는 건…그 사람의 권총…)


루시아

침식체가 되기 전에 자살한 건가...그렇다면 최소한 마지막 소원은 들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