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급 공중정원.


PM: 14:00.



오늘은 언제나와 같은 날이었다. 모처럼 지상 임무에서 복귀한 나는, 리브가 타준 커피를 마시며 서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른 때와 같다면 루시아나 리브, 리, 카무이나 크롬 등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주 작전을 진행하는 구조체 대원과 함께 있겠지만 오늘은 고요했다. 루시아는 훈련실에 있었고, 리브는 안정을 취하고 있었으며, 리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카무이와 크롬도 임무에 나갔고 의외의 다른 소대의 대원들도 찾아올 용무가 없었으니 모처럼 지휘관실은 쉴 새 없이 눌리는 타자소리와, 내 숨소리, 시계 타이머 소리 외에는 적막에 싸여 있었다.


"아이구. 목이야..."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서류 작업에 몰두했다. 그 탓에 목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나는 한 손을 목에 대고 고개를 돌려 스트레칭을 하는 한편 기지개를 펴 잠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뉘였다.


그 때 별안간 지휘관실의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세리카가 산더미만한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지휘관님. 오늘도 정시 퇴근은 그르신 것 같은데요?"


그녀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소악마 같은 미소를 짓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키득 거리며 날 바라보았다. 그 짓궂은 미소는 나의 벙찐 표정을 보자 더욱 더 번졌고, 나는 불만스러운 소리로 끄응 거리며 눈을 못마땅하게 굴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지휘관님. 제가 마치 어린애 괴롭히는 누나가 된 기분이잖아요. 프흐흐."


그 말에 기가 찬 나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고 어이없단 듯이 피식 웃은 뒤 이리 대답했다.


"나 원 참. 누가 누구더러 어린애라는거야? 이렇게 날 놀려먹는 건 세리카 뿐일껄."


그러나 그녀는 되려 이렇게 답하며 평소처럼 능글맞고 얄궂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귀여우시기는. 그럼 잘 부탁드릴께요! 그레이 레이븐, 화이팅~!"


거기다가 한 술 더 떠서 반은 놀림 가득한 응원구호를 외치는 세리카. 이 상황이 어이없고 한 편으로는 알미로웠으나, 나는 결국 추가된 서류를 결재하기 위해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시던 커피는 차게 식고 태양은 서산을 넘었다. 서류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루시아는 비앙카, 카레니나랑 훈련을 하던 도중, 카레니나의 도전을 받고 계속 막상막하로 대련을 이어하고 있었다. 리브는 잠시 왔었으나 의식 이탈로 인한 온통이 유별날 정도로 심해져 결국 히포크라테스 교수에 의해 생명의 별 안정실에 누워있었다.


리는 여전히 대기 중이었다. 그나마, 지루함에 거의 미칠 것 같던 나를 잠시 환기시켜 준 건 노안이었다. 그는 내 눈 상태를 잠시 보더니, 또 무리한다며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너란 사람은 정말이지. 지휘관. 그렇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꼭 리브같은 소리를 하네. 노안."


서류작업에 지쳐서인지 노안이 한 그 말이 꼭 리브가 하는 잔소리가 떠오른 한편, 입에서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는 웃을 일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리브가 아니더라도, 지휘관이 무리하는 걸 아는 모두가 그러지 않아?"


"그래. 그치만 뭐 어쩌겠어? 오늘은 아무래도 이곳에서 나가긴 그른 것 같아."


노안에게 답하며 책상 위에 남은 서류를 보니, 정시 퇴근은 고사하고 야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많은 서류들이 산맥 처럼 책상 위를 뒤덮고 있었다. 그 서류 중 대부분은 각 세력의 외교와 관련되어 있거나 리의 새 기체에 대한 정보 보고서, 지상 임무의 상세한 보고서 등이었다. 


쓴웃음 짓는 내 어깨를, 노안이 두드리면서 뭔가를 건넸다.


"자. 이거라도 받아. 오는 길에 들러서 산 쿠키야. 당 보충은 뇌 활동에 도움이 될테니까."


그 뒤 노안은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애초에 아직 상부의 감시를 받는 그가 너무 오래 지정된 자리를 비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에 기대조차 안 했지만, 그의 마음이 담긴 쿠키를 뜯어 입에 넣고, 나는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서류는 아직도 한참 남았지만 나는 미처 그것을 다 하지 못하고 의자에 기댄 채 거의 눕다시피 늘어져 있었다. 며칠 사이 무리했는지 안구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지그시 누르며 풀어주는 한편 계속 깜빡였으나,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혹사당한 눈은 계속 불평을 늘어놓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기에 다는 서류 작업 재개를 위해 컴퓨터 앞에 몸을 가져다대었다. 그때였다. 지휘관실 앞으로 한 통의 동봉된 우편과 함께 메일이 와 있다는 알림이 눈에 잡혔다.


그것은 아이라의 메일이었다.


"음? 이상하군. 아이라가 내게 우편을 보내다니. 지금쯤 지상에서 작전을 진행하고 있을텐데. 무슨 일이지?"



별안간 호기심이 일어 동봉한 우편을 열었다. 곧 내 눈앞에 보랏빛 제비붓꽃이 박혀 있는 푸른 바다빛의 파란 호박석이 드러났다.


그 순간, 나는 잊고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호기심 많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천진난만한 소녀와 주고 받던 수많은 펜팔들.


그것에 동봉되어 있던 아름다운 제비붓꽃과 반듯하고 예쁜 인쇄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되뇌였다.


 오늘은 세레나,



그녀의 생일이었다.



나는 잠시 서류작업은 제쳐두고 아이라의 메일을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지휘관님. 예술 협회의 아이라입니다! 


얼마 전, 지휘관님이 도와주셔서 잡아낸 고래의 노래 신호 내용은 이미 분석이 완료됐어요. 원래, 바로 결과를 보여드리려 했어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오늘까지 기다리는게 좋을 것 같아서 이 편지와 함께 보내드렸어요.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오늘은 세레나의 기동일이에요. 구조체가 되기로 결정하고, "진실"을 목격하러 가는 여정을 시작한 날이죠. 오늘에 대한 제 감정은 조금 복잡하지만...이 이야기는 다음 만남에 나누도록 하죠.


이곳 유적지에서 지상 탐색을 하던 도중, 고래의 노래 신호가 발생한 곳에세 한 조각의 파란 호박석을 발견했어요. 이것이 숲 속의 한 공터 위에 놓여있었는데, 아마도 세레나가 남긴 흔적일 것으로 생각했어요.


이 호박석을 오늘 지휘관님께 전달하고 싶어요. 어디에서 온 직감인진 모르겠지만 이것을 받아주세요.


마지막으로 이 편지의 끝맺음에서 조금 자리를 빌려 올해도 전하지 못한 말을 세레나에게 하고 싶어요.


기동일 축하해. 세레나!***



아이라의 편지에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나에 대한 감사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친구를 저버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를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라의 메일을 읽으며 지난번 예술 협회에서 연극 로봇인 햄릿에 보관된, 그녀가 각색한 세레나의 작품인 신서망향을 해독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아이라는 그때 "고래의 노래"를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했고 나 또한 그랬다.



 그 기쁨은 머지않아 그리움과 회상으로 변했다. 특히나 오늘처럼 다른 이들이 일정에 바빠 홀로 있어야 하는 날은 더욱 그렇고, 우연히도 지금이 그녀의 편지를 자주 읽던 시간대인지라 세레나에 대한 감정은 더욱 강해졌다.



 한쪽에 뭍어두던 기억을 되감으며, 나는 눈을 돌려서 아름다운 은하수가 드리워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세레나 또한 그 아이리스 빛 눈망울로 필히 이 광경을 담고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별안간 떠오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나는 아직 잠들지 않았을, 아이라에게 메일을 이와 같이 보냈다.



***아이라, 늦은 밤에 연락해서 미안해. 혹시 고래의 노래의 다음 행선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겠어?***




몇 분 후, 지구.




한 흑단같이 긴 머리칼의 소녀가 첼로와 현을 든 채로 끝없는 천리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은하수로 수놓은 밤하늘 아래에서 파랗게 자란 수풀 바다를 지나가며 풀벌레들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리스 빛 눈망울에 밤하늘을 담으며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소녀의 눈망울에 커다란 별똥별이 비쳐졌다. 그녀는 그것에 이끌린 듯 자리에 멈춰서, 서서히 커져가는 그것을 보았다. 언뜻 별똥별을 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단 얘기가 떠오른 그녀는, 잠시 첼로와 현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아 별똥별을 향해 소원을 빌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 별똥별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점차 환한 빛을 내며 커지더니 그녀의 머리 위를 지나치고, 바람을 일으키며 넓은 들판에 떨어졌다. 곧 지상에 크레이터가 파이고 잔디밭이 뒤로 쓰러지며, 거센 바람이 소녀의 치맛자락과 머리칼을 난폭히 휘날렸다. 그녀는 그 충격에 비틀거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떨어진 별똥별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강해지는 걸 느꼈다. 곧 소녀는 천진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떨어진 그것을 향해 조심조심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 그 별똥별인줄 알았던 그것을 보게 된 소녀는 그것이 공중정원의 구식 물자 보급함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왜 그게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쳐 가까운 떨어진 것일까? 그녀는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지만 뭔가에 이끌려 그것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제비붓꽃을 달은 아름다운 머리핀과, 한 통의 편지였다. 달빛을 받아 더 아름답게 빛나는 머릿핀은, 은빛 몸테에 탐스런 꽃망울을 달고 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소녀는 이유모를 기쁨에 자신의 머리에 달아보았다. 그리고, 편지를 열어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그곳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단단하고 강건하며 올곧은 필체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비록 우리의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언제까지고 함께야. 생일 축하해. 세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