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역/오역 O

2023 여름 이벤트 모음



긴 여름의 외로운 등불

싸늘한 달 아래에는, 낯익은 모습이 서 있다.

 


 


석양빛을 쬐며 자고 있다가, 밝은 달의 맑은 빛에 깨 문을 연다. 하늘에 가득한 은빛 서리는 어둠 속을 떠다니며 어둠의 청량함을 그린다. 바닷바람은 얼마 남지 않은 졸음을 날려버린다. 나는 아예 이 상쾌한 바람 속에서 해면에 반짝이는 물결을 향해 나아간다. 바다 거품이 남긴 흔적을 따라 산책하다 보니 어느새 멀리까지 갔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외로운 등불이 모두 멀어져 간다. 싸늘한 달 아래에는, 낯익은 모습이 서 있다.


 

 


노안: 좋은 밤이야, 지휘관.

 


그의 손에서는 반딧불이가 살아 숨 쉬는 듯한 부드러운 빛을 내며, 밤의 어둠 속에서 동료를 부르고 있다. 

 


지휘관: 내가 올 줄 알고 있던 것 같네.


노안: 내가 밤에 너를 만난 건 처음도 아니잖아.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약속이나 한 듯 맑은 별하늘을 바라본다. 


 

노안: 같이 산책할래? 난……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지휘관: 좋아.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다. 청명한 달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인다. 이를 보니 그의 그림자를 쫓아 숲속으로 들어갔던 그날 밤이 떠오른다. 

 


지휘관: 너도 공중정원에 온 지 오래됐네.


노안: 그러게. 너와 같이 돌아온 게 얼마 전의 일인 것 같아. 


지휘관: 처음에만 해도 난 네가 여기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


 

그는 웃으면서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묻는 듯 돌아본다. 

 


지휘관: (훈련실의 이야기를 꺼낸다)


 

노안이 처음 공중정원에 왔을 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와 승격자 사이의 연루에 관해 두려워하며 그를 위험인물로 여겼다. 심지어 그와 같은 훈련실에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노안: 그런 일들은 이미 해결됐지――일부분만. 모든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건 어렵지만, 작은 일부터 해나가면 돼. 얼마 전에 한양 소대가 공중정원에서 전근했을 때, 훈련실에 있던 교관이 나에게 작은 과자 봉지를 주기도 했어. 


지휘관: 아……시몬이 혹시 그걸 먹고……

지휘관: 어쩌면 한양 소대의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시몬을 다치게 할 수도 있겠는걸.


노안: 미안해……. 하지만 나는 정말 그가 참깨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몰랐어. 다행히 증상은 심각하지 않았어.


지휘관: 시몬도 몰랐대. 전에 깨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까. 병문안을 갔을 때, 그는 누가 너한테 독살 시도를 한 줄 알았다고 했어.


노안: 그렇구나.


지휘관: 네가 처음 왔을 때, 시몬은 네가 괴롭힘을 받는 건 아닌지 생각하더라.


노안: 훈련실 때문에? 음……하지만 이런 일들 덕분에, 시몬 지휘관은 나를 도와 도서관 관리원 자격을 신청해줄 수 있었어. 훈련실과 도서관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후자지.


지휘관: 설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그는 나의 추측에 소리 내어 웃는다. 그 여부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휘관: 사실 훈련실뿐만 아니라 그 실험들도……


 

처음에 노안이 협력해야 할 실험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어느 날 과학 이사회에 가서 검사 보고서를 가져와야 할 때, 비로소……산산조각으로 해체된 기체와, 자신의 팔다리와 부품 속에 앉아 있는 청년을 보았다. 

 


노안: 응……공중정원에 오기 위한 교환 조건이었어. 약속을 지켜야 하기도 했지만, 나도 궁금했거든. 혹사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내가 승격자도 아니고 수격자도 아닌 상태에서 승격자와 비슷한 일을 하게 된 걸까? 내 의식의 바다 안정성이 검증된 이상, 이 실험들은 안전성을 보장할 수 있어. 그들도 이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했지.


지휘관: 그냥 생각지도 못했어……누군가가 그 틈을 타서 네 의식의 바다를 복제하다니……


 

이 말을 들은 노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다. 

 


지휘관: ……

지휘관: 왜 그래?


 

그는 손을 뻗어 옆 사람의 뺨을 살짝 어루만진다.

 


지휘관: ……왜 네가 날 위로해주는 거야.


 

청년은 웃음기를 머금고 손을 놓는다.

 


지휘관: ……

지휘관: ……얘가 진짜.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로 쿠로노를 귀찮게 한 후에 시몬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자신의 소대를 그레이 레이븐처럼 홀가분하고 우애롭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며 나에게 물었던 것 같다. 그는 다른 지휘관과 마찬가지로, 파오스의 교실에서 지휘관이 해야 할 일을 많이 배웠고, 대원들을 어떻게 관리하며 작전 계획을 세우는지 알고 있다. 이론대로라면, ‘지휘관’과 ‘대원’의 관계를 잘 유지하면 정상적으로 소대를 운영할 수 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아, 여러 차례의 소대 재편성을 겪은 후 그도 지휘관 직책 이외의 일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계획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시몬과, 상대적으로 잘 아는 노안에게 가끔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한양 소대를 도운 동시에, 점차 노안과 함께 더 나아갔다. 


 

 


도서관에서 발생한 그 도피의 행동 이후로, 우리는 묵묵히 모종의 합의를 보았다. 언제나 노안에게 도움을 청할 때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접대와 번거로움을 조금씩 피했다.

 


 


돌이킬 수 없을 때, 그는 곁에 남아 번거로운 보고, 결재 절차, 심지어는 소프트웨어를 빌려 위장하여 나를 대신해 화상 회의를 진행하기도 한다. 

 


지휘관: 얼마 전엔 내가 분신술을 할 줄 아는 것 같다는 말도 들었어.


노안: 강의도 하고, 작전 준비실에서 화상 회의도 해서?


지휘관: 그래. 들키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야. 


노안: 어차피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나도 우리가 정리한 보고서를 변성기를 통해 한 번 읽었을 뿐인걸.


지휘관: 다음에는 나 대신 강의해줄래?


노안: 굉장히 그러고 싶지만, 난 지금 약을 잘못 처방한 척만 할 수 있어.


지휘관: 꾀병이라……맞다. 생명의 별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한 일은 어떻게 됐어?


노안: 영상 참고 자료를 많이 받았어. 그걸 보고 한참 더 연습하면 응급 자격증을 한번 딸 준비는 할 수 있어. 


 

노안은 이 말을 하며 천천히 걸음을 늦춘다.


 

노안: 우리 이미 해안을 따라 오래 걸었어. 앉아서 좀 쉴까?


지휘관: 응.

지휘관: (끄덕인다)


 

...

 


두 사람은 모래사장 가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파도가 낮게 읊조리는 소리 속에서 달빛이 점점 구름 속으로 숨어들 때까지 별하늘을 바라본다. 


 

 


노안: 이렇게 여유로운 상태에서 너를 본 게 오랜만인 것 같아……. 임무도 아니고, 너는 서둘러 떠나지도 않으니. ……지난번에도 공중정원에 있었지?


지휘관: 응.



 


 

한양 소대가 콘스타레예로 발령받기 전의 어느 날 밤,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아 광장 근처를 걷고 싶었는데, 어느새 도서관 근처까지 간 적이 있다. 그의 말처럼, 우리가 밤에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휘관: 난 그날 밤에 너와 많이 수다 떤 게 기억나.


 

처음에는 단순히 최근에 일어난 일을 말할 뿐이었다. 리브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든가, 정화부대의 개혁이 계획되어 있다든가, 최근의 임무 등……. 어느새 마음속에 꽉 막힌 일까지 털어놓게 되었다. 속출하는 배반자, 이상 재해 구역의 변화, 실종되는 사람들, 루시아의 감찰, 좀처럼 모이지 못하는 그레이 레이븐. ――그는 하소연을 잘 들어주는 좋은 상대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위로는 말할 것도 없다. 어려운 계획을 제시하지 않으며, 지금의 슬픔이 작은 일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묻지 않는다. 우리의 대화는 날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까지 계속되다가, 끝에는 졸음이 찾아왔다. 두 시간만 더 지나면 작전회의가 있어 지상의 거점으로 달려가야 했다.

 


지휘관: ……망했다.

지휘관: 나 먼저 일찍 가볼게.


 

이 안타까운 말을 들은 노안은 바에서 아이스 커피 한 잔을 집어 들고, 인간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지휘관: 앗 차거!

지휘관: 으악……



 


노안: 네가 방금 앉을 때만 해도, 돌아가면 잠을 못 잔다고 했잖아.


지휘관: 그건 그렇지만……


노안: 조금만 더 버티면, 수송기에 타서 잘 수 있어.

 


그가 건넨 커피를 받았다. 우리는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눴지만, 이어지는 폭풍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노안: 네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모든 방법을 써서 너를 찾으려고 했지만, 한양 소대는 여전히 활동 구역에 제한이 있어서 나갈 수 없었어. 그 정보를 알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경계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태도에는 명백한 근원이 있다고 확신해. 나중에, 네가 드디어 돌아왔을 때……나도 너에게서 진짜 이유를 들었어. 

 


청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짓는다. 

 


지휘관: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때, 네가 뭔가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네 행동에 특별히 주목했지. 아무리 그래도 지휘관 납치라니……


노안: 응, 미안해.


지휘관: 이러면 완전히 배신자로 몰릴 수 있다는 거 알잖아.


 

그는 조용히 대답하고, 인간의 목덜미에 상처가 남아 있던 곳으로 손을 뻗어 상처가 다 나았는지 확인하는 듯하다.

 


지휘관: 내가 증언하러 가는 것조차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거야?

지휘관: ……


 

사람들의 인상 속에서 노안은 무엇을 해도 화내지 않을 정도로 성격이 좋은 사람이다. 대다수는 그를 감시하는 게 불필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 무모한 행동이 한양 소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예상치 못하게 만들었다.

 


노안: 하지만, 나는 그가 반드시 다시 올 거라는 걸 알아. 그리고 이번에는 도망치게 내버려 둘 수 없어.

 


노안의 목소리는 매우 담담해서, 마치 평범한 임무를 말하는 것 같다.

 


지휘관: 베테에 관한 일, 시몬에게 말 안 했지.


노안: 해야 할 말은 했으니, 시몬 지휘관은 너에 관한 것과 나와 관련된 불필요한 건 말하지 않을 거야. 나는 단순히 그가 양보하는 경계를 어렴풋이 알 뿐이야. 일단 그가 이 일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내 행동은 그를 더욱 번거롭게 할 뿐이지.


지휘관: 그러니까……너는 어쨌든 가야 하는구나.

지휘관: 이 일을 고려하고 있다는 건 네가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 같네.


노안: 응. 어떤 사람들은 원래 살아있어서는 안 돼. 이왕 그가 반드시 온다고 하니, 내가 직접 하는 게 빠를 거야. 그리고 이건 내가 신경 쓰는 사람과 관련 있잖아.

 


그는 상처를 확인한 손을 거둔다.

 


지휘관: 그래도 네가 나와 상의했으면 좋겠어……


노안: 응. 약속할게. 그 후에 꼭……


지휘관: 차라리 지금 해.


노안: 좋아.

 


달빛은 물러가고, 하늘은 점점 칠흑같이 물든다――새벽이 다가오고 있다.


 



서로 빛나는 반딧불

같이 도망갈래? 쉴 수도 있고, 펑펑 울 수도 있는 곳으로 말야.

 


 


달은 완전히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아, 먼 하늘가에 아주 어두운 은빛을 입힌다. 노안은 손에 들고 있던 태엽 반딧불이를 감은 뒤 손에 쥐어, 동이 트기 전에 이 부드러운 빛이 어둠을 몰아내도록 한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귓속말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연다. 


 

 


노안: 어렸을 때, 나는 사람이 굉장히 많은 곳에 살았어. 침대는 엄청 가까이 붙어있어서 조건이 좋은 사람은 누더기 커튼을 쳐서 가렸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지. 그들은 누더기와 침대조차 없었어. 모두가 같은 장소에 몰려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자존심과 숨기고 싶은 수치심이 드러나……혹은 사랑과 성욕, 미움과 다툼, 도둑질, 강탈, 사고, 살인이……보고 싶든 아니든 간에 눈앞에서 일어나. 엄마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 속에서 울며 아이를 낳았고, 환자는 모두의 무시 속에서 신음했어.

 


노안이 한숨을 쉰다.


 

노안: ……너는 고슴도치의 딜레마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고슴도치는 겨울에 서로에게 기대어 온기를 나누고 싶은데, 몸에 가시가 있어 너무 가까이 붙으면 서로를 찌르게 되고, 또 너무 멀면 추위를 느끼게 돼. 사람도 마찬가지로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거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하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은 빼곡하게 모여 있어 사생활이라는 게 없고, 거리를 둘 수도 없었어. 이럴 때, ‘고슴도치’는 어떻게 하면 서로를 찌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내 선배들이 항상 말해줬어. 공통점을 추구하고 차이점은 남겨두라고 했지(求同存异). 나의 태도와 목표를 숨기는 거야. 이런 환경에서 나는 남들이 하기 싫은 말은 하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일을 무시하는 법을 배웠어. 만약 한 사람이 어떤 화제만을 이야기하길 원한다면, 나는 그와 함께 그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거지. 이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숨기길 원한다면, 난 눈치를 채더라도 못 본 거로 받아들여야 해.


 

그는 평소처럼 진지하게 앞에 있는 사람을 주시하고 있다. 반딧불이의 빛을 빌린 노안의 호박색 눈동자에는 무언가 어두운 감정이 배어 있는 듯하다.

 


노안: 나는 모든 것을 포용하며 욕심이 없는 성인이 아니야. 나 역시 만인 만사에 관심이 있고, 이를 반 발짝이라도 양보하고 싶지 않아. 이런 감정들을 얼굴에 내비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하지만 이것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어.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네가 많이 말해줬기 때문이야……. ……교환과 공유는 여행 상인들의 습관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지휘관: (고개를 끄덕인다)

지휘관: 그러면……


지휘관: 낮에 네가 날 처음 봤을 때 무슨 말을 하려던 게 맞구나?


노안: 응.


지휘관: 이제 알려줄 수 있어?


노안: 그렇게 중요한 말은 아니야. 그때는 그냥……네 머리카락이……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더 길어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어.


지휘관: ……

지휘관: 어, 진짜?


노안: 요즘은 어때? 잘 돼가?


지휘관: 괜찮아.

지휘관: 나도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노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변함없이 대화를 기다린다. 그러자 과거에도 그랬듯이 최근에 있었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하게 된다. 소소한 행복이든, 쳐다보기도 싫은 보고 문서든, 과중한 접대이든, 영문을 알 수 없는 조사 임무든 상관없다. 고민 말고도 기쁜 일도 많았고, 오랜만에 주문한 조그마한 선물도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바로 자주 가는 식당에서 새로 나온, 의외로 맛있는 요리이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전부 말했을 때, 하늘은 이미 희끗희끗해졌다. 그 역시 진지하게 모든 말을 다 들어주었고, 내 최근 경험에 대해 기뻐하거나 조금 슬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안: ……이렇게 많은 일을 겪었다니, 정말 고생 많았어.


지휘관: ……


 

노안과는 그다지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많이 지친 걸 보고 땡땡이치는 나를 받아들여 줬다. 그는 이 비밀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며, 타인의 상처를 비웃지도 않고, 이런 일들로 농담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물어보면, 그는 늘 일일이 말한다――

 


 


노안: 살아 있는 한, 모든 일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할 수는 없어. 당연히 슬프고 피하고 싶을 때가 있지.


 



하지만, 가끔 그가 나를 ‘영웅’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을 때 어떻게 생각했을지도 상상해본다.

 


지휘관: 노안, 네 눈에는 난 어떤 사람으로 보여?


노안: 응?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봐?


지휘관: (대강 설명한다)


노안: 남들이 부르는 것처럼――인류의 영웅, 보석처럼 찬란한 희망, 백전백승의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정도?


지휘관: 그리고?

지휘관: 그냥 ‘다른 사람’이라고 해줘.


노안: 갈림길에서 나를 찾아준……언제나 나를 믿고 옆에 서주길 바라는 사람.


지휘관: 전에도 이렇게 말했잖아. 

지휘관: 난 단순히 이런 걸 묻는 게 아니야……


노안: 그러면……답을 듣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저 들어봐. 


지휘관: 좋아.


노안: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원작으로 한 만화가 있는데, 원작과는 다르게 이 이야기 속의 공주는 요정의 축복을 받지 않아. 그녀를 둘러싼 요정들은 모두 인간의 가장이지만, 공주의 주변인들은 그녀가 진정한 축복을 받았다고 믿어. 그들은 그녀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여성으로 성장하기를 바라. 남들이 보기에 공주는 축복받은 운 좋은 놈이지. 하지만, 요정에게 축복받지 못한 공주가 어떻게 이런 지나친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까? 그녀는 밤낮없이 노력하며 공부하고, 인생에서 오는 본연의 즐거움을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어. 사람들은 그녀의 타고난 재능과 행운에 감탄했고, 그 성과들을 모두 당연하게 여겼어……. 아무도 그녀가 힘들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거야.


지휘관: …………


노안: 어쩌면 이게 바로 내가 본 너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 대답은 ‘그뿐만이 아니다’라는 거야. 인류의 영웅이자 희망이며 무적의 지휘관, 나를 믿고 내 편이 되어줄 사람뿐만이 아니야. 내 눈에 너는……평범한 한 사람이야. 상처받고, 지치고, 괴로워하는 사람. 자신이 아끼는 사람과 일을 위해,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여전히 발버둥 치는 사람. 난 이런 사람이 너무 좋아……. 내 생각에는 약점이 있는 사람이 더 진실해. 그리고 그 말은 내가 너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뜻인 것 같은데, 안 그래? 구조체든 인간이든, 고통에 무너지고, 울고 싶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어.



지휘관: 하지만 눈물은 아무도 구할 수 없어.


노안: 응. 예전에 우리 엄마도 나에게 이 말을 해줬는데, 그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하지만 눈물은 나 자신을 구할 수 있다’라고 꼭 한마디 하고 싶어. 이야기 속의 영웅들도 그들만의 후회가 있을 거야. 우리는 그저 인간일 뿐이니 너무 무리하지 마, 지휘관.



지휘관: 맞아. 누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겠어?


노안: 응. 해바라기는 햇빛이 들지 않는 밤에 고개를 숙이지. 이건 연약함이 아니라 마음이 아직 메마르지 않았다는 증거야. 괴로울 때는 언제든지 나에게 와도 돼. 그리고 우리 같이 도피하자……쉴 수도 있고, 펑펑 울어도 되는 곳으로. 나는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함께 있을게. 



지휘관: 응……

지휘관: 그러면 그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의 결말은 뭐야?

노안: 이야기 속 왕자는 마침내 성에서 공주를 깨워, 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했어. ……공주의 시간은 빠르게 ‘현재’로 돌아갔고, 그렇게 상대방의 품에서 죽었어.


지휘관: …………

지휘관: 이런 결말이라니……


노안: 그들의 시간은 대등하지 않았지만, 이야기 밖의 사람들은 현재를 소중히 여길 수 있어.


지휘관: 하지만, 나는 여전히……이곳에는 살기조차 힘든 사람도 많아. 나의 고민은 그들에 비하면 전혀 언급할 가치가 없어. 나는 적어도 고민의 시간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해.


노안: 상처받았는데도, 상처의 깊이에 따라 괴로워할 자격이 있는 거야? 이야기 속 일상과 평화 속에 사는 사람들조차 고민이 있어. 싫어하는 사람, 배려하기 어려운 인간관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 번거로운 일과 집안일……. 이런 일들은 모두 서서히 정신을 소모하고 피로하게 만들어. 긍정적인 일이 없었다면 평범한 일상만으로도 사람 하나가 무너질 수 있었을 거야. 이런데도 괴로워할 자격이 있는지 따져야 하는 건 너무 가혹해.


지휘관: ……응.

지휘관: ……


노안: 근데, 나도 알아……. 여기서 아직도 신경 쓰이는 일이 많으니까, 마음 놓고 쉬고 싶지 않은 거지?


지휘관: 응.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어.



지휘관: 이런 바쁜 일 사이에서 숨 돌릴 틈을 낼 방법이 없어.

지휘관: 어떻게 하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노안: 좋아하는 거 있어? 음식이라든가, 꽃이라든가, 이야기……혹은, 좋아하는 사람.


지휘관: (끄덕인다)

지휘관: 응.


노안: 사람들은 이를 위해 노력하고, 마음 놓고 쉴 수 없을 때면 상대에게 자신을 치유할 권리를 줘. 그러니까……힘들고 괴로울 때, 네가 좋아하는 것과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봐.


지휘관: ……



지휘관: 응, 걱정하지 마. 내가 그 사람들을 찾아갈게.


노안: ……응.


 

그는 동틀 무렵의 햇살 속에서 다소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털어놓고 싶은 말이 많다. 하지만 그의 허락을 받기 전까지는, 그는 이 감정들을 두 사람 사이의 한 걸음이라는 거리만큼 조심히 밀어 넣을 뿐이다.

 


노안: ……해가 떴네. 우리 돌아가자, 지휘관. 


지휘관: 내가 널 찾아가도 될까?


노안: ……당연하지.

 


노안은 일어서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한 걸음 더 넘어 다시 몸을 숙인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 3초의 기다림 끝에, 앞에 있는 사람이 밀쳐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제서야 그를 꽉 껴안는다. 이 순간, 지휘관은 귓가에서 마치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노안: 나 정말 기뻐……진짜로, 엄청 행복해.


 

동틀 무렵의 햇빛이 구름을 뚫고, 두 사람의 몸 위에 부드러운 금테를 두른다.

 


지휘관: 일출이야……

지휘관: 날이 밝았어.


지휘관: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


노안: 좀 더 있을래? 돌아가서 변명거리 하나 대고 대충 넘어가자.


지휘관: 좋아.

지휘관: 너무해.


노안: 기체의 문제가 해결되면, 같이 멀리 가지 않을래?


지휘관: 어디로?


노안: 엄청 많아……예전에 여행할 때 교환 상인으로 있었을 때랑, 운송대장을 하면서 가봤던 곳인데. 자연으로 뒤덮인 폐허에 있는 꽃바다, 모닥불을 피우는 거점, 아직 오염되지 않은 강물……엉망진창이 된 세상에는, 아직도 미련이 남을만한 풍경이 많아.


지휘관: 그러면 약속할게.


노안: 꼭이야. 말 돌리기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