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위로 흐릿한 초상이 반사되어 '루시아'라는 외딴 배를 향해 돌진하여 그녀를 바다 밑으로 끌고 갔다.



【경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침입 감지, 기체 전투 성능 이상 발생

전투 모듈 강제 재가동 권고



루시아

하필 이럴 때...


루시아

안 돼, 아직 재가동 할 수 없어.



라미아

으아ㅡㅡ다가오지 마!


클라렌스

아니야 아가씨, 널 뜯어내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약속을 지킬 거야.


라미아

저리 가, 저리 가, 라미아에게 떨어져!


채드

닥쳐! 클라렌스, 어서 처리하자.



클라렌스

요~ 착한 아가씨, 어디 출신이야? 퍼니싱이 활개치는 시대에도 여전히 미녀를 구하기 위해 영웅노릇을 하고 다니나?


채드

공중정원의 제복이라, 너도 탈주자인가? 낯이 익은데...


채드

뭔가 이상해! 일단 그녀를 때려눕히자!




라미아

고마워...라미아는 도망칠 힘도 없었어...



【경고】 기체 손실 과다... 【경고】 기체 손실 과다...


라미아

꺄악! 뒤에!


워커

드디어 기회를 잡았어!





ㅡㅡ알 수 없는 데이터 수신 중ㅡㅡ

기체 복구 완료

성능 강화 중


【경고】 주변의 침식 농도 증가로 인한 차단 강화




"루나"

드디어...여기에 이른 거야?


"루나"

따라잡았어...내가 늦었지...힘을 받아들여...


루시아

(난 아직...여기서 쓰러질 수 없어!)



아직 힘이 충분하지 않아, 계속해서 승격 네트워크의 힘을 받아들여줘.


【너에게 굴복하지 않을 거야.】

【다시는 그녀의 모습으로 이런 말을 하지 마.】




저항하지 마, 우리가 널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게.


【너를 믿지 않을 거야!】

【나를 통제하려 하지 마!】



복구 완료, 강화된 쌍검 검기를 사용해 환영을 격파하라


ㅡㅡ재가동 프로세스 시작ㅡㅡ




채드

이제 널 보호할 사람은 없다. 순순히 죽어라.


라미아

라미아는 단지 집에 가고 싶었을 뿐인데….


ㅡㅡ재가동 완료ㅡㅡ



루시아

그만 둬!



클라렌스

강하다...전혀 상대가 안 돼!


채드

뛰어, 뛰어!


루시아

떠나, 내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역돌격 실시



전투 종료




루시아

휴우....윽...


놀라운 열기가 루시아의 기체에서 뿜어져 나왔고, 옆에 쩔쩔매던 이인형 구조체가 건드리려다 이내 움츠러들었다.


라미아

너 괜찮아?...악! 뜨거뜨거!


일반적인 구조체라면 이런 고온에서 과열 보호로 셧다운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에게는 한 번도 노출된 적이 없는 강화된 힘이 있었다... 어쩌면 몸에 있는 각종 안전장치를 강제로 부수고, 기체 성능이 이론상 상한선을 돌파할 수 있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루시아

이것이 바로...승격자의 힘인가?


귓속말은 사라졌고 루시아는 자신의 의식의 바다와 무언가의 희미한 연결이 긴밀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라미아의 시각에서 자신을 구한 백발 구조체의 몸에는 공기를 뒤틀게 하는 고온 외에도 붉은 스파크가 끊임없이 튀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루시아

나한테서 떨어져!


루시아의 호통 소리에 놀란 개구리처럼 튕겨나간 라미아는 10m 떨어진 폐허의 벽 뒤로 휙 몸을 피한 채 머리 하나만 내밀고 루시아 쪽을 살폈다.


루시아의 의식은 비바람에 흔들리는 외로운 배와 같았다. 노이즈의 속삭임은 사라졌지만 관측도, 구상도, 이해도 할 수 없는 데이터 흐름은 그녀의 의식의 바다에 쓰나미를 일으켰다.


파도 위로 흐릿한 초상이 반사되어 '루시아'라는 외딴 배를 향해 돌진하여 그녀를 바다 밑으로 끌고 갔다.



채드

제기랄, 분명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그 미끄러운 인어를 겨우 잡았었다고!


클라렌스

아까 분명 그 유명한 루시아였지. 지난 임무에서 모든 대원과 지휘관을 잃고 공중정원에서 대기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워커

상부에서 비밀 임무라도 보낸 걸까? 아니면 정화부대에 합류한 건가?


채드

그럴 리가 없어, 그녀의 군복에 있는 팀 로고가 여전히 그레이 레이븐인걸 못 봤어?


클라렌스

우리가 어떻게 우연히 그녀와 부딪힌 건지... 만약 그녀가 마지막에 기체 상태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죽었을 거야.


워커

이제 어떡하지? 공중정원으로 돌아갈 수 없고, 승격자의 임무도 완수할 수 없게 됐어.


채드

또 다른 기회를 찾아보자, 어차피 보라색 구조체의 흔적을 찾아도 승격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클라렌스

안타깝게도 윌 그 자식은 따라오길 거부했지, 그 녀석이야말로 이런 일에 제격인데 말이야.


채드

멍청한 놈. 평소에 우리 중에서 공중정원을 가장 심하게 욕해대더니, 정작 기회가 오니까 오히려 뒷걸음질이나 치고 본부에 보고하려 하다니, 겁쟁이 새끼!


워커

그런 말 하지마, 어쨌든 과거의 동료였잖아.


클라렌스

착한 척 하지 마, 제일 먼저 총 쏜 사람은 바로 너였잖아?


워커

어쨌든 나는 단지 그 친구에게 통쾌함을 주고 싶을 뿐이었다고. 악랄하게 역원 장치를 끊어서 침식체가 되도록 내버려 둔 건 누구였더라?


워커

내가 볼 때 너는 기회를 잡아서 화풀이 했던 것 같거든, 왜냐하면 윌은...


클라렌스

닥쳐!


어떤 금기를 깨는 듯한 워커의 말에 클라렌스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들었고 워커도 이에 질세라 총을 뽑아 들고 대치했다.


채드

그만해! 너희들은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 셈이야?


채드의 일갈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리더로서의 권위는 일찌감치 그가 탈주를 결심하고 윌에 대한 공격을 묵인한 뒤 사라졌었다.


숙청에 대한 두려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초조함, 잘 되어가던 일을 망친 루시아에 대한 원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모래시계 속의 자갈처럼 서서히 마음속에 쌓이고 이성의 가는 줄을 건드린다.


저마다 더 많은 죄를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더 큰 상처를 들춰내는 것이 마치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것처럼 행동하려 한다.


???

아직 기운 넘치나 보네. 승리의 열매를 빼앗긴 나머지 선택받은 용사들이 좌절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때아닌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어느새 한쪽 폐허 위에 구조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채드

왜 온 거지? 아직 약속한 시간은 아닐텐데?



자신을 '롤랑'이라고 칭하는 구조체는 당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들을 찾아냈었고, 침식체가 그의 손짓에 꼭두각시처럼 지시를 따르는 것을 본 이후에 그들은 '승격자'라는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믿었었다.


롤랑

그렇게 말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잖니. 너희들이 걱정돼서 와본 거라고.


롤랑

돌발상황이 닥쳤을 때, 선택받은 용사는 언제나 안내자가 필요하지 않아?


클라렌스

우리를 도와줄 건가?


롤랑

한 가지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어. 너희들이 찾아야 할 그 구조체는 이미 이곳을 떠났을 거야.


채드

이게 왜 좋은 소식이지?


롤랑

결국 너희들은 더 이상 헛수고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좋은 소식 아니야?


채드

지금 놀리는 건가?


상대방의 여유롭고 무심한 태도에 채드는 병기를 겨누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할 뻔 했지만, 침식체를 통제하는 능력이 우려되기에 울분을 삼켜야 했다.


더구나 증오와 동료의 참살을 묵인하는 이색적인 쾌감에 힘입어 상대방이 말한 '선별 제 1라운드'를 견뎌낸 채드는 이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상대와 충돌하는 것을 피했다.


채드

우리가 무엇을 하길 바라지?


롤랑

아주 간단해, 이전과 같이 그 인어를 처리해. 그 다음에 최종 단계까지 갈 수 있는 자를 내가 데리고 갈게.


채드

알겠다.


워커

하지만...


클라렌스

닥쳐! 더 볼 일 없으면 우리 먼저 떠나도 되겠지.


롤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어 청하는 손짓을 했다.


세 사람은 이내 롤랑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는 세 사람이 떠나는 방향을 바라보며 귀를 가볍게 두드렸다.


잠시 후 그는 웃으며 혼잣말로 말했다.



롤랑

눈앞의 강적으로부터 뒷걸음질을 쳤기 때문에, 적진에서 쓰러지고자 했던 용자조차, 결국에는 배드 엔딩을 맞이하게 되지.


롤랑은 손을 품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롤랑

이제 막을 내릴 때가 되었으니, 성대한 불꽃놀이를 선물해 줄게.


작동하지 않는 스파이 이어폰을 귓가에서 떼어냈고, 굉음에 조금 불편해하는 소리 감지 장치를 두드리며 롤랑은 폐허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롤랑

이제 그 쪽 상황을 살펴볼 차례가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