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거대한 나무가 끊임없이 불타고 있다.



아이라

…투영으로 복원한 거라고 하지만 너무 리얼해요.


트로이

이런 디테일로 보아 그것을 복원한 녀석이 직접 현장에 갔었던 것 같다.


레나

...


가장 사실적으로 장면을 투영한 것이지만, 눈앞의 모든 것으로부터 생체공학 피부가 타는 듯한 냄새와 폭발 연소로 인한 연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밤하늘은 화염에 눈부시게 붉게 물들었고, 발밑에는 생명력 없는 그을린 땅이 있었고, 그 화염과 자욱한 연기 아래 영웅들의 전투는 일시정지된 영화처럼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이전 어느 전시관 복원 현장과 비교해도 가장 처참한 모습이다.

그녀들 앞에는 장벽 같은 빛의 장막이 있고, 그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정체된 시간은 다시 흐를 것이다.


시카

...


과거의 기억과 눈앞의 광경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눈앞의 광경에 짓눌려 그녀의 마음속 마지막 한 가닥의 조심스러운 가식의 흔적도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당시 그녀는 아직 졸업하지 않은 파오스 학생에 불과헀고, 지상 전선의 인력 부족으로 지원을 위해 후방으로 보내졌다.

그 거점에서 전방의 전장은 단말기를 통해 전해지는 전투 브리핑 한 줄에 불과했고, 그녀는 병참 관련 업무를 맡았을 뿐, 출전 전 기억나는 군사 이론과 지휘 전술은 하나도 쓸모없을 것 같았다.


후방인원

다음 공중투하 장소는… 아니, 침식체 진행 속도가 예상보다 느려서 좌표를 다시 계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쪽도 침식체 반응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B구역 최전방 선봉대는 어느 쪽입니까?


구조체

그레이 레이븐 소대.


후방인원

어쩐지…. 이번 토벌도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개선을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구조체

방심은 금물이야.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다른 지역의 전황에 주의하고 보급품을 점검하는 것을 잊지 마. 탄약 기종을 틀리지 않도록.

모든 소대가 그레이 레이븐과 같은 것은 아니야. 전쟁터에 나가 본 적도 없는 아이가 이런 걸 알아내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지.



시카

(...)

(나도 할 수 있다면...)


후방군관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시카

아...네! 죄송합니다, 장관님. 잠시 넋을 놓고 있었어요...

언제 전선에 나갈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후방군관

네가 아직 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하지 말고, 먼저 수중의 임무와 목표에 집중해.


시카는 자신의 얼굴에 열이 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고 파견 목록을 움켜쥐었다.


후방군관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해.

우리가 현재 전선에 제공하고 있는 전쟁 물자와 장비는 지난 전투의 경험과 교훈을 기반으로 하고있지.

조급해 하지 마. 여기서 배운 것은 네가 장차 진정한 전쟁터에 발을 내딛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니까.


시카

알겠습니다...

(난 그저...진짜로 무언가를 하고 싶을 뿐이야...)



풀리아 삼림 공원 전투가 벌어졌을 때, 경험 없는 학생들은 지상으로 내려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밤새 단말기를 통해 전세를 지켜보며 자신의 교관과 지도교사가 교안을 내려놓고 지휘부로 향하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전선에서 보내오는 영상을 보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난이 닥치자 그녀는 때아닌 부러움을 느꼈다.

그레이 레이븐이나 차징팔콘처럼 인류를 구하고 모두에게 희망을 안겨준 영웅들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들의 후광은 확고한 신념과 눈부신 전공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녀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영웅의 딸이라는 타이틀만으로 비교되고 기대를 받을 뿐, 정작 자신에게 쏟아지는 의혹의 시선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수석"이라는 칭호에 어울리기를 원한다. 이것은 그녀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모든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동경하는 사람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스스로도 이상적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라 여기며 맹렬히 나아갔다.

그러나 그녀가 진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그녀는 자신이 단지 눈부신 광채에 비친 빈 껍데기라는 것을 알았다.



웰스

이런 말은 군 참모장으로서가 아니라…. 과거의 스승으로서 조언한 것으로 치게.

남이 걸어온 길을 따라가려다 보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지.



그녀는 사실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단지 막연한 환상을 쫓고 있을 뿐이다.

만난 지 며칠 안 된 팀원들조차 무모함과 미숙함을 간파하고 신뢰를 주지 않으려 했다.

다시 만난 아이라는 수년 전 부스에서 자신을 격려할 때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굳은 마음과 신념은 변함없었다.

과거를 비추는 이런 환영들 사이를 지날수록 마음속의 그 흐릿한 생각은 더욱 선명해진다.

홍앵소대는 확실히 까다로운 소대다. 각자의 호흡은 완전히 달랐고, 대원들은 서로를 믿지 못했으며, 지휘관은 경험이 없고 실망스러운 초보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그녀에게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바보'들의 몸짓은ㅡㅡ

눈부시잖아요.



시카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아이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손에 든 총창을 움켜쥐고 불타는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도 영웅에 대한 자신의 동경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라

그냥 갑자기 우리가 소대를 이루어서 이렇게 같이 싸울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고 느꼈어요.


영웅에 대한 동경은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며, 그녀를 진정으로 목표로 삼는 것은──



시카

아이라 씨의 말이 옳았어요. 우리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아니에요.

...저는 한 번의 기회를 놓쳤었고, 그렇기에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참조로 삼아 스스로를 구속하지 않을 거예요.

레나.


레나

무슨 일이야?


시카

당신이 어떤 일 때문에 저를 믿지 않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저도 지금의 제가 당신의 믿음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홍앵의 지휘관이고, 당신은 저의 팀원입니다.

싫든 좋든, 우리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함께 할 거예요.

저는 언젠가 트로이 씨와 아이라 씨의 인정을 받을 거예요.

저는 자격을 갖춘 '홍앵소대의 지휘관'이 되겠어요.


아이라

...


레나는 시카를 바라보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 더 이상 시카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레나

그런 큰소리를 쳤으니까 적어도 우선은 우리부터 잘 지휘해서 눈앞의 이 전투를 완수하자고.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돌려 자신의 전방 전장을 가리켰다.


시카

알겠습니다.

여러분, 준비됐나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불타고 있는 거대한 나무를 마주하고 손에 들고 있는 총을 꽉 쥐었다.


트로이

하아, 이걸 어떻게 헤쳐나가라는 건지...


트로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내 등을 돌리자, 두 개의 톤파의 증기를 뿜어내며 내장된 파일 드라이버를 발사하기를 기다렸다.


트로이

이제 고전이 될 테니, 지휘관의 지휘를 받아 최선을 다한다!


아이라

그날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에게 있어 이 정도의 시련은 그 재난과 비교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겨내야 해요.

인류의 발걸음은 일찍이 이러한 슬픈 기억을 뛰어넘으며 성큼 나아갔어요.

그러니 우리도 과거의 그림자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되는 거예요!


아이라는 행렬의 맨 앞에 서서 단호히 선언했다.



전투 개시






풀리아 삼림 공원 유적

재난의 종국, 동트는 새벽.



아이라

여기는...이 나무는....원래 전시장 한복판에 있던 나무예요!


메모리를 불러오는 중...



트로이

전에 우리가 정말 한 번 죽었었나, 두 번을 정말 경험하고 싶지는 않다.


시카

저는 여전히 해낼 수 없어요...


레나

원래 정해진 것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당신의 계획에 동의하는 나도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어.



커크

모체 파편은 이미 성공적으로 회수되었겠지, 어쨌든 그레이 레이븐 소대잖아.

조금만 더 버티면 누군가 우리를 구하러 올지도 몰라.



조이스

너희도 엄호 철수 작전에서 살아남은 병사냐?

우리의 진지는 이합생명체에 의해 무너졌고, 대대와의 연락도 끊겼어.

여기는 아직 공중무기의 타격 범위 내에 있으니, 우선은 철수하자.



커크

...내 침식도로는 거의 버티지 못할 거야, 너희 자신을 위해서라도 나한테서 떨어져.


시카

그들이 말한 공중무기는 설마...그럴 리 없어요. 그 폭격은 분명히 완전히 철수한 후에 시행되었잖아요!


레나

아직도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어?

그들이 이미 연락 수단을 잃은 뒤에 사망으로 등록된 것은 결국 타자를 두드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돼.


시카

...


조이스

부근에서 또 대량의 이합생명체가 탐지되었어. 너희들 몇 명이 함께 도와줘!

나는 침식도가 매우 높으니까 내가 미끼역할을 할게.


아이라

...좋아, 홍앵소대가 너희를 지켜줄 거야!



커크

꺼져라, 괴물!!

빌어먹을, 끝이 없어...



꺼져라, 이 괴물아!!



리더, 난 이만 먼저 가볼게.




카터

빌어먹을, 끝도 없이… 아!!!



조이스

커크, 카터, 미안...나도 갈게.



조이스

코어손상, 복무기간 : 5년


ㅡㅡ적을 유인하는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한스의 공중무기 재가동을 도왔다.


전투 종료




더 이상 새로운 이합생명체와 침식체가 사방에서 튀어나오지 않았고, 구조체의 울부짖음과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라

...


아이라는 반쯤 무릎을 꿇은 채 앞에 있는 채색없는 구조체를 바라보다가, 공중무기의 흰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마지막 순간에 그 구조체의 손을 잡아주려 했다.

사방이 고요해졌고, 투영된 구조체는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고, 무채색의 창백한 소체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자세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트로이

빠져들지 마, 이것들은 모두 과거의 투영이다.

무엇으로도 그들을 구할 방법은 없다.


아이라

알아요.


아이라가 속삭이며 얼어붙은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구조체의 손아귀에서 그녀는 데이터 칩 하나를 찾았다.


레나

또 하나의 메모리 데이터인가….


시카는 아이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있던 트로이는 자신의 몸을 무기로 지탱하며 그녀에게 부탁하는 손짓을 했다.


아이라

그럼 이번에도 맡겨주세요!


아이라는 기체의 데이터 인터페이스에 칩을 능숙하게 꽂았다.



>>>확인—기계교회의 시간…<<<

>>>모듈이 손상되어 재보정 중ㅡㅡ<<<

>>메모리데이터 상태 : 분류되지 않음<<

>>>인격 시뮬레이션 상태: 오프라인<<<

>>> 범위 내 생체반응 수량 확인 : 1<<<



2시간 16분 23초 전, 밤하늘을 찢는 하얀 빛과 함께 이 숲에 공중무기의 공격이 떨어졌다.

공중정원의 병사들은 충격으로 생긴 깊은 구덩이를 빠져나와 수많은 대가를 치르고 모체의 샘플을 채취한 소대를 숲 밖으로 호송했다.

여과탑이 있던 자리는 시커먼 구덩이로 변해 있었고, 그가 부러진 무기를 넘고, 쓰러진 깨진 잔해를 일으켜 세웠고, 성분 불명의 액체가 탄창에 작은 웅덩이를 이루며 그의 움직임에 따라 잔물결이 일었다.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지 못하게 만들었고, 고개를 숙여 바라보니 군인의 몸과 그을린 통나무에 파묻힌 폭탄 분화구에서 손이 뻗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구조체

...


파손된 스피커에서 몸부림치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고, 구조체의 머리는 아래로 처졌다가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 범위 내 생체반응 수량 확인 : 0<<<


이 메마른 초토에는 이미 어떤 생명도 존재할 기미가 없다.

인식표가 구조체의 옷깃에서 미끄러져 나왔고, 달빛을 타고 그는 그 구조체의 이름을 똑똑히 보았다.



세르반테스

...'조이스'.


거대한 구덩이를 건너는 과정에서 죽은 병사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하고 메모리 데이터를 얻었다.

대부분의 데이터가 훼손되어 있었고, 빈 탄창과 부러진 칼날은 병사들의 신념을 말해주고 있다. 돌아올 수 없는 전투임을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가지고 싸웠다.


세르반테스

...



폭발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분화구 가장자리의 숲에서 그는 급히 탈출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잃어버린 듯한 배낭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바닥에는 가방에서 떨어진 물건들이 널려 있었고 대부분은 생존용 식품 도구와 의료용품이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황무지 부랑자들의 시신에서 비슷한 행장을 본 적이 있었다.


세르반테스

이것은...


그는 부서진 마른 음식 옆에 떨어진 네모난 카드를 집어들었는데, 그것은 노란 신분증 카드였다. 식별 코드는 더 이상 스캔할 수 없었고, 소지자의 사진과 카드 뒷면의 로고만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세르반테스

...바이오텍 주식회사?


배낭에 칙칙한 핏자국이 잔뜩 묻어 있는 것은 배낭 주인이 이곳에서 습격을 받고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숲 밖으로 나섰다는 뜻이다.

풀밭 사이의 핏자국을 한참 따라가다가, 그는 핏자국이 묻어있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자루를 찾아냈다.

그 가장자리는 반복적인 마찰로 인해 약간 거칠어졌지만, 한때 소중하게 잘 보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물건 확인 : 식물종자-범의귀과 수국속 식물, 수국, 황금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분재 관상식물 <<<

>>>데이터베이스 오프라인, 상세정보를 얻을 수 없음<<<

>>>검색키워드 : 식물<<<

>>> 메모리 모듈 판독 완료, 재생 시작 기록<<<



...당신의 지시에 따라 가능한 한 생존하기 쉽거나 실내 재배에 적합한 화훼 식물을 선택했는데, 대부분은 아직 그 기관에서 정식으로 판매하지 않은 개량 품종입니다.


미켈레

기구? 아, 저번에 내가 없을 때 방문했었지….


네, 그들은 콘스타레예의 녹지 조성을 그들이 책임질 수 있도록 당신과 협력하기를 원합니다.


미켈레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게.

그게 전부인가?


미켈레는 일어서서 손에 든 흙을 쓰다듬었고, 앞에 놓인 간이 꽃밭을 들여다보며 흥겹게 웃었다.

선생이 절묘한 영감을 얻었을 때 흔히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네.

물을 주는 빈도, 조명 환경 조정 및 시비 방법에 대해서는 여기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언제든지 문의할 수 있습니다.

꽃의 종류와 구근의 종류는 왼쪽부터...


미켈레

쉿ㅡㅡ일단 품종은 알려주지 말게.

그것들이 꽃을 피울 때쯤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그전에 기대부터 하는게 재밌지 않을까?


...알겠습니다.


미켈레는 조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꽃밭 앞의 다른 야외용 데크 체어에 함께 앉으라고 손짓했다.


미켈레

오늘 날씨가 참 좋지.

봐, 꽃이 베란다에 가득 피면 콘스타레예 맨 꼭대기의 풍차도 돌기 시작할 거야.

그때가 되면 그 도시의 탄생에 꽃을 바치자고.



세르반테스

관상용 식물의 씨앗은 오늘날 인류의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왜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걸까?


또 다른 답이 없는 질문이다. 길을 따라 수집된 흔적을 바탕으로 시뮬레이션을 하니, 여과탑 방향에서 탈출한 두 인간은 한계에 다다랐고, 그들의 생존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웠다.

그는 그 꽃봉지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려다 결국 신분증 카드와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비록 이 행동이 그의 예정된 행위 안에 있지 않더라도.


>>>확인ㅡㅡ기계교회의 시간...<<<

>>>237번째 시뮬레이션 실행, 전송 종료 중<<<



그는 교회의 가장 먼 곳의 첨탑 위에 서서 발밑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았다.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하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최전선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이던 구조체들은 퍼니싱의 침식 아래 하나둘씩 무의식의 침식체가 되어버렸고, 아무리 강인한 병사라도 재앙의 물결 속에서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은 비극과 절망이 끊임없이 순환되는 죽음과 같다.



그러나 새벽빛이 먹구름을 뚫고, 순백의 소녀는 맹렬한 불길을 향해 날개를 퍼덕이는 흰 새처럼, 그 빛에 거의 명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병사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그는 침식에서 깨어난 병사들이 주저 없이 동료들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았고, 검푸른 얼음과 총알이 그녀를 위해 철벽을 쌓았고, 인간형 생명체가 순백의 불길 속에서 패퇴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허약한 인간이 어떻게 아직 낫지 않은 몸을 이끌고 외골격의 도움을 받아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는지, 또 내려오는 흰 새를 어떻게 받아 그녀의 몸에 박힌 족쇄를 풀었는지 지켜보았다.

앞으로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세르반테스

또 한 번, 시뮬레이션과 다른 결과였어.

...어째서?

어째서...당신들은 이걸 해낸 겁니까...?


그동안 지켜본 모든 것이 그의 의문에 답하지 못하고 그를 더욱 막막하게 했다.

영야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는 소녀의 자태는 너무나 눈부신 나머지, 등대에 대해 이야기하던 선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르반테스

이것이 당신이 추구하는 것이었습니까, 선생?


그에게 대답하는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확인ㅡㅡ기계교회의 시간<<<

>>>목표 좌표 확정, 얼굴 매칭 진행, 신원 확인 완료<<<



그는 자신의 시뮬레이션에서 결코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이 실제로 살아나 재건된 보육 구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는 그 재난에서 빠져나온 인간들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뜻밖의 결과를 얻었다.

작은 디테일에도 현실의 궤적은 다시 그의 시뮬레이션을 빗나갔다.

하지만 그의 궁금증이 풀릴 기회가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르반테스

부탁합니다.


운반기계

나한테 맡겨, 물건을 가야 할 곳으로 배송하는 것, 이게 내 본업이야.



코드

이건...

아...아...


인간은 꽃 씨앗이 든 자루를 손에 꼭 쥐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담 뒤에서 들려오는데, 처음에는 거의 들을 수 없는 흐느낌으로 이어지다가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는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어찌된 일인지 그는 그 눈물이 절망에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당혹스러웠다.


세르반테스

...


고작 꽃 한 봉지일 뿐인데, 어째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일까?


'수염'

이미 물어봤지만, 보육구역에서는 아무도 이 종자가 어디서 들어왔는지 몰라. 마치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았다지. 참 이상한 일이야...


코드

...


'수염'

그러니까, 이건 정말이지 기적이야.

그런데 솔직히 넌 아까 깜짝 놀라서 갑자기 미친 듯이 사람 붙잡고 물어봤어었지…. 너 이러는 거 오랜만이야.


코드

그것을 되찾을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그것은 나에게…소중한 거니까.


아까 울던 남자는 잠잠해졌고, 그는 여전히 그 씨앗 자루를 움켜쥐고 옆에 앉아 있는 절뚝거리는 동료를 올려다보았다.


'수염'

에이, 알고 있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딸이 살아있다고 믿고 있지?


코드

한 가닥의 희망만 있다면, 결코 포기할 수 없어.


'수염'

…그래, 그럼 나도 끝까지 함께 할게.

참, 저기 있는 사람이 꽃을 심을 수 있는 작은 구석을 남겨줄 수 있대.

잠깐 얘기만 나눴는데 바로 승낙해주네. 여기 사람들은 참 대화하기 쉽다니까.


코드

...

이따가 삽 좀 들어줘, 지금 손이 안 좋아서 말이야.


'수염'

정말 이해가 안 돼. 이렇게 되었는데도 꽃을 심으려고 하다니. 정상인들은 모두 어떻게 보급을 좀 더 구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넌 오히려…


수염은 고개를 저으며 이내 숙이고 손에 든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코드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씨앗은 뿌리기만 하면 싹이 트는 순간은 반드시 와.

딸이 정말 살아있다면 내가 심은 꽃을 보면 내가 딸을 찾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수염'

...맞아, 넌 항상 그래왔고, 나까지 너한테 옮았어.


코드

아까부터 물어보려고 했는데, 손에 들고 있는 게 뭐야?


'수염'

만화야, 우리 그때 꽤 많았잖아. 벌써 수십 년 동안 못 봤는데, 이 보육구역에 이런 게 있을 줄이야.

공중정원에서 내려온 구조체가 가지고 온 것 같은데 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남은 국물이랑 바꿨지.

말할 것도 없이, 이야기는 꽤 흥미로워. 잭이 이런 것들을 좋아했으려나?

그가 몰래 숨겨둔 디스크에는 애니메이션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의 쓴웃음 속에 비슷한 그리움을 느꼈다.


코드

언젠가… 인류가 진정으로 지구를 되찾는다면, 이런 것도 다시 번영하겠지.

그때가 되면 딸과 함께 꽃집을 열 수 있을 거야.


'수염'

그런 날들이 다시 왔으면 좋겠어.

참, 이 책을 너도 보고 싶다면, 저쪽 벽 틈에 한 권 남아있어, 상태가 좋더라고.



세르반테스

만화...


그는 손에 든 작은 책자를 보며 손을 뻗어 표지의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


>>>황금시대 출판 책 정보 스캔 중- 카테고리:만화<<<

>>>결과 없음<<<


황금시대에 나온 만화가 아니라 최근에야 인쇄된 작품이다.

이 시대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창작물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속표지를 펼치면 밝은 색채와 장밋빛 상상이 종이 위에 펼쳐지고, 한 획 한 획에 씩씩한 생명력과 애착이 담겨 마치 종이 페이지를 뚫고 나와 앞 납회색의 폐허 도시를 알록달록 물들이는 듯했다.


세르반테스

이건...


속표지에는 만화의 출처도 인쇄되어 있었다.

공중정원ㅡㅡ예술협회.






밀레 아빠가 코드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