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람의 재앙은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증오해 마지 못한 대상에게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함께 . . . 라고?'

41회차의 유중혁은 동료를 도구로 취급했다. 거듭된 시나리오에 그들이 죽어 나갈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되려, 피도 눈물도 없는 메마른 감상으로 그들의 헌신을 폄하했다.

이지혜가 죽었을 때 유중혁은 이렇게 말했다.

- 앞으로 해상전은 조금 힘들겠군.

이현성이 죽었을 때 유중혁은 이렇게 말했다.

 - 아까운 방패를 잃었군.

그리고 신유승 자신이 유중혁의 명을 받아 세계선의 방랑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 . . 

- 네가 알고 있는 정보를 전하면, 죽어라. 재앙은 넷으로 족하다.

따뜻한 위로,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매몰차게 그녀를 보냈다.

'그랬던 당신이 . . . 이제 와서?'

범람의 재앙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의 풍파에 아스라져 버려진 회차의 잔재에 불과한 자신에게 건네는 구원의 손길을.

그 손의 주인이 그녀가 가장 미워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고작 한 번의 인정에 동요해 실낱같은 희망을 떠올리고만 자기 자신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재앙은 유중혁의 말을 부정했다.

"예언자가 . . . 그렇게 말하래?"

넘겨짚은 말이었으나 하필이면 진실이었다. 방금 유중혁의 대사는 김독자가 각본을 짜고, 한수영이 연출한 한편의 연극이었으니까. 

김독자와 한수영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유중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기서 유중혁이 어떻게 대답하냐에 따라 연극은 희극이 될 수도, 비극이 될 수도 있었다.

". . ."

침묵이 길어지자 두 사람은 한낮의 밀회로 유중혁을 독촉했다. 

- 야, 뭐 해! 아니라고 해야지!
- 중혁아. 한 번이면 된다.

" . . . "

유중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유중혁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독자는 문득 불안감에 휩싸였다. 

'원작에서 유중혁이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나?'

적어도 3회차에서는 없었다. 다른 회차를 통틀어도 유중혁이 거짓말을 한 횟수는 손에 꼽는다. 

유중혁은 누군가를 기만하는 것을 무척이나 혐오하는 인물이었으니까.

김독자는 은연중에 유중혁이 다음에 할 말을 짐작했다. 아마도 그것은 한수영과 김독자의 기대를 한참 벗어난 대답일 것이라고.

이는 정답이었다.  
정확히는 반쪽짜리 정답.
추측의 결과는 맞으나 그 원인이 달랐다.

'녀석은 위험하다.'

유중혁은 애초부터 재앙을 살릴 생각이 없었다. 물론 전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김독자의 제안에 잠시 혹하긴 했으나, 그녀의 증오 어린 눈빛과 자신을 공격하지 못해 안달이 난 손아귀를 관찰하고 회유할 마음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니 여기서 죽여야 한다.'

비록 재앙은 유중혁을 애증하고 있었으나, 김독자처럼 [전지적 독자 시점]도 없는 유중혁이 그 사실을 알리 만무했다.

결국 연극의 장르를 비극으로 몰고 간 것은 엇갈린 마음이었다.

유중혁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 . . . 그렇다. 아니면 네가 나를 죽일 것이라 말하더군."

결국 유중혁은 소신대로 진실을 선택했다. 한수영이 팔꿈치로 김독자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씨발, 좆됐는데?"

"말 안 해도 알아."

김독자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삼켰다. 그래, 순순히 넘어갈 유중혁이 아니지. 빌어먹을 회귀자는 대쪽 같은 성격 탓에 성운들과 마찰을 빚으면서도 끝내 그 성격을 고쳐먹지 않았다. 

회귀 회차가 네 자리수를 넘어가도 그 모앙이니, 고작 3회차밖에 안 되는 놈이 자기 말을 들어 먹을 리 없지. 김독자는 한탄하며 한낮의 밀회로 일행들에게 앞으로 닥칠 재앙을 경고했다. 

- 다들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이번 재앙은 이전 시나리오와 차원이 다를 겁니다.

화신들이 재앙에 대비하는 사이, 범람의 재앙 주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역시 그랬구나 . . . "

유중혁의 본심이 어떻든, 방금의 선언은 범람의 재앙의 처지에서 기만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유중혁은 재앙 자신을 세계선의 미아로 만든 것도 모자라, 진정한 동료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농락한 악인이었다.

재앙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인내심은 이미 한계를 넘은 지 오래. 담을 곳 없는 분노가 서서히 범람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확신했어. 세계선이 달라져도 대장은 달라지지 않아.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지."

"나를 41회차의 녀석과 겹쳐보지 마라. 나는 놈을 모른다."

"아니야. 대장은 앞으로도 여전할 거야. 대의를 앞세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나를 또 세계 선의 미궁에 빠뜨리겠지."

" . . . "

유중혁은 말없이 검을 뽑았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범람의 재앙의 등 뒤로 다수의 몬스터 게이트가 출현했다. 그녀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증오해, 대장."


*


저열하다.
그리고 처절하다.

상처 입은 재앙의 분노에 대지가 약동했다. 수백 마리의 괴수들이 쓰나미처럼 서울을 휩쓸었다.

"크아악!"
"살려줘!"

파량에 휩쓸린 화신체의 사지가 조각나고 붉은 강우가 대지를 적셨다. 도망치려는 자도, 맞서려는 자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재앙은 잔혹하게도 공평했다.

전의를 상실한 대다수의 화신들은 시나리오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바야흐로 재앙의 시간. 이제 멸망밖에 남지 않았다고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카앙!

꺾이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유중혁이 최전방에서 검을 휘둘렀다.

"공격을 허용하면 안됩니다!"

그 옆에서 김독자가 [바람의 길]과 책갈피로 보조를 맞췄다.

"독자 씨!"

두 사람의 빈틈을 이현성이 온몸으로 틀어막고.

"제정신이에요, 현성씨?! 그렇게 무턱대고 달려나가면 어떡해요!"

쓰나미처럼 범람하는 괴수들 사이에서 정희원이 멸마의 겁화를 피워냈다.

그럼에도 수세에 밀리자 이지혜가 유령함대를 이끌고 화포를 쏟아부었다. 이에 재앙의 수족들이 호수를 얼려 버리려고 했으나 이길영과 신유승에 의해 번번이 막혔다. 

난리통에서 유상아는 올림포스의 성유물로 전장을 누비며 화신들을 구조했다.

전장의 균형이 팽팽하게 유지됐다. 강렬한 전투에 성좌들이 열광했다. 공방이 오갈 때마다 그 여파로 무대가 요동쳤다.

지면이 박살 나고 파공음이 고막을 울리면, 사방으로 흩날리는 누군가의 혈액. 

모두가 상처투성이었으나, 그중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존재는 범람의 재앙이었다. 

전투가 발발하기 전부터, 그녀는 여타 화신들과 비교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천 년의 기다림으로 피폐해진 정신.
배신감으로 얼룩진 마음.

보이지 않는 상처는 재앙의 심신을 조금씩 갉아먹었고, 작금의 전투는 재앙의 상처를 더욱 해집어 놓았다.

유중혁의 파천검을 받아내며 재앙이 생각했다.

'연계가 유연하다 . . .'

일행은 마치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였다. 빈틈이 생겨 공격하면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몸을 던지고, 뒤처지는 자를 사냥하려 들면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떼지어 달려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전투방식. 그 중심에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재앙을 괴롭게 만들었다.

'어째서 . . . 어째서 저 인간을 위해 싸우는 거야 . . . 이건 마치 . . . !'

부정하고 싶었다. 

부정하지 않으면 이제 증오밖에 남지 않은 자아를 상실해 버릴 것만 같아서. 죽지 못해 살아온 그녀지만 죽는 것은 두려웠기에. 

눈을 감고 눈앞에 보이는 경광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찬랸하게 빛나는 눈앞의 경광은 41회차의 신유승이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던 것이기에.

신유승은 차마 뱉지 못한 문장을 삼키며 생각했다.

'마치 동료 같잖아.'

재앙이 이빨을 뿌득 갈았다. 마지막 일격에 온 힘을 담아 휘둘렀다. 풍압과 마력 폭풍에 휩쓸린 화신들이 뒤로 튕겨 나갔다. 

"크윽!"

김독자 일행을 뿌리치고 상념을 다스렸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생각이 맴도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이런 세계선이라면 어쩌면 나도 . . . '

흐릿한 시선이 요동치다가 한 곳에 머물렀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어린 자신을 이용하려 든 유중혁의 파렴치함에 분노가 솟구쳤으나, 이번 세계선의 동료들과 함께 싸우는 모습을 보자 되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도 저렇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고. 

신유승을 보며, 신유승이 생각했다.

'나도 . . . '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재앙을 죽여라!"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시나리오 클리어 보상에 눈이 먼 화신들이 달려든 것이다. 범람의 재앙은 손짓 한 번으로 그들을 소멸시켰으나, 그들이 내뱉은 단말마는 잊을 수 없었다.

' . . . 나는 재앙이다.'

악마와 손을 잡고, 세계선을 넘은 이방인. 돌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외톨이. 

지독한 고독함을 느끼며 신유승은 현실을 자각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허탈함은 다시금 분노로 이어졌다. 범람의 재앙이 검을 역수로 잡아 힘겹게 몸을 지탱하는 유중혁을 눈에 담았다.

'대장도 내 고통을 느껴봐야 돼.'

아니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잖아. 

그리하여 재앙이 폭주하려는 순간, 침묵을 깨고 누군가가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신유승."

재앙이 시선이 하야멀건한 남자에게 향했다. 분명 자신을 예언자라고 밝힌 화신이었다. 기이하게도, 흐릿한 남자의 인상이 어딘가 낯익었다. 

그래서일까. 미간을 찌푸린 재앙의 입에서 재앙 자신도 의도하지 않은 문장이 튀어나왔다.

"당신은 . . . 누구야?"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김독자. 너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


범람의 재앙과 혈투를 벌이며, 김독자는 한낮의 밀회를 통해 유중혁에게 빈정거렸다.

- 덕분에 고생한다, 중혁아. 

평소 같으면 '죽인다'부터 튀어나왔을 유중혁도 이번만큼은 할 말이 없는지 느닷없이 한수영의 거취를 물었다.

- . . . 한수영은 어디 있지? 
- 도망쳤어. 자긴 있어 봤자 도움이 안 된다고.

당초 여기까지 온 것도 본체가 아닌 아바타라, 한수영의 성격을 생각하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카앙!

"윽!"

책갈피로 '리카온'을 불러 온 김독자가 [바람의 길]을 사용해 간신히 복부가 관통되는 꼴을 면했다. 

이현성과 정희원이 버티는 동안, 잠시 퇴각한 유중혁이 입에 고인 핏물을 뱉으며 말했다.

"우리가 이길 것 같나?

"글쎄. 전력 상으로는 비등비등해. 대신 장기전으로 갈수록 우리가 더 유리해져."

김독자 일행에게는 의선 이설화, 그리고 능력치 강화와 포션 구입에 지급가능한 코인이 있다. 반면, 범람의 재앙에게는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상황을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었다. 일행들 모두가 사활을 걸고 싸워 겨우 균형을 이뤘으니, 이대로라면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희원씨와 현성씨가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지만.'

정희원이 '멸악의 심판자' 였다면 이미 끝난 싸움이나, 아쉽게도 그녀는 '멸마의 심판자' 였다. 정희원의 배후성, 우리엘의 지옥염화조차 아직 승계작업이 덜 끝나 불안정한 상황. 

이현성과의 콤비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리타이어 됐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못 가 두 사람이 밀리기 시작해 유중혁과 김독자가 합류해야 했다.

'화력이 부족해.'

생각하기 무섭게 하늘에 불길을 수놓은 포탄 하나가 재앙에게 적중했다. 무심결에 뒤를 흘겨보자 유령함선에 탑승한 이지혜가 당찬 목소리로 외쳤다.

"나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멍청아, 뒤를 봐!"

"뭐?"

근처에 있던 이길영의 경고에 이지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함선 밑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콰드득!

"미친."

재앙이 소환한 '퀸 매스우드'가 강물을 얼리고 있었다. 자칫 유령함대까지 무력화될 뻔했으나 래서 드래곤의 브래스 덕에 간신히 회피에 성공했다. 

신유승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하아, 덜렁대지마요. 언니."

안도의 한숨을 내쉰 김독자는 재앙 공략에 집중했다. 시나리오 도중 여유가 생겨 [무기연마]를 비롯한 전투형 스킬을 익혀둔 덕에 어느 정도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다.

코인으로 레벨을 올려 기감을 상승시키자 문득 김독자는 재앙의 움직임이 전보다 헤이해졌음을 인지했다. 유중혁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낮의 밀회로 통신했다.

- 녀석의 움직임이 굼떠졌다.
- 서두르지 마. 기습을 준비하는 걸 수도 있어. 

멸살법 원작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평정심을 잃은 범람의 재앙이 일순 강력한 기파를 터뜨려 일행들 다수를 무력화시켰다는 서술을 분명 읽었다.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던 도중, 김독자는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갑자기 동요하게 만들었을까. 때마침 발동된 [전지적 독자 시점]의 2단계 덕에 김독자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41회차 신유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료라고? 웃기지 마?'
'그럼 나는 뭔데. 내 회차는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건데.'

절반은 증오로.

'어쩌면 나도 . . .'
'이 세계선이라면 . . . '

절반은 소망으로 이루어진 사고. 

몰아치는 상념을 김독자는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그리고 결정했다.

- 중혁아.
- 뭐지?
- 나는 한 번 더 회유해볼 거야.

한 번 더 도전해 보기로 말이다. 이건 독자의 고집이었다. 동시에 등장인물의 불행을 소비하며 살아남은 독자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다.

김독자의 메시지를 받은 유중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 방금 못 봤나? 녀석은 나를 증오한다.
-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를 증오하는 거지 나를 증오하는 건 아니잖아.
- . . . 죽인다, 네놈.

범람의 재앙이 마력을 폭발시킨 것은 그때였다. 황금빛 스파크에 휘말려 전위에 있던 네 명의 화신이 전부 튕겨 나갔다. 정희원을 감싸 안은 이현성은 허공을 날다시피 해 꽤 먼 거리를 날아갔다. 

그나마 미리 대비해 충격을 완화한 김독자와 유중혁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착지했다. 거센 숨을 몰아쉬며, 김독자가 육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재앙이 정말 너를 증오하기만 할까?"

이번 질문에는 유중혁도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의미지?"

"너를 증오하는 게 전부였다면 이미 2회차에서 범람의 재앙은 너를 포함한 모두를 죽였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2회차의 그녀는 유중혁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분명 그녀 역시 41회차의 유중혁에게서 비롯된 증오를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점은 '증오'가 아니라 '실망'이야. 네가 '3회차'라는 사실이 녀석을 폭주하게 만든 방아쇠고. 거짓말까지 들통났으니 예정된 일이었어."

" . . . " 

유중혁은 반박할 수 없었다. 김독자의 추리가 현 상황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엔 우리의 진심을 담아 말해야지."

김독자가 멈춰 선 재앙을 한번, 유중혁을 한번 쳐다 봤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 . . . "

"이번에는 억지로 안 시킬게. 대신 너답게 말해. 너만을 바라보고 천 년을 버텨 온 사람에게 진심 어린 몇 마디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유중혁은 침묵했다. 그리고 김독자가 알기론, 유중혁의 침묵은 곧 긍정의 표시였다. 하여튼 까다로운 자식이라 생각하며 김독자가 한걸음 전진했다.

걸음이 이어지고, 재앙의 체구가 점점 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재앙에게 가까워질수록 김독자는 그녀가 생각보다 여리여리한 체구임을 알게 되었다. 

눈밑에 짙게 깔린 피로와 일그러진 입매, 고슴도치처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튀어나온 깃털만 없다면, 정말 평범한 여자였다. 

41회차의 신유승이 말했다.

"당신은 . . . 누구야?"

"나는 김독자. 너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나를 . . . ?"

신유승과 김독자가 서로를 마주봤다. 

"이상해 . . . "

"뭐가?"

"이곳은 내가 모르는 것 투성이야. 낯설고 . . . 외로워."

" . . . "

"전부 당신이 계획한 거야?"

그 말에 김독자는 순간 한 마왕을 떠올렸다. 자신보다 음험하며 도무지 그 속셈을 유추할 수 없는 마왕. 그녀에 비하면 자기 계획은 계획이라 부르기도 민망했다. 

대신 김독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하지만 네가 올 건 알고 있었어."

신유승은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그랬겠지. 나를 죽일 준비도 전부 끝마친 상태였으니까."

"우리는 너를 구할 생각이었어."

"나를 . . . 구해?"

일순, 신유승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웃기지 마. . . ! 너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 . . . "

"내가 살았던 41회차는 이제 없어. 이 우주 어디에도, 그 어떤 세계선에서도! 아무도 . . . 아무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

어느새 다가온 일행들 전부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없어. 내 고통도, 상처도 . . . 만약 네가 말하고 싶은 게 그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자고 제안하는 거면 . . . 그딴 건 기만일 뿐이야."

김독자는 오랜만에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마따라 자신의 선의는 가진 자의 기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만을 부려서라도 김독자는 41회차의 신유승을 구원하고 싶었다. 유중혁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모든 회귀자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증오하면서 살아가지."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도 다시 살아가야 하는 존재. 

"그들이 아직 아무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 믿고 행동한다."

그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존재. 

"왜냐하면 내안에서 그 모든 건 '분명히 일어날 일'이고, 그걸 부정하면 나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회귀자 유중혁. 그는 41회차의 신유승에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말하고 있었다.

"너도 그렇게 살아라, 신유승. 이 회차에서 나를 죽이기 위해서 살아가라."

" . . . "

유중혁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거기까지였다. 남은 것은 41회차 신유승의 선택. 그녀는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이 잠겨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단시간에 풀어내기엔 헤묵은 감정이 너무 많았다. 

이에, 김독자가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곳이 너의 새로운 회차야."

"아 . . . "

41회차 신유승이 그 손을 잡을려는 순간, 불청객이 난입했다. 

[죄송하지만 그 이상은 두고 볼 수 없군요.]

중급 도깨비가 무대에 난입했다.


*


[저 가증스러운 혓바닥을 뽑아버리고 싶군요.]

가증스러운 도깨비 같으니. 대도깨비만 없었다면 진작에 죽여 버렸을 텐데 말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비형을 중급 도깨비로 승진시켜 놓을 걸 그랬다. 제아무리 비형의 채널 규모가 중급 도깨비와 맞먹을지라도 직급이 딸려 시나리오의 주도권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다.

- [등장인물 '신유승'의 성격이 '악'으로 고정됩니다.]

옆에서 관망하던 메타트론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 많은 개연성이 모일 줄은 몰랐습니다. 분명 괜찮은 전개였는데 . . . ]

메타트론의 말이 백번 옳다. 신파를 싫어하는 성좌들이 많다지만 충분히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연출이 뛰어났으니까. 

억까 하는 성운들만 막으면 순탄하게 흘러갈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 [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전개에 만족합니다!]

[제아무리 신선한 전개도 반복되면 식상해지기 마련이죠.]

재앙을 살려 아군으로 삼는다. 이미 히든 시나리오에서 김독자 일행은 소재앙 래서 드래곤을 살리는 전개를 보여줬다. 때문에 작금의 상황에서 채널 내 상당수의 성좌들이 기시감을 느끼고 말았다.

성좌란 이야기에 미친 존재. 더 재밌고 새로운 이야기를 보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개연성을 지급했다.

-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들의 비극에 환호합니다!]

그리고 김독자 일행은 현재까지 이상할 정도로 이야기를 순탄하게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원작보다 강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롯된 평이한 전개에 질린 성좌들, 눈에 띄게 강한 모습에 시기심을 품은 성좌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게 한까번에 터져 버린 게 작금의 사태였다. 단일 성운의 힘만으로는 저지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메타트론이 질문했다.

[어쩌실 겁니까? 보아하니 재앙의 죽음은 원치 않는 것 같은데.]

나는 잠깐의 고민 끝에 말없이 아공간 코트에서 성유물 하나를 꺼냈다. 메타트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걸 쓰실 생각입니까?]

[문제있나요?]

나는 손에 잡힌 선악과를 응시했다. 탐스러운 빛깔의 성유물은 선악을 반전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어차피 내가 먹을 것도 아닌데 필요한 이에게 줘야죠.]

[ . . . 설령 '데우스 액스 마키마'를 발동하더라도 선악과는 그것을 섭취한 대상에 한하여 효력이 발생합니다.]

메타트론이 화면을 응시했다. 끊어진 필름 효과에 저항하기 전이라 41회차의 신유승은 원작에서 강제 집행권이 적용될 때보다 강했다. 

[저 난관을 뚫고 선악과를 억지로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 . . 거의 불가능하겠죠.]

메타트론의 말마따라 제압은 무리였다. 

'화신들'에게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내려갈 생각입니다.]

현현은 무리고, 강림의 방식으로.

내 말을 들은 인형이 벌떡 튀어 올랐다. 경악 어린 진언이 귀청을 때렸다.

[미쳤습니까?! 자칫하다간 지구에 이계의 신격이 강림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괜찮습니다. 든든한 빽이 있거든요.]

[빽이요?]

혹부리왕의 소원권이 아직 하나 남았다. 그는 은밀한 모락가와도 안면이 있으니 여차하면 지구에 강림하는 이계의 신격을 막아달라는 부탁도 할 수도 있겠지.

[. . .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막대한 개연성 후폭풍이 들이닥칠 겁니다.]

[뭐, 찌릿찌릿하고 좋겠군요.]

정 안 되면 성운의 개연성 좀 끌어다 써야지. 내 지분이 꽤 있으니 크게 반발하는 마왕들도 없을 거다.

주섬주섬 준비하는 모습을 보던 메타트론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 질문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순간 망설여졌다. 이유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하나만 추려본다면 . . . 

- 구하고 싶어. 미래의 나.

제 어린 화신이 저렇게 간절히 염원하는 데 차마 무시할 수 없었기에. 

나는 웃으며 답했다.

[궁금하면 배후성 노릇 한번 해 보던가요.]

잠시 멍때리던 메타트론이 이내 두손두발 다 들었다는 듯 항복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의외의 제안을 던졌다.

['선악과'의 '데우스 액스 마키마'는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 . . 진심인가요?]

상징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덴의 성물을 마왕이 하사한다면 저희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하긴.]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였다. 허나, 메타트론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 . . . 전에 참회동에서 각자의 선과 악을 실현해 보자고 제안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랬었죠.]

[상처 입은 어린 양을 구원하는 건 선을 행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죠.]

천사 입에서 선을 행한다는 말이 나오는 게 이렇게 어색할 줄은 몰랐다. 이걸 믿어도 되나? 혹시 몰라 사상검증을 실시했다.

[변심한 계기를 알고 싶군요.]

[ . . . 참회동에서 작별한 뒤, 계속 자문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다가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죠.]

[벽을 넘은 자]로 확인해 본 결과, 메타트론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는 회한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이 그때보다 못하더군요. 선을 향한 순수한 열의는 선의 승리를 위한 열망으로 왜곡되어 자신을 좀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초심으로 돌아가겠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이었다. 이제 묵시룡을 부활시키겠다는 미친 생각은 안 하겠구나. 

독립한 아이를 보는 기분이라 코끝이 찡해졌다. 

[후훗, 좋아요. 그대를 믿을게요, 메타트론.]

나는 메타트론에게 선악과를 건넸다. 선악과를 받은 메타트론이 문득 질문했다.

[선악과는 누구한테 전송합니까?]

[그대가 요즘 관심 있는 화신에게.]

[. . . 정말 못 당해내겠습니다.]

결국 실소를 자아낸 메타트론이 김독자에게 성유물을 전달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이곳 시나리오는 뒷전으로 미뤄야겠습니다.]

[뭐, 어쩔 수 없죠.]

아바돈이야 좀 늦게 부활시켜도 상관없으니까. 원래 메타트론이랑 깜짝 삼자대면을 시킬려고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포기하는 수 밖에.

아쉬움을 접어둔 채, 신유승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자기 화신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앙을 구하고 싶냐고 묻습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신유승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사방에서 낙뢰가 내리쳤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시나리오에 강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