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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니싱 세계관에서 퍼니싱만 없었다면? 

만악의 근원이 되는 재해가 없었다면 작중의 그 어떤 집단도, 모략도, 아픔도 그녀의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루시아는 주어진 일상을 모두 살아내고 평범하게 죽었겠죠?

아마 루나도, 그리고 대다수의 구조체들도 비슷했을 듯.


아래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적어본 짤막한 소설이니 시간이 넉넉하시다면 읽어보세여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하굣길.

루시아는 비를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 빠진 구름이 불러오는 비. 텁텁한 습기를 남겨 온 세상과 나를 기어코 덮어버려 숨이 턱 막히게 하는 뭐 그런 회색빛의 비를 혐오했다.

어찌 보자면 그 나이대 아이다운 민감한 이유로 힘이 빠져버린 지친 몸을 애써 가려보려는 우산은 몰아치는 비바람 앞에 이미 도구로서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

사방에서 내리는 비가 루시아를 꽤나 비참한 꼴로 만들었다.

점점 맺히는 이유모를 슬픔. 더욱이 울적해지려는 찰나에 대뜸 위화감이 느껴졌다. 딛고 있던 땅바닥에 서늘한 햇빛이 드리워진 것이다. 날이 갠 걸까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직 잔뜩 껴 있는 구름 사이로 겨우 고개를 내밀고 있는 태양이 눈에 들어왔다.


눈 속으로 오색들이 쏟아지고 본인조차 설명하지 못할 심경의 변화가 일어 루시아는 점점 변해가는 하늘로 무심코 손을 뻗었다. 아직 기세가 가시지 않은 빗줄기가 여전히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런 중에도 태양이 가져다주는 온기와 그 온기에 의한 열풍이 차가운 비 너머로 루시아를, 한 사람을 따듯하게 감싸주었다.

일순간 멍해진 정신을 다시 붙잡으니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고 높은 곳을 향해 뻗었던 손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다. 얼른 여운을 떨쳐내고 다시금 집을 향하던 발걸음을 떼려 한 그 순간에 그녀는 아름답고도 모순된 풍경 속에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각을 마주한다. 존재할리 없는 레이븐 소대에서의 기억이 손에서 비누거품이 되어 하늘로 흩어졌고, 손에서 넘치는 빗물에 녹아내려 팔을 타고 흘러내리는 신체의 파츠는 단지 오한이 유발한 어지럼증이 가져다준 찰나의 환상통일까?

아니면 필사적으로 존재하려 발버둥 친 기억의 현현일까?


빛바랜 붉은빛과 회색만이 존재하는 지구가 아니었다면 그녀도 여러 색으로 가득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곳은 퍼니싱이 만연한 그 세상과는 다르다. 매일같이 아픈 비만 내려대지는 않는다.

햇빛이 밝게 뜨는 날이 어두운 날보다 더 적게 느껴지는 그런 칙칙한 세계에서 많이도 아팠고 그렇게 아픈만큼 기뻤던 기억. 그 비정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세상과 다름없는 일상만이 가득한 이곳에서의 안배가 여기 이 루시아에게만이라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견고한 현실이 되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