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쪽에 강림한 재앙을 상대하러 가던 중, 유중혁 일행은 괴수종 무리와 충돌했다. 


'이전 회차에선 이 시간대에 괴수종이 무리지어 활보하지 않았다.'


서울 전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탓에 도깨비들이 술수를 부린 것이라 판단한 유중혁은 즉각 전투에 돌입했다. 선두를 유중혁이, 좌우를 이지혜와 정희원이 맡았다. 


지금으로서는 무적인 조합. 


일행이 무난하게 이변을 해쳐나가던 도중, 정희원이 문득 질문했다.


"그래서, 재앙이 동료라고요?"


눈동자를 굴린 유중혁이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 . . 41회차의 안배다. 녀석은 후반 시나리오에 필요한 정보를 알고 있어."


"하지만 독자 아저씨는 재앙이 적이라고 했잖아요. 그 뭐냐. 천 년 동안 밀실에 틀어박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던가?"


". . ."


한마디 얹은 이지혜가 사부의 눈치를 보더니만 시선을 피했다. 마침 그녀 주위로 괴수들이 몰려들었기에 핑곗거리도 충분했다. 


"에이 씨, 자꾸 귀찮게!"


그래도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지만.


이지혜가 [귀살]을 발동하려는 찰나, 정희원이 선수를 쳤다.


"허리 숙여봐, 지혜야."


이지혜가 상체를 낮추자 정희원은 이지혜가 있던 방향으로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멸마의 불꽃에 닿은 괴수종들이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고마워요, 언니!"


이지혜는 그 뒤로 정신없이 공방을 펼쳤다. 수상전이 아닐 때 그녀의 전력은 두 사람에 비해 뒤처지는 면이 있었기에, 이지혜는 이를 악물고 전투에 임했다. 


적어도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지혜의 마음을 눈치챈 유중혁은 그녀가 성장할 수 있도록 내버려 뒀다. 좋게 말하면 자기 나름대로 신경을 써 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방치였다. 


어쨌거나 이지혜는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으니 유중혁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다소 여유가 있는 두 사람은 그 뒤로도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독자씨 말이 틀린거예요?"


"한쪽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놈은 예언자고 나는 회귀자지."


" . . . 그게 그거 아닌가요?"


"보는 세계가 다르다."


예언자는 미래를 관철하고, 회귀자는 과거를 복기한다. 그러니까 둘이 보는 세계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본질적으론 완전히 딴판이었다. 


혹은 기질적으로도. 


" . . . 이전 회차에서 재앙으로 부화한 신유승은 내게 협력했다. 정보를 제공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그게 무슨 -"


- 서걱!


눈앞의 괴수를 베어 넘기며 유중혁이 말했다.


"41회차의 신유승은 재앙이다.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기 위해선 녀석이 죽어야 했다."


유중혁의 머릿속에서 태엽이 거꾸로 돌아갔다. 역행한 시간 속에서 유중혁은 비참한 몰골의 신유승을 바라봤다.


- "이 지옥 같은 세계를 끝내줘, 대장."


1회차와 2회차. 연이은 세계선에서 범람의 재앙은 항상 같은 선택을 내렸다. 그것은 유중혁이 이미 경험한 사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였다. 


회귀하는 것은 회귀자를 제외한 세계이기에, 그는 억겁의 세월동안 수많은 비극을 홀로 기억한 채 살아가야만 했다. 눈을 뜬 유중혁이 낮은 어조로 말했다.


"녀석을 만나는 건 이번이 세번째다."


간략한 문장에서 느껴지는 비감에 사뭇 망설이면서도, 정희원은 질책섞인 말을 뱉었다.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는 멸마의 심판자는 누군가의 필연적인 불행을 목도하고도 눈을 돌릴 생각이 없었다.


정희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중혁씨 말은, 이번에도 그 짓을 반복하겠다고요?"


" . . . "


"너무 잔인하잖아요. 그 사람은 당신만 보고 천 년을 버텨 왔을 텐데 . . . !"


정희원의 분노가 담긴 검이 괴수종의 뱃가죽을 갈랐다. 멸마의 불꽃에 휩싸여 악을 심판하는 모습은 그녀가 에덴의 총애받는 이유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유중혁은 그녀를 보며 1회차의 자신을 떠올렸다. 지금은 다소 사그라졌지만, 유중혁도 한때 저런 시절이 있었다. 물론 무뚝뚝한 성정 탓에 구해 놓고 생색을 부리진 않았지만.


'하나, 전부 헛될 뿐이다.'


그렇게 살린 사람들은 다음 시나리오를 위한 제물이 되었다. 동료도 죽고, 사랑하는 연인도 죽었다. 유중혁의 최후는 언제나 고독했다.


결국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지 않는 한, 막을 수 없는 비극이었다. 


자기 자신의 회귀도, 재앙이 된 신유승의 고통도.


"새로운 회차가 시작될 때마다 녀석의 기다림은 반복되겠지."


"그럼 재앙을 구하기 위해선 . . ."


"회귀를 멈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해야 한다."


정희원은 유중혁이란 사람이 문득 거인처럼 느껴졌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진 거인. 보이지 않은 상처가 온몸에 가득했다. 그런데도 그는 우뚝 선 채 꿋꿋이 나아가고 있었다. 


- 쉬익!!


희미한 거인의 형상을 가르며 진천패도가 튀어나왔다. 정희원의 상념을 물리는, 눈앞의 괴수를 참하는 일검. 유중혁의 신형이 한 바퀴 회전하자 괴수들이 말 그대로 갈려 나갔다. 


- 촤아악!


잇따르는 피륙음. 사방으로 터지는 육편 사이로 빛나는 검의 궤적. 


파천검도의 제 일식.


시선을 사로잡는 패도적인 검술에는 지금껏 회귀자가 쌓아온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유중혁은 그것을 담담히 풀어서 설명했다. 


"나는 시나리오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이 녀석의 고행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겠지. 답이 되었나?"


정희원은 차마 유중혁의 정의를 부정할 수 없었다.



*



<명계>에서 돌아온 이후, 내 마음은 여러모로 심란했다. 사람 마음에 정답이 없듯 이유 또한 다양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원인을 고르자면 '범람의 재앙'을 뽑을 수 있겠다.


41회차의 신유승.

가장 슬픈 재앙.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주된 화두였다. 


솔직히 그녀가 재앙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일은 득보다 실이 크다. 김독자도 모자라 그를 지원하는 나 역시 다른 성좌들의 어그로를 대차게 끌었으니, <게티아>가 개연성을 보태도 41회차의 신유승에게 닥친 비극을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을 터였다. 


또한 '재앙 구출'은 <게티아> 전체를 움직일 명분으로는 부족했다. 앞으로 벌어질 별들과의 사투에서 개연성은 갈퀴로 쓸어 모아도 부족한 자원. 냉철하게 생각하면 여기선 방관하는 쪽이 전략적으로 옳았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정당화를 끝마칠 때마다 떠오르는 문장에 고민은 도로 원상복귀되었다.


- 과거를 바꾸기 위해 맞서 싸워야 할 자가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죽인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린 신유승을 보며 김독자가 한 독백이 가슴 한 켠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내가 본 미래에서 그녀가 행복하다는 것을 이유로 현재의 신유승을 방치한다면,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 


<스타스트림>의 시간은 상대적이다. 


차원을 넘나들 때마다, 혹은 세계선을 이동할때마다 시간은 제멋대로 흘러간다.


마찬가지로 사망한 '범람의 재앙'이 다시 도깨비로 부활할 때까지, 명계에 떨어진 41회차의 신유승은 또 한 번 영겁의 세월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연이은 질문에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전에도 그렇듯, 답은 이미 내 안에 있었다.


[어떻게 용납하겠어.]


용납할 수 없기에 신유승을 화신으로 삼았다. 용납할 수 없기에 정희원이 성추행을 당하기 전 유중혁에게 합류하도록 유도했다. 


내 행동 원리는 언제나 일관적이었다.


[그대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걸.]


솔직히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땐, 저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내가 저들의 이야기를 읽지만 않았어도 전장을 헤매진 않았을 텐데' 라는 문구가 계속 떠올랐다. 


허나 시간이 좀 흐르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들은 원망의 대상이기 이전 나의 구원자였다.


각박한 인간관계와 건조한 사회에 치여 살던 한 청년. 숨을 곳을 찾던 청년에게 넉넉한 품을 내어준 이야기를, 나는 끝내 미워할 수 없었다.


하여, 자조하며 웃었다.


[증오에서 피어난 사랑이라. 에덴이 좋아라 할 글귀군요.]


굳이 <에덴>을 들먹인 이유는 오늘 초대한 손님이 <에덴>의 대장이기 때문이다. 서기관은 자신만 용건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나도 용건은 차고 넘쳤다. 


아공간코트에 담긴 성유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자 문 밖에서 익숙한 마력이 느껴졌다. 문을 연 그리고리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든 인형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주변의 마기가 인형을 피해 방구석으로 흩어졌다. 


[손님입니다, 주인님.]


[수고했어요. 이제 볼일봐요.]


그리고리가 머뭇거렸다.


[. . .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연락 주십시오. 다른 마왕들에게 도움을 - ]


[여긴 마계입니다, 그리고리. 제아무리 대천사여도 이 정도 격으로 허튼수작을 부릴 수는 없죠. 부려봤자 상징체를 찢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 . . 실례했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시길.]


홍차를 세팅한 그리고리가 퇴장하자 나는 탁자에 놓인 인형을 물그러미 바라봤다. 고작 인형 하나일 뿐이나 그 안에 실린 격은 웬만한 위인급 성좌들을 능가했다.


인형 주인의 정체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배후엔 에덴의 유이한 신화급 성좌가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반가워요, 서기관.]


[오랜만입니다.]


인형이 묵직한 진언을 발했다. 하늘의 서기관, 메타트론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절 여기로 초대한 이유가 뭡니까?]


[별 이유 없어요. 굳이 찾자면 '가기 귀찮았다.' 정도?]


그리고 저번엔 내가 <에덴>에 갔으니 이번엔 서기관이 와야 인지상정 아니겠나. 이유야 어찌 됐건 나는 처음부터 대천사를 마계에 부를 생각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메타트론이 머리를 짚었다. 


[ . . . 고작 그런 이유로 마계에 대천사를 초대하는 마왕은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손바닥만 한 인형임에도 불구하고 표정 변화가 꽤 다양했다. 지금은 씁쓸한 미소, 인생에 달관한 현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차례 신경전이 지나간 이후, 나는 서기관의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요? 아직도 서류산에 파묻혀 지내고 있나요?]


[우리엘이 도와준 덕에 업무량이 많이 줄었습니다.]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아니라?]


인형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게 왜 진짜지?


[의외군요.]


[저도 놀랐습니다.]


어쩐지 요즘 성류게시판이 조용하더니, 다 이유가 있던 모양이다. 


[에덴의 망나니가 철 좀 들었나보군요.]


[그녀를 모욕하는 발언은 삼가해주시죠.]


내 발언에 메타트론의 상징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래 봤자 인형이라 위압감은 전혀 없었다. 나는 인형의 이마를 툭 치며 말했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 . . . ]


말을 잇지 못 하는 메타트론을 보며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메타트론이 어떻게 차를 마시는 지 구경했다. 


- 보글보글.


인형의 손이 잔 끄트머리에 닿자 차표면이 아주 작은 물보라를 일으키더니, 이내 양옆으로 쫘악 갈라졌다. 인형은 수위가 높아진 가장자리에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먹었다. 모세의 기적을 저렇게 하찮게 재현해도 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다시 시선을 옮겨 창문 밖을 바라봤다. 맑은 하늘과 새하얀 구름. 아름다운 경치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귀담아 들으니, 문득 이곳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간만에 산책도 나쁘지 않을려나? 갈 곳도 있고.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충동적으로 메타트론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새끼 고양이처럼 축 늘어진 솜뭉치에서 경계심 가득한 진언이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기껏 마계까지 와서 집무실에만 박혀 있으면 너무 그렇잖아요. 관광하러 가죠.]


[전 괜찮 - ]


[흐음, 그대 의사는 묻지 않았어요. 그러니 잠자코 따라와요.]


마계에선 마계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 그리고 32번째 마계에선 내 말이 곧 법이었다.


.

.

.



나는 메타트론의 상징체를 어깨에 얹은 채 거리로 나섰다. 주민들이 나를 어려워하기에 변신 스킬로 외형을 바꾼 상태. 따라서 맨눈으로 봤을 때 나는 인형 놀이를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소녀로 비춰졌다. 


자연히 언행도 그 나잇대 소녀처럼 연기했다. 인상 좋은 종업원이 나를 보더니 허리를 숙였다. 


[우리 꼬마 손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


나는 손가락을 쫙 펼치며 말했다. 


[꼬치구이 두 개 주세요.]


[네에. 꼬치구이 두 개가 . . . 여깄네!]


아공간 스킬을 사용해 마술사처럼 순식간에 꼬치구이를 만들어 낸 종업원이 싱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코인이 빠져나가는 감각과 함께 주의사항이 들려왔다.


[뜨거우니까 잘 식혀먹어요.]


[네.]


나는 시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구매한 음식을 맛봤다. 메타트론이 아까부터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물어봤다.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봅니까?]


[ . . .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작게 양심이니 뭐니 하는 잡소리가 들려왔으나 신경 끈 채 미각에 집중했다. 길거리 음식 특유의 자극적인 맛 덕분인지, 미식협을 진행하며 고급화된 입맛을 만족시킬 정도는 아니어도 그런데로 먹을 만 했다.


그렇게 두 번째 꼬치를 완료할 즈음,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인형이 마지막 남은 꼬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길래 은근슬쩍 권유했다.


[한 입 줄까요?]


[ . . . ]


침묵은 곧 긍정이라 핓빛손아귀로 한 조각씩 떼어 인형의 입에 넣어 주었다. 배고팠는지 곧잘 받아먹었다. 


작은 입이 오밀조밀 움직이다가 목젓 부위가 한번 크게 요동쳤다. 나는 시식평을 요구했다. 


[맛있죠?]


[ . . . 나름 괜찮았습니다.]


[근방에서 출몰하는 5급 괴수종을 베이스로 한 구이예요. 나름 이곳 특산품이라 할 수 있죠.]


배도 채웠겠다, 우리는 그 뒤로 평화롭게 도시를 시찰했다. 활기찬 거리를 탐닉하고, 각종 유희시설을 즐겼다. 


야바위도 하고, 마술도 보고, 버스킹도 보고.


기타도 한번 쳐보고.


홍등가의 술집이나 투기장을 제외하곤 전부 돌았다. 그곳은 메타트론의 성정에 맞지 않는 곳이며 타 성좌들도 많아 체험하기 어려웠다. 


도시 외곽 지대, 인적이 드문 공터에 이르어서야 여정은 막을 내렸다. 메타트론이 짧은 감상을 남겼다.


[예상외로 활기찬 도시였습니다. 거리에 만연한 유흥시설만 제외한다면 말이죠.]


[명색이 마계인데 이 정도 향락은 있어야죠.]


나는 멀리서 번쩍이는 홍등가를 가리켰다. 


[그대도 한번 도전해볼 생각 없나요? 아직 천사는 받은 적이 없어 아마 최초 고객 타이틀을 얻을 수 있을 텐데.]


덤으로 그날개도 회색으로 멋지게 덧칠하고. 일석이조의 제안이건만 메타트론의 답변은 차가웠다.


[전에도 말했지만 관심 없습니다.]


[아쉽군요. 그래도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요.]


고개를 저은 메타트론의 시선이 이번엔 거리를 뛰노는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마계에도 아이가 있군요.]


느닷없는 문장에 내가 답했다.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에요, 메타트론.]


[ . . . ]


침묵 속에서 우리는 지평선을 응시했다. 해가 모습을 감추고 처연한 별빛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메타트론이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그 전에 한 군데 더 들를 곳이 있어요. 분명 그대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겁니다.]


[ . . . 거기가 어딥니까?]


나는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차원 이동 게이트를 향해 날아올랐다. 황혼의 빛이 눈썹에 닿아 부서졌다. 반짝이는 마계를 응시하며 나와 같은 경광을 보고 있을 메타트론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시나리오 밖에 더 있겠습니까?]



*



차원게이트를 통과한 나는 43번째 마계의 어느 변두리에 착지했다.


[거대설화를 얻은 직후, 마계간 왕복 수수료가 많이 절감됐어요. 덕분에 상호교류가 한결 편안해졌죠.]


내 설명에 메타트론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어째 반응이 건조하군요.]


메타트론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 상징체로 온터라 숨결은 느껴지지 않았다. 


[에덴의 대천사로서 빈말로도 축하한다는 말은 못 하겠습니다.]


하긴. 이해는 간다. 그 누가 적이 강해지는 걸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선악은 스타스트림의 초창기부터 대립해온, 나름 근본있는 라이벌이다. 그 막대한 역사의 한 축을 맡은 메타트론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두렵나요?]


[ . . . 이해할 수 없는 건 언제나 두려운 법입니다.]


나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두려워말라.]


[ . . . ]


[으음, 이럴 때 쓰는 말이 이닌가요?]


[ . . . 가끔 당신을 보면 미치는 것엔 정도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은 저리해도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허탈해서 짓는 웃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웃었으니 좋은거다.


그 뒤로 나는 도깨비의 눈을 피해 목적지로 이동했다. 작은 점처럼 보이던 것이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거대한 협곡, 43번째 마계의 히든 시나리오가 숨겨진 지대였다. 


협곡의 그림자로 진입해자 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등 뒤로 휘광을 발한 메타트론이 수상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설마 저를 전등 대용으로 쓰기 위해 데리고 온 겁니까?]


[그럴 리가요. 여기 시나리오는 2인용입니다.]


[저 말고 다른 분들도 많지 않습니까?]


[공교롭게도 이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대가 왔습니다. 기막힌 우연이죠.]


[정말 기가 막힙니다. ]


협곡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을 즈음, 푸른 스파크와 함께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 협곡을 뒤덮은 그림자가 걷히며 또 하나의 무대가 등장했다. 


['히든 시나리오'를 발견했습니다!]


[여긴 . . . ]


푸른 초목 위로 드리워진 청명한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목가적인 풍경. 에덴과 흡사한 무대에서,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새로운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 무대를 위한 무대>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참여좌들이 보유한 설화 중 하나가 랜덤으로 지목되어 '무대화' 됩니다. 참여좌들은 해당 무대에서 기존 설화를 재현하거나 변주해야 합니다. 

제한 시간 : ???

보상 : ???

실패 시 : ???


메타트론이 주변을 쓱 둘려보더니 말했다.


[일단 제 설화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 무대다. 천 년 전 일인지 기억 속에 남아 있진 않으나 해당 설화를 찾는 덴 문제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물 만난 물고기처럼 한 설화가 아주 지랄 발광을 했기 때문이다.


[설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흥분합니다!!]


[하아, 왜 하필 . . . ]


'무저갱의 지배자'의 봉인을 풀러 온 것은 둘째치고 흑역사를 재탕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