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대부분 휴가가 없어서 그런지, 이번 휴가 신청은 유난히 빨리 이뤄졌다.

아이라와 이전에 한 약속을 상기하며 결재를 신청한 뒤 아이라에게 연락했다.

새로운 미술 전시를 준비하던 그녀는 우연히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에 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첫 강의 장소를 공중정원 도서관으로 정했다.



미리 준비한 그림 클립을 들고 느릿느릿 도서관으로 들어가 코너를 돌자, 약속 장소에서 화사한 분홍색이 보였다.

아이라는 한동안 이곳에 앉아 두꺼운 책을 넘기며 가끔 손에 들고 있는 공책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던 것 같았다.

무심코 책 사이로 몇 줄기 빛이 스쳐지나가고 떠다니는 먼지가 공중에 흩날리는 와중에 책을 내려다보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유화처럼 아름다웠다,

마치...이렇게 조용한 아이라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발걸음 소리때문에 차마 이 조용한 장면을 방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세한 움직임은 구조체의 귀를 피해가지 못 했고, 아이라는 예리하게 고개를 들고 그 소리의 주인이 자신임을 깨닫고는 기뻐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라

지휘관! 이쪽이야!


사서는 이쪽의 작은 소동을 예리하게 알아차리고 불만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아이라는 얼른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라

도서관에선 이러면 안 되지...꼭 작은 소리로 말해야 돼.


아이라는 자신의 빈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몸을 숙이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이라

생각보다 일찍 왔네...너무 서두를 거 없이 푹 쉬었다가 와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어?


이내 잠잠해진 장면에 아이라라는 이름의 생기가 스며들었고, 그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지휘관

아침에 일어났는데 별일 없어서 그냥 왔어.


아이라

어? 설마 공무가 남아 있는데 일하기 싫어서 뛰쳐나온 거 아니겠지?


지휘관

(1)절대 아니야.

(2)아니거든.


아이라

헤헤, 사실 나야말로 몰래 도망쳐 나온 거야.

매니저가 빨리 다음 전시회를 준비하라고 재촉했어. 하지만! 예술가의 일이 그렇게 서둘러서야 되겠어?

바람 쐬러 나온다고 말하고 빠져나왔지롱~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작업실에 멍하니 앉아 있을 수 없다구!

쉿… 내 매니저에게 말하면 안 돼.


아이라는 능글맞게 웃었고, 주변에 흩날리는 미세먼지가 들러리가 된 듯 어두운 도서관에서 반짝였다.


아이라

그림 그릴 준비 하자. 필요한 펜은 이미 다 깎아뒀어~


그녀는 굵기가 다른 펜을 많이 꺼내 탁자 위에 놓고 하나를 골라 자신에게 건넸다.


지휘관

그럼...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돼?


그림 클립을 열고 빈 종이를 앞에 마주한 채 잠시 손을 쓰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최근에 그린 것은 전술지도뿐일 텐데, 그런 '그림'은 '자유창작'과 전혀 관계가 없다.


아이라

초보자라면 스케치부터 연습해야겠지... 그런 것 같은데?

에이, 그림 처음 배울 때 너무 어려서 처음 펜을 든 느낌이 전혀 기억 안 나.


아이라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첫 수업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


아이라

혹시 《데생의 기법》이라는 책 본 적 있어?


지휘관

(1)없는 것 같아.


파오스에 있을 때는 임무로 몇 개의 예술 감상 과목을 수강했을 뿐, 실습 내용은 다루지 않았다.

그레이 레이븐에 들어온 이후로는 비슷한 책을 읽을 시간이 더더욱 없었다.

(2)본 적 있어.


어렸을 때, 개인적인 취미로 그림 관련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파오스에 들어간 뒤부터는 그림을 연습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아이라

그렇구나, 그럼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설명할게.

그림을 배우는 것의 첫걸음은 데생을 연습하는 것인데, 데생을 잘하면 나중에 다른 유형의 구도를 만들고 명암 관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돼.

선은 데생과 같은 회화 방식에서 그림의 대상을 형성하는 주요 수단이야. 선은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우면서, 질서정연하고, 매끄러워야 해, 이렇게...


아이라는 손에 닿는 대로 도화지에 한 줄씩 선을 그었다. 마치 자를 대고 그려낸 것처럼 평온했다.


지휘관

대단해.


아이라

그림 그리기의 기초 연습이야. 예술가라고 해도 기초 연습을 게을리하면 안 돼.

그다음은...지휘관이 한 번 해볼래?


손에 든 펜으로 아이라처럼 가지런한 선을 빼려고 시도했지만 펜은 항상 자기 통제를 듣지 않고 흔들렸고, 그려진 선은 굵고 가늘고 난잡했다.


아이라

힘을 주는 지점에 문제가 있어. 손목이 아니라 팔에서 나와야 해.

이렇게 한 번 해봐...


아이라는 거리낌 없이 다가와 자신의 팔을 잡았다.

손가락으로 펜을 잡는 자세를 가다듬은 뒤, 자신의 손목 관절을 부드럽게 조절하자, 펜촉이 무슨 요정에 마법이 걸린 듯 살며시 도화지 위에 뛰어올랐다.


아이라

봐, 이렇게 하는 거야.

이렇게 칠해야 더 안정적이고 균일하게 만들 수 있고, 팔에 힘을 주는 연습을 할 수 있어.

일단 이렇게 계속 연습해 보고 나는 《데생의 기법》 책을 찾아볼게. 도서관에 이 책의 종이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면서 아이라는 자기 뒤에 있는 책장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종이에 줄을 맞춰보면서 뒤쪽 책장에서 작게 들려오는 아이라의 간간한 투덜거림과 책장을 넘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전대미문의 평온함을 느꼈다.

그림을 그리면…이렇게 긴장을 풀 수 있는 것일까?



'퍽'

약간의 소음이 있은 후 갑자기 도서관의 모든 불이 꺼지고 아이라의 당황한 비명 소리와 책장의 흔들림이 뒤편 책장에서 들려왔다——


지휘관

조심해!


뭔가 떨어질 것 같다ㅡㅡ! 오랜 작전에서의 근육에 새겨진 기억에 따라 몸을 돌려 아이라를 감쌌고, 책 한 권이 자신의 팔을 내리쳤다.


아이라

【지휘관 이름】, 조심해!


여러가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즉시 아이라를 끌고 책상 밑으로 엎드리고는 재빨리 단말기를 열어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다른 사람들과 연락을 시도했다ㅡㅡ


시스템

다음으로는 도서관의 전력시스템 점검이 있을 예정이며, 예상 점검시간은 20~30분 입니다. 도서관 내 체류자께서는 비상등 안내에 따라 가능한 한 빨리 도서관을 떠나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는 도서관의 전력시스템 점검이 있을 예정이며...


차가운 전자음이 책상 밑으로 파고든 두 사람을 야속하게 비웃었다.


아이라

어...? 전력시스템 점검시간?

그냥 오늘 도서관에 사람이 별로 없는 건 줄 알았는데….


아이라는 책상 밑에서 기어 나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허겁지겁 테이블 밑에서 일어나서 가지고 있던 전술 랜턴을 꺼냈고 하얀 불빛이 작은 공간을 환하게 비추었다.

아마 요즘 많은 작전으로 인해 신경이 곤두서서 돌발 상황에 대하여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진 탓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들어왔을 때 도서관 사서의 이상한 눈빛에 대해 생각해봤을 것이다. 아이라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너무 커 사서가 불만을 품은 줄 알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눈빛은 순전히 '왜 전기 점검 직전에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리려고 했을까'라는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이라

참, 지휘관의 팔ㅡㅡ


아이라는 황급히 자신의 팔을 잡아당겨 몇 번이고 확인했다.

방금 책 한 권이 팔을 찧은 것 같은데 상황이 '급박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아이라

좀 부었네...지휘관도 참, 책 한 권일 뿐이잖아. 나는 구조체라 한 대 맞아도 끄덕 없다구.


지휘관

(1)무의식적으로 반응해 버렸네.


아이라

역시 이것이 엘리트 소대의 지휘관인 건가?

응...지휘관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아.

(2)하지만 너도 여자야.


아이라

엣?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아이라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어깨 위로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둘둘 꼬았다.


지휘관

"구조체가 머리를 맞으면 의식의 바다 진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 몰랐어?


아이라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어째 지휘관은 꼭 어린애를 속이려고 하는 것 같다니까, 아무튼 이번에 고마웠어~

그 보답으로 최선을 다해~최선을 다해~그림 잘 그리는 법을 가르쳐줄게!


아이라는 생기를 되찾은 듯 보였다. 그녀는 시스템이 경고하는 '비상등에 따라 도서관을 나간다'는 생각을 따르지 않고 땅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집어 들었다.


아이라

이전에 이런 전력 시스템 점검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점검 시간이 비교적 짧아서 관리자가 장소를 정리하지 않을 거야.

좀 어둡긴 하지만, 이렇게 '전세 낸 도서관'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모처럼의 영감을 낭비하지 말고 계속 연습하자~


전술 랜턴의 불빛을 등에 업고 아이라는 방금 빌린 책에 파묻혀 다른 쪽 공책에 무언가를 계속 기록하고 있었다.

무거운 책꽂이 사이로 비상등의 찌익 하는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조용해진 소녀는 손전등이 만든 빛줄기 속에서, 책장에 피어오르는 미세한 먼지를 그녀의 손끝으로 쫓고 있었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펜은 자신도 모르게 종이 위를 움직이며 방금 아이라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느낌을 찾으려고 했다.

소녀의 실루엣을 먼저 그려내고, 음영을 나타내기 위해 큼지막한 블록을….



아이라

엣? 지휘관? 지금 그리고 있는 거...나야?


어느새 아이라는 자신의 뒤로 돌아서 자신의 도화지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라

리듬이 잘 잡혀있네....이쪽 실루엣에 문제가 좀 있는데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이라가 펜을 들고 간단히 수정하자 옆얼굴과 빛이 만나는 부분이 확실히 더 둥그래졌다.


아이라

왜 이런 그림을 선택했어? 그림은 괜찮지만 초보자로서 연습하기 적합한 장면은 아닌 것 같아.


지휘관

그냥 아까 아이라가 너무 아름다웠어.


아이라

어? 아름답다고?


도화지 위의 소녀는 어둠 속에서 빛의 광선 아래에서 손에 든 책을 읽는 데 집중하고 있으며, 그림은 평온하고 깨끗했다.


아이라

음...

이런 장면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지휘관이 이런 성격을 더 좋아하기 때문일까?


아이라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그녀 앞에 있는 그림을 더 열심히 살펴보았다.


지휘관

그치만 이것도 아이라잖아?


아이라

어?


아이라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고, 어깨에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지휘관

조용하든 명랑하든 모두 아이라야.


아이라

그렇구나...


아이라는 생각에 잠긴 듯 앞에 있는 도화지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 도화지를 클립에서 빼냈다.


아이라

날 그렸다고 했지, 그럼 사양하지 않고 받아갈게!~


그녀는 도화지를 그녀의 그림 클립에 넣고 다시 몸을 숙여 자신이 방금 선 긋기를 연습한 종이를 관찰했다.


아이라

선은 이제 잘 그리네. 이제 정사각체 그리는 법을 가르쳐줄게! 이건 데생의 기초 연습 중 하나인데...


도서관은 여전히 깜깜했고 전력시스템 점검은 끝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시간의 흐름은 멈춘 것만 같고, 느껴지는 것은 이 구석의 빛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