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의역 O

 


리는 시공간 연속체를 ‘여행’할 때 느끼는 이질감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이번 균열의 끝에 나타난 건 과거의 어느 특정 시점이 아니라, 낯설고 혼돈스러운 공간이다. 광풍이 휘몰아치자 머리 위는 마치 거꾸로 된 차가운 바다와 같다. 부서져 알아볼 수 없는 괴상한 구조물이 떠다닌다. 공간 깊은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천둥소리는 극도의 비통함에 잠긴 통곡이다. 또 땅바닥에 잠들어 있는 종말의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를 연상케 한다. 마치 그것은 다음 순간에 속박에서 벗어나 만물을 침식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이 폭풍우 속에서 파괴되었다가 재구성되어 순환한다. 이곳은 결코 기억 속의 그 어떤 곳도 아니며, 시간의 끝자락에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린, 이름 없는 구석에서 잊힌 것 같다.

 



 

리: 여기는……의식의 바다?

 


리는 어떤 기이한 신호에 이끌린 듯 유일한――완전하게 네모난 곳에 서서 탐색하듯이 한 걸음을 내디딘다. 발밑의 네모난 것은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에 따라 조금씩 맞춰져, 먼 곳을 향해 뻗어나가는 길을 만든다. 길의 종착점은, 폭풍우 속에서――유일하게 고요한 외딴 섬이다. 

 


리: 저쪽에 있나. 

 


그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전투시작

 


폭풍에 휩쓸린 의식의 바다……

 


호수에는 침묵이 흐른다.

 


다른 “리”의 모습은 볼 수 없다……

 


리: 비정상적인 공간……소속이 확정되지 않고, 서로 다른 의식의 바다가 뒤섞인 듯한 상태야. 아직은 그나마 안정적이니 이곳을 뚫어야 한다. 이 장벽들은 탑 안의 봉쇄와 약간 비슷해 보이는군. 원리가 비슷하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리: 역시 그렇게 쉽지는 않군. 

 


리: 만약, 이 장벽의 “시간”이 역행한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출력을 조정하면……

 

 

리: 역시……

 


이 지역을 계속 조사하세요.

 

 

리: 이것은 기억의 파편이지만, 내용이 완전하지 않아. 

 


리: 또 다른 기억의 조각은 이전의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군. 

 


 

리: 또 한 토막의 기억 파편일 뿐이라 내용을 분간할 수 없어. 기억의 파편이 새로운 데이터로 합쳐졌는데, 그쪽의 ‘소용돌이’와 관련이 있나?

 


리: 그냥 보여줘……네 뒤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기억과 “소용돌이”가 공명하고, 의식의 바다 깊이 있는 기억이 출렁인다――

 


――시곗바늘이 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 미친, 나는 또 어디 있는 거지? 앞에 있는 건……뭐지?

 


리: 이건……내 기체인가? 아니, 좀 이상해……보아하니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 같군. 난 그런 기억이 없어. 

 


리: ……또 다른 “나”의 기체다. 이 자세는, 무엇을 만난 거지? 왜……갑자기 머레이가 생각나는 걸까?

 


리: 알겠다……이건 “나”의 시간별 투영이군. 이것들의 종착점은……모두 의심의 여지가 없이 죽음이다. 이런 게 여기에 있다니, 누구의 악취미인지 모르겠군. 이것이 필연적으로 도달할 결말이라면, 내가 찾는 종착점은 과연 존재할까?

 


리: 또 하나의 투영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가……? 이런 곳에도 적이 있다니……

 


“통제 불능의 집착”


리: 아니, 이건 적이 아니다……상태가 이상해. 이것 자체는 이렇게 행동할 수 없어. 

 


리: 역시나……이건 “나 자신”이다. 아까의 투영이랑 같아. ……내가 자초했어.

 


리: 왜 여기에도 이합 생물이 나타나는 거지? 여기서 소모할 시간은 없어. 가능한 한 빨리 탑으로 돌아가는 노드를 찾아야 한다. 

 


리: 저기 있다!

 


리: 됐다. 다른 “나”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군. 이 의식의 바다 안정도가 하락하고 있어. 그들도 여기에 있다면……

 


리: 이 진동은……큰일이야……!

 

――시곗바늘이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리: 또 다른 무질서 공간……어떻게든 이곳을 떠나야 해. 

 

 

???: 답은 여기에 없다. 너는 실패했어. 우리는 실패했어……

 

리: 이건?!

 

 

제231번째 시도……나는 보았다……날개가 부러지고……날개가 눈과 진흙 속에 떨어졌다……

 

리: 익숙한 목소리다. 도대체 누구지……

 


……기다리고 있어……인류의 죽음으로……열리지 않은 문에 닿는 순간을……

 

 

……나에게, 너희들의 답을 알려줘.

 

 

리: 나에게 전하고 싶은 정보가 있나? 과거의 나……아니……다른 “세계”의 나. 

 


리?: ……


리: 우리는 항상 “올바른” 길을 찾고 있고, 이를 위해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모든 자신을 말살하는 걸 서슴지 않는다. 우리가 남긴 흔적은 많은 걸 바꾸기에 충분하다. 그렇지 않나? 네가 본 답을 알려줘. 이 모든 것의 근원, 도달할 수 없는 미래. 도대체 누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지. 

 


리: 다른 적, 다른 재난, 다른 결말, 비슷한 비극. 몇 번이든, 나의 총구는 나를 가로막는 모든 존재를 가리킬 거다!

 


 

리: 먼저 상황을 볼 줄 모르는 이 녀석부터 해결하지. 

 


리?: 우리는 수많은 “가능성”을 겪었다. 단지 그 미래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지. 모든 것을 끊임없이 바꾸고, 모든 것을 끊임없이 반복한다……“내”가 더 이상 “나”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리는 나타나, 우리를 대신하여 계속 나아갈 거야. 

 


먼지로 뒤덮인 기억은 다시금 공명한다.

 


결의의 출발점, 갈구하던 미래, 모든 게 다시 한데 모인다.

 


리: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 노력이 헛수고라고 해도 상관없어. 난 단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도 전진할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나……

 


저기 있는 나는, 새로운 기체<//가능성>의 나다.

 

리: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건 같은 결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붙들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

 


미래는……너에게 맡길게……

 


전투 종료

 



 

모든 기억이 지금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원래 이곳은 그의 의식의 바다이며, 알고 보니 모든 실패와 죽음을 담은 그 의식의 바다이다. 또한, 모든 과거와 미래, 그리고 다른 가능성을 위해 싸우는 ‘리’의 의식의 바다이다. 이것들은 어떤 계기로 인해 서로 겹겹이 얽혔고, 서로 연결되어 눈앞에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공간을 형성한다. 그는 드디어, 기체가 적응할 때 부쩍 선명해진 의식의 바다 과부하와 그 순간 지나간 화면의 진정한 근원을 깨달았다. 이것의 존재 의의는 단 하나로, 미래에 대한 ‘그’의 모든 기억을 봉인하는 것이다. 과거로 향하는 모든 메시지는 그 유일한 미래를 향하기 위함이다. 이미 미래에 있는 그는 메시지를 교환하고 행동을 취하는 것까지 자신의 모든 기억을 차단한 것이다. 단지 조금 ‘우연’한 단서들이 그를 차근히 이곳까지 이끌었다. 수많은 리는 마음속의 미래를 위해 싸운다. 그리고 한 리는 작은 변수로 인한 나비효과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쉴 새 없는 윤회 속에서 무너져가는 그를 이 의식의 바다로 끌어들인 후 제 손으로 소멸시킨다. 바로 이 순간, 그는 이러한 기억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다. 만사 만물의 정보량이 모두 직관적이고 또렷하게 그의 앞에 펼쳐져 있다. 그의 의식의 바다는 그렇게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담을 수 없지만, 지금 이 자리에 서서 또 다른 자신의 도움으로 모든 세계선 중 ‘자신’의 연산력을 공유할 수 있다. 바로 지금, 그는 봉인되고 지워진 많은 일들을 떠올린다. 

 


그는 공중정원의 함교에서 무기를 든 구조체에 둘러싸인 자신을 본다. 그들의 눈에는 광기의 붉은 빛이 반짝였으며, 응답 가능한 모든 통신에서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그는 더 이상 익숙해질 수 없을 정도로 낯이 익은 인간이 얼굴에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미친 웃음을 띠고, 천천히 그에게 총을 드는 걸 보았다. 

 


그러자 그도 총을 들었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공중정원이 추락했다. 일찍이 에덴은 대기 중에서 가장 밝은 불의 유성이 되었다. 그는 전속력으로 불과 주홍빛으로 뒤덮인 대지를 질주했고, 총알은 수많은 옛 동료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결국 그는 자신을 향해 뻗은 손을 잡지 못했다. 

 


차가운 기계가 하늘과 대지에 깔려 지구상에는 더 이상 어떠한 녹색의 기색이 없었다. 강철과 연면한 초토(焦土)는 유일한 풍경이 되었다. 그레이 레이븐은 여전히 회색 까마귀로, 그들은 이전의 지휘관을 구할 수 없었고, 심지어 시체조차도 되찾을 수 없었다. 그는 행동 능력을 잃은 채로 육친이 전투에 뛰어드는 뒷모습을 향해 쉰 목소리로 외쳤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설은 모든 것을 묻었다. 재앙은 모든 생명에게 무차별적으로 닥쳤고, 만물은 절대적인 혹한 속에서 파멸로 치달았다. 퍼니싱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위협이 되었다. 그는 헛된 전투에서 사람들이 영동 영야 끝에 하나둘 쓰러지는 걸 지켜보았다. 소녀가 자신의 영혼을 불태우는 대가로 구해낸 미래는 끝없는 전투의 영원한 밤으로 끝이 난다. 

 


온몸에 한 줄기의 데이터 흐름이 나타나며, 점차 조합과 분해로 완전한 인간형을 이룬다. 무수한 다른 세계에서 걸어 나온 ‘자신’이 앞에 나타나 다양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리(?): ……난 이런 과거를 바꾸고 싶었는데, 더 큰 비극이 일어났어. 마지막까지……나는 내가 무엇 때문에 전투하고 구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너는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어. 


리(?): 이건 내가 너에게 하는 충고다. 바꿀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지 마. ‘탑’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있었던 일들을 바꾸려고 하지 마. 대신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존재할 수 있는 미래를 찾아.

 


리: 난 계속 그렇게 하고 있었어. 

 


리는 주먹을 쥔 손을 내민다. 그의 눈빛은 확고하고 태연하여, 마치 그가 지금까지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 그의 의식의 바다에 모든 기억이 융합된다. 슬픔, 증오, 후회가 모두 그에게 녹아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세계가 수많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고, 정해진 궤적이 모든 사람의 노력으로 확실히 바뀌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절망하지 않는다. 그 기억들의 난류 속에서, 그는 이미 사라진 ‘리’의 마지막 기록 속에서 ‘탑’의 코어에 숨겨진 핵심 메시지를 포착한다. 그들은 오로지 그의 길을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형광으로 바꾸었다. 수많은 세계 속의 ‘리’가 전하고 싶은 건 비극으로 가득 찬 역사 자체를 한 번에 뒤바꾸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미래가 있다고 해도 ‘그’가 굳건히 걸어갈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천만번을 싸워도 무한한 미래 속에서 여전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는 이 특별한 의식의 바다 속에서 모든 자신과 눈을 마주친다. 그 모습 하나하나에는 시간이 흐르며 전투에서 새겨진 흉터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자신’의 모습은 이미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져 있지만, 오직 한 곳만은 그들 전부가 완전히 동일하다.

 



리(?): 분명히, 너는 이미 알아차렸을 거다. 

 


완전히 탈색된 백발을 가진 자가 리의 눈에 띄었다. 한쪽 눈만 남은 리가 그의 앞에 서는데, 그의 손에는 따뜻한 빛을 발하는 물체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그레이 레이븐의 명패이다. 

 


 



리(?): 어떤 시공간이든, 너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대원이다. 

 


 


리(?): 운명의 궤적이 어떻게 변하든, 넌 결국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선택할 거다. 

 


 


리(?): 그러니……‘너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리’만이 완수할 수 있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명패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먼 옛날로 향하는 것 같다. 그는 이미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미래를 본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냉혹함과 슬픔이 없는 대신, 셀로판지에 반사된 햇빛처럼 환상적이면서도 따뜻한 미소가 있다. 

 


리(?): 나는 이제 이런 기회가 없지만, 너는 다시 돌아갈 기회가 있다. 그들이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웃는 걸 볼 수 있어. 


리: 너희들은?

 


문제의 답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어 묻는다. 

 



 

리(?): 나는 당연히 나만의 전장이 있어. 나의 사명은 이미 끝났다. 

 



 

리(?): 나는 계속 싸울 거야. 아직 이루지 못한 소원이 있어. 

 



 

리(?): 또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리(?): 그리고 지키고 싶은 미래.

 


자신의 옆으로 걸어오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탑에서 자신을 도와준 ‘리’이다. 그의 모습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기체이다. 

 



 

리(?): 우리는 의식의 바다에 투사된 ‘유령’일 뿐이다. 탑 자체가 시간을 초월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존재는 결국 ‘규칙’에 의해 지워질 거야. 결국 시련을 받은 ‘내’가 선별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리: 선별……규칙? 또 누가 이런 ‘규칙’을 정할 자격이 있는 거지?


리(?): 나도 너와 같은 질문을 던졌어. 

 


그의 표정은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막막한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의 표정은 이렇게 보인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그레이 레이븐과 차징 팔콘과 함께 있으면 늘 이런 표정을 짓는 것 같다고 아무런 이유 없이 생각했다. 

 


리(?): ……너는 만날 수 있어. 답안도 네가 만들어 내야 해. 이미 넌 자기에게 던진 미제를 풀었으니, 지금부터는 뒤로 물러설 수 없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의식의 바다는 아직도 마지막 기억을 봉인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중요한 정보지. 그것은 네가 너를 위해 설정해놓은 순간에 봉인을 해제할 거다. 오직 한 번의 기회만이 우리가 이 의식의 바다를 통해 그것을 너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할 거고, 그건 네 마지막 카드가 될 거야. 그 전에 정상에 올라 그 빛을 막고 ‘탑’의 규칙을 역전해야 한다. 그래야 네가 신경 쓰는 모든 것을 진정으로 구할 수 있어. 

 


최초의 자신은 모든 아쉬움과 희망을 전하는 듯 무심한 미소로 그를 가볍게 친다. 동시에 리 앞에는 익숙한 시공간의 균열이 나타난다. 

 


리(?): 너는 이미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으니, 앞으로 나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