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치의 땅도 버리지 않고, 한 치의 땅일지라도 지킬 것이며, 희망의 불씨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소중한 한 분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는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학생이었고, 모두가 가장 신뢰할 수 있던 전우이며, 망각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년 동안의 수색은 여전히 좋은 소식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찾은 것은 기체 잔해와 동포의 시신 몇 구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감스럽게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리더...와타나베는...

영원히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허나...



발라드

우리의 항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항쟁은 당연히 계속됩니다, 항쟁은 항상 그래왔습니다.

한 사람이 떠나면, 승리가 달성될 때까지, 우리가 우리의 것을 쟁취할 때까지 다른 사람이 이어받을 것입니다.


기념비 아래 발라드의 낮고 숙연한 목소리가 참석자들의 기분을 한껏 고조시켰다.


발라드

제가 와타나베를 처음 알았을 때는 아직 퍼니싱이 창궐하지 않은 황금시대였습니다. 그도 그저 아이일 뿐이었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이일 뿐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미래가 어떻게 될지,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될지 아직 생각을 못 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가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고, 더 이상 황금시대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재난을 이겨내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의 어머니가 희생된 후, 퍼니싱 사태가 발발한 이후 원래 꿈을 버리고 병사가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죠.

병사, 구조체, 리더? 아니오, 이것들은 와타나베가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닙니다.

그는 저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인 즉...



새까만 구름은 번개에 찢겨졌고, 찢어진 상처 틈으로 오랫동안 쌓여왔던 폭우가 빗발쳤다.

빗물이 모든 사람을 덮쳐 옷과 머리를 적셨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고,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발라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 약자를 지켜주는 사람! 부조리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와타나베는 항쟁 중에 죽었고, 그는 그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었고, 그는 그 최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천둥소리는 발라드의 우렁찬 목소리를 가릴 수 없었고, 빗물은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 분노를 꺼뜨릴 수 없었다.


발라드

와타나베가 우리를 이끌고 이 항쟁을 시작하였고,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는 정의를 이 세상에 되돌렸고, 모든 생존자들에게 이 황폐한 땅에서 단지 서로를 속이고,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서로 돕고, 우애와 함께 난관을 헤쳐나가며, 여전히 이 폐허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한 치의 땅도 버리지 않고, 한 치의 땅일지라도 지킬 것이며, 희망의 불씨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공중정원의 탈영병들은 와타나베의 육신을 없애면 이 불씨를 꺼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던가요?


발라드는 주먹을 가슴에 꽉 쥐었습니다.


발라드

그들은 틀렸습니다! 이 불길은 희생으로 인해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영혼은 장작이 되어 이 불을 더욱 강하게 태울 것입니다. 억압으로 인해 무감각해진 동포들을 따뜻하게 깨우는 것입니다.

공중정원은 무력진압으로 저항의 불길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하던가요?

그들은 또 틀렸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유혈의 희생을 두려워한 적이 없는데, 그 탈영병들의 위협이 어떻게 우리의 족쇄를 깨뜨리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싸우는 자들을 존중하나, 공중정원은 여전히 그 전사들을 억압하고 있으니, 인심을 얻지 못하는 정권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높은 단상에 오른 발라드의 시선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을 쓸어내렸다.


발라드

저항은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살아있던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본디 망각자에 속할 지역을 해방시켰는데, 여기서 그쳐야 합니까?

이 기념비를 바라봅시다. 황금시대에는 통일을 기념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희생된 지도자와 동포들을 추모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까?

아니!

가장 훌륭한 기념 방법은, 그들이 이루지 못한 일을 완수하고, 그들이 보고자 했던 미래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발라드는 팔을 들어 떨어지는 빗물을 깨뜨렸고, 격앙된 목소리가 기념광장을 가득 메웠다.


발라드

동포 여러분, 지금도 보육구역에는 억압받는 영혼들이 해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 추모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망각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며, 믿을 만한 전우들이 전선을 지키며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추모제는 단순한 추억의 행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동원입니다!

우리의 희생을 전진의 동력으로 바꾸어, 썩은 억압의 족쇄를 깨뜨리도록 합시다!

공리를 세계에 돌려놓고! 모든 이들에게 존엄을 돌려줍시다!

이 항쟁은 쌍방 모두에게 두 가지 결과...승리 혹은 죽음뿐만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만약 굳이 우리에게 결과를 선택할 기회가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기필코 승리할 것입니다, 완전한 승리 말입니다!



망각자들

승리! 승리! 승리!


말이 떨어지면서 귀청을 찢을 듯한 환호성이 하늘가에 울려 퍼졌고, 먹구름도 이 파도에 부서질 것만 같았다.

발라드가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폭우는 여전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속될 것 같았다.



발라드

(또 이런 날씨인가...)



세계 정부 국립묘지

4:00PM



?

츠루코, 또 당신을 보러 왔어요.


남자는 들고 있는 꽃다발을 묘비 앞에 헌화했고, 연한 푸른 눈동자에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모습이 비치는 듯했다.

묘비의 양식은 이름, 생몰년과 같은 짧은 정보와 함께 묘비명 한 줄로 간결하게 적혀있었다.

그녀는 전란과 함께 이곳에 영면하여 평화를 세상에 선물했다.


?

와타나베, 어머니에게 꽃다발을 드리렴.



와타나베

네, 아버지.


소년은 손에 든 꽃다발을 묘비 앞에 놓았고,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묘비의 낙엽을 닦아냈다.


???

신과 와타나베, 이미 도착했군. 이번에는 내가 늦게 온 것 같구나.


큰 형체가 오솔길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와타나베에게 있어서, 많이 모이는 부모님 뻘 사람 중에서 가장 잘 알고 신뢰하는 사람을 고르자면, 그 사람은 발라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게는 가혹한 요구로 자신을 훈련시킬 때도 있지만, 그 몸짓과 카리스마는 와타나베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와타나베

발라드 삼촌!


발라드

교관님이라고 불러야 된다.

하지만 오늘이라면 예외일 수 있겠지.


발라드는 손에 든 꽃다발을 묘비 앞에 놓았고, 그제서야 그는 자신 외에도 다른 위로의 꽃다발이 묘비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발라드

이 꽃다발은?


그는 증거를 찾는 눈빛으로 신을 바라보았다.


한스 선생님의 것입니다...묘지 관리인에 따르면 사실 그분도 매년 오시는데, 우리와 일부러 어긋난 때에 왔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발라드

너와 츠루코 모두 그가 가장 총애하던 학생이었지. 자네를 알게 된 것도 그의 소개 덕분이기도 하고.

종전을 앞뒀을 때, 그런 오판이 벌어지는 바람에 츠루코가 있던 대열이 전멸하였다.

아마 이 일에 대한 회한에 그는 아직도 시달리고 있을테지.


전쟁은 그런 것이지요...책임자를 찾는다고 한들 가라앉힐 수 있는 상처도 아니고, 전쟁으로 찢어진 상처는 평화로 다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사실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아마 평생을 싸워왔던 본인으로서 오점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마침내 평화를 얻었고, 상처를 아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습니다.


발라드

...


어째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것 같군요?


발라드

실은...


잠시만요, 보안 정보국의 기밀 사항이라면 듣지 않겠습니다.


발라드

기밀 사항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아놀드가 의장과 다툰 소리는 아래층 환경 보호 및 보건 부서에서도 들렸을 테니까.

아마 우주군인 당신네들은 이 소식을 들어보지 못한 듯 하군.


발라드는 드물게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듯한 어조였다.


당신이 아놀드 중장님을 언급할 때마다 이러시는 것 같습니다. 그는 결국 당신의 상사이지만, 당신은 그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발라드

그가 보안 정보국에서 이룬 공적은 존경스럽지만, 거기까지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무실에서 청어 통조림을 버젓이 열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할 수 없어. 설령 그가 나중에 단지 한스나 트릴드 의장과 농담을 나눈 것이라고 설명하더라도 말이지.

에휴...내가 지난번에 자네에게 말한 군사지출 6차 감축 제안 기억하나?


우주군의 예산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육군 쪽에서 심하게 삭감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최종 공동헌장 개정 이후, 각국은 군사지휘권의 대부분을 축소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구상에 더 이상 대비할 외적이 없으며, 국가 체격을 가상 적으로 하는 군대를 그렇게 많이 유지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요.

매년 이런 제안이 통과되는데, 올해는 끝까지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발라드

반대라기보다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정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 어떤 의미로는 이미 군비 삭감 계획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야.

트릴드 의장은 의회에서 "고용제"를 제안하면서, 일부 군대를 고용 가능한 단위로 분류했다.


만약 이 안건이 통과된다면……



??

이 안이 통과되면 재벌과 경제체들은 세계 정부의 무력기관에 손을 댈 기회를 갖게 된다.

트릴드, 당신의 이번 제안은 도대체 또 무슨 속셈이지?


트릴드

한스? 당신 오늘 성묘가는 줄 알았는데.


한스

아침에 미리 갔다 왔네. 오후에 이 "세계정부 상임회의"가 있으니까 말이야.

자, 새 안경이다. 오는 길에 당신 비서를 만나 겸사겸사 챙겨왔지.


지휘복을 입은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안경을 건넸다.


트릴드

마침 이게 필요했거든.


상대방은 반파된 낡은 안경을 벗었다.



트릴드

휴...오면서 별 생각은 없었다만, 이제야 계단이 잘 보이는구만.

아놀드...화풀이라곤 하다만 펀치는 너무 잔인하잖아.

보통 그 사람이 프로젝션으로만 참석하는 상임회의를 특별히 골랐것만, 이번에는 평소랑 다르게 직접 참석할 줄은 몰랐지.

"사냥개"라고 불리는 안전정보국장답게 후각이 정말 예리하단 말이야.


한스

자업자득이다. 아놀드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지 않나.

이렇게 정정당당하게 그들에게 완전히 편향된 안건을 제출하다니…보안 요청이 빨라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으면 안경만 깨지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트릴드

의장으로서 멍을 뒤집어쓰고 아침뉴스에 나올 수 없는 노릇이니, 의료 컨소시엄에 예약해서 붓기를 빼야 하겠구만.

먼저 가보겠네.


한스

멈춰, 내 질문을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지 마.

여기 다른 사람은 없다. 당신의 그 소심한 생각을 가능한 한 말해 보라고, 늙은 여우.

연합정부 수립 이전부터 우리는 함께 일해왔고, 당신이 종이 위에 끄적인 것이 결코 자신의 진정한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트릴드

그럼 왜 꼬치꼬치 캐묻는 건데...

사실 너무 깊은 이유도 없지만, 우리는 돈이 많이 필요하잖아. 많은 돈 말이야.


초대 세계정부 의장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난처함을 피하려는 듯, 통일을 기념해 만든 거대한 조형물을 돌아보았다.



트릴드

산업의 침체, 신념의 동요, 전쟁의 수렁.

이 셋 중 어느 하나가 등장하면 통합의 국면에 균열이 생길 수 있지.

세계 정부가 싣고 있는 것은 '전 인류'라는 큰 호수인데, 어떠한 작은 균열조차 이 댐을 붕괴시킬 수 있어.

도미니크와 과학 이사회는 신념의 문제를 해결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두뇌들이 모여 인류를 위한 기적을 하나씩 이뤄낼 때, 그들이 제시한 이념의 방향은 강철처럼 흔들리지 않을 거야.

십수 년 간 군부의 평화적 행동 끝에 극단주의 사상과 극단주의자들은 파괴의 수단과 생존의 토양을 완전히 잃었고, 이는 우리를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게 했지.

그렇지만 한스, 우리는 이념과 힘을 통일했지만, 아직 자원은 통일하지 못했잖아.


공 모양의 조형물이 트릴드의 눈에 비쳤고, 그는 그것이 반사하는 자신의 작은 형체를 볼 수 있었다.

조각 아래 기념비에는 평화행동을 위해 희생한 모든 열사의 이름, 그리고 하단에 새겨진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다.




만인을 위한 세상



트릴드

대부분의 자원은 여전히 소수의 손에 있으며, 이 사람들은 신념에 흔들리지 않아.

그들은 기사소설에서 보물을 지키던 살찐 용처럼 ,황금과 마노가 쌓인 산에서 잠을 자면서 우리가 언제 그들의 동굴에 침입해 보물을 약탈할까 걱정하고 있지.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무력을 행사해서는 안 돼.


한스

그래서, 당신은 이익 교환을 선택한 건가?


트릴드

그들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밧줄을 팔 수도 있어. 큰 선물이라면 당연히 또 다른 값을 치르게 되는 거지.


한스

당신의 지금 표정은 그 그룹 대표들이 당신의 제안을 들었을 때의 모습과 똑같군.


트릴드

그들의 악취와 코드가 맞는 사람만이 이런 일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거지.

도미니크와 그의 과학자들은 신념을 안정시켰어. 당신과 당신네 군대는 전쟁을 해결했으니, 이제 나머지 땔나무, 기름, 소금, 강철, 구리는 나 같은 속물들이 해결하겠네.

"영점 에너지 프로젝트"이든 "에덴 프로젝트"이든 간에, 통일된 자원 없이는 아무것도 추진할 수 없어.


한스

당신의 이번 교환은 호랑이를 풀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단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 팽창하고 세계 정부와 싸울 자본을 마련하게 된다면, 그들은 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할 뿐이다.


트릴드

하지만 호랑이를 잘 써먹는다면 복고양이에 다름없으니, 나도 당연히 그들을 위한 쇠사슬을 준비했거든.

우선 군대에서 고용제를 실시했지만, 징집과 훈련 자격은 여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고용군의 규모는 통제 불능이 되지 않아.

그들이 법에 저촉되는 위험을 무릅쓰기를 원하지 않는 한……설령 그렇다고 해도, 오롯이 그림자 속에서만 행동하고, 밤낮이 지켜지지 않는 그런 생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발을 들이고 싶어 할까?

둘째, 고용제도의 적용 대상은 육군과 일부 육군의 부대장비에 한정시켜 육지에 침투할 수 있는 병력을 확실하게 고정시킬 거야.

이 단일 전력은 육해공으로 구성된 완전한 4차원 타격 시스템에서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지.


한스

그들이 이 점은 예상하지 못했겠군. 그럼 이러한 제안의 요점은 무엇이지?

그리고 당신의 억제 방안은 단지 이상적인 환경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렇겠지만, 만약 중간 집행자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사슬은 그 역할을 잃게 될 거라고.


트릴드

이 점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어. 원체 오랫동안 실험할 계획은 아니야.

게다가 군대를 고용하기로 한 그들의 선택은 우리를 가상의 적으로 간주할 만한 것이 아니지.

그들이 세계 정부라는 '외적'을 단기간에 해결하거나 타락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당연히 내부로 화살을 돌릴 거야.

연못에 갇힌 물고기는 결국 삼켜지고 점령당하게 되는데, 이는 그들 자신의 작동 논리에 의해 결정될 뿐, 개인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지.

그들이 서로를 잠식하는 동안, 우리는 지구 중력장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행성으로 향하는 식민부대를 조직하기에 충분하다고.

머지않아 우주의 광활한 공간에 있는 자원은 인간의 손에 닿을 수 있는 것이 될 거야.

그때가 되면 그들이 손에 꼭 쥔 동전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려나?


트릴드의 얼굴에 희한한 광기가 나타났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을 뚫고 저 끝없는 별하늘에 시선을 던지려는 듯했다.


한스

에덴 Type-1 검증을 절반 앞당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나?

10년 임기 내에 영점 에너지 프로젝트와 에덴 프로젝트를 동시에 완성하고 싶은 건가?


트릴드

당신도 나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구만, 아직 그 정도까지는 욕심내지 못했어.


한스

그다지 급진적인 것은 아닌 걸 보아하니 아직 야심에 현혹되진 않았나 보군.


트릴드

그러니까 재선을 노려야 해.


한스

...


트릴드

한스, 어떤 정치인도 인류를 지구 밖으로 인도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어. 나도 예외는 아니야.

그리고 나도 늙어서 세계 정부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이는 일을 하고 싶어.


한스

그리고 당신도 역사에 남을 공적을 남길 수 있을 테니까?


트릴드

나 같은 속인에게 있어 정말 날카로운 평가구만...

이것이 단순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 난 항상 세계 정부를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었지.


한스

만약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동전을 포기하고 우주에 판돈을 걸기로 결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트릴드

그들도 우주를 목표로 삼고 별에 착륙한다면…


트릴드가 몸을 돌리자, 햇빛이 공 모양의 조형물을 통해 그에게 비추었다.

하늘의 거대한 불덩어리를 끌어안으려는 듯이 팔을 벌리고, 눈앞에 펼쳐진 온 세상을 끌어안으려는 듯했다.



트릴드

그럼 결국 같은 뜻을 지닌 동료라는 건데, 내가 왜 굳이 그 사람들을 음해하려고 하겠나?



신과 발라드는 여전히 그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을 주고받았고, 남자아이의 생각은 점점 멀어져갔다.

어머니의 묘비 아래에 시신은 없었다. 그 처절한 공방전에서 극단주의자들은 아직 불안정한 열용포를 사용했고, 통제 불능의 폭발로 정부군과 함께 잿더미로 변했다.

직경 400m의 깊은 구덩이에서는 인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녹은 쇳물과 점차 냉각되어 결정화된 암석만이 발견되었다.

폭발로 인해 발생한 스모그는 도시 전체를 뒤덮었고, 일주일 내내 지속된 후에야 모두 지상으로 떨어졌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으로 희생자들이 흙먼지로 돌아가는 날이었을지 모른다.

인류에게는 전쟁과 혼란의 마지막 날이지만, 희생자 가족에게는 슬픔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와타나베

어째서야? 그런 위험한 임무에...엄마가 굳이...?


비록 직접 보진 못했지만, 현장의 처참한 사진과 방송국에서 반복해서 내보낸 보도를 통해 와타나베도 연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만 같았고….…

폭발하는 순간, 인체는 어떻게 산산조각이 났을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었고, 그때마다 와타나베의 위는 경련을 금치 못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다친 사람을 볼 때마다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눈앞에서 생생한 상처를 목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 떠나지 않는 죽음의 환각때문이었다.

와타나베는 이미 이곳에 없는 어머니를 향해 몇 번이나 의문을 제기했다.

언제나 똑같은 의문이었지만, 아버지를 슬프게 할까 봐 감히 아버지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발라드라면 좋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상대방이 자신을 무른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지 않을까?

조숙한 남자 아이의 마음속에는 너무 많은 근심과 걱정이 있어서 그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어려웠다.



【내 생각엔...】


낯선 젊은이가 와타나베의 시야에 난입했다.


【이것은 그녀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기 때문이었어】


상대방은 추모의 꽃다발을 묘비 앞에 살짝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며 묵념했다.

신과 같은 군인인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제복을 입고 있었다.


와타나베

책임?

어머니이자 아내로써 있는 것은 책임이 아니야?


첫 만남이었지만 와타나베는 앞사람에게 뭔가 익숙한 데자뷰를 느꼈다.

마땅히 들어야 할 경계심도 내려놓았고, 그는 뒤척이며 납득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와타나베

세상에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많은 군인들이 있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녀가 유일한 아내이고, 나에게는 그녀가 유일한 어머니였어.

설마 우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거야?


【그녀는 당신들을 마음 한 켠으로 치운 적이 없었어】

【너도 그녀의 신념의 원천이야】

【너는 앞으로도 같은 선택에 직면하게 될 거야】


와타나베

그럼 난 절대 어머니처럼 텅 빈 비석만 남기지 않을 거야.


【아니야, 그녀는 이미 남겼어...】


물방울이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가 젊은 군인들의 말을 끊었다.



궂은비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은 마치 사내아이의 걱정스러운 마음과도 같다.


와타나베, 이제 가야 돼.


아버지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고, 어느 순간 발라드와 그는 묘지 출구에 있었다.


와타나베

네.


와타나베는 외투를 벗고 점점 커지는 비를 막으며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그는 고개를 돌리자 그 이상한 젊은이가 다음 묘비까지 가서 또 다른 추모의 꽃다발을 헌화한 것을 발견했다.

희미한 빗줄기 속에서 그는 방패와 날개로 이루어진 로고가 상대방의 망토에 찍혀 있는 것을 어렴풋이 보았다.


발라드

와타나베, 뭘 꾸물거리는 거냐?


와타나베

갑니다.


비가 점점 더 많이 내리자 와타나베는 코트 아래로 몸을 웅크리고 출구를 향해 달려가야 했다.



비의 장막 속에 그 젊은 장교의 모습은 마치 바다 위의 등대처럼 묘비로 이루어진 암초에 둘러싸여 있었다.

외롭고, 굳건하게.






퍼니싱 사태로부터

D-2900









바빠서 예전처럼 빨리 못올릴 것 같은데 번토라레 해도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