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김독자는 욕지거리를 삼켰다. 

이건 명백히 자신의 실수였다. 


순조로운 시나리오를 겪으며 안일해진 사고방식이 결국 이 사달을 냈다.


['범람의 재앙'의 성향이 악으로 고정됩니다!]


"지금 당장 멀리 떨어지세요!"


김독자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앙의 포효가 고막을 후볐다. 


"크아아악!"


이지를 상실한 재앙의 첫 번째 표적은 가장 가까이 있던 김독자였다.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에 흠칫 놀란 김독자가 반사적으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들었다. 


손톱과 검면이 충돌했다. 


쾅!


"커억!"


괴력이 방어를 무시했다. 충돌음과 함께 김독자의 신형이 사라졌다. 바닥에 두어 번 튕기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입에서 한 줄기의 선혈이 흘러나왔다. 


김독자가 입가를 훔치며 고개를 들자, 재앙의 주먹이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아, 이건 글렀다.'


김독자가 무심코 죽음을 직감한 순간, 금빛 실이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현성이 김독자를 받았다. 


"괜찮으십니까?!"


". . . 저는 괜찮습니다."


김독자가 눈동자를 흘끗 굴려 옆을 바라봤다. 아라크네의 성유물로 자신을 구한 유상아가 황급히 달려왔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상아씨."


"하아, 늦지 않아서 다행이예요. 다친 데는 없어요?"


"이 정도는 버틸 만 합니다."


이현성의 팔에서 내려온 김독자가 전장을 응시했다. 이번엔 유중혁을 표적으로 삼은 범람의 재앙이 무자비하게 진천패도를 난타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정희원이 멸마의 겁화로 훼방을 놓아 두 사람은 간신히 재앙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령함대를 타고 나타난 이지혜가 이길영과 신유승을 이끌고 합류했다. 


일행 곁으로 돌아온 유중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담담한 어조에 분노가 가득 실려 있었다.


"도깨비가 농간을 부렸다. 우리를 싫어하는 놈들이 기꺼이 개연성을 지급한 모양이군."


유중혁의 시선이 잠시 신유승에게 머물렀다. 김독자가 불안한 듯 신유승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건 안 돼."


". . . 안다. 여기서 마왕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없다."


'끊어진 필름 이론'을 활용하면 손쉽게 범람의 재앙을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야 이전 회차에서 자신을 죽였던 마왕과 척을 지게 된다. 


한때 그녀의 집착을 한 몸에 받았던 유중혁이 속으로 치를 떨었다. 


"하지만 재앙은 여기서 죽여야 한다. 이제 녀석을 구할 방도가 없다."


유중혁이 결연한 어조에 일행들이 김독자를 바라봤다. 늘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남자에게 일말의 기대를 건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독자라고 해서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초반 시나리오에서 성좌들의 힘은 그야말로 절대적. 그들이 지급한 막대한 개연성은 제아무리 김독자라도 거스를 수 없었다. 


문득 김독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밤하늘을 쳐다봤으나, 이내 단념했다. 제아무리 저희들에게 호의적인 성좌들이라도 어디까지나 우리의 불행을 소비하는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들의 불행을 즐거워합니다.]


김독자가 침체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이제 정말로 재앙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행들이 탄식했다. 누군가는 안타까움에 머리를 짚었고, 누군가는 분노에 몸서리쳤다. 


정희원은 명백히 후자의 인물이었다.


[절대선 계열의 성좌들이 '정희원'에게 '악'을 처단할 것을 중용합니다.]


". . . 울고 있었어요. 살려달라고, 힘들다고, 구해 달라고. 근데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에요? 저 여자를 죽이는 거?"


"희원씨 . . ."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정희원'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정희원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밤하늘을 응시했다. 


"이건 아니잖아요, 우리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뇌합니다.]


별자리의 맥락에서 우리엘은 신음을 흘렸다. 지고한 대천사도 지금 이 전개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성좌 단신의 힘으로 시나리오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 설화급 성좌인 그녀로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에 우리엘이 입술을 짓씹으며 화신에게 현실을 자각시킬 지 아니면 용기를 북돋아줄 지 고민하던 와중, 이변이 일어났다. 


츠츠츳! 


금빛 스파크가 무대를 뒤덮었다. 중급 도깨비 바울이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채널 내 성좌들이 눈을 부릅뜹니다!]


당황한 것은 화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뭐야?!"


"재, 재앙이 온다!"


대다수의 화신들이 지레 겁을 먹곤 도망쳤다. 물론 사전에 데우스 액스 마키마를 경험하는 김독자 일행 만큼은 제자리를 고수했다. 이중 유일하게 무경험자인 이지혜가 유상아에게 질문했다.


"언니는 저게 뭔지 알아요?"


"성좌들이 주는 선물 . . . 일 거야, 아마."


뒷말을 흐린 이유는 한명오를 엄마로 만들어 버린 마왕의 흉계를 무심코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현성이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물일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도움이 될 만한 게 들어있으면 좋겠습니다."


여타 등장인물처럼 가슴에 품은 기대와는 별개로 김독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멸살법 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문 현상을 벌써 3번이나 보다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츠츠츳!


아무튼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지상에 도착한 것은 탐스러운 빛깔의 과실이었다. 과실은 김독자의 손에 안착했다. 과실의 정체를 알아차린 김독자가 무심코 욕지거리를 뱉었다.


"미친."


선악과가 왜 여기서 나와. 


김독자가 황망한 눈빛으로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와 연이 닿은 에덴의 성좌라곤 한 명밖에 없었다.


"혹시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님께서 주신겁니까?"


갑자기 거론된 배후성의 수식언에 정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독자씨?"


"이건 에덴의 성유물 중 하나인 선악과입니다. 대상의 성향을 반전시킬 수 있죠."


선은 악으로. 


악은 선으로. 


"잠시만요. 그렇다면 . . . "


재앙의 동태를 주시하던 유중혁이 말을 받았다.


"재앙이 된 신유승이 복용한다면 시나리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타스트림은 항상 임의로 선악을 분리시켰다. 선악의 이중주에서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거나, 그것으로도 모자르면 성마대전에서 자웅을 가렸다.


그리고 무구한 시나리오의 역사 속에서 '재앙'은 줄곧 악역을 맡아왔다. 다시 말해, 선역은 재앙의 감투를 뒤집어쓸 수 없었다. 


"착한 놈은 재앙이 될 수 없으니까."


설사 지평선의 악마가 농간을 부렸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독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희원의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선의 대행자랍시고 행하는 건 살인밖에 없던 지긋지긋한 나날에서 드디어 해방되는 느낌이랄까. 고마운 마음에 정희원이 배후성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정말로."


그러나 돌아온 대답이 다소 생뚱맞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자신이 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네? 그럼 누가 . . ."


그때, 소름 끼치도록 안온한 시선이 일행들을 훑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화신들을 바라봅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정신 나갔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릅니다!]


[성좌,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컵을 떨어뜨립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에덴>을 경계합니다.]


"하늘의 서기관 . . ."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수식언이었다. 


에덴의 2인자이자 선의 우두머리.

진명 메타트론. 


2차 배후선택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 말고는 접점이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지금 당장 묻고 싶은 게 넘쳐났으나, 일단 접어두었다. 


더 급한 일이 있었으니까. 


"크르르. . ."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중급 도깨비가 다시 한번 강제 집행권을 사용했다. 흰자위를 드러낸 재앙이 서서히 접근했다.


그녀가 흩뿌린 마력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에 대항하여 왼손에는 선악과를, 오른손에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든 김독자가 유중혁에게 물었다.


"녀석의 입에 선악과를 집어넣을 수 있을까?"


" . . . "


유중혁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중급 도깨비의 손에 넘어가 이지를 상실한 신유승은 이제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적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버틴 것보다 몇 배는 더 험난한 시련일 터. 어쩌면 여기서 몇 명은 팔다리, 심하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 . . 죽이는 것도 어렵지만 살리는 건 그보다 몇 배는 어려운 일이다."


유중혁이 김독자와 시선을 교환했다.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 김독자. 네놈은 녀석을 구하는 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죽음이 만연해진 세계이나 죽음의 의미가 사라지진 않는다. 소중한 사람이 죽는 것은 언제나 슬프고 괴로운 일이다. 그 비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겠냐고, 유중혁은 묻고 있었다. 


김독자는 곧바로 답하는 대신 고통스러워하는 재앙 신유승을 응시했다.


" . . . 어려운 일인 거 알아. 네 말대로 우리 중 누군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르지."


김독자의 시선이 하늘에 닿았다.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히 많은 별들. 그들의 탐욕스러운 안광이 무대를 밝히고 있었다. 


"근데 그건 다른 시나리오도 마찬가지야."


저들의 시선이 사라지지 않는 한, 빌어먹을 시나리오가 끝나지 않는 한, 이러한 비극은 영원히 되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들이 강제한 비극에 놀아나는 신세 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결국 이래도 저래도 죽을 거면, '어떻게 죽을지'는 우리 손으로 선택해야 되지 않겠어?"


그것이 이야기를 대하는 독자의 자세였다. 

또한, 유중혁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 . . . 따라와라. 길을 열겠다."


허나 세상일이 그렇듯, 모두가 두 사람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신유승이 그러했다.


정이 고픈 아이는 아직 곁에 있는 사람의 죽음을 수용하기엔 마음이 어렸다. 


소녀는 죽음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도 죽지 않기를 소망했다. 안일하다면 안일한 사고방식이었으나, 소녀의 나이를 고려하면 지극히 당연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소녀에겐 소녀의 꿈을 들어 줄 신이 있었다. 신은 악마의 뿔을 가졌으나 세상 그 누구보다 다정한 존재였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신유승을 바라봅니다.]


"아저씨 . . . "


"왜, 유승아?"


신유승이 결연한 눈빛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제가 미래의 저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콰쾅!!! 


김독자가 미처 되묻기도 전에 일은 벌어졌다. 조금 전 '데우스 액스 마키마'도 애들 장난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스파크가 작렬했다. 


아니, 낙뢰라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야, 신유승!"


경악한 이길영이 낙뢰의 중심지로 달려드는 것을 유상아가 저지했다.


"안 돼, 길영아! 잘못하면 너도 휘말려!"


아라크네의 강림을 몸소 겪어본 유상아라 작금의 사태를 금세 눈치챈 모양이었다. 다만, 피부로 느껴지는 기세는 아라크네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지혜가 망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 . !"


한차례 경련한 신유승의 몸에 누군가의 외형이 덧씌워졌다. 금빛 머리카락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머리에는 산양의 뿔이 자랐다. 등 뒤로 펼쳐진 날개는 명백히 악마의 것. 이윽고, 신유승의 육신에 깃든 존재가 천천히 눈을 떴다.


"네놈은 . . . "


[후훗.]


평소 신유승이라면 내지 않을 장난기 가득한 웃음소리. 사이한 눈동자와 마주한 일행들은 숨이 턱 막하는 기분을 들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격이 다르다. 눈앞의 존재에게서 살아남는 경우의 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 


지상에 강림한 마왕이 김독자를 향해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죽겠다는 겁니까. 그대는 여기서 죽어서는 안 돼.]


김독자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마시던 음료수를 뿜습니다.]

[성좌, '불을 삼킨 도마뱀'이 머리를 부여잡습니다.]

[마왕,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한숨을 내쉽니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실소를 짓습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걱정합니다.]


.

.

.


하여튼 유난이라니까. 손을 휘저어 눈앞에서 범람하는 간접 메시지를 치웠다. 이제야 앞이 조금 보였다.


하야멀건한 김독자, 어두컴컴한 유중혁. 청순한 유상아와 강인한 정희원. 단단한 이현성과 당찬 이지혜. 신비로운 이설화와 성숙한 이길영. 


그리고 이 육신의 주인 신유승까지.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등장인물들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이상야릇한 감상에 젖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한가롭게 감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나는 일행들에게 진언을 날렸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을 테니 자기소개는 생략하도록 하죠.]


이에 아까부터 나를 살벌하게 쳐다보던 유중혁이 응수했다. 까딱하면 벨 기세였다. 


"무슨 속셈이지, 아스모데우스?"


아무래도 이전 회차의 악연을 쉽게 잊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 편이 더 재밌을 것 같아서요.]


쿠르르 . . .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의 그레이트 홀이 점점 확장되기 시작했다. 무대 전체가 날아갈 상황에 당황한 바울이 내게 날아왔다.


[마왕님. 이러시면 곤란합니 - 켁!]


나는 핓빛 손아귀를 가볍게 휘둘러 바울을 원위치시켰다. 털을 곤두세운 채 비명을 내지른 바울이 관리국으로 도망쳤다. 


아마 상급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간 것이겠지. 관리국에서 지원이 오기 전까지 시나리오를 끝내야 한다.


[시간을 끌어 줄게요. 앞으로 3분 동안 재앙은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척하면 척이라고. 머리 좋은 김독자는 내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모두 달려요!"


김독자의 신호에 일행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앙을 향해 돌진했다. 유중혁도 마지못해 나를 내버려둔 채 선두를 달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의식의 수면 아래 잠든 신유승을 일깨웠다. 같은 정신을 공유하는 느낌이 상당히 어색했다.


[내 목소리 들리나요?]


- 이 목소리는 . . . 마왕님이세요? 


[맞아요. 이제 그대도 마음의 준비해야할 것 같아서 불렀답니다.]


- 준비라면? 


[지금부터 재앙과 그대의 역사가 공유될 겁니다. 재앙이 곧 그대고, 그대가 곧 재앙이겠죠. 기억이 범람한다고 해서 너무 당황하지는 말아요. 어차피 '자신'의 이야기니까.]


- 알겠어요. 저, 잘 참아낼게요. 


누굴 닮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애가 참 당차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나의 오랜 동반자를 불렀다.


[전용 스킬, '벽을 넘은 자'가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이번에 우리의 역할은 이야기를 고쳐쓰는 작가가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이어 주는 교량이다. 본래 김독자가 해야 할 일이지만 원작의 전개가 뒤틀린 관계로 내가 떠맡았다.


-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게 타인이다.


본래 기능의 절반을 포기해서인지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투명해진 41회차 신유승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활자를 응시했다.


엉킨 실타래 처럼 잔뜩 꼬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이야기. 그것의 문맥을 정리해 현 회차의 신유승의 역사와 이었다. 내가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아아악!!"


- 으윽!


재앙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통제를 잃은 몬스터게이트에서 괴수들이 말 그대로 쓰나미처럼 범람했다.


김독자 일행은 그 사나운 물살을 거슬러 직진했다. 서로 등을 맞대고 합을 맞추면서. 함께라면 무서울 게 없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름다운 경광과는 별개로 머릿속에선 재앙의 기억이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제3자의 처지에서 이야기를 엿보며 제멋대로 그녀의 아픔에 공감했다.


- 살고 싶어.


알아.


- 죽기 싫어.


당연해.


- 남을 상처 입히면서 살고 싶진 않아.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


문득 눈앞이 흐릿해졌다. 눈가를 닦으니 촉촉한 물기가 손에 묻었다. 내 것은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관찰자에 불과하니까. 이것은 내 화신의 눈물이었다.


- 그녀를 . . . 구하고 싶어요.


구해 줄게.


- 그녀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도와줄게.


마음의 소리에 답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고 앞을 쳐다 봤다. 5번째 메인 시나리오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불타고 베인 괴수들의 사체들이 줄지어 길을 만들고, 그 위를 김독자가 달렸다.


그에겐 유중혁이 주인공이겠지만, 내게는 저 녀석이 주인공이었다. 나는 주인공이 활약하는 장면을 뇌리에 각인시켰다. 김독자의 손을 떠난 선악과가 별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리고 깊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대상의 성향이 반전됩니다.]


[대상의 성향이 '선'으로 지정됩니다.]


[재앙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섯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개연성 후폭풍에 격통이 밀려오고 정신이 서서히 아득해져갔지만, 입술을 깨물어 견뎠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나를 향하는 시선이 무척이나 많았다.


[채널 내 성좌들이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후훗, 하지만 재밌었잖아요. 어느 채널에서 이런 이야기를 볼 수 있겠습니까?]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말에 동의합니다.]


누가 그랬던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나는 태반이 적대적인 의사가 가득한 시선을 나만을 위한 래드카팻으로 삼았다. 


첫 번째 미식협에서 그랬던 것처럼. 

질투는 나의 무대였다. 


그렇게 벌판에 도착했다. 내가 휘청거리자 김독자가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우리는 잠시동안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를 담았다. 


[그녀에게 데려다줘요.]


" . . . 알겠습니다."


김독자의 품에 안긴 채 하늘을 비상했다. 지평선 너머에서 해가 뜨고 있었다. 


새로운 오늘이 왔다.


새로운 인연에 얼굴을 붉힌 하늘 아래로 몸을 잔뜩 웅크린 여자가 있었다.


그녀와 나는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구했고, 그녀는 내 덕에 목숨을 부지했다. 


삶이란 이토록 예측불허한 것이기에 나는 희망찬 내일을 꿈꾸며 오늘을 살아간다.


신유승이 힘겹게 입술을 뗐다.


"어째서 . . . 나를 . . ."


나는 그냥 말없이 두 팔을 벌려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비록 체격 차이 탓에 내가 그녀에게 안긴 신세가 되었지만. 


나는 뻣뻣하게 굳은 신유승의 등을 한번 크게 쓸어 내렸다. 내가 지금까지 받은 온기를 고스란히 물려주자 숨소리가 편안해졌다.


나는 작게 속삭였다.


[이제 그대의 삶을 살아요.]


벽을 넘어 닿은 진심에 신유승은 내 품 안에서 아이처럼 울었다.


더 이상 범람의 재앙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