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정원, 점심식사 후 휴식시간.

복도 유리가 눈부신 햇빛을 걸러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 이런 오후는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ㅡㅡ



아이라

놀아야지!


아이라는 행복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단말기를 열고 최근 대화 기록을 확인했다.


아이라

잘됐어, 오늘 지휘관은 외출 임무가 없네!

또 그레이 레이븐 휴게실에 가서 놀아야겠네~


그녀의 발걸음은 경쾌했고, 밝은 웃음기가 넘쳐흐른다. 햇빛이 자잘히 하늘에서 새어나오자 아이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의 인공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이라

음…지난번에도 이렇게 햇빛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지상의 보육 구역은 오후의 화목한 햇빛이 내리쬐어, 창창한 대지에 잠시의 온기를 가져다 주었다.



아이라

오늘 날씨 참 좋네...


따스한 빛이 나뭇가지 끝에서 쏟아지고 핑크빛 머리카락 구조체는 눈을 감고 잠시의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이라는 우주정거장 전투 이후 오랫동안 공중정원으로 돌아가지 않았었다. 고고학 원정대를 따라 지상의 보육지역을 돌며 세레나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얻으려 했었다.

생각해보니 꽤 오랜만의 휴식인 것 같다...

고고학 원정대 동료가 할 말이 있는 듯 신기하게 다가왔다.


고고학 대원A

들었어? 그레이 레이븐 소대도 이 보육구역에 왔대.


아이라

응? 그레이 레이븐 소대? 이번 임무가 여기 보육구역 근처야?


고고학 대원A

그렇대. 임무가 이관되어 지휘관과 팀원 1명만 오고 나머지 2명은 아직 다른 곳에 있다고 들었어.

아마 오후에 다시 출발한다고 하는 것 같던데? 방금 전에 보육 구역 직원이 그렇게 말하더라고.


아이라

음...어디서 쉬고 있는지 알아?


고고학 대원A

뒤쪽 방 근처, 아마 주변 보호시설을 점검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 전설의 지휘관을 아직 못 봐서 몰래라도 보고 싶었는데….

어? 아이라? 어디 가?


아이라

금방 돌아올게!


이 말이 나왔을 때 핑크색 머리카락의 구조체는 이미 한참을 걸어나간 뒤였다. 그녀는 흔쾌히 뒤로 손을 흔들며 방금 동료가 지시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지상 보호 구역, 임무 교대 시간.

지정 보육구역으로 물자를 옮긴 뒤 오후 내내 쉴 수 있을 정도로 임무 자체는 급박하지 않았었다.

루시아와 리브는 마지막 임무 장소에 남아서 마무리를 지었고, 보호구역 담당자는 리를 빌려 보호시설을 정비했다.

다 같이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주변이 고요한 것에 다소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이전 단계의 작업 기록을 정리하고 노트를 닫았다. 고개를 들자, 시고 떫은 눈동자에 비친 것은, 커다란 텐트와 무심히 일을 하는 유랑민이었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하던 일을 반복하며 이따금씩 말을 주고받았고, 각자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없었다.

퍼니싱 바이러스가 가져온 것은 전화와 도피뿐이 아니었다. 미지와 절망으로 가득 찬 내일이야말로 인류가 더욱 헤어나기 어려운 그늘이다….

잿빛 어둠이 깔린 보육구역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스함보다는 실낱같은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핑크빛이 잿빛을 깨고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라

하이! 지휘관!

나 기억해?


지휘관

...아이라?


핑크색 머리의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갑자기 나타난 한 줄기 빛처럼 앞에 놓인 작은 창문을 환하게 비추었다.


아이라

지금 바빠? 들어갈게~



거절할 여지를 전혀 주지 않고 곧바로 소녀가 방에 들어갔고, 그녀는 신기한 듯 좌우를 둘러보았다.


지휘관

오랜만이야, 아이라.


아이라

정말 오랜만에 만나긴 했네~

몇 차례의 멋진 전투 후에 지휘관의 업적은 이미 공중정원에 널리 퍼졌어.


아이라는 윙크하며 들고 있던 그림 클립에서 이상한 그림 한 장을 꺼냈다.

그림 속 사람은 지휘관의 전투복을 입고 있었지만....자신이 알고 있는 지휘관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족히 2m는 되는 키, 넓은 어깨, 등에 업혀있는 거대한 포신과 이상하고 복잡한 외골격 장비들을 바라보며….

도대체 어떤 지휘관이 이런 포신으로 공격을 할...까?


지휘관

이건...?


아이라

너잖아~지휘관!


지휘관

...!?


아이라

이것은 내가 지휘관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만남 선물이야! 공중정원에서 도는 지휘관과 관련된 모든 소문을 모아서 이 작은 상을 완성했어.

사람들이 2m21cm의 키에 한 손으로 융합포를 잡을 수 있고, 지휘관이 구조체처럼 싸울 수 있게 하는 특수 외골격까지 가지고 있다고 했지...


아이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 앞에 있는 작품에 감탄했다.


아이라

내가 그리지 않은 다른 요소들도 있어, 예를 들어 지휘관 옆구리에 쌍날개, 천리안 같은 것도...


지휘관

...이상해.


아이라

그냥 일종의 꼬리표 같은 표현이야. 다들 지휘관에 대한 숭배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거라고.

내 마음속의 지휘관은 이렇지 않아. 나는 평가 자격이 있어!

그래서 결국 지휘관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지~


아이라는 자신을 향해 눈을 깜빡이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지휘관

그럼 아이라가 본 나는 어때?


아이라

훌륭한 군인, 출중한 지휘관...

음, 총체적으로 요약하자면 '태양'이랄까?


지휘관

'태양'?


아이라

마치 희망을 전파하는 떠오르는 태양처럼…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물론 태양보다는 온기가 비춰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빛나기 위해 분투하는 어둠속의 등불처럼 느껴지지만...

이 주제에 따라 작품을 만든 적도 있어.


앞에 있던 소녀는 빙그레 웃으며 뒷짐을 진 채 자신의 응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런데…뜻밖에 이런 평가를 받고 한동안 정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의 곤혹스러움을 알아차린 아이라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라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의 칭찬에 직면하는 것도 성공을 유지하는 방법이야.

'뛰어난 영 아티스트'라고 칭찬받을 때 나도 기분이 좋다니까~

이럴 때는 그냥 "고마워, 계속 노력할게"라고 말하면 돼.


소녀는 시치미를 떼고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지휘관

응...고마워, 계속 노력할게.


아이라

맞아, 바로 그거야!


아이라는 그 이상한 모양의 스케치를 책상 위에 놓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신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아이라

그러고 보니...지휘관은 다른 경로로 내 정보를 들은 적 있었어?

예를 들어, 트렌디한 예술가? 나의 작품? 아니면 예술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구조체 같은 거?


지휘관

(1)아니 ← 선택

(2)응


아이라

뭐? 거짓말 하지 마!

지휘관은 외부 정보에 전혀 관심을 기울일 수 없을 정도로 바쁜 거야?


지휘관

거짓말이야.


아이라

그럴 줄 알았어!

내 작품이 아무도 신경 안 쓰는 한물간 그런 것일리가 없지.

그럼 지휘관은 나에게 특별한 인상을 느낀 적 있어?


아이라는 이 돌발적인 새로운 아이디어에 관심이 많은 듯 흥미진진하게 쳐다봤다.


지휘관

아이라에 대한 인상?


아이라

그래, 지휘관의 마음속에는 내가 어떤 모습일지 듣고 싶어.


그녀가 창문 앞에 서자 햇빛이 그녀의 몸 주위에 찬란한 빛을 뿌렸고, 아이라의 눈에는 장난기 어린 빛이 반짝이며 자신의 대답을 기대하는 듯 보였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방금 본 잿빛 보육구역, 그리고 잿빛 보육구역에서 튀어나온 핑크빛이 새삼 스쳐 지나갔다.


아이라

어? 적당한 형용사가 생각나지 않는 거야?

'2m21cm' 같은 거 해도 돼!


지휘관

음...


그나저나 공중정원에서 아이라의 이름을 많이 들었고, 아이라의 작품도 많이 봤지만...

본인이 이렇게 앞에 서서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볼 때, 아무리 언어를 짜내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하다.


아이라

…말로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그럼 차라리 그리는 게 낫겠다!


번복할까 봐 아이라는 재빨리 그림 클립에서 빈 종이를 꺼내 탁자 위에 깔았다.

    

아이라

그렇게 자세히는 필요 없고 특징을 대표하는 '꼬리표'만 있으면 돼!

예를 들어 '2m21cm'이나 '옆구리에 돋아난 날개'처럼!


지휘관

...야!


그나마 회화라는 형식을 쓰면 좀 더 표현이 잘 될 것 같다.

오랜만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니 펜을 든 손이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금 창문으로 아이라를 보았을 때 머릿속에 스쳐간 첫인상을 종이에 그렸다.


아이라

...핑크색...여자아이?


아이라는 호기심에 자신의 뒤로 돌아서서 종이를 기웃거렸다.


아이라

꽃...흐음, 이 선은 무엇을 나타내려고 한 거야?


지휘관

햇살이야.


종이에는 창문과 햇빛을 나타내는 간략한 선이 그려져 있었고, 분홍색 소녀는 화가 모자를 쓰고 있고, 그 옆에는 찬란한 꽃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아이라

나는 지휘관의 마음속에서… 이런 것이었구나!


먹물이 덜 마른 종이를 집어들고 있는 아이라는 왠지 이 '첫인상'에 놀란 느낌이 들었다.


아이라

팔레트나 브러시 같은 게 아니구나? 내가 모든 사람에게 주는 첫인상은 '트렌디한 아티스트'일 줄 알았는데….


한 줄기 햇빛이 화지에 비스듬히 내리쬐며 그림 속 소녀에게 따뜻한 색채를 입혔다.


아이라

...지휘관은 그림 배운 적 있어? 소질있게 잘 그린 것 같은데.

아이라 선생님이 체계적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 줄까?

나는 살롱에서 수업하는 거 되게 좋아해! 비록...

왜 자꾸 아무도 내 수업에 오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개념적으로 가르쳐서 제대로 못 배운다고 하는데...

그치만 지휘관이 한번 배워볼래? 내가 열심히 가르쳐줄 거라구?


지휘관

좋아,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할게.


아이라

어, 그럼 이렇게 결정하자!

나중에 우리 모두 공중정원에 있게 되면 나에게 연락하는 거 잊지 마!

그럼 이제 푹 쉬어, 방해 안 할게~


그림을 치우고 아이라는 장난스럽게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난데없이 나타났을 때처럼 다시 재빨리 방을 나갔다.

이것이 바로...예술가라는 건가?



창밖을 내다본 아이라는 콧노래를 부르며 텐트 구역으로 걸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어린 소녀가 한데 엉킨 밧줄을 안고 비틀거리며 다가오다 실수로 땅에 넘어졌다. 아이라는 민첩하게 두 걸음 달려가 그녀를 땅에서 일으켜 세웠다.


아이라

조심해, 다쳤니?


그녀는 끈기 있게 붕대를 꺼내 울고 있는 어린 소녀가 상처를 감싸도록 도와주고 붕대에 무언가를 그렸다.


아이라

자, 예쁘지? 이 핑크색은 내가 특별히 꾸며준 거야~

밧줄이 되게 많네...저기 가서 텐트 보강을 도와주려고 하는 거니?

나도 그쪽으로 가야지! 내가 도와줄게!


분홍색 머리의 소녀는 무거운 밧줄을 품에 안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고, 아이는 자신이 서 있는 창문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그녀와 함께 수군거렸다.

...어느새 창가에 들어온 햇살은 다시 따뜻해졌다.





찐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