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주장 끝에 우리는 설화를 변주하기로 결정했다. 메타트론은 못마땅해하는 기색이었으나, 물어볼 게 많은 그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천사의 상징체가 진언을 발했다.

[그래서 어떻게 바꿀 셈입니까?]

좋은 질문이었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답했다.

[아주 잘?]

일순, 인형의 오른팔이 목부위로 향했다. 나는 메타트론의 진체가 뒷목을 잡았다고 확신한다.

[ . . . 계획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누가 서기관 아니랄까, 문장 독해력이 훌륭하군요.]

인형의 목이 삐그덕 돌아갔다. 쏘아 보는 시선에 옆통수가 따가워졌다. 이러다 관자놀이가 뚫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 즈음, 메타트론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마음 같아서는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들인 수고가 전부 사라질텐데?]

내 지적에 인형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래서 이 고생을 하고 있잖습니까.]

대천사의 용건은 안 봐도 뻔했다. 내가 어떤 ■■을 얻었고, 어떤 이야기를 추구할지가 궁금한 것이겠지.

절대선의 수장인 그로서는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확실하게 알고 싶을 터.

하지만 쉽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게, 진작에 나를 잘 대해주지 그랬어요.]

메타트론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형이 저렇게 생동감 넘치는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제가 지급한 아이템들은 걸레짝 취급입니까?]

[걸레는 바닥 청소에라도 쓰죠. 신성력 넘치는 성물을 내가 어디다 써먹습니까?]

협조의 대가로 메타트론이 선물한 아이템들은 하나 같이 높은 등급을 자랑했다. 문제는 그 효과가 하나 같이 퇴마나 해주에 치중됐다는 점이다.

이걸 다른 마왕 놈들에게 써먹었으면 내가 에덴과 성물까지 주고받는, 생각보다 긴밀한 관계임이 들통나 평판이 나락으로 갔겠지.

마계 통일이 한참 미뤄질 게 뻔했다.

게다가 효능은 또 쓸데없이 좋아 사용자인 나도 쓸 때마다 도트딜이 들어왔다. 철두철미한 메타트론이 계략을 꾸밈에 있어 은근히 허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찌됐건 그의 본질은 순수한 선이니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도깨비들이 눈독들이긴 하더군요. 에덴의 아이템이 워낙 희귀하니까.]

[ . . . 설마 팔았습니까?]

[골동품 전시대에 보관 중입니다. 팔진 않았어요.]

아공간 코트가 아니라 전시대에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대체로 쓸모가 없었다. 사실 우리엘의 서슬 퍼런 경고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도깨비 보따리에 매물로 넘겼을 것이다. 

아무튼 팔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메타트론은 안도했다. 동료 천사들의 반발이 걱정됐던 모양이다. 이후 옅은 한숨을 내쉬다가, 은근슬쩍 몇마디를 덧붙였다.

[다행입니다. 성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그 빛을 온전히 발하는 법이죠.]

한마디로 안 쓸 거면 돌려달라는 소리였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전부 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것을 함부로 내어 주지 않는다.

[흐음, 도깨비들이 제시한 금액의 두 배로 사간다면 한번 생각해 보죠.]

[얼마입니까?]

[개당 40만 코인.]


말도 안되는 금액에 메타트론은 잠시 말이 없다가, 눈앞의 시나리오 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 . . .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방법이나 생각해봅시다.]

결국 다 포기하고 본제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현명한 선택이다. 사실 줄 마음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서기관은 아마 내 속셈을 지례짐작했겠지.

뭐, 빨리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싶은 건 피차일반이라 나 역시 대책을 찾는 데 집중했다. 

시나리오 창을 몇 차례 정독하며 설화를 샅샅이 분석했다. 우습게도 내 설화지만 이해도가 떨어져 메타트론과의 담론을 통해 문맥을 잡아나갔다. 

여자 한 명 얻기 위해 남편 7명을 죽인 악마의 심리를 이해하기란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자가 의지할 곳을 가지치듯 잘라내 독점하겠다는 아이디어는 도대체 어떻게 떠올렸는지 . . . 

또한, 원전설화에서 강간은 하지 않고 여자가 완전히 자신의 손에 떨어질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순애보(?)적인 면이 있다는 것도 다소 골떼리는 부분이었다.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렸군요. 도대체 과거의 나는 무슨 심보였던 걸까요?]

[. . . 그걸 왜 제게 물어보십니까?]

나는 턱에 얹은 손가락으로 다시 메타트론을 가리켰다.

[그쪽도 한 고집하잖아요. 뭐, 방향성이 조금 다르지만.]

원래 미친놈은 미친놈이 가장 잘 이해하는 법이다. 

메타트론은 선에 미친 대천사고 아스모데우스는 욕망의 화신이니, 극과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듯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직 덜 미쳐서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 '미친놈학개론'을 들은 메타트론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조에서 불쾌함이 뚝뚝 묻어나왔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저를 같은 선상에 둔다는 자체가 모욕입니다.]

[흐음, 면전에 대놓고 그러기예요?]

[맞는 말했을 뿐입니다. 당신이 제 발언에 크게 신경 쓸 성격도 아니고. 애초에,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것 아닙니까? ]

[상상은 그대에게 맡기도록 하죠.]

아무튼 일련의 담화 덕에 알게 된 점은 우리 둘 다 원본 아스모데우스의 비범한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메타트론은 악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나는 그녀의 욕망이 와닿지 않았다. 결국 나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을 내식대로 해석해야만 했다. 

정욕은 이야기와 관계를 향한 욕망으로.
격노는 별을 향한 분노로.

재현이 아닌 변주를 선택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부드러운 초원에 주저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욕은 그렇다 쳐도 격노가 문제였다. 생각보다 내 욕망의 부피가 비대한 탓에 둘 사이에 균형이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원작에서 성좌들이 터트린 병크는 대다수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 경험하지 못했기에 그들을 증오하는 마음이 아직 부족했다.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넘치는 것을 덜어내거나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한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설화로 남기기 위한 '사건'이 필요했다. 

설화의 3요소 중 '등장인물'과 '배경'은 이미 갖춰진 상태. 마지막 퍼즐조각의 위치를 고뇌하고 있을 무렵, 난데없이 알림음이 울렸다.

발신자는 비형이었다.

- 마지막 재앙의 부화가 코앞입니다.

혹시라도 방송을 놓칠까 봐 비형에게 언질을 뒀던 게 신의 한 수였다. 시나리오에 집중하느라 까맣게 있고 있었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성류방송 채널에 접속했다. 

[갑자기 뭐 하십니까?]

[지구에서 곧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군요. 같이 볼래요?]

어차피 인형이 내 어깨 위에 앉아 있었기에 보기 싫어도 같이 볼 수밖에 없었다.

메인 화면에 김독자와 유중혁, 한수영이 잡혔다. 논쟁이 한참이었다.

- ". . . 네놈은 이게 통할거라고 생각하나?"
- "아까 한수영도 그렇게 말하더라.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지."
- "쳇. 난 분명히 안 된다고 했어."

-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궁금해합니다.]
-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김독자'의 전략에 의구심을 갖습니다.]

나는 유승이를 바라봤다. 잔뜩 굳은 얼굴로 래서 드래곤을 쓰다듬고 있었다. 함께 지켜보던 메타트론이 말했다. 

[초조해 보입니다.]

[같은 생각이예요.]

김독자가 재앙의 정체를 알려 줬을 때는 담담히 받아들이더니, 내심 고민이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신유승에게 간접 메시지를 전송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괜찮냐고 묻습니다.]

놀란 신유승이 고개를 불쑥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이었다.

시선을 교환하자 가슴 한 켠이 몽글몽글해졌다. 신유승도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이게 '유대감' 일려나.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화신에게 격려의 말을 전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전부 괜찮을 것이라 말합니다.]

- "고마워요 . . ."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곁에 있던 이지혜가 의아해했다.

- "갑자기?"
- "언니 말고 마신님이요. 걱정해주셔서 고맙다고 말한거예요."
- "우리 장군님은 별말 없던데 . . . "
- "누나가 황소처럼 드세서 그런 거 아니야?"
- ". . . 너 일루와."

재빠르게 도망친 이길영이 충왕종 등에 올라탔다.

-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독자형!"
- "야, 안 내려와?!"

[사이 좋네요.]

[ . . . 묘하게 에덴이 떠오릅니다만.]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대천사들을 떠올렸는지 인형이 한차례 몸을 떨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순 화면이 전환되더니 이번엔 유상아, 이현성, 정희원이 한 화면에 잡혔다.

- "일이 잘 풀리면 좋겠습니다."
- "그러게요. 상아 씨는 어디 갔다 와요?"
- "아, 다름이 좀 보고왔어요. 잘 있는지 궁금해서."
- "어떻습니까?"

유상아가 빙그레 웃었다.

- "한 부장님이 육아에 재능이 있던데요."
- "그 인간, 딸 생기니까 사람이 바뀌었어, 아주."

헛웃음을 흘린 정희원이 자신의 검을 정비했다. 이현성도 방패 끈 길이를 조정하고, 유상아는 재앙의 알이 있는 지점을 흘겨봤다. 그 뒤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아 화면이 전환되었다.


지상에는 보상을 노리는 화신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개중엔 김독자 일행을 노리는 자들도 있었다. 물론 막상 재앙이 깨어나면 막대한 괴수들에 치여 도망치기 바쁠 것이다. 


왁자지껄한 무대가 일순 고요해진 것은 그때였다. 

두근.

고동 소리. 

재앙의 알이 들썩였다. 그리고 쩌저적 - 알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서울에 있는 화신들의 시나리오가 갱신되었다.

-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깨진 조각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깃털에 둘러싸인 나체의 여성이었다. 이윽고 깃털은 여성과 한몸이 되어 옷으로 자리잡았다.

개연성 스파크와 함께 범람의 재앙이 눈을 떴다.

유중혁이 그녀를 불렀다.

- "기다렸다. 신유승."
- " . . . 대장?"

헛것이라도 보는 양 재차 눈을 깜박이던 재앙이 무언가 깨달은 듯 표정을 싹 굳혔다. 

- " . . . 그런가. 대장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 . . 이번이 날 처음 보는 게 아니라는 거네?"

[둘이 아는 사이입니까?]

[아, 조용히 좀 해 봐요. 안 들리잖아.]

대천사를 합죽이로 만들고 다시 방송에 몰입했다. 

- "대장, 지금이 몇회차야?"
- " . . . 3회차다."
- "역시 그랬구나. 내가 정보를 줬음에도 결국 실패한 거야."

여기까지는 내가 아는 전개. 그리고 이어지는 유중혁의 대사부터 내가 모르는 전개였다.

- "이번 회차는 다를 것이다."
- "뭐?"

유중혁이 눈동자를 굴려 한수영과 김독자를 쳐다봤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그런 회한이 실린 눈빛이었다. 독자와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옅은 한숨을 내쉰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 "변수가 생겼다. 이전 화차에선 볼 수 없는 예언자와 멸악의 심판자가 나타났지. 분명 41회차에서도 없는 사건이다. 네가 2회차에서 네가 아는 정보를 전부 제공했다면 말이다."

범람의 재앙이 정확히 김독자를 바라봤다. 

- "그쪽이 예언자?"
- "그래."
- "증거는?"
- "놈이 예언자를 사칭했다면 이미 내 손에 죽었을 것이다."

신유승이 유중혁의 변호를 수긍했다.

- "하긴. 대장은 늘 그랬지. 거슬리면 죽이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 . . "
- ". . ."
- "그래도 난 그런 대장을 동경했어. 당신의 부탁을 들어 주기 위해 지난한 세월을 견뎌 냈어.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고 대장과 동료를 생각하면서 . . . 근데 3회차라니. 내 기다림이 . . .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거지?"

츠츠츳!

몰아치는 감정의 격류에 개연성 스파크가 거세졌다. 지면이 페이고, 살벌한 기세에 한수영이 한 발짝 뒤로 빠졌다. 유중혁은 우뚝 선채 재앙의 기세를 감내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 "의미가 있다."
- "설명해 봐."
- "기다림의 대가로 너는 이 세상의 마지막을 보게 될 것이다."
- " . . . 뭐?"

벙찐 재앙에게 유중혁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 "나와 함께해라, 신유승. 나는 널 죽이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