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 의역 O

 


승격자, 인간, 기계 등 불변하는 사물은 없을 거고, 지금은 이합 생물조차 예상치 못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어. 

 


루나와 알파가 각자의 경험을 교환하자 시간은 이미 밤이 됐다. 

 



 

루나: 이합 생물, 쌍둥이…… 그동안 그 퍼니싱의 조물들이 이런 단계로 발전했구나. 가브리엘은 결국 자신의 야망 때문에 죽었어.

 


다시 가브리엘의 이름을 거론할 때 루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루나: 순전히 퍼니싱으로 뭉친 조물만으로도 종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알파: 종점? 


 

하지만 루나는 알파의 의문에 해명하지 않고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알파: 알겠어. 또 대행자가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

 


알파는 이 문제에 너무 매달리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알파: 그렇다면 왜 본ㆍ네거트는 그 이합 생물에 관심을 보였을까? 그리고 나는 그들이 이중합 모체를 양성하는 지하 통로에서 그 자비로운 자를 만나지 못했는데, 그녀는 ‘복음’을 위해 왔다고 했어. 


루나: 종점에 향하지 못하더라도 선별의 시련으로 삼을 수 있어. 본ㆍ네거트는 아마 이런 식으로 더 많은 ‘우수’한 씨앗의 발아를 촉진 시킬 생각이었을 거야. 자비로운 자에 대해서는……


 

루나의 얼굴에는 석연치 않은 표정이 역력했다. 



루나: 나는 원래 그녀가 단지 괴팍한 대행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승격 네트워크에 접속한 후에야 그녀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 심지어 나는 그녀가 대행자인지 아닌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 그래서 그녀가 어떤 시선으로 그런 이합 생물을 바라봤는지 알 수 없어. 


알파: 그녀보다 내가 더 신경 쓰는 건 역시 본ㆍ네거트야. 비록 대부분 행동하는 건 그의 부하들뿐이지만, 이 배후에는 반드시 그의 지시가 있겠지. 최근 공중정원의 대규모 탈영에도 그의 선동이 있었을 거야. 


루나: 언니는 이 일을 조사하고 있는 거야?


알파: 그냥 탈영한 구조체가 우연히 칼끝에 스친 것뿐이야. 나를 승격자라고 착각하고 이끌려 접근한 거겠지. 그에게 모든 정보를 말하라고 한 후, 또 잠시 기다렸다가 몇 명의 탈영병을 붙잡아 연결을 기다렸어. 그들의 말은 모두 비슷했어. 모두 본ㆍ네거트와 그의 부하들을 가리켰고. 


루나: 언니는 예전에 이 일들은 전혀 신경 안 썼잖아. 


알파: 공중정원이 어떻게 되든 난 관심이 없지만, 그 남자는 인류와 연관이 있었고, 너의 정보도 그의 입에서 나왔어. 075호 도시 사건을 겪은 당사자들조차 네가 공중정원의 손에 있다는 걸 몰랐지만, 그는 너의 상세한 위치를 알 수 있었어. 이런 기밀 정보는 평범한 사람이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스파이를 심는 것만으로는 이렇게 정확한 정보를 알아낼 방법이 없어. 그들은 분명 어떤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어.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결정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지. 그리고 너를 달에다가 버릴 생각까지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내가 그들을 적으로 삼을 이유는 충분해. 


루나: 인간은 원래 통일된 의지가 없기에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기 마련이야. 그들 중 누군가가 대행자와 협력할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네. 신경 써야 할 건 그들이 그 대행자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 혹은 그들이 어떤 확신을 가지고 대행자가 흥미를 가질 만한 걸 내놓는지겠지. 


알파: 조사하러 가야 해?

 


루나는 잠시 침묵한 뒤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루나: 이건 공중정원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니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알파: 비록 그 남자가 배후에서 조종하려는 계획은 표면적으로는 모두 실패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아. 그는 자신의 집념이 있는데도 이에 미쳐버리지 않는 게 그를 더 다루기 어렵게 만들어. 그가 무엇을 하든 승격 네트워크를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 그리고 자신의 대행자 자격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하지도 않을 거야. 


알파: 내가 걱정하는 건 승격 네트워크가 아니라 너야, 루나. 넌 예전처럼 네 선택에 집착하지 않지만, 승격 네트워크에 더 깊이 얽혀 있는 것 같아.


루나: 고마워, 언니. 나는 내 상황을 잘 알고 있어. 근데 계속 나아가면 미래가 있어. 지금 되돌아간다고 해도 남는 건 회한뿐이야.

 


알파는 입술을 다문 채 더 이상 이 주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파: 이 얘기는 그만하자. 이제 뭐 할 거야? 예전처럼 선별할 수 있는 ‘씨앗’을 계속 찾을 거야?


루나: 아니, 이 일은 당분간 계속할 필요는 없어……

 


루나는 부유 모드를 해제하고 석제 분수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시선을 마당 가운데에 두어 그곳을 훑으며 다음 행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알파: ……당분간 다른 생각이 없으면 들어가서 살펴볼래?


 

알파는 부서진 유리창에 먼지가 쌓인 낡은 안뜰을 바라보았다. 외벽의 흰색 페인트는 벗겨져 노랗게 썩은 목조 구조를 드러냈다. 

 


알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테지만.


루나: 응.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하기 전에 가보자. 

 


두 사람은 문 앞에 도착한 뒤 붉은 물감으로 상징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빛은 바래 모양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알파: 이건 뭐야?


루나: ……

 


루나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갑자기 낮은 소리로 웃었다. 루나의 웃음소리에 알파는 고개를 돌렸다.

 


알파: 왜 그래?


루나: 별거 아니야. 내 생각에 이건 어떤 선택지 같은데?


 

루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음을 거두었지만,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루나: 언니……


알파: 왜.


루나: 롤랑과 라미아랑 함께했던 시절이 그립지 않아?


알파: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만약 내가 그들에게 돌아가길 원한다면, 나는 너와 함께 갈 수 있어. 


루나: 당분간은 필요 없어. 만약 그들이 나를 찾으려 한다면, 자연스럽게 내 위치를 알 수 있을 거야. 


 

루나가 눈앞의 방문을 살며시 열자, 썩은 나무와 녹슨 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먼지가 내려앉았다. 

 


루나: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은 각자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거야. 여기도 벌써 이렇게 됐네……

 


달빛이 오랜만에 집으로 들어왔다. 

 


...

 


한 이합 생물이 땅을 기어 다니고 있다. 합금판을 쉽게 찢을 수 있는 앞발은 겨우 가슴이라고 할 수 있는 부위에 모아져 있어 웅크린 두더지처럼 보인다. 웅크려도 50cm는 족히 되는 이 ‘두더지’는 이제 이를 악물고 발을 동동 구르던 순백 소녀의 눈앞에서 움츠러들고 있다.

 



 

알파: 여기에도 이상한 점은 없군……

 


알파는 한쪽 건물에서 나와 루나가 눈앞에 있는 이합 생물을 눈여겨보고 있는 걸 발견한다. 

 


알파: 이 이합 생물은 어떻게 됐어?

 


루나는 웅크린 이합 생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알파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루나: 언니, 얘가 무서워해. 

 


알파는 말없이 이합 생물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뾰족한 기둥을 들여다본다. 이 기둥의 돌기는 위험한 빛을 굴절시키고 있었다. 

 


알파: 응, 이해했어.

 


루나가 손을 흔들자 퍼니싱이 이중합하여 만들어진 뾰족한 기둥이 진홍색 입자로 변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공 모양으로 웅크리고 있던 이합 생물은 마치 대사면을 받은 듯 사지로 재빨리 기어나간다. 루나는 이합 생물이 사라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다.

 


알파: 언제부터 이합 생물에 관심을 가졌어?


루나: 무섭게 느껴질까봐 조금 놀랐을 뿐이야…… 자세히 설명할게. 


 

알파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묘한 감정을 읽은 듯 루나는 덧붙인다.

 


루나: 이합 생물은 구성이 감염체와 다르지만, 행동 패턴은 같아. 모두 단순히 본능에 의해 움직여. 그래서 그들이 적과 아군을 식별하는 방식은 사실 상당히 간단해. 누군가가 지령을 통해 적을 표시해 주거나, 퍼니싱을 감지하여 판단해. 


알파: 아무도 통제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들은 승격자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지.


루나: 그리고 우리에게 두려움은 더더욱 느끼지 못해. 두려움은 항거를 의미하고, 항거는 반항의 전제니까. 


알파: ……너를 두려워하는 거야, 아니면 대행자를 두려워하는 거야?


루나: 나도 모르겠어. 혹은 다른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걸 수도 있지.


알파: 그걸 어떻게 알았어?


루나: 원래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도망치려고 했어. 이합 생물은 통상적인 의미의 생물이 아니야. 천적 같은 개념이 없는 데다가 내가 퍼니싱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이런 행동이 굉장히 이상해서 손을 써서 이것을 가두었어. 


알파: 뭐 알아낸 건 있어?


 

루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얼굴에는 별로 아쉬운 기색이 없다. 

 


루나: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탄생 초기부터 있었던 설정일 수도 있고, 예외적인 특이한 개체일 수도 있어. 


알파: 그동안 감염체든 이합체든 간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심을 보인 것 같아. 


루나: 그들의 변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싶기 때문이야. 


 

루나가 고개를 들자 검푸른 하늘에 몇 송이의 흰 구름이 수놓아져 있다. 오랫동안 지구와 함께한 그 위성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루나: 승격자, 인간, 기계 등 불변하는 사물은 없을 거고, 지금은 이합 생물조차 예상치 못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어. 선별 기준도, 승격 네트워크도 새로운 가능성을 원하고 있어. 


알파: 새로운 가능성이라…… 네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해. 


루나: 음, 그럼 언니는? 언니는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알파: 나? 나중에 생기겠지. 하지만 지금은 네 곁에 있을 수 있고, 다시 널 잃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해.


 

이때만 해도 이들은 아직 갈 길을 탐색할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