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의역 O

 


허물어지는 공간의 파편들 사이에서 리의 눈앞에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뒤틀린 시공간이 뒤섞여 진동하는 모습이 지휘자 없이 교향곡을 연주하는 현장 같다. 혼란스러운 음표가 악장에서 튀어나와 점이 되어 평면을 이루고, 이것이 2차원적으로 떠올라 발밑의 플랫폼이 되어 그가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으로 변한다. 방대한 정보량은 광풍처럼 그의 의식을 파고들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천만년의 시간 역시 그의 머릿속에서 이어진다. 리는 기괴하게 빛나는 색채 사이에서 여러 은하의 탄생과 죽음을 본다. 시간은 어떤 규칙도 없이 광풍에 휩쓸려가는 책의 페이지와도 같다. 그는 광대한 우주에 선다. 시야는 더 이상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는 무수한 은하의 탄생과 소멸로 생겨난 빛을 본다. 그것은 억만년 전 광휘에서 온 것으로, 인류가 사는 별은 우주의 척도에서 단지 걸음마를 배우는 갓난아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존재에게 별 그 자체는 그저 차가운 장난감 혹은 손아귀에 맴도는 오르골일 뿐이다. 마치 시종일관 현실 밖에 격리된 이 공간에 갇혀 있는 느낌이며, 인생에 매 순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다. ‘그’의 과거와 미래는 모두 평평하게 펼쳐진 지도처럼 그 위에 모든 세부 사항들이 섬세하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시작’과 ‘종말’이라는 개념은 이 공간에서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은 공간의 주인 손바닥 안에서 쉽게 가지고 노는 블록이자 차가운 폐루프(Closed loop)가 된다.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공간은 이미 안정을 찾아간다. 리는 익숙함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 알고 있다. 그는 이곳을 처음 방문한 게 아니다. 성운은 만물을 꿰뚫는 두 눈에 모이고, 검고 깊은 공허에서 홀로 서 있는 생명에게 온기 없는 시선을 던진다. 먼 곳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마치 직접 전래되는 것 같다. 이는 우주의 화음 또는 천만 명의 화음과 비슷하다. 이것은 리가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지만, 그는 공연히 이 뜻을 이해한다. 그들 사이의 대화는 그의 ‘추억’이자, ‘현재’이자, ‘미래’이다. 

 

 

 

‘너에게 보이는 게 혼란스럽니?’

 


리: 여기는 어디지?

 


‘경계 밖의 공간이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차원의 경계지. 너는 그걸 “문”이라고 부를 수 있어. 우리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위해 마련한 “응접실”이라고 이해하면 된단다. 인간이 적응할 수 있도록, 외형을 잠시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개조했어.’

 


리: 내가 왜 여기에 왔지?

 


‘이건 “인류”라는 이름의 문명이 문을 통과할 가능성을 나타내.’ 우주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삼라만상이 담긴 화음 속에서 조금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는 문득 의식의 바닷속 또 다른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리: 너는――너희는 무엇이지? 심판자, 아니면 선별자? 그 탑의 출현은 너희들이 선별에 사용하는 도구인가?

 


‘우리는 단지 관측체 의지의 집합이야. “규칙” 때문에 인간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없었고, 관측 초기에는 과도한 간섭으로 이제 막 출발한 세 개의 문명을 가속하여 무너뜨렸어. 저차원 세계를 드나들 수 있는 “투영”을 가진 극소수의 “우리”는 전달자이자 여행자야. “탑”은 또 다른 생명의 진화 상징이야. 너는 단지 그것의 특성으로 이곳에 오는 길을 찾았어. 퍼니싱이 인간에게서 새로운 진화의 방향을 찾은 것처럼, 인간도 달성할 수 없는 일을 이루기 위해 퍼니싱을 이용할 수 있어.’

 


리: 퍼니싱……선별자이면서, 동시에 선별된 사람인가?

 


‘너희가 “인간형 생물체”라고 부르는 생명은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생물들이 진화해 온 정점이야. 인류가 진정으로 그들을 격파했을 때 인류의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이 있단다.’

 


리: 너희가 원하는 건 도대체 뭐지?

 


‘모든 가능성에서 인류의 진정한 미래를 관찰하고 목격하는 것. 피와 살로 열리지 않은 문에 닿는 순간. 우리는 인류의 존속 가능성을 알고 싶어. 우리는 최종적인 “시련”을 통해 함께 “규칙”을 깨는 미래를 기다려왔어. 여기에 도착했으니――’

 

 

거대한 두 눈이 천막 속에서 사라지고, 세상은 갑자기 좁아진다. 무수하고 투명한 가시들이 시공의 틈새를 뚫고 나와 리를 향한다. ‘너의 의지로, 우리에게 네 답을 알려줘.’ 리는 수없이 해왔던 것처럼 그것들을 솜씨 좋게 피한다. 그는 여기에서 싸우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선형 플랫폼 위에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거의 다를 바 없는 허영이 그의 앞에 멈춰 서서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건넨다. 

 


‘오직 한 번의 기회만이 우리가 이 의식의 바다를 통해 그것을 너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할 거고, 그건 네 마지막 카드가 될 거야.’

 


리가 손을 내밀고 무기에 닿는 순간, 상처투성이의 구조체 허영이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그리고 변치 않는 용기와 그리움, 모든 세계선의 ‘리’가 싸웠던 기억이 전해진다. 뭇사람의 노력, 풀리지 않는 아쉬움, 그리고 인간의 의지로 그는 결국 이 기체로 탑 정상에 이르렀다. 그는 반드시 이곳을 떠나 그 최초의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리: 나는 이 거짓된 공간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미원 투영체 보스전)

 


한순간이 지난 것 같고, 또 천만년이 지난 것 같다. 끝없는 싸움이 얼마나 오래 지속됐는지 리는 굳이 셀 필요가 없다.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한 번의 실패와 재가동 사이에, 리는 과거와 미래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핵심 정보를 포착하고, 과거의 자신에게 이를 모두 전달해 이곳으로 오는 길을 안내한다. 이 기체가 다시 성공적으로 작동될 수만 있다면, 그 뒤를 이어 계단을 밟고 문을 밀어 미지의 싸움을 이어갈 새로운 그가 있을 것이다. 이 길고 긴 전투는 결국 끝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리: 그래……아무리 풀리지 않는 나선처럼 보여도, 변수에 새로운 계기가 생겨난다면 충분히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 수 있어!

 


마지막 총알은 모든 시공간을 초월하여 겹겹이 쌓인 시공의 틈새를 뚫고, 마침내 ‘관측자’의 몸을 관통한다. ‘관측자’는 공격을 멈추고 몸 중앙의 블랙홀로 ‘손’을 뻗었는데, 이전처럼 빨리 아물지 않는다. 별하늘을 거꾸로 비춘 몸은 붕해가 가속화되어 ‘투영’은 그 자체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게……인류의 답이니?’

 


리: 아니, 난 인류를 대표해서 너에게 대답할 수 없다. 다가오는 재난을 막을 수만 있다면, 계속 싸워나가도 상관없어. 하지만, 내 사명은 여기에 없다. ‘탑’의 재앙을 막고 내 동료에게 돌아가겠어. 이건 내가 나 자신으로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리’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다. 

 


그 목소리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더 이상 이전처럼 차갑고 무자비하지 않으며, 어떤 허황된 따뜻함을 띠고 있다. 

 


‘인간이 감지하는 모든 실체는 3차원적인 형태로 존재하며, “시간”은 인간이 간섭할 수 없는 규칙이야. 하지만, 지금의 너는 더 넓은 세계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어. 너에게 가장 완벽한 세상을 선택할 수 있어. 일단 이곳을 떠나면, 너는 미래를 관측하고 시간에 간섭하는 능력을 잃어버려. 네가 보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잊게 되고, 과거를 바꿀 기회가 없어져.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게 돼. 그래도 이 문을 통과하지 않을 거니?’

 


리: 확실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미래가 어떻든 나는 그들과 함께 찾아낼 거야. 

 


목소리는 한참 동안 침묵한다. 온 공간이 적막 속에서 갑자기 균열을 일으켜 천천히 붕괴한다. 의식이 철저히 경계 밖의 공간을 떠날 때, 리는 ‘그녀’의 마지막 응답을 들었다. ‘그러면, 그때 즈음에 새로 태어날 너희의 앞날에 축복을 보낼게.’ 마지막으로 머리에 남은 건 삼라만상의 화음이 담긴 목소리가 아닌, 온화하고 아련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이다. 이것은 리의 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 남겨진 마지막 생각이다. 

 


...

 


리가 다시 눈을 뜨니 이미 탑 정상이었다. 주홍색 코어는 여전히 위협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앞으로 다가온 리를 더 이상 막지 않았다. 그는 코어 아래로 가서 ‘탑’의 진짜 코어 단말을 찾는다.

 


리: 그 전에 정상에 올라 그 빛을 막고 ‘탑’의 규칙을 역전해야 한다. 그래야 네가 신경 쓰는 모든 것을 진정으로 구할 수 있어. 

 


리는 의식의 바닷속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 Ω 무기, 역원 장치에 대한 연구, 퍼니싱 언어, 그리고 각 세계선으로부터 온 ‘자기’의 기억―― 모든 파편이 열쇠가 되어 새겨지고, 그 자물쇠 구멍은 바로 눈앞에 있다. 

 


리: ‘규칙’이 존재하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언어’를 아는 이상, ‘탑’ 밑의 논리를 덮어쓰기만 하면 그 작동 방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 

 


‘방출하고 활성화한다’에서 ‘흡수하고 소멸한다’로 바뀌어, 이 탑이 방사한 범위 내에서 퍼니싱의 흔적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리: 이번에는 당신들이 그것을 사용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