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 리틀 닉, 왔나? 좀 늦었네."


니콜라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긋지긋한 얼굴인 그린스와 그의 옆에서 금방 체할 것 같은 얼굴을 한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은은한 조명과 탁자에 올려진 값비싼 술들을 보면 니콜라라도 금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크으 리틀 닉. 너 엄청난 인재를 주워왔잖냐... 응? 그런데 나한테 소개도 시켜주지 않고."


"우리 인연이 있는데... 이러면 나 서운해?"


새하얀 머리와 얼굴에 가득한 주름.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장과 다르게 행동은 경박하기 그지없다.


서운한 듯이 표정을 만들어내는 평소같은 그 모습에 절로 혈압이 오르는 기분이 든다.


지휘관은 문을 열고 들어온 자신을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린스는 시원한 동작으로 술을 들이키고는 금방 지휘관의 등을 팡팡 두들기고 있었다.

지휘관의 갈길잃은 눈이 조용히 바닥을 향했다.


"우리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공중 정원의 영웅!"


"내가 우리 지휘관의 팬인건 알고 있으려나? 응?"


"어이! 리틀 닉! 자네도 와서 앉아!"



니콜라는 머리에 돋아나는 핏줄을 억누르며 저 경박한 남성을 바라봤다.

싱글싱글 웃는 모습에서는 경박함 밖에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저 남성은 쿠로노의 고위 집행관. 쉬이 얕볼 수 없는 사내다.



"지금 당신의 투정을 받아주고 있는 사람은 공중정원의 지휘관입니다. 당신과 엮이는 모습은 피차 서로에게 득될 일 없지 않겠습니까?"


"아- 리틀 닉, 우리의 리틀 닉. 자네는 말을 너무 재미없게 해. 나는 말이야, 그저 순.수.한 팬심으로 우리 지휘관과 이 어려운 자리를 마련한거라고. 응? 나 살 날 얼마 남지도 않은 늙은이에게 너무 팍팍한거 아니야?"


"우리 지휘관. 자네가 말 좀 해줘. 아, 군부 총사령관 앞이라 쫄릴려나. 괜찮아! 이래뵈도, 내가 응? 저기 리틀 닉과 옛날부터 친분이 있었거든. 술김에 그랬다고 하고 그냥 하고 싶은 말 다해. 내가 다 우리 영웅님을 위해 카바쳐줄테니까."


속삭인다면서 낮춘 목소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니콜라는 그린스가 지휘관에게 속삭이는 말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제보니 술을 좀 마셨는지 얼굴이 살짝 붉었다.


니콜라는 닫힌 문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일었다. 저 경박한 남자는 행동 하나하나만으로 남을 열받게 하는 재능이 있었다.


"지휘관. 나는 말이야. 자네같은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아주 쓸모있는 사람말이야. 자네의 활약상은 내 익히 들어 알고 있어. 자네같은 사람이 이 공중정원에 많아져야 지구를 수복할 가능성이 늘어나지 않겠나."


"과찬...입니다."


"겸손함까지! 와 리틀 닉, 도대체 어디서 이런 사람을 주워온거야? 이런 사람을 꽁꽁 숨겨두고 키우고 있었단 말이지? 나 진짜 서운해?"



그린스는 마치 진짜로 서운해한다는 듯이 주름진 손으로 눈가를 훑었다.

그 과장된 말투와 동작 하나하나가 니콜라의 화를 돋구었다. 당장이라도 지휘관을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이곳은 쿠로노의 본진이었다.

건물의 입구부터 방의 입구까지, 총기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능히 사람 둘쯤은 억류할 수 있는 구조체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능글맞은 인간.

지휘관의 잔에 좋다며 술을 따르는 그린스의 모습이 백살먹은 너구리처럼 보이는 이유라면 그거일거다.


"쯧."


니콜라의 혀차는 소리에 그린스가 기분나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자, 지휘관 한 잔 더 들어봐. 응? 영웅에 걸맞는 주량을 보여야지."


"더... 더는 못 마시겠, 우욱...!"



그린스가 억지로 지휘관의 입에 술을 쏟아부었다.

창백한 얼굴의 지휘관은 평소와 달리 창백해진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병들의 갯수가 그린스가 지휘관의 위에 쏟아놓은 술의 양을 짐작케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 말이야...."


돌연 그린스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니콜라를 포함해 세 명뿐인 방에서, 괜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척을 한 번 해주곤 눈 앞이 핑핑 돌아가는 지휘관의 귓가에 은밀하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자네는... 어느 쪽이 취향인가? 하얀 머리쪽, 아니면 검은 머리쪽인가...?"


"예...? 그게 무슨."


"에헤이, 다 알면서 그래! 이게 요즘 우리 지휘관에 대한 핫토픽이란 말이지.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도 화제란 말이야."


"자네 소대에 있잖아! 자네는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 쪽이냔 말이야. 역시 그 리브인가 하는 구조체지? 아주 참한 처자 아니야. 응? 좀 수줍고, 아주 자네에게 헌신적일 것 같은데."


"저는... 딱히 동료들에게...."


"....그러면 혹시 남자쪽이 취향인가? 좀 그런 특이한 쪽? 그렇게는 안봤는데. 우리 지휘관, 좀 위험한 비밀을 숨기고 있었구나!"



"아니, 아닙니다....!"



금세 기겁을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린스가 지휘관의 곁에서 조금 떨어졌다.

술김에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쓴 지휘관이 곧장 반박해보지만, 그린스는 그 나이를 먹고서는 젊은이를 놀리는데 재미를 들린 것 같았다.


니콜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완전히 저 능구렁이에게 말려들었다.

지휘관에게 술을 먹인 것도, 저런 주제를 꺼내는 것도, 경박해보이지만 방심할 수 없는 사내다.


니콜라는 더는 저들의 추태를 보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지휘관과 그린스 사이를 붙여두지 않기 위해서 개입하기로 했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술자리에 귀한 너와 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군."


"쓸모가 없다니! 리틀 닉! 날 이렇게 서운하게 할거야?! 이런, 넌 옛날부터 남들 잘 노는 자리에 흥을 깨트리는 특기가 있었지."


니콜라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지휘관이 비틀거렸다.

훅 끼쳐오는 술냄새에 니콜라의 미간이 무의식적으로 찡그려졌다.


"앞으로는 이런 적극적인 행동은 삼가시죠. 서로의 위치를 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아아- 닉. 너가 맨날 이렇게 산통깨는 소리만 하니까 니 머리도 빨리 새고 부하직원들한테 악명도 자자한거야. 의장을 봐. 아직도 찰랑찰랑한 머릿결을 가지고 있는데 너는 최근 듬성듬성 빠지기까지 하고 있잖아."


"그럼 이만."


"아 닉! 정말로 이럴거야! 내가 어떻게 모셔온 사람인데 자기 맘대로 데려가는게 어딨어!!"



니콜라의 어깨에 기댄 지휘관의 몸이 심히 비틀거렸다.

도대체 얼마나 먹여댄건지, 니콜라는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는 마음에 걸음을 옮겼다.


그린스가 혀를 쯧쯧하고 찼다.

문앞에서 니콜라의 걸음이 멈췄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구조체는 어느새 방문을 굳게 막은 채, 꼿꼿히 고개를 세우고 있었다.


니콜라의 서슬퍼런 시선이 그들을 스치자, 총기를 쥔 손가락이 약간 떨리는게 보였다.


"리틀 닉? 거기까지 해. 쟤네 다 월급 받아먹고 사는 친구들인데 갈궈봐야 뭐해?"


니콜라가 굳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린스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후줄근해진 넥타이를 바로맸다.


일의 뒷감당은 생각도 안하는건지, 설렁설렁 다가와서는 니콜라가 부축한 지휘관의 반대쪽 어깨에 손을 걸쳤다.


"지휘관. 자네는 신을 믿나?"


지휘관은 이미 의식을 반쯤 잃어버린 것 같았지만, 그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 신앙이라는게 말이야. 참 아이러니한거거든."


"꼴에 신자들이라고 거들먹대고 다니는 것들은, 언젠가 종말이 올거면 다들 신에게 귀의할거라고 철썩같이 믿고있단 말이야."


"근데 지금 봐봐. 이 퍼니싱이라는게 터지고 나서 신의 이름을 외치던 것들이 남아있던가? 차라리 퍼니싱을 신벌이라며 개소리하는 멍청이들이라도 남아있어야 하는데, 응? 그 신에게 몸을 바쳤다는 성직자들이 다- 지 사는거에만 관심이 팔렸어."


"그렇게 많던 종교인들은 과학에 패배하고 자위하다가 퍼니싱이 터지니까 그렇게 연모하던 신은 나몰라라하고 다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겠다니까?"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자들이 진짜 성직자들이지. 음, 내가 인정해. 걔네들 정말 대단한 놈들이야."



"물론, 난 신을 믿지 않지만..."


그린스는 별 쓸데없는 궤변을 읊어놓으며 감정을 표출했다.

니콜라는 이번에 들리도록 한숨을 푹 쉬었다. 문을 막은 구조체들이 움찔한 것과는 별개로 그린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린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손가락을 확 치켜올리며, 연극을 하는 배우처럼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신은 본 적이 없는데, 살면서 천사를 본 적은 있었단 말이야."


그린스의 입가에 황홀한 미소가 피었다.

그 때의 경험을 생각하면, 그의 눈에는 다시 한줄기 순수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가슴을 지피는 가장 강렬한 감동은 술이 조금 들어가서야 더 확고한 형태를 가졌다.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크흑! 아름다웠다고!"


"너가 그 모습을 봤으면 내 마음을 이해했을거야! 확신한다고!"



주름진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정장을 적셨다.

니콜라는 아예 사방에서 풍기는 술냄새에, 흔들거리는 지휘관의 몸까지. 당장이라도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천사는 인류에게 진화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해 온게 틀림없어. 그 아름다움을 인간이 가질 수만 있다면, 이런 시시한 정치질 따위는 아무래도 좋단 말이야!"


"지휘관! 나는 유능한 인간이 좋다! 자네처럼 인류의 한 걸음을 만들어내는 부류를 좋아한단 말이야!"


"네 발걸음에 매달리는 쓰레기들은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난 말이야 자네가 어쩌면 이 위대한 비밀의 열쇠가 될 수도 있는 존재라는걸 딱 보자마자 느꼈단 말이지."


"응? 비밀? 궁금하지 않아? 나랑 조금 더 친해진다면 알려줄 수도 있는데. 저기 리틀 닉도 말이야. 어렸을 때 나한테 얻어먹은게 꽤..."



"그린스."


횡설수설 떠벌려대는 그린스의 입을 니콜라가 막았다.

머리 끝까지 핏줄이 올라온걸 보니, 곧 터질 것 같다.


그린스는 니콜라의 선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휘관은 이미 실신했습니다."


그린스가 고개를 살짝 숙여 지휘관의 눈을 봤다.

동공이 아예 풀려서는 앞에 보이는게 바닥인지 천장인지 분간도 못하고 있었다.


허리를 번쩍 세워서는, 그린스는 다시 흐트러진 옷차림새를 갈무리했다.


"음. 내가 새 정원의 착한 어린이를 너무 오래 데리고 있었나보네. 하긴, 말 잘듣는 착한 아이는 이제 자야할 시간이긴 하지."


그린스가 손을 휘적휘적 젓자 문 앞을 막고있던 병사들이 금세 길을 터줬다.

거칠게 문을 열어제낀 니콜라는, 이 불쾌한 장소에서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린스는 여전히 옛적처럼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설렁설렁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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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내가 그린스 할배의 광기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이 호1감할배, 기행이 대단하다!



앞으로는 좀 네임드 캐릭터들도 넣고, 밝은 것들도 써야지.

최근 스토리도 그렇고 글들도 다 어두워서 정신 나갈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