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여전히 백일몽을 갈망하고 있다.



첫 출발을 앞두고 그녀는 많은 상상을 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지상의 풍경이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을 했다.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어떤 시와 노래를 엮을지, 황금시대와는 또 다른 문화가 탄생했을지 상상을 했다.



폐허 사이로 아직 시들지 않은 접난 한 다발을 찾아 공중정원에 남겨진 동료에게 선물하는 상상을 했다.



영웅들이 몸부림쳤던 곳을 밟으며 그들에게 뒤늦은 만가를 들려주는 상상을 했다.



현실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눈을 크게 뜨고 그것들을 마음속에 새겨놓는 상상을 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목도함으로써 한 층 더욱 발전하게 될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상상을 했다.


그 상상이 진실의 파편에 꿰뚫리고 몸과 마음이 지친 자신의 발밑에 밟힐 때까지는.



...

십여 명의 구조체로 이루어진 행렬이 황야를 걷고 있다.

동행자의 수는 처음보다 두 명 줄었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몇몇 구조체의 팔다리 부품이 심하게 손상돼 부러진 신경회로와 합금 골격이 드러났고, 응고된 순환액이 생체공학 피부에 달라붙어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천천히 갈 수 있었다.



아이라

...


맨 뒤에서 걸어가는 분홍머리 구조체는 이들 중 가장 가벼운 부상을 입었는데, 그녀와 몇몇 동료들이 바로 이 팀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묵묵히 본대와 거리를 두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전방의 대열을 주시하고 있었다.

답답한 분위기 탓인지 앞서가던 한 구조체는 자신의 발걸음을 조금 늦추고 아이라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고고학 소대원

아이라, 괜찮아?

아까는 꽤 괜찮게 처신했어. 누가 보면 네가 처음으로 지상에 내려왔다고는 상상하기도 힘들 거야.


아이라

오르페우스 대장...

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것은 고고학팀에 합류한 이래 그녀가 처음으로 참여한 대형 고고학 임무였다.

예술 협회가 황금시대의 유적을 발견하였고, 당연히 고고학 소대를 보내 그곳에 남겨진 자료와 문화재를 회수해야 한다.

유적은 이미 집행부대가 정리한 지역에 있어 침식체가 대거 출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일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미처 감지되지 않은 퍼니싱 바이러스 일부가 유적 내 기계를 침식시켜 고고학 팀과 집행부대가 유적 내 깊숙이 진입하자 대량의 침식체에게 포위당헀다.

자료와 귀중한 유물을 짊어진 고고학 소대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집행부대는 두 사람의 희생을 대가로 고고학 소대원들을 무사히 유적 밖으로 내보냈다.


오르페우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걸.

고고학 팀에 갓 합류한 사람들은 많든 적든 이런 문제를 겪게 돼. 결국 지상의 상황은 공중정원과 너무나 달라서 잠시도 쉴 수 없는 것도 정상이라 할 수 있지.


아이라

전 그냥...아니, 뭐라 해야 할지...

많은 것들이 제가 상상했던 것과 달라서요.

항상 웃지 않으면서 불쑥 냉소적인 농담을 던지는 렉스씨…. 저에게 늘 친절했고 임무가 끝나면 다음 전시회를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던 페이씨….

분명 얼마전까지 같이 이야기도 했었는데….


오르페우스

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많은 사람들은 지상에 내려오기 전까지 스스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여기고, 의식회수가 있기 때문에 전쟁터 또한 덜 무서울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가혹해. 회수 조치는 없을 때가 많고, 유일한 해결책은 목숨을 걸고 막는 것뿐이야.

우리의 임무는 황금시대의 과학기술과 문명의 유산을 회수하는 것이며, 전장의 정면에서 싸우는 집행부대에 비해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낮아.

하지만 이번처럼 어디가 정말로 위험한 곳인지 결코 예측할 수 없지.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 있어. 만약 네가 적응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네가 신청서를 제출하도록 도와줄게. 이건 드문 일이 아니니까 협회측에서도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어.


아이라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탈퇴하지 않을 거예요!


상대방이 그녀가 탈퇴하려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인했다.


아이라

저는 단지 제가 아직 잘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단단히 각오한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녀는 일찍이 공중정원에서 '전쟁'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함선의 잔해가 드넓은 별밤을 떠돌았고, 입자 무기의 섬광은 한순간에 캄캄한 우주를 밝히고 있었다.

그녀는 그 순간 전장에서의 가장 친한 친구와 같은 풍경을 보고 무언의 인연을 맺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단짝 친구의 선택, 그녀의 꿈, 그녀가 작별인사 없이 떠난 이유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주정거장 내 침식체와 싸울 때, 그녀는 단지 공중정원의 유리창 앞에 앉아 중력, 습도, 기온이 세심하게 시뮬레이션된 온실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막상 세상의 '진실'을 접하고 그 속에 몸을 담았을 때…. 그녀의 두 발은 마비되어 차마 발을 떼지도 못했다.

'우리가 진실된 세상을 그리려는 한, 우리의 길도 반드시 수정되어야 해'

절친한 친구가 있는 우주정거장이 전쟁의 파편에 파묻혀 있는 것을 바라볼 때 그녀는 어렴풋이 이런 말을 들었다.

그것은 세레나가 그녀에게 남긴 은어였고, 그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여행의 끝에서 찾아낸 해답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꽃 한 송이에 담긴 세상의 계시로 여겼고, 그 모습을 따라가면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명확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퍼니싱에 의해 썩어 만신창이가 된 세상을 직접 보았을 때, 칼이 침식체를 찌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ㅡㅡ


렉스

쳇! 멈추지도 말고, 뒤돌아 보지도 마. 손에 든 것을 가지고 빨리 나가!


페이

고고학 소대! 멍하니 있지 마. 너희들에겐 아무 일도 없어야 해. 우리의 임무는 너희를 보호하는 것이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구조체와 눈을 마주쳤고,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동료가 침식체에 찢겨 잠식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용기가 없었다.



아이라

제가 구조체가 되어 예술협회에 가입하게 된 것은 세상의 '진실'을 증명하고 싶었고, 그 '진실'을 내 캔버스 밑에 넣어 진정한 예술을 창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사실 '진실'이라는 것이 반드시 힘이 되는 것은 아니었어요.

지상에 오더라도 세상의 전모를 볼 수 있다는 보장 또한 없고요.

저의 생각...너무나 순진했던 게 아닐까요?


오르페우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상식을 깨는 것을 더 높은 진리로 받들지만…. 네가 말하는 '진실'은 정말 그럴까?

너의 느낌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을 거야. 나는 너에게 답을 줄 수 없어.

다만...

예전에 너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녀와 함께 몇 번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어.

첫 번째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우리에게 그녀가 매우 좋아하는 시 한 수를 낭송했었지.

순진한 신념을 비웃는 자, 세월과 죽음의 조롱을 받을 것이다….*


그녀는 익숙한 시 구절 한 수를 가볍게 읊기 시작했다.


오르페우스

순진한 신념을 흔들려는 자, 썩어가는 무덤에 영원히 묻힐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절친한 친구가 애지중지하는 시였다.



???

순진한 신념을 존중하는 자, 지옥과 죽음을 이겨낼 것이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면, 결코 신뢰하는 법을 알 수 없다...

...무엇을 하더라도.*


*윌리엄 블레이크 -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 中



앨런

우리는 기록자, 증인임과 동시에 표현자, 창조자다.

우리는 구체적인 것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괴물과 싸우지.

어떤 이는 우리를 비웃고, 어떤 이는 우리를 의심하고, 어떤 이는 우리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여기기도 해.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그 가치는 우리 자신이 마음대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나는 그 가치를 지키고 싶은 소망을 너의 눈에서 보았어. 그러므로…

예술협회에 가입한 것을 환영해, 아이라 양.



임무를 마친 고고학팀은 마침내 인근 인류 집단 거주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폐도시 뒷편에 건설되었으며, 일부 보육구역에 비해 열약한 여건이지만 내부에는 비교적 상당히 완전한 생활 시스템이 형성되어 있으며 지상 방위군이 상시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안전성이 보장된다.

공중정원의 수송기가 지상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남아서 고고학팀은 이 집단 거주지에 잠시 머물러야 했다.


아이라

...



그녀는 이 정착촌에 발을 내딛고 인간이 쓸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만든 서식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초라한 천막 안에서 노련한 정비사가 방위군이 운반해 온 기계체의 잔해를 점검하고 그 중 아직 활용할 수 있는 부품을 고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부뚜막과 행거만 있는 야외 주방에서 요리사가 과거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재료를 손질하고 있던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한 늙은 유모가 녹슨 가시 바늘로 안감을 꿰매는 것을 보았고, 남자가 폐품으로 사냥용 화살촉을 다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오르페우스의 이전 말을 떠올렸다.


패트릭

받아라! 이 나쁜 침식체!


아론

으아아악...


동네 아이들은 아무데나 주운 나뭇가지를 들고 구조체와 침식체를 연기하는 놀이를 한다.


야, 너 계속 구조체 하고 있었으니까 이번엔 내 차례겠지?


아론

잠깐잠깐ㅡㅡ다음 차례는 분명 나라고, 알겠어?



아이라

남자애들은...어딜 가나 마찬가지네.



여자아이

...


아이들이 다른 생활권까지 뛰놀며 장난을 치고 다니는 와중에 한 소녀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들의 놀이에 끼지 않고 나무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공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고, 손에는 막대기 모양으로 깎은 황토바위가 쥐어져 있었는데, 바로 그녀의 붓이었다.

소녀는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데 전념했고, 가끔은 손을 뺨에 대고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그림을 훑어보기도 했다. 그녀의 외투에는 '밀레'라는 이름을 새긴 천으로 만든 완장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밀레라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아이라

그림 그리는 중이야?


밀레

음...


소녀는 아이라를 눈치채지 못했다ㅡㅡ혹은 눈치채고도 애써 외면하려 했고, 그녀는 그저 손에 든 종이만 빤히 쳐다보며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여자아이가 손에 들고 있는 작품을 힐끔 훑어봤는데, 상상력이 넘친다기보다는 외부인의 입장에서 무엇을 그렸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아이라

뭘 그리고 있니?


밀레

거북이.


여자아이는 그녀에게 도안 중 하나를 가리켰다.


밀레

작은 새, 강아지, 그리고 이건 토끼.


아이라

그...이렇게 그리고 싶은 이유가 뭐니?


밀레

...

언니, 내가 그림을 못 그린다는 뜻이지?


여자아이의 생각은 기이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아이라

아, 아니야. 그런 생각 안 했거든?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니?


밀레

그렇겠지...?

아빠가 밖에서 찾은 거라고 하면서 이 공책을 선물해줬어. 이것만 있으면 내가 본 것을 그려서 적어가지고 아빠가 집에 오면 보여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패트릭과 아론은 내가 그린 게 너무 못생겼다고 말해서...걔네들이랑 안 노는 거야.

아빠는 예전에 그림을 자주 그렸다고 했는데, 요즘 너무 바빠서 가르쳐 줄 시간이 없어.


아이라

음…그럼 언니가 가르쳐줄까?


밀레

그림 잘 그려? 여기 아저씨랑 아줌마는 별로...아, 그런데 언니는 공중정원 사람이었지?

패트릭한테서 공중정원의 구조체는 대단하고 그림도 잘 그린다고 들었었는데?


아이라

이건 사람마다 다를 거야...근데 언니는 쪼금 잘 하긴 해.


밀레

그렇구나...아껴 써야 돼. 세어보니까 70쪽밖에 안 남았어.


그녀는 여자아이의 옆에 앉았고, 조심스럽게 건네는 공책과 황토 크레파스를 받았다.


아이라

뭘 그릴까… 참, 뭐 좋아하는 거 있어?


밀레

말하면 언니가 그려줄 수 있어?


아이라

너무 희귀하지만 않다면…… 예를 들어 고양이 강아지, 민들레, 히아신스 같은 식물도 괜찮아.


밀레

음...그럼 언니, 수국화 그려줄래?


아이라

수국화?


밀레

수국화, 난 이름만 알고 있어. 진짜 수국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못 봤어.

전에도 공중정원의 구조체 언니가 왔었는데 수국 씨앗 몇 알을 주면서 심을 곳을 찾으면 예쁜 파란색 수국꽃이 자랄 수 있다고 했어.

언니는 수국화 본 적 있어? 정말 그 언니가 말한 대로 엄청 예뻐?


소녀는 기대에 찬 눈빛을 보였고, 그녀는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라

응, 그렇지. 정말 심을 수만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아.



그녀는 사실 수국화의 실물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공중정원의 교육 센터에는 세계 각지에서 알려진 생물의 사진과 자료가 보관되어 있지만, 제한된 온실 자원은 그것들을 재배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붓을 들어 여자아이의 마음속 광경을 그려주었다.

손에 든 황토돌은 사실 그림에 사용되는 도구라고 할 수 없었다. 울퉁불퉁한 표면과 붓끝이 손목에 힘을 주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여자아이는 그림에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너무 열악하고 지도를 해줄 사람이 없어 펜을 잡는 자세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이라

요렇게...또 요렇게...그리면....

거의 이런 느낌...이려나?


그녀는 그림을 완성하고 그 성과를 여자아이에게 보여주었다.


밀레

대단해...언니는 정말로 대단해! 마치 진짜처럼 그려졌어...수국화가 정말로 이렇게 이뻐?


아이라

음...단지 기억나는 대로 그린거야. 파란색도 안 쓴거라 너가 생각하는 거랑 좀 다를 거야.

하지만 그 느낌은 나중을 위해 아껴둬. 너희가 직접 심은 수국화는 분명 내가 그린 것보다 훨씬 예쁠 거야.

그리고 그리는 과정을 지켜봤겠지만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아. 붓을 댈 때 여기만 주의하면...


그녀는 여자아이의 동작을 세심하게 지도했다. 여자아이의 이해도가 매우 높아서 많은 기교를 한 번만 가르쳐도 바로 배울 수 있었다.


밀레

언니, 왜 그림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고 있어?

언니가 말한 빛과 그림자, 형체, 구도...그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잖아...

어떻게 그렇게 많은 걸 배웠어? 공중정원에서 이런 걸 가르쳐주는 사람도 있어?


아이라

...

나는 예술 협회에서 왔어. 공중정원에 있는 조직이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술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있지. 그 사람들이 나에게 예술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르쳐 준 거야.


밀레

예술...협회? 예술이 뭐야?


아이라

예술이란...


그녀는 줄줄 암기했던 복잡한 정의를 도로 삼켰다.



아이라

저기, 밀레. 자신이 그린 그림을 왜 아빠한테 보여주고 싶니?


밀레

어...?

왜냐하면...아빠는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 기뻐하실 것 같아. 왜냐하면 항상 집에 계시지 않은데 내가 여기서 매일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는지 알려주고 싶거든...


아이라

응…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

예술이란...적어도 나는 그런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해.

물론 표현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어. 예를 들면 그림, 춤, 소설이나 시 등등.. 황금시대에 유행했던 영화, 만화 같은 형식도 있고..


밀레

만화...? 만화...아, 언니, 잠깐만!


여자아이는 무슨 생각이 난 듯 황급히 떠나가더니 이윽고 책자 한 권을 들고 달려왔다.


밀레

이게 바로 언니가 말한 '만화' 아니야? 아빠도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여자아이의 손에 들고 있던 그 오래된 만화를 받아들었는데, 연식이 오래되어 재활용지가 이미 구겨지고 누렇게 변색되었지만, 내용을 알아보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아이라

이건...《뷰티엔젤》?


여자아이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황금시대에 유행한 만화로, 정확히는 '애니메이션'과 '장난감'에서 파생된 작품이었다.


아이라

《가면라이더》제작사에서 나온 만화네...


밀레

안에 있는 여자애들은 정말 대단해! 아주 예쁜 마법소녀가 되어서 그 말썽꾸러기들을 주먹으로 때리고 다녀!


아이라

나도 어렸을 때 교육센터 도서관에서 몇 편 봤던 기억이 나…. 그때만 해도 푹 빠져있었는데, 참 그립다니까.


밀레

정말? 정말이야? 난 이거 하나밖에 없는데...여러 번 뒤져보았지만 아빠는 새 것을 못 찾겠다고 말했었어… 언니, 한 권만 빌려줄 수 있어? 어… 내 공책이랑 바꿔도 돼!


아이라

미안해...이런 종류의 만화는 공중정원에도 몇 권밖에 없을 거고 내가 가지고 나오기도 힘들어.


밀레

그래?...다음 편도 보고 싶었는데...


만화의 말미에 두 여주인공은 요정의 선택을 받아 '뷰티엔젤'이라는 마법소녀로 변신해 괴물과 싸우며 서로를 알게 되며 본격적인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모로 봐도 이야기는 딱 감질맛 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라

응…예술협회는 그동안 이런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래. 이런 상업작품에는 예술성에 한계가 있지만 분명 보존할 가치도 있을텐데….


밀레

우우...참, 언니, 그림을 잘 그리니까 이런 것도 그릴 수 있겠네!


여자아이는 그녀의 중얼거리는 말을 끊었다.


아이라

이건 그러니까...만화를 그려달라는 뜻이니?


밀레

안 돼? 언니도 좋아하잖아?


아이라

만화를 그려본 적도 없을 뿐더러 필요한 기법과 지식이 꽤 달라서...


밀레

그리는 걸 도와준다면, 정말....정말 기쁠 것 같아! 아...언니가 도와줘야 할 일이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여자아이는 자신의 이 부탁이 다소 억지스럽다는 것을 의식한 듯,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겸연쩍게 고개를 숙였다.



오르페우스

아이라, 오랫동안 찾았잖아. 이제 곧 출발해야 해.

수송기가 도착했어. 10분 후에 출발할 거야.


아이라

아...알겠습니다.


밀레

언니...가야 되는 거야?


아이라

응, 공중정원으로 돌아가야 해.


밀레

그렇구나...알았어...그럼 나중에 봐! 헤헤...다음에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몇 달 안에 새로운 보육구역으로 데려간다고 하셨는데, 거긴 여기랑 멀리 떨어져 있을 거야.

언니, 잘 가.


아이라

응, 고마워.



그녀는 소녀와 작별을 고하고 예술협회의 동료들과 함께 수송기가 정박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오르페우스

네가 그렇게 빨리 아이들과 함께 어울릴 줄은 몰랐어.


아이라

마침 그녀가 혼자 있는 것을 보았거든요.


오르페우스

많은 고고학 소대원들은 보육 구역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꺼리고 있어. 그들은 하루 종일 밖에 서 있을지언정 주민들의 접대를 안 받으려고 하지.


아이라

...저희는 집행부대와 다르기 때문인가요?


오르페우스

많은 지상인들은 공중정원의 구조체가 자신들을 보호하는 영웅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심지어 우리 스스로도 집행부대의 보호를 받아야 해.


아이라

오르페우스 대장, '예술'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오르페우스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단시간에 대답할 수는 없어...예술의 정의는 매우 복잡한데, 넌 어느 학설을 따르고 있지?


아이라

음...저에게 '예술'은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또한 멀리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혹시 그 유명한 작가의 일기를 기억하고 있나요? 그는 첫날에 '결정했다, 마땅히 사랑하고 마땅히 일을 해야 한다! 그런 것이다.'라고 적었지만, 그러다가 다음 날에 '너무 힘들다, 사랑하기 싫고, 일하고 싶지 않다'*고 썼었죠.

그는 항상 막막함을 느끼고 자신의 글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지 의심했겠죠.

그러나 그는 자신의 창작을 고집했고, 그의 작품은 인류 문명의 역사에 길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아마 그 사람처럼 위대해지진 않을 거예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미래에 있어 정말로 무의미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톨스토이의 일기 中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있다.

그녀는 자신이 언제나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고 장담할 수 없고, 내일이면 지금 내린 선택에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녀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고치에 스스로를 가둘 것이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일생 동안 그녀의 행동이 낳은 결실을 볼 수 없을 것이며, 세상의 허영심에 맞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만남은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될 것이고, 그녀는 상실과 회복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길을 걷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순수한 신념을 가진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 소녀가 아버지에게 바라는 것처럼, 그 만화의 후속편을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아이라

잠시만요, 오르페우스 대장.


오르페우스

아이라? 어디가니?


그녀는 오르페우스에게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앞서 걸어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밀레

언니?


아이라

하...하...다행이네...아직 멀리 가지 않았구나.


밀레

왜? 뭐 까먹고 놓고 간 물건 있어?


아이라

그래, 중요한 걸 여기에 뒀는데 깜빡했지 뭐야.


그녀는 반쯤 무릎을 꿇고 그 소녀와 마주보았다.


아이라

내 이름은 아이라야. 나는 공중정원 예술협회에서 왔어.

그 만화 혹시 빌려줄 수 있니? 그림을 그릴 때 참고하고 싶어.


그녀는 구시대의 유산을 가리켰다.


밀레

언니...?


여자아이가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밀레

아이라 언니, 새로운 만화 그려줄 거야?


아이라

응, 약속할게.

지금은 아마 늦었겠지만, 공중정원에서 너가 원하는 다음편을 그려줄 거야.

소녀는 악당을 물리치고, 우정을 쌓고, 세상을 구하는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다… 아, 스포일러는 안 되지… 아마 그녀들은 못 이겼을 거야! 아무튼 기대해줘.


밀레

하지만, 나는 앞으로 여기에 없을지도 몰라….


아이라

괜찮아, 내가 널 찾을게.

너를 찾을 때까지 내가 갈 수 있는 보육 구역을 전부 찾아볼게.


그녀는 이루지 못할 수도 있는 약속을 했다. 그녀는 여자아이를 실망시킬 수도 있고 만화를 훔치는 사기꾼으로 몰릴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이것이 결코 선의의 거짓말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아이라

그때가 오면, 옛날 이야기와 새로운 이야기를 너에게 들려줄게.

반드시.





이번편 핫산이 아마 마지막 스토리 핫산이 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