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날



언제부터였을까.


  희망과 절망은 한 끗 차이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격언처럼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말들은 언제나 힘든 시기에 뒤따라 힘을 얻었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또한 그러했다. 영점 발전소에서 시작되어, 세계에 드리운 붉은 역병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이젠 자연의 법칙마저 모방하며 온갖 생물을 집어삼켜갔다. 한 때 지상 위에 복구되었던 도시들은 하나씩 붉은 역병의 파도와 군세에 삼켜졌고, 잠시나마 희망을 가졌던 사람들의 온 몸에 절망이란 납덩이를 짊어지웠다.
 
 이미 절망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역시 미래 따윈 없다며 조소를 터뜨렸고, 약소했던 희망마저 빼앗긴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마냥 삶을 쓸데없는 짐짝처럼 던지기란 힘들었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기에, 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매 순간 그러한 사람들의 생존본능은 끊임없이 부딪혔고, 그 동안에도 인류를 모방하고, 동식물을 모방한 퍼니싱 생물들의 위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언제나 그랬듯 힘없고 약한 자들부터 일방적으로 약탈당하고 죽임당했고, 조금이나마 힘을 가진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기 위해 서로 빼앗고 뺏기고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가지고 있는 힘이 다 소진될 때면 그들은 영락없이 퍼니싱 생물들에 의해 짓씹히거나 적조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흡수되었다.



  그러한 상황은 이리저리 떠도는 생존자들이나 청소부들 사이서부터 빠르게 퍼져나갔다. 절망에 의한 혼란과 무질서는 누가 부여하지 않아도, 전염병 처럼 빠르게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다. 지상 위에 있는 인류의 어떤 세력도 이런 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것은 공중 정원 휘하에 수복된 세력권 또한 마찬가지였다.

 
 타다다당 - ! 타다다당 - !


  이곳은 공중 정원에 의해 수복된 대도시 중 하나였다. 며칠 전 인근의 도시가 다시 침식체들에 의해 전복되면서, 이곳도 그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며칠동안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는 그칠줄 몰랐고, 도시에 주둔중이던 구조체 소대들과 무장 청소부들은 도시의 지형과 가진 자원들을 모두 동원해 적들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도 무색하게, 그들은 도시의 시청과 그 인근 구역을 제외한 도시의 대부분을 침식체들에게 뺴앗겼다. 
  
  적들은 밤낮없이 공격하며 거친 공세를 이어갔고, 이를 막아내기 위해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부터 몰려오는 침식체들을 향해 무수한 총탄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적들을 막아내기 위해, 필사적인 공격을 가해도 침식체들의 기괴한 진격은 조금도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그 어떠한 감정이나 이성따위 남아 있지 않은 존재들은 자신들이 다치는 것도, 적에게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그저 눈앞의 인간을 죽이는 것에만 몰두했다.


  "으아악! 살려줘!"

  "3소대. 시청 인근의 광장으로 후퇴해! 1소대는 청소부들을 엄호하도록 하고, 2소대는 적들을 지연한다. 서둘러!"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었다. 끝없이 몰려오는 적들 앞에서 무기와 인력은 시시각각 줄어갔고,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손실들이 늘어갔다. 구조체 대장은 자신들의 부하를 이끌며 치열하게 눈앞의 적들을 상대하고, 부하들을 인솔하며 청소부들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대장! 큰일났습니다. 북쪽 방어선의 4소대가 전멸했습니다!"
  
  "뭐라고? 몇 시간 전만 해도 잘 버티던 4소대가 전멸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두 시간 전, 인간형 퍼니싱 이합 생물체들이 가세했습니다.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시청 안에 대피해 있는 민간인들이 공격을 받게 될 겁니다!"

   구조체 대장은 이를 악 물고 눈앞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무거운 산에 깔린 것 보다 더한, 정신과 몸이 짓눌리는 것 같은 압박감이 그의 온몸을 휩쓸었다. 잠시동안 상황을 판단하던 대장은 결단을 내렸다. 

  "민간인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내 휘하의 6소대는 지금 즉시 4소대의 공백을 메운다! 다른 소대들은 이 지역에서 최대한 빨리 물러나 재정비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곧 그와 6소대는 즉시 전멸당한 4소대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미 인간형 이합 생물을 필두로한 침식체 무리는 시청의 목전까지 다다른 상태였고, 그 주변을 방어하는 소대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갈 모양의 침식체들은 꼬리로 새빨간 퍼니싱 광선을 발사하며 앞을 가로막는 방어진지를 무자비하게 타격했고, 인간형 변종들은 진지에 주둔하던 구조체들과 무장한 청소부들을 덮쳐 갈갈이 찢어버렸다.

 사방에서 총소리와 침식체들의 괴성,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구조체 대장과 6소대는 즉시 그 현장으로 뛰어들며 방어에 나섰다.

 "으아악! 사, 살려줘! 살려줘!"

  공포에 찬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대장은 고개를 돌려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인간형 변종에게 덮쳐진 한 청소부가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변종은 아래에 깔린 먹잇감을 찢기 위해 자신의 팔 돌출부를 높게 들어올린 상태였다. 대장은 곧바로 총의 개머리판으로 그것의 머리를 가격했고, 직격당한 변종은 그대로 인근 건물의 벽에 처박히며 콘크리트 먼지를 일으켰다.

  "이봐요! 괜찮습니까? 정신 차리세요!"

 대장은 다소 거칠게 청소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다행히 그는 곧 정신을 차리며 감사를 표했다.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저 녀석에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다만... 아까 땅에 깔렸을 때 제 총기가 망가져버렸습니다."
   
  그 말대로 청소부의 소총은 인간형 변종에 의해 깨끗하게 반토막이 나 있었다. 이미 퍼니싱에 침식된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 재활용할 수 없었다. 대장은 잠시 고민하다, 자신의 권총을 청소부에게 쥐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지금 싸울 수 없는 상태입니다. 최대한 빨리 시청 건물로 가서 대피하십시오. 저희가 어떻게든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치만..."

  "시간이 없습니다! 자, 어서요!"
 
  그러던 그 순간이었다. 대장에게 머리를 가격당한 인간형 변종이 다시 공중으로 튀어올라, 다시 한 번 목표로 삼았던 청소부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대장은 총구를 겨눠 그것의 복부를 맞췄고, 공중에서 피격당한 변종은 공중제비를 돌며 땅에 거꾸로 처박혔다. 이를 본 청소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대장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시청을 향해 도망갔다.

  자신이 노리던 목표가 멀어지는 것을 본 변종은 기괴한 목소리를 내며 끼기긱.. 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한참동안 통증을 느끼듯 이렇게 되뇌이며 기괴한 몸짓으로 처박힌 몸을 빼내며 이렇게 되뇌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뒤틀리고 괴기스런 목소리로 인간의 말을 따라하는 그것의 모습은 매번 구조체들에게 충격과 공포스러웠다. 최근 그것을 맞딱드리게 되면서 겪은 구조체 대장또한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되려 자신의 무기를 꽉 잡은 채로 변종을 겨누며 말했다.
  
  "여기서 더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인류의 이름을 등에 업고, 네놈들을 반드시 막아낸다!"
  
  곧 구조체 대장과 6소대의 합류와 함께 더 많은 침식체와 더 많은 퍼니싱 이합 생물들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필사의 사투는 인고의 시간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위는 어두워졌고, 대장은 어느 새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기체가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역원 장치에서 끊임없이 경고음이 울렸고, 무기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된 것도 보았다. 자신의 옆을 잘 지켜주던 모든 부하들이 침식되거나 쓰러진 모습들을 보았다. 도망가던 청소부들이 이제 시청 건물에서 침식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눈 앞에 새빨간 눈들을 번득이는 침식체와 이합 생물들이 도사리는 것도 보았다. 곧이어, 그들은 대장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에도 대장은 너덜너덜해진 무기를 힘없이 휘두르며 적들을 조금이라도 지체시키려 했다. 하지만 허약한 저항은 손쉽게 짓밟혔고, 곧이어 침식체들은 그를 찢어버리려 했다.


  그 때였다.
  
  전투기의 엔진음이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면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 밀집한 침식체들과 이합 생물들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파란 탄환과 분홍빛 광선이 대장을 덮쳤던 침식체와 이합 생물을 삽사간에 해치웠다. 그리고 곧 한 수송기가 한 줄기 희망처럼 시청 위에 멈춰섰다.
  
  "저건...! 엘리트 소대의 수송기다!"

  "살았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와줬어! 우리는 살았어!"
  
  곧 공중으로 부터 뛰어내린 세 명의 엘리트 소대원들이 지상으로 착지했고, 그들을 따라온 공중 정원의 지원 부대들도 따라 착지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강적의 등장에 침식체와 이합 생물들은 괴성을 발악하기 시작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 작전을 속행하겠습니다! 지시를 내려주세요! 지휘관님!"
  
  양 갈래 머리를 한 소녀 구조체가, 태도를 바로 쥔 채 적들을 겨누며 외쳤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 적들을 일망타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