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구조체 수술을 했을 때,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미한 숨소리. 공기를 쓸어뱉는 가쁜 숨.

극심한 고통은 그에게서 비명을 지를 힘조차 빼앗아갔었다.


새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그 구조체는 흐릿한 눈으로 천장의 조명을 응시하고 있었다.

의사들의 손에는 메스와 같은 의료기구보다는 정비공에게 어울릴 장비들이 여럿 들려있었다.

나는 똑같이 하얀가운을 입고, 손에는 메스 대신 용접장비를 쥔 채로 그 구조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하얀 인공피부가 갈라지자 그 밑에 드러난 것은 횟빛의 강철.

따뜻하고 구불대는, 보기만해도 구역질이 나는 새빨간 장기 대신에 차갑고 단단한 강철만으로 이루어진 몸.


구조체는 100퍼센트 기계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으로서 남은 부분은 데이터로 이루어진 의식.


어렴풋하지만 실감하지 못한 사실.

나는 그 때가 되어서야 구조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쾌한 경보음이 연신 귓가를 두드린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조명과 하얀 가운들은 내 연약한 정신을 뒤흔들기는 충분했다.

명백한 불쾌감이 속에서부터 차오른다. 혐오감. 공포. 고통. 그런 감정들이 나를 휘감는다.


차가운 기계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게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마스크가 습기로 축축하게 젖어들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기분이다.

그 흐릿한 동공.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고통을 느끼는게 인간이 아닌 구조체라는 사실이 혐오스럽다.


사람을 닮은 거라면 침대 여기저기 흩뿌려진 붉은 액체일까?

그러나 이것 또한 닮았을 뿐이다. 피라기엔 묽고, 기름처럼 끈적하게 달라붙는 이 액체는 피가 아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나는 수리를 끝마칠 수 있었다.


순환액으로 끈적해진 가운을 벗었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게 한층 가벼워진 기분이다.


습기로 가득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새빨갛게 변한 장갑도 내던졌다.

거울은 없었지만 축축하게 젖어들어간 목 부근의 느낌을 보면 꽤 말이 아닐거라 생각한다.


힘없는 걸음걸이로 수술실을 나섰다.

뒤에 따라붙는 눈초리에는 많은 감정들이 실려있었다.


단연 많은 것은 짜증이었다. 그야 처음이라고 허둥지둥했으니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그리 어려운 수술은 아니었지만 꽤나 많은 난관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 사이에 깃든 감정은 동정, 공감, 그리고 애환.


생명의 별 밖으로 나가자마자 가슴을 꽉 채울 정도로 답답한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차가운 공기를 폐로 들이마시며 눈가를 감싸쥐었다.

그 상태로, 나는 한숨처럼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런건.... 내가 원했던게 아닌데."





+++++


잔잔한 곡조의 재즈가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에서는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말의 파문조차 일지 않은 탁한 수면에는 의사가운을 입지 않은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어머, 그래도 차려입으니 꽤나 볼만한데?"


당당한 목소리.

붉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맞은편에 앉아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뭔가, 멍한 기분이다.

수술실에서 살다시피 시간을 보내온게 문제였을까, 이런 잔잔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하는지 잘 몰랐다.


텅 빈 기분.

포화된 감정이 빠져나간 인형과도 같은 상태인채로, 나는 하루하루를 그렇게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저...."


"베라라고 불러."


"네, 베라씨."


그녀는 여전히 내가 커피잔을 바라보는 모습만 응시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숨결이 검은 커피에 닿자, 그 진원에서 원이 퍼져나가듯이 수면이 일렁였다.


베라, 그녀는 여전히 재미있다는 눈길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주변을 보면 이곳에서만큼은 모두가 행복한 얼굴로 담소를 나누고, 휴식을 취하고, 미소를 짓는다.

나는 어떻지? 나는 이곳에서 웃고있나?


"베라씨는, 그.... 이런 말이 실례라는 것은 알지만. 왜, 저를 선택하셨나요?"


"무슨 뜻이야?"


"그렇잖아요. 저, 그렇게 잘생긴 편도 아니고. 성격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베라 씨 정도면 저보다도 훨씬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설령 베라 씨가...."


"구조체라도?"


".....네."


다시금 대화의 맥이 끊겼다.

구조체. 그 단어가 목에 턱하고 걸린다.

계속해서 내 마음을 멤도는 단어였다.


일이 끝나고, 침대에 누워서도 나는 온통 구조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것들을 향한 무의미하고도 비열한 혐오를 품은 채로, 나는 무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딱히 너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진건 아닌데?"


"그러면....?"


"재밌어보였거든. 딱 처음 갔을 때부터, 네 표정을 보고나서 말이야."


베라, 그런 이름을 가진 구조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잔잔한 바이올린 소리가 특징이었던 재즈곡이 그 끝을 다했다. 다시금 카페의 스피커에서는 비슷한 느낌의 곡이 흘러나온다.

사람들은 그런 노래의 전환에 신경쓰지 않는다. 우리는 끝없이 어두운 별바다를 표류하고 있음에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재즈만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넌 왜 의사가 되었지?"


들려오는 질문.

약간은 오만하게 들리는 미성은 흘러나오는 음악에 섞여 부드러운 음을 내었다.


마음이 갈길을 찾지 못한 것과는 별개로, 항상 잔뜩 긴장해있던 몸만큼은 약간 이완된 상태였다.


"어렸을 때, 아는 군인이 있었어요."


"아주 강인하고, 책임감이 넘치시는 분이었죠. 대철수를 경험하신 분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구에 미련이 많으셨어요. 그 분은 시간이 날 때면 황금시대의 영광에 대해 이야기해주셨고, 그런 그 분의 눈에는 곧장 촉촉한 그리움이 깃들었어요. 어느 날은 구조체가 되셨는데, 제가 끙끙대며 못옮기던 이삿짐을 번쩍 들어 옮겨주시며 환하게 웃어보이셨지요."


"다시 지구로 가서, 퍼니싱을 해치우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런 강한 분도 어느날 크게 다쳐서는 붕대를 칭칭 감고 절 찾아왔어요. 저는 그 모습을 보고서,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사람을 돌보는 의사는 많잖아요? 그 분처럼 숭고한 의지를 갖춘 분이 다쳤는데도,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어요. 구조체니까. 사람의 배나되는 힘을 가진, 강철로 이루어진 육신을 지녔으니까. 부품만 갈아끼워도 나을 수 있는 상처일테니까. 구조체는 죽지 않을테니까."


"전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전 구조체를 고치고 싶었어요."



"생각했던거랑 달랐어?"



"....네."


그녀의 말은 단번에 내 심정을 꿰뚫었다.

무심코 흠칫하고 어깨를 떨 정도로,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나는 그녀의 미소를 자세히 관찰했다.

감정을 짚기 어려운 미소였다. 조소인듯, 미소인듯, 약간은 광소같기도 했다.


"구조체는 사람이 아닌걸까요?"


"사람이었지."


다시 침묵.

그녀는 더해보라는 듯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구조체가 두려운거야?"


나는 그 말에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까만 커피물만을 바라봤다.


"자리를 옮길까?"


그녀가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 또한 그녀를 따라 자리를 떴다.

계산은 내가 했다. 커피는 결국 입도 대지 못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차가운 공기와 음악의 부재에서 말미암은 정적이 내 주변을 감싼다.

나는 쌀쌀한 밤공기를 느끼며 앞으로 나아간다.


밤이라 해봤자 별것 아니었다.

공중정원에서 인공적으로 조정하는 광량. 조명이 많이 밝게 켜지면 낮, 반대면 밤.

공중정원에서 시간은 전적으로 인간이 관리하는 분야였다.


낮과 밤이라는 시간기준 또한 지구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지구에서는 태양빛이 닿지 못하는 지역을 밤, 반대편을 낮으로 정의했다.

24시간을 주기로 회전하는 지구는 나름대로 골고루 그 생명의 은총을 자신의 피부로 받아내고 있었다.


언젠가, 창밖으로 지구의 모습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매체에서 묘사하던 것처럼 푸른 별이라 불릴만큼 지구는 푸르고 하얀 구였다.


우리는 지구의 중력에 스스로를 의지한 채 궤도를 끊임없이 선회할 뿐이었다.

태양은 더 이상 시간의 기준이 아니었다. 한없이 밝은 빛을 흩뿌리는 태양은 지구의 공전축의 중심일 뿐이었다.



+++++


"언젠가 말이죠. 황금시대에 우주를 묘사한 단편소설을 본 적이 있어요."


커피와는 다르게, 술은 목구멍으로 그럴대로 넘어갔다.

베라 씨는 술잔을 잡은 채로 휘휘 돌려봤다.


붉은 액체가 유리잔의 표면을 따라 소용돌이 치듯 미끄러졌다.


타는 듯한 목넘김.

위장에 불붙은 기름이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취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을 순회하고 나면 조금 나아질 터였다.


꿀꺽.


"크으.... 거기서는 말이죠. 다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우주를 상상했다네요. 손을 뻗고, 언젠가는 저 바다를 항해해보고 싶다며..."


"웃기지 않나요? 그들은 별바다를 유람하는 일은 분명 멋질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주에서 보는 지구는 분명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고, 끝없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거대한 태양은 그 자체만으로 신과 같은 자태를 하고 있을거래요."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목재테이블에 고개를 쳐박고는 달아오른 몸을 차가운 테이블의 감촉으로 시키려 해봤다.


노랫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약간, 취한 걸지도 모른다. 조금은 씁쓸해진 목소리로 나는 말을 이어갔다.


"언젠가 이 태양계를 벗어나 은하를 여행하고, 외로운 우주에서 동반자를 찾을지도 모른다고, 끝없는 신비로 이루어진 우주를 탐험할 것이라고.... 웃기게도, 우리는 지구에서 쫓겨나서는 이렇게 집나간 강아지마냥 지구 주위를 빙빙돌고 있는데..."


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바를 채운 화려하되 은은한 조명과 한 모금 와인을 입에 담는 베라 씨가 보였다.


"감성적이네. 의사답지 않은걸?"


"하하.... 친구가 없으니까, 별로 말할 상대가 없는걸요."


"술도 별로 못하는 것 같고."



나는 대꾸하지 않은 채 이마를 테이블에 박았다.

어두운 시야 너머로 여러가지 소음이 귓가를 통과한다.


"베라 씨는, 왜 싸우나요? 구조체는... 무엇을 위해 싸우죠?"


"퍼니싱을 없애버리기 위해."


"퍼니싱을 없애고 싶은건... 어째서죠?"


"그것들이 우리로부터 지구를 빼앗았고, 우리는 그것들에게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있으니까."



"....우리. 우리인가요...?"


나는 아무의미없는 단어들을 중얼거렸다.

베라 씨는 술잔의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고급스러운 유리잔은 투명하면서도 자신을 향하는 빛을 굴절시켜 오묘한 형태로 우리의 눈에 나타났다.




"지구란거. 그렇게 가치있는건가요?"



술김에 나온 본심.

그건 분명 나조차도 모르는 내 마음이었다.


베라 씨는 이제 술잔 대신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페에서처럼 미소짓고 있지는 않았다. 아무런 표정없이, 그저 내 말을 듣겠다는 것처럼 있었다.


속이 뜨겁다.

정신은 몽롱하다.


한 번 튀어나온 본심은 아무런 브레이크도 없이 입을 통해 힘없이 흘러나왔다.



"그 소설과는 다르게. 우주에서 본 지구는 딱히 낭만적이지도 않아요. 우주는 춥고 거대한 어항일 뿐이에요. 은하는 물고기고 별들은 그 물고기의 세포쯤 되겠지만, 우리는 딱히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구는 그냥 하염없이 돌 뿐이고, 태양은 그 자리에서 빛나기만 할 뿐이에요. 공중정원은 애써 지구의 중력에 의지해 궤도를 만들어 스스로를 속박했죠."


"우리는 그냥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혔을 뿐이에요."



"그거, 엄청 위험한 말인건 알지?"



씁쓸한 기분.

술은 쓰지 않고 달았지만, 들이키면 들이킬수록 머리가 뜨거워졌다.


이러다가는 펑하고 터지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전에 내 속에 있는건 전부 풀어놓아봐야 하는건 아닐까?



"구조체를 치료하고, 구조체는 지구에 가고, 다시 다친 구조체를 치료하고, 그 구조체는 지구에 가고."


"이거, 악순환 아닌가요? 언젠가는 제 손을 잘라야하나 고민했어요. 이 손은 구조체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을 뿐이니까. 끔찍한 악순환에 묶여있을 뿐이니까. 포기했어요. 제 손으로 끝날 순환은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구조체를 치료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니에요. 그들은 영원히 쉬지 못해요. 그들은 쉴려면 죽어야만 해요. 나는 죽지 못한 구조체들을 복구해서 다시 사지로 내몰아요. 다시 그들이 다쳐서 생명의 별에 돌아오거나, 혹은 영원히 죽어버리거나 미래가 두 종류밖에 없다는걸 알아요. 구조체들은 다시 죽기 위해 살아나는 것 뿐이에요. 수많은 구조체들의 잔해를 바쳐서 저희가 얻은게 뭐죠?"


"조금 더 많은 침식체? 시체조차 돌려받지 못한 유가족? 높은 사람들의 이득?"


"전....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 지구는 그냥 행성이에요. 전 공중정원에서 태어났고, 평생을 이곳에서 자랐어요. 저에게 지구는 고향도 뭣도 아니에요. 밤에 보이는 하늘의 별빛이 그렇게 아름답나요?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일출이 그렇게 소중한가요?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풀잎의 감촉이 정말 그렇게 싱그러운가요?"


"그 모든 것들이 지금까지 죽어간 사람들의 목숨보다도 가치있나요?"



"네 말은, 그럼 결국 꼬리를 말고 도망치라는거야? 퍼니싱에게 우리는 패배했으니 지구를 바치겠다.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해달라는거야? 우린 패배자인채로 우주를 떠돌며 집이 되어줄 별을 찾으라고. 그렇게 말하는거니? 지금까지 죽어간 사람들이 참 안심하겠구나. 구차한 목숨이라도 부지해서 미아가 되었으니까."



베라는 곁을 흘긋 보았다.

고개는 테이블에 쳐박고 있었지만 귀는 물감이라도 칠한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네온사인으로 점철된 바의 조명. 어둡지만 다양한 색의 별들이 천장에 붙어있다.


더 이상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버릴거니?"



"그러니까.... 음... 우리는 퍼니싱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죠. 그런 노력을, 조금 더 많은 사람을 공중정원에 수용하는데 쓰지 않는걸까요. 우리는 왜 계속 이기려 하는걸까요."


"퍼니싱이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아니면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까요." 



정적.

분명한 정적이 바에 흘렀다.


베라는 남은 술을 털어넣듯이 목으로 넘겼다.

구조체는 먹을 필요도, 마실 필요도, 숨쉴 필요도 없었지만. 설령 그 모든 것들이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잔재라고 해도 멈추지 못하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수많은 '눈'들이 베라와 의사를 지켜보는 와중에, 베라는 가볍게 의사를 들쳐메고 바를 나섰다.

바의 문이 닫히고 불들이 꺼졌다. 모두가 잠든 시각, 밤은 아닌 시각에 베라는 걸음을 옮겼다.




눈이 떠지자, 어두운 방의 낯선 천장이 먼저 보였다.

당연히 집은 아니었다.


"일어났니?"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눈을 찡그리며, 그녀의 목소리를 쫓았다.


카펫에 떨어지는 물소리.

붉은 머리카락에서 묻어나오는 물기를 짜내며, 베라 씨는 그렇게 서있었다.


"여기는....?"


"호텔."


짧은 단답.

그녀는 그 단어에서 어떠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무심하게 머리의 물기를 말리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어렴풋이, 그녀와 함께 술을 마셨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차려입은 옷은 술기에 흐트러져서, 꽤나 보기싫은 꼴을 하고 있었다.


"구조체가 무섭니?"


"......"


"아니면, 그들이 싫어?"


"음식도 필요없어. 마실 필요도 없지. 숨조차 쉴 필요가 없어. 그런데도 힘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어. 어찌저찌 사람같은 인공피부 아래에는 근육도 뼈도 장기도 없이 차가운 강철과 그 위를 흐르는 순환액 뿐."


"공포. 질투. 멸시. 재밌지 않아? 인간 대신 전장에 나가는건 구조체인데. 구조체도 한 때 인간이었을텐데. 인간들은 직접 보지도 못한 피부 아래 강철을 짐작해서는 제멋대로 이상한 감정을 품지. 너도 그들과 같은 부류일까?"



베라가 한 발자국 다가갔다.

시커먼 머리카락은 평소에 정리하지 않다가 급하게 정리한 티가 났다.

옷은 여러 번 꺼내입지 않아 새것 같다. 그는 베라에게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최소한 그의 차림새는 그에게 있어 예의의 부분이었다.

베라에게 품은 감정은 전혀 호감에 가깝지 않다. 그렇다면 왜 그는 베라가 제멋대로 잡은 약속에 어울려주었을까.


베라는 어두운 방. 음악조차 흐르지 않은 정적 속에서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피로에 찌든 눈. 그것은 의사들이 으레 가지는 일종의 고질병이었다. 눈밑의 다크서클까지 함께하면 전형적인 과노동에 시달리는 직장인의 인상이었다.


그러나 다르다.


베라는 다시금 미소짓는다.

그의 앞까지 다가간 베라는 검지로 그의 턱을 치켜올린다.


구조체와 인간의 눈이 마주친다.

괴로워하는 의사. 베라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넌 구조체가 불쌍하지?"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왜 널 선택했냐고, 카페에서 물었지."


"네 눈만큼은 달랐어. 의사는 항상 피곤과 피로에 찌든 눈을 해. 그들의 고통은 인간의 몸으로 견디기 어려운 노동에서 와."


"너는 달라. 네 고통은 순수해. 보다 순수한, 오직 고통이 원인인 고통이지. 넌 하루하루가 의미없고, 어쩌면 그런 자신에게 싫증이 나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많은 하얀 가운들 속에서, 네 고통만큼은 내 눈에 들어올만큼 빛이 나."


베라는 천천히 그를 침대에 눕혔다.

의사는 의외로 구조체가 가볍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사람처럼. 무의식적으로 떨쳐내려던 생각처럼, 그는 애써 수술 때보던 수많은 구조체들의 내부구조를 떠올렸다.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 괴물.


무의식적으로 의사 자신은 구조체를 그렇게 생각하려 하고 있었다.



"너만은 진정으로 살아있어. 공중정원의 다른 시체들과는 다르게, 넌 순수한 고통을 느끼는 법을 알지. 누구보다 숭고한 흉터를 지닐 자격을 가지고 있어."


"구조체가 가여워? 이런 힘을 가지고, 너흴 위해 전장에 나서는 우리가? 넌 자신의 양심을 속이기 위해 그들을 경멸하려고 했지만, 사실은 알고있잖니. 넌 구조체 또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들이 사람처럼 다뤄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속이 뒤틀리지."



베라는 천천히 그 새하얀 손으로 의사의 눈을 덮었다.

새까만, 보석과 같은 고통이 담긴 그의 눈이 암흑 속에 잠겼다.


베라는 자신의 숨소리에 집중하는 의사를 본다.

그의 맥박, 심장소리를 느끼며 귀에 속삭였다.



"내 것이 돼."


"내가 너의 고통을 거둬갈게."


"더 이상 괴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돼. 너의 고통을 내게 넘겨."



남자는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숙취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온다.


이상야릇한 상황. 남자의 심장은 오히려 낮고 느리게 뛰었고, 그래서 더욱 선명하게 자신의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다.



구조체는 더 이상 심장이 뛰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람이 아닐까?


그들은 고통을 느낀다. 누군가가 그 고통을 꺼트려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끝없이 아파한다.


생각이 뒤죽박죽으로 섞여갔다.


"네가 마음에 들어. 넌 살아있는게 벅차잖니. 하루하루가 숨막히는 시간의 연속. 네 고통은 분명 순수해. 나는 그걸 알아. 그리고 그 고통이 네게 남길 수많은 성흔 또한 알고 있지."


"내 것이 된다면, 네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내가 그 고통을 거둬주지. 난 더욱 살아있다는걸 느끼고 싶거든. 네게 벅찬 그 고통이 내게는 심장을 뛰게 하는 힘이나 다름없어."


남자의 심장이 뛴다.

자신의 눈을 덮은 그 심장이 따뜻하게 느꼈다.


약간,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베라의 손이 살짝 젖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답은?"


처음으로 구조체 수술을 거쳤을 때, 그는 구조체의 흐릿한 동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온몸은 기계였고, 피 대신에 순환액이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눈은 분명 인간의 눈이었다.


고통에 지쳐, 안식을 원하는 인간의 눈이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속삭임과 같은 넋두리가, 베라에게만 들려왔다.




그렇게 우주를 유영하는 공중정원의 시간이 흐른다.

은밀한 비밀들이 오가는 시간대. 베라의 입꼬리가 뱀처럼 휘어졌다.





+++++


"저기.... 루시아 씨는 무얼 위해 싸우시나요?"


루시아는 상처부위를 감은 붕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조체는 질병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퍼니싱을 제외한 역병은 그들의 신체를 병들게 할 수 없었다.


루시아는 다친 부위를 살짝 움직여보며, 통각 모듈을 체크했다.


"미래를 위해 싸워요."


"미래요?"


"언젠가, 모든 전쟁이 끝난다면.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맞을 미래요. 저는 일출을 보고, 바다도 보고 싶어요.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싶고, 모두와 웃고 싶어요."


"저는 모두가 행복한 미래를 위해 싸워요. 그 미래에,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미소지을 수 있도록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워요."



의사는 루시아의 미소를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그는 치료가 끝났음을 알리며,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생명의 별을 나서는 구조체에게, 의례적일지는 몰라도 한 마디를 남겼다.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