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의역 O

 

서로 간의 짧은 협력은 ‘즐거웠지만’, 근본적 목적의 충돌은 화해할 수 없었으니 의회와의 ‘정치적 밀월기’도 끝나게 될 것입니다. 

 


어둡디 어두운 밀실 속에서 한 줄기의 옅은 푸른 빛의 투영이 약속대로 밝아진다.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투영된 이들은 역사의 적막에서 빠져나온 유령처럼 무거운 어둠을 뒤집어쓴다. 이들은 평소 중진 의원, 업계 거물, 사령부의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참모들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나타나면 그들은 단 하나의 신분――쿠로노의 한 사람일 뿐이다. 

 



투영 1: 여러분, 시작합시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이번 암호화 적용은 두 시간만 유지됩니다. 

 


투영 2: 지난 이중합 탑 소란으로 인한 인명 피해로 많은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의회는 이 틈을 타 그들의 인수를 주선했습니다. 그중에는 구조체도 있었습니다. 명분이 충분하고, 민중 지지율도 높아 우리가 막기에 쉽지 않습니다. 일부 말단 직책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예전처럼 완전한 집행 구조를 갖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투영 3: 흥, ‘영웅 소대’ 하나로도 모자랄 판에 구조체의 영향력을 계속 확대하려나? 


투영 1: 괜찮습니다. 탈주자도 구조체입니다. 하산은 아직 흔들리는 사람들을 달래고 탈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돌리려는 것뿐입니다. 그들을 다그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도 좋을 게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 ‘임시’가 ‘정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투영 3: 지상 쪽은 우리가 통제하는 하선의 32%만이 연락을 재개하고 있으며, 모두 아딜레나 항로 연합과 같은 비교적 큰 세력권 내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소형 거점은 아직 연락을 재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락되지 않는 자들은 아직 집계 중입니다. 


투영 1: 우리가 지상에 배치한 실험실은?

 


투영 4: 중형 병합 실험실 4개, 소형 생물 연구실 2개는 ‘청정 구역’ 내에 있습니다. 발견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며, 이미 오늘 폐지되었습니다. ‘청정 구역’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승격자에 의해 파괴된 그 작은 의식 연구소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이미 초보적으로 운영을 재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감청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지만 목소리를 낮춘다. 

 


투영 4: 북아시아 생명과학 및 진화 연구소……일명 윈터 홀드라고도 하죠. 

 


그 이름의 무게는 모든 사람을 침묵하게 했고, 주위의 어둠도 한층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투영 4: 파견된 팀이 윈터 홀드에 들어간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암암리에 동원할 수 있는 민간 무장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오로라 부대’도 아직 휴식 중입니다. 지난번 혼란으로 우리가 입은 손실이 너무 큽니다. 

 


대규모 민간 무장은 원래 쿠로노가 은밀히 활동할 수 있는 동력 중 하나였다. 이중합 탑의 영향으로 이 칼이 날카로울수록 자신의 상처는 깊어진다. 무장 대원의 차출을 담당한 쿠로노 고위층은 처음으로 힘이 부치는 걸 느낀다. 

 


투영 3: 승격자가 차지했을까?


투영 4: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파견대의 앞뒤 간격이 짧지 않아 우리가 파악한 승격자의 행동 패턴으로는 한곳에 그렇게 오래 머물 거라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진입 전에도 이합 생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이 가능성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윈터 홀드 내부에서 우리가 아직 모르는 변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수좌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그의 결단을 기다린다. 

 


투영 1: 파기 절차를 진행합니다. 


투영 4: 내부의 연구 데이터는 어떻게 합니까? 그곳은 겨울 계획의 핵심 연구소입니다. 이전 데이터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처리 센터의 도움으로 복원할 수 있지만, 해당 테스트 데이터는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좌의 사람은 손을 흔들며 그의 말을 끊는다. 

 


투영 1: 하던 일을 다시 되풀이하는 것일 뿐, 어떤 일은 결코 빛으로 비추어서는 안 됩니다. 의회와 겨울 계획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이제 분기점에 있습니다. 그들은 퍼니싱에 대해 완전 면역이 가능한 특화 기체를 확보했습니다. 지구를 탈환하고 퍼니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그들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우리에게는 과정의 부산물일 뿐이며, 승격 네트워크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힘을 우리 손에 넣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서로 간의 짧은 협력은 ‘즐거웠지만’, 근본적 목적의 충돌은 화해할 수 없었으니 의회와의 ‘정치적 밀월기’도 끝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의회 사이의 갈등은 조만간 터질 것입니다. 어느 쪽도 아직 상대의 손을 잡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암묵적 이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의원 4: 알겠습니다. 제가 처리할 테니, 조금만 시간을 더 주세요. 


의원 1: 빠르게 해결하세요. 시대는 변했습니다. 행동이 굼뜬 사람은 그 수레바퀴에 말려들 수밖에 없죠. 


투영 4: 다음 항목은 ‘수수께끼의 인물’입니다. 보내드리는 정보는 당신이 관심을 가질 만할 겁니다. 당신이 계속 주시하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잘 활용하면 하산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을 겁니다. 


 

...

 



엄숙한 청년의 목소리: 몇 번이고 실험을 해봐도 기가 막히네…… 기체 성능의 최적화를 위한 공간이 그만큼 있었다니.

 


여기는 어디지……

 


여성 연구원: 카플란 감독님, 피실험자의 의식의 바다에서 변동이 생겼습니다. 실험 과정을 종료하시겠습니까? 

 


피실험자……누구?

 


카플란: 실험을 종료하고 ‘자장가’를 켜. 이번에 수집된 데이터는 윈터 홀드에 제출했나? 

 


윈터 홀드……윈터……의식 깊숙이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듯 핏빛 같은 진홍색이 시야를 물들인다. 

 


여성 연구원: 데이터가 업로드되어 ‘자장가’ 프로그램을 실행합니다. 

 


부드러운 전자기 펄스는 의식 깊은 곳의 따끔거림을 점차 사라지게 한다. 이와 함께 사고 능력도 없어지는 것 같다. 여기서 자면 안 된다…… 정신을 차릴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자 붉은 빛이 그녀의 주의를 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탐색한다.

 


여성 연구원: 표적 체내에 퍼니싱 반응!


카플란: 말도 안 돼. 여기에……역원 장치가 없잖아!


 

청년의 목소리는 예전 같지 않다. 

 


카플란: 제 0호 예비 방안을 집행해!

 



 

케이블과 기구에 구속된 승격자, 그녀가 눈을 떴다. 

 




2:00 AM 014호 보육 구역.

 


루시아: 아까 그건……?


 

루시아는 방금 의식의 바닷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명하기 그지없던 기억은 안개가 짙게 낀 듯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이런 이상은 늘 함께하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게 당연하다.

 


지휘관: 루시아. 


루시아: 좋은 밤이에요, 지휘관. 쉬고 계셨던 거 아닌가요? 

 


옆으로 다가오는 인간을 바라보며 루시아가 묻는다. 

 


지휘관: 조금 있으면 운송기가 와서 물자를 인계할 거야. 잠이 안 오면 나와서 좀 걷자. 


루시아: 리브가 있었다면 또 걱정을 끼쳤겠네요. 

 

지휘관: 윽……리브에게 말하지 마……


 

내가 난처해하는 모습에 루시아는 웃는다. 

 


지휘관: 너는 요즘 자주 딴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루시아: ……

 


눈앞의 곤란한 시선에 루시아는 숨기는 쪽을 택하지 않았다. 

 


루시아: 네. 희미한 느낌만 있는, 존재하지 않는 많은 화면과 소리가 보이고 들려요. 이런 느낌은 뭐랄까……취서체 사건 당시 075번 도시 지하에서 알파 의식에 딥다이브 했던 것과 비슷해요. 

 

지휘관: 그 딥다이브의 영향인 걸까?


 

루시아는 진지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루시아: 과학 이사회는 이미 그때의 딥다이브 영향을 수복했어요.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으니 전 재발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번에는 좀 달라요…….

 

지휘관: 다르다고? 


루시아: 그동안 딥다이브의 영향으로 보았던 영상은 흐릿했지만, 적어도 단편적인 부분들은 기억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아까는 어렴풋이 정신이 나간 느낌이 들었고, 떠올리기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지휘관: ……언제부터 그랬어? 


루시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오늘부터 시작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동안의 느낌이 너무 애매해요. 

 

지휘관: 딥 링크로 상황을 확인해줄까? 


루시아: 네. 

 

지휘관: (딥 링크 진행)


 

의식의 바다에 딥 링크를 빌려, 루시아의 겉모습 속에 감춰진 정서에 접촉한다. 신뢰와……불안. 

 


지휘관: (그녀의 손을 잡는다)


루시아: ?

 


놀랍다는 표정은 루시아의 얼굴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의식의 바다에서는 평온한 신호가 전해진다. 



지휘관: (자세히 확인한다)


 

자신에게 전문적인 기구는 없었지만, 소대원들에 대한 익숙함과 늘 아시모프에게 불려가 기체를 시험해 본 경험으로 간단한 검사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의식의 바다는 마치 사는 곳과 다름없이 고요하고, 숨겨진 암초도 없으며, 부르짖는 듯한 풍랑도 없다. 가능한 모든 복병을 꼼꼼히 배제한 뒤 링크 상태에서 물러났다. 

 


지휘관: 어떤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어. 


 

루시아에게 먼저 자신의 판단을 말한다. 

 


루시아: 기체의 각종 데이터에도 이상이 없어요. 

 


방금 내가 딥 링크를 했을 때 루시아 본인도 1차 본체 자체 검사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이전 이중합 탑 작전 때 마인드 표식 오염이 끼친 영향일까? 아니면 요즘 바빠서 쌓인 피로 때문일까? 

 


루시아: 현역 연한이 임박한 구조체라고 하니 이런 의식설도 자주 나오는 것 같아요. 

 


루시아의 갑작스런 말이 나의 생각을 끊는다. 

 


루시아: 저도 곧 은퇴해서 후방 훈련소에서 구조체 교관으로 일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지휘관: 콜록콜록, 컥……어디서 난 소문이야?


루시아: 훈련소의 구조체 교관이 한 말이에요. 비록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건 단지 수업을 피하고 싶었던 그녀의 구실이었다고 하네요. 

 

지휘관: 그래서 이건 그냥 농담이야? 


루시아: 당연히 농담이죠. 

 


루시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루시아: 지휘관,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그냥 단순한 문제에요. 그러니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지으실 필요 없어요. 


지휘관: 그렇게 티가 나나……


 

루시아는 이번에는 대답 대신 웃으며 앞에 있는 인간을 바라본다. 

 

지휘관: 알겠어. 하지만 이번 임무가 끝나면 자세한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해.


루시아: 네.

 


...

 


2:15 AM 014호 보육 구역 10km 밖. 찬바람이 손바닥을 스치며 허황된 온도를 앗아간다. 알파는 손을 꽉 쥐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알파: 이런 상황이 점점 더 빈번해지는군. 

 


처음에는 드문드문 흐릿한 소리만 들려오다가, 나중에는 시각 모듈에서도 간간이 끊기는 화면이 나타났다. 마지막에는 기체의 다른 감지까지 교란됐다. 

 


알파: 이건 아마 그 루시아의……

 


알파도 이 간섭을 막는 수단을 생각해냈지만, 간섭이 강화되면서 이것을 방어할 수단도 하나둘씩 무력화됐다. 

 


알파: 막을 방법이 없다면, 잘 활용해야겠어. 

 


흐릿한 화면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꾸미고 상대방의 움직임을 간접적으로 판단한다. 이는 다음 행동을 편리하게 만든다. 검붉은 인영은 폐허를 누비며 보육 구역 쪽으로 나아간다. 갑자기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달빛이 비치지 않는 그늘에 대고 소리친다. 

 



알파: 나와!


???: 그런 상태에서도 이 정도의 감지를 유지하다니, 역시 대행자 자질이 있는 사람이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걸을 수 있는 다리가 없어. 우리 이렇게 거리를 유지하는 게 어때?

 


단아한 여성 목소리는 알파가 바라보는 위치에서 흘러나온다. 알파는 이 목소리의 제안을 무시하고 앞으로 다가간다. 작은 음향기기가 알파의 발밑에 놓여 있다.

 


???: 어머, 이렇게 추태를 부리는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타나서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릴게. 


알파: 뭘 하고 싶은데?


???: 그냥 성의를 보이고 싶었어. 


알파: 네가 말하는 성의는 숨기만 하는 건가 보지?


???: D12 구역에 수송기가 착륙할 거야.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알파: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아?


???: 기왕 성의를 보이는 거니, 당연히 그래야지. 그 시설이 잘 갖춰진 보육 구역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보다, ‘고립무원’ 수송기가 당신에게 더 잘 어울리는 먹잇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정도면 충분해?


알파: ……

 


알파는 더 이상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서서 먼 곳으로 떠난다. 

 


???: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