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토독.


물방울이 탁한 웅덩이로 떨어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폐허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구조체가 희미한 소리에 눈을 떴다.

갈라진 건물의 틈새로는 새하얀 햇빛이 조심스레 새어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들어 소리의 진원을 찾았다.

구부러지고 녹슨 하수도에서, 미처 떨어지지 못한 물방울이 통로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구조체는 눈을 감고, 자신의 처지를 상기시켰다.



지휘관의 머리가 터져나가던 장면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토록 자신을 괴롭혀오던 지휘관. 매일 밤 잠에 들며 그를 살해할 방법을 수백가지나 세워봤지만, 정작 실행은 간단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방법이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반동을 버틸 수 없는 대 침식체용 권총의 총구는 연약하디 연약한 인간의 골통을 터트리기는 충분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휘관은 빈말로도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타인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남기지 않았던 사람이다. 침식체보다도 더 기계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작전은 가혹했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벼랑까지 몰아세우는 극한의 효율을 자랑했다.

실제로, 누군가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세컨드 플랜을 시행시킬 뿐이다.


그에게 모든 구조체들은 장기말이었다.

어쩌면 그 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류가 벼랑 끝까지 몰려있는 상황에서, 모두가 구조체의 권리나 심정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구조체가 된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자신이 인간임을 포기하겠다는 선서나 다름없었다.


허울뿐인 인권은 그 어떤 비인륜적인 작전으로부터 구조체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우리들은 죽을 때까지 전장에서 혹사당할 운명이었다.


자신은 그래서 지휘관을 죽였다. 인간이 되고 싶었다.

언젠가 자신이 버렸던 피와 살이, 사람의 온기가 그렇게나 그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 되고 싶어서 인간을 죽였다. 돌아가기 위한 대가였다.



"겁쟁아~ 어디에 숨었니? 기껏 지휘관을 죽일 용기를 품었으면서 추적자를 처리할 능력은 없었던거야?"


"멍청한 짓도 그렇게 멍청한 짓이 없지. 피차 귀찮은 일이 많을텐데 그냥 나와서 죽지그래?"



지긋지긋한 여인의 목소리가 다 고장난 청각모듈로 전해진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이며, 자신이 구조체가 되었을 때부터 받은 권총 두자루를 끌어안았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도발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절묘하게 사람 하나가 들어갈 공간을 마련해놓은 폐허의 그림자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도와주지 않던 신이 마지막으로 내린 안식처 같았다.


그의 목숨을 거두러 온 사신이 도착했다.

쫓아온 정화부대를 몰살하자 공중정원은 새빨간 죽음을 자신에게 선물했다.

억지로 감아낸 팔뚝의 붕대는 이미 보랏빛 순환액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목소리가 멀어지는걸 느끼고서, 햇빛이 비쳐들어오는 틈으로 고개를 내민다.



도시는 발전한 문명의 상징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사람이 사라진 지 몇 십년이 지나자, 인간에게 빼앗겼던 지구의 터전을 자연은 그럭저럭 복구하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을 타고 오른 넝쿨이 구름의 틈새로 쏟아지는 햇볕을 맞았다. 견고한 모양을 그렸을 콘크리트는 전쟁의 여파로 무너져 지금은 길가에 치이는 돌덩이나 다를 바 없었다.


침식체와 구조체가 길가에 뒤엉킨 채 죽어있다.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구조체와 침식체는 지구의 전장의 주연이었다.

그러나 반응이 멈춘 시체는 침식체와 구조체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평등했다.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만이 이곳의 전투가 방금 막을 내렸음을 알릴 뿐이었다.

구조체는 건물의 틈새를 비집고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받는 햇빛이 따갑게 느껴진다면 그건 왜일까.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어가는 시야로 다시금 약속 장소를 재고한다.



"아, 아가씨가 너한테 흥미가 있다고 했어...."


"내일, 이곳으로 와. 그러면... 너도 라미아의 동료가 될 수 있어."



그는 바다에서 올라온 인어의 말을 믿었다.

어릴 적, 낡은 동화책에서 봤던 것처럼 아름답고 당찬 인어는 아니었다.

그녀는 겁도 많았고, 소심하고 음침했다.


그러나 그 침식체만은 자신을 이해해주었다.

처음에 모르고 공격하려 했던게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살고싶다고 했다. 나도 살고 싶었다.

그녀는 바다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바다에 가보는 것이 꿈이었다.


나는 살아서 바다에 가고 싶었다.

시체만이 즐비한 거리를 전전하며 얻은 작디작은 꿈이었다.


그러나 내 인생은 일찍이 이루어지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는 날 팔아 공중정원의 입주권을 얻었다. 나는 구조체가 되어서 전장에 보내졌다.

전장의 삶은 끔찍하다. 내가 살아남은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전우가 다음 날 침식체가 되어있는 광경이 허다하다.

끔찍한 부상을 입어도 구조체인 이상 악착같이 살아남아 다시금 생명의 별에서 전장으로 보내진다.

의식 회수로 달아난 구조체도, 뒤에서 지휘하는 지휘관도, 매일 보급되는 신병도 모두 한 번 지구에 발을 디딘 순간 빼앗긴 고향에 속박되곤 했다.


라미아를 만난건 바다와는 거리가 먼 한 폐허도시에서였다.

나는 함께 있던 부대가 전멸해서 겨우 몸만을 빼낸 참이었고, 반쯤 정신을 잃은 채로 도시를 거닐고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것은 그저 겁먹은 라미아의 모습에서 어제 죽어버린 신병의 얼굴이 기억난 탓일 뿐이었다.

침식체가 허리를 끊어놓았고, 바닥을 적신 순환액 위에 엎드려 중얼거리는 구조체의 모습은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모두가 죽은 전장에서 빠져나왔다. 살고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그 참극에서 도망쳐나왔다.

라미아와 나는 같은 도망자 신세라는 점에서 꽤 죽이 맞았다.

우리는 꽤 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린 서로 도망쳐온 곳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육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바다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나는 구조체였고, 그녀는 침식체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서로의 꿈을 채워나가며 나는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튿날 찾아온 구조부대에게 구출되기 전에, 라미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핑-- 콱!


"커헉...!"


어깻죽지에 화살이 틀어박혔다.

재빨리 화살이 날아온 방향 반대편으로 몸을 숨겼다.

강한 탄력을 받은 화살은 어깨를 관통한 것과는 별개로 오른쪽 팔의 골격을 완전히 망가뜨려놓았다.


화살을 뽑아내자 순환액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졌다. 인간시절의 습관이었다. 숨을 쉴 필요가 없다 할지라도, 이건 내 근본을 상징하는 하나의 닻이었다.


"쯧, 오래도 도망치네 쥐새끼마냥."


눈앞에서는 붉은 머리의 사신이 다가오고 있었다.

양손에 들린 태도에는 내가 흘린 순환액이 핏자국처럼 스며들어 칼날의 색을 물들이고 있었다.

시야가 점점 붉어져간다.


"이미 거의 침식당해렸나? 하, 겨우 그딴 결말을 위해서 여기까지 도망친거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붉은 사신이 칼날을 맞대었다.

발성 모듈은 고장나서 반박도 못했다. 하염없이 내게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는 것.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에서 이루어진 지루한 추격전은 그렇게 막을 내리는듯 싶었다.



쾅!!


갑작스레 붉은 머리카락이 거세게 휘날렸다.

포탄이 쏘아지듯 날아간 사신이 벽에 쳐박혔고, 부드러운 손길이 몸을 들어올리는 듯 했다.

흐릿한 시야에는 공간이 약간 일그러지는 듯한 모습만이 보였는데, 가까운 공기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심해 라미아야."


"너무 늦어서... 찾고 있었는데, 괴롭힘당하고 있었구나. 라미아가 지켜줄게. 괜찮아..."


생각해보면 웃긴 상황이었다.

같은 공중정원의 구조체는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고, 그런 자신을 구한게 항상 자신이 죽여오던 침식체라니.

고장난 발성 모듈 탓에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해도, 입을 뻐끔거릴 뿐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몰려오는 수마에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라미아를 만났을 때, 그녀는 기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내가 그녀의 동료가 될 기회를 얻었다고, '아가씨'에게 잘 보이기만 한다면 나도 더 이상 퍼니싱과 싸울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좌표 하나를 주며, 정해진 시간까지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


기뻐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내 마음은 어째서인지 복잡했다.

살아남을 기회다. 항상 바라고바라던 기회였다. 분명, 그녀처럼 나도 기뻐해야했었다.


나는 부대로 돌아가 지휘관을 찾아갔다.

심경은 복잡했고, 나는 결단을 내릴 의지가 부족했다. 지금도 왜 그를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항상 마주치길 않지 바랬건만, 오히려 이때만큼은 그를 찾아가는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무덤덤한 눈으로 서류를 훑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지난 전투에서 죽은 신병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그는 아니라고 답했다.


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주위는 조용했다.

부대는 바깥을 경계하느라 오히려 이 지휘관실에는 나와 지휘관, 둘만이 남아있었다.


난 내 이름을 물었다.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세 번의 기회는 없었다.

나는 당장 총을 뽑아 그의 머리를 쏴버렸다.

자그마치 10년을 밑에서 굴렀는데, 그는 자신의 소대원마저 기억하지 못했다.


그에게 구조체는 뭐였을까? 장기말? 그렇다면 그는 장기말에게 살해당한 덜떨어진 놈일거다.

그렇다면 그런 그에게 부려지던 나는 무엇이었을까?


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나는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자유를 바라고 있었다. 난 살고 싶었다.


총성이 울려퍼지자마자 방에는 금세 대기하던 대원들이 들이닥쳤다.

짙은 혈향이 머리가 터진 시체에서부터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녀의 제안을 승낙하기로 했다.



추격은 거셌다.

당장 부대를 빠져나오면서도 많은 상처를 입었다.


현장의 집행 부대뿐만이 아닌 공중정원에서는 프래깅의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듯 정화부대까지 동원했다.


비좁은 폐허도시에서 나는 달렸다.

자유를 향한 갈망이 강철로 된 다리를 움직였고, 심장 대신 순환액을 흐르게 했다.


날 쫓아온 구조체를 죽였다.

침식체와 구조체의 싸움은 달랐다.

그들은 조금 더 지능적이고, 영악했다.


조금도 쉬지 못한 채 몰아붙여졌다. 정화부대를 죽이자 사신이 전장에 강림했다.

수많은 탄환과 화살, 설치된 함정이 모두 나를 잡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사람이 되기 위해 난 모든걸 버렸다.

바다를 보고 싶다. 라미아가 말해주던 바다의 모습이 보고싶었다.



눈을 떴다.


상처투성이의 라미아가 날 지켜보고 있었다.



"헤헤... 일어났구나?"


신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보였다.

가래가 끓는 소리를 내며, 붉은 안광을 번뜩이고 있다.


"이건....?"


"그들은 자격이 없었어."


자격?

하루아침에 침식체로 격하되어버린 전우들을 보았다.


매일을 비참하게 살던 결말은 그것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희망은 없었다. 끝없는 전장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본능 뿐이었다.


전선은 고착되었고, 침식체의 군세는 끝이 없다.

나는 라미아를 바라봤다. 침식 농도가 치솟고 있다는 경보가 머릿속 시스템에서 미친듯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넌, 자격이 있을 거야."


"끄윽! 끄아아악!!!"


수십만개의 달궈진 칼날들이 뇌를 토막내는 느낌.

말단에서부터 피어오른 불이 인공심장을 향해 번져가고 있었다.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살아서 바다를 보고 싶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꿈을 이룬 기회도 없었기에, 나는 살아있지 않았다.


"아아악!! 끄흡! 끄아아악!!"


시야가 완전히 붉게 물든다.

드문드문 들려오던 라미아의 목소리가 새하얀 이명에 덮여버린다.


인간이 되기 위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세상의 모든 열들이 오로지 나를 태우기 위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끝없는 고통의 파도가 마디마디 내 몸을 찢어버리고 있었다.


고통이 임계점을 넘는다. 이성이 차례차례 무너져간다.

울리는 경보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세상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걸까?


도망치고, 배신해서. 사람이 되고자 한 죄는 그리도 깊은 것이었을까.


심장에 뭉툭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리고 날 태우던 업화의 불길은 이제 반대로 날 차갑게 묻어버리려 했다.


희미한 시선 너머로 당황한 라미아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고보면, 나는 꿈을 이뤘을지도 모르겠다.


동화책에서 인어는 바다에서 왔다고 했으니까.

평생을 육지에서 살 운명인 나에게, 그녀는 신이 내린 약간의 자비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이 아니었고,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향해 손을 뻗은 대가는 거대했다.


얼어버린 팔과 다리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촉각이 사라지고, 그에 따라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마지막으로 들은게 라미아의 목소리라는 것만 기억 났다.


마지막으로 시야가 어둠 속에 잠겨버렸다.

이제 내 두 눈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담을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쯧, 남의 사냥감을 채가기나 하고."


베라는 심장에 화살이 꽂힌 구조체를 바라봤다.

수많은 상처들을 신체에 새겨가며 발걸음을 옮긴 그의 집념은 일종의 광기마저 느껴졌다.


흐릿한 동공이 허공에 닿았다.

쓸쓸히 남겨진 시체는 완전히 비워진 인형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베라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배신자의 목을 베었다.

식어버린 순환액이 흙을 적셔, 그 토양에 깊게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