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정원, 점심식사 후 휴식시간.

인공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고 아이라는 손을 내려놓고 다른 땅의 햇빛을 가볍게 밟았다.

단말기가 울리자 매니저의 고함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매니저

아이라! 마지막 경고야! 신규 전시 신청은 모레까지 제출해!

네가 지난달에 나에게 주기로 약속한 새 작품집! 왜 나는 오늘까지 못 봤을까!


아이라

아이고야...예술 활동이잖아요. 어떻게 서두를 수 있겠어요?


매니저

더 이상 미루지 마! 오늘! 반드시 네가 정리한 작품집을 봐야 한다고!


아이라

뭐가 그리 급하신지~ 포트폴리오 정리에도 영감이 필요하답니다~


모퉁이를 돌자 목적지가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아이라

네네, 영감을 찾으러 갈게요, bye~


망설임 없이 단말기를 내려놓고 매니저의 호통을 차단한 아이라는 그레이 레이븐 대기실 팻말이 걸린 대문을 밀치고 살금살금 들어갔다.


아이라

이 시간에 지휘관은 이곳에서ㅡㅡ서류를 정리하고 있겠지!



오후의 햇살이 따스하게 책상에 내리쬐어 겨우 눈꺼풀을 벌리고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 반복적인 서류 정리 작업은 도대체 언제 끝날까...

편안한 온도는 자신에게 빨리 이 물건들을 버리고 낮잠을 자도록 재촉하지만, '긴급'이라는 표시가 있는 몇 개의 서류는 또 '오늘은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경고를 보낸다.

잠결에 문밖에서 부슬부슬 인기척이 들려오는데, 루시아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아이라

맞췄다! 역시 지휘관은 여기에 있었어!


지휘관

아이라?


새하얀 코팅과 화장을 칠한 구조체가 활기차게 뛰어들어 상큼한 과일향을 풍기며 오후의 나른한 공기를 날려버렸다.


지휘관

새로운 전시를 준비한다며?


아이라

쉿ㅡㅡ! 매니저가 나 여기에 있는 거 절대 눈치채면 안 돼.


아이라는 소파에서 가장 편한 자리로 들어가 손에 들고 있는 그림 클립을 꺼냈다.


아이라

매니저가 새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라고 재촉하는데, 사실 마지막 한 장을 아직 못 그렸거든.

예술 활동에 있어서 어떻게 늦고 빠름이 있을 수 있겠어?

조용히 있을게. 숨게 해줘, 부탁이야~


아이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맞잡은 채 자신을 향해 애원하는 몸짓을 했다.


지휘관

매니저한테 네가 여기 있다고 말하지 않을게.


아이라

헤헤, 지휘관, 고마워. 큰 영감을 얻을 것 같아~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아이라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붓을 쥐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고, 화판 위에서 손짓을 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영감인지….



궁금증을 억누르고 '긴급'이라고 적힌 마지막 서류를 본 지 두 시간이 지났다.

태양은 약간 서쪽으로 기울었고, 원래 금빛이던 빛은 귤빛으로 물들었다. 아이라는 도화지에 무언가를 그리는 데 열중했고, 조용한 방에서는 그녀의 붓이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지휘관

(아이라 뒤로 몰래 가본다.)


그레이 레이븐의 대기실이 아이라의 도화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테이블 위에 다 마시지 못한 커피잔, 의자 등받이에 떨어진 외투, 소파 틈에 두고 온 만년필까지 작은 도화지에 구현되었다.

화폭에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곳곳에 자신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이라

흐흥~


아이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심코 자신을 힐끗 쳐다보았다.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붓 끝을 움직였고, 두꺼운 문서에 거의 익사할 뻔한 작은 만화 인물이 책상 뒤 의자에 나타났다.


아이라

진작에 훔쳐보고 있는 거 알고 있었어!

봐, 생동감 있지 않아? 서류에 파묻힌 불쌍한 지휘관?


지휘관

난 저렇게 작지 않은데.


아이라

그냥 과장 좀 한 거야~


아이라는 자신의 걸작에 감탄했고, 못된 미소를 지으며 물에 잠긴 만화 캐릭터에 고양이 수염을 몇 개 더 얹어주는 것으로 자신이 한때 그녀를 분칠한 고양이로 그린 원수를 갚는 듯했다.


지휘관

(아이라가 들고 있는 그림 클립을 잡는다)


아이라

에? 지휘관?


책상에서 펜을 꺼내어 소파에 사람의 윤곽을 간단하게 그렸다.


아이라

이건...내 새로운 코팅?


동그란 악세서리 안경, 특이한 넥라인 디자인, 깜찍한 모자….

아이라는 자신 옆에 앉아 조용히 집중해서 자신의 도화지를 바라보았다.

아직 테크닉은 서툴고 여백의 선도 있지만 펜촉이 미끄러지면서 아이라의 모습과 형태는 이미 종이에 선명해졌다.

이 그림을 수정하여 완성했을 때, 해는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따뜻한 주황색 빛이 화지에 번져 그림 속 그레이 레이븐 대기실을 따스하게 물들였다.


아이라

휴...잘그렸네.

여기 라인까지 예쁘게 처리해놨어.

지휘관, 이제 하산해도 되겠는데.


눈을 구부러뜨린 아이라는 이 작품에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아이라

이것은 지휘관과 내가 함께 만든 첫 번째 작품이니까 꼭 잘 보관해야 돼!


그녀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단말기가 갑자기 다급한 소리를 냈다.


매니저

아이라! 왜 작업실에 없는 거야!


아이라

어, 저 작업실이에요. 안에서 작품 준비하고 있어요!


매니저

내가 이미 작업실 문 앞에서 두드려봤어! 5분씩이나!

내일까지 너 포트폴리오 보는 거 안 기다려! 문 따서 들어간다!


아이라

아아아, 진정해요! 지금 바로 갈게요!


갑자기 털에 불이 붙은 고양이처럼 아이라는 소파에서 튕겨져나왔다.


아이라

지휘관! 다음 주에 내 전시회 열려! 다음 주 월요일에 시간 있어? 그때 나랑 같이 전시관 세팅 체크하자!

우리 약속했지. 시간나면 나의 첫 관객이 되어주겠다고!

시간 되면 답장해줘! 나 먼저 갈게!


이전에 갑자기 나타나듯 아이라는 다시 갑자기 자리를 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주황색 빛이 방을 떠나고 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따스한 기운이 주위의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다.



예술협회.

매니저의 눈초리를 피해 조용히 작업실로 들어가자 아이라는 한숨을 내쉬며 클립 속 그림을 빼냈다.


아이라

음...농땡이 부리던 내 모습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은 그림 속 나른한 소녀를 그려냈다. 눈동자에는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색채를 띠고 있다.


아이라

아니면 지휘관의 눈에 비친 내가 이런 모습일까?


문득 뭔가 생각이 난 아이라는 캐비닛을 열고 정성스럽게 보관된 액자 몇 개를 꺼냈다.

액자에는 공책에서 떼어낸 반쪽짜리 종이, 정갈한 도화지, 불에 탄 흔적이 남아있는 페이지, 심지어 혈액과 순환액이 묻은 붕대까지 있었다.

이 난잡한 물체에는 예외 없이 앞에 있는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솜씨가 서툴러 그림자도 섞지 못하는 것부터 이미 익힌 기법으로 더 깊은 감정을 표현한 것까지.

아이라는 벽에 액자걸이용 줄을 뽑아 그림들을 일렬로 늘어놓고 가지런히 걸었다.


아이라

지휘관의 눈에서 나는 '예술가'와 '전사' 말고도 다양한 '이면'이 보이는 것 같아...


그녀는 마치 지휘관의 눈을 통해 자신을 응시하는 것처럼 벽에 걸린 그림을 응시했다.


아이라

꼬리표 아래에 숨겨진 인지, 다양한 각도의 자아, 허락되는 연약함...


가벼운 깃털이 물 위에 내려앉은 듯, 그림에 표현된 미세한 감정들이 의식의 바다의 심층부를 건드린다.

과거에 그녀는 항상 자신에게 '예술가', '전사'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다녔다...

한 겹 한 겹의 화려한 꼬리표가 그녀를 감싸며 그녀는 꼬리표 아래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그림들은 한 점 한 점 그녀의 꼬리표를 벗겨내고, 모든 꼬리표 아래에 있는 가장 본질적인 '아이라'를 드러낸다.


아이라

아, 새로운 영감이 떠올랐어.


머릿속에 그 사람의 모습이 그려졌고, 아이라는 도화지를 펼쳐 그 배경을 찬란한 아침 햇살로 물들였다.


아이라

다음에 지휘관은 무엇을 그리려나?


경쾌한 빛깔이 황량한 사막을 건너고, 꽃 한 송이가 화지에 피어나고, 소녀의 환한 미소에도 피어난다.

그녀의 마음은 한때 광야에서 길을 잃은 새였지만, 마침내 그녀만의, 자유롭게 날 수 있는 하늘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