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독자는 몇만 년을 보낸 지하철보다 설원이 더 마음에 들었다. 회백색으로 덧칠된 철문은 수백 년을 들여다봐도 변함이 없지만, 눈이 그치지 않는 설원은 매 순간 새로운 풍경을 자아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눈에 푹푹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새하얀 눈 아래로 푹 꺼진 구멍이 활자처럼 드문드문 늘어져 있다.



 김독자가 서 있는 이곳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도 땅 위를 덮은 것도 죄다 하얀색이라 우주를 닮은 빛을 내뿜는 균열을 퍽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언젠가 읽었던 동화책 속에 나오는 토끼굴이 꼭 저런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저 구멍 속으로 뛰어든다면, 오래된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김독자는 얕은 숨을 내쉬었다. 입김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진짜 눈도 아니니 당연했다. 그 증거로 김독자는 이곳에 있는 동안 춥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끔 외롭다고 느낀 적은 있었지만. 어쩌면 자주.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일이 있기 전 모든 순간에.



 그 상태로 몇 걸음을 더 걷다가 새로운 균열을 발견한 김독자가 발걸음을 멈췄다. 김독자는 홀린 듯이 균열 안을 바라보았다. 오류가 난 화면처럼 일그러진 균열 너머로 망막에 맺힌 상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김독자가 아끼던 금발 여자아이였다. 그 옆에 언제나 붙어 다니던 남자아이도 보였다. 아, 아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늦었으려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언제나 상냥하던 갈색 머리의 여자가 아이들을 가볍게 타일렀다.



 여전히 검은색만 고집하는 누군가가 묵묵히 요리 재료를 손질하는 걸 새하얀 의사가 돕는 모양이었다. 명백한 흑백 대비에도 여전히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 옆에 좋은 술을 구했는지 즐거운 표정으로 전직 바텐더가 잔을 꺼내 들고, 곤란해 보이는 군인이 멋쩍게 웃었다.



 김독자는 무심코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은 보이지 않는 결계에 막혀버렸다. 억지로 힘을 주고 밀어 넣자, 결계가 뚫리긴커녕 손끝에서부터 설화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때론 형체 없이 수천 년을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김독자는 손을 떼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도 언젠가 닿을 수 있을까.



 옛날 같았으면 이 시점에서 제4의 벽이 한소리 했을 텐데. 제4의 벽이 없었더라면 김독자는 그 지하철에서 진작 미쳐버렸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제정신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다 보니 어느새 손가락 한 마디가 통째로 사라졌다. 이대로 내버려두다간 그를 이루는 모든 설화가 날아가 버릴 것이다. 문득 김독자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스운 생각이었다. 제8612 행성계의 화신 김독자라면 모를까, 가장 오래된 꿈은 결코 스타스트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잘게 쪼개져 이 우주를 떠돌아다니기만 할 뿐. 그러니 구원자는 여전히 죽을 수 없었다. 뭐, 어차피 걔가 날 사라지게 둘 일도 없으니까.



 저벅. 얼음 결정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등 뒤까지 온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를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므로. 뭐라 할 새도 없이 팔이 붙잡혔다. 위로 들어 올려졌다.



 “하여간 말은 지지리도 안 들어요.”



 이미 손가락 한 마디가 통째로 사라진 김독자를 본 한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이라도 한눈팔면 그새 삽질하고 있으니 원.”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김독자는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는 한수영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붙잡힌 팔을 타고 설화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한수영이 새로 쓴 이야기가 김독자의 빈틈을 메꿨다. 한수영은 빠져나간 설화의 빈자리가 다시 채워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언짢은 표정으로 김독자의 손을 놓아주었다.



 “나도 좀 쉬자. 네가 자꾸 헛짓거리하니까 내가 글을 쓰느라 쉴 시간이 없잖아!”


 “언제는 로맨스 삼천 편 넘게 써주겠다며.”


 “그 로맨스가 툭하면 설화로 자해공갈 하는 놈 꾸역꾸역 살리는 건 줄 알았겠냐?”


 “자해공갈이라니. 말이 심하다, 수영아.”


 “이럴 때만 성 빼고 부르지.”


 “그래서 삐쳤어? 그렇게 잘 안 불러줘서?”


 “...진짜 파업해버린다.”



 죽여버린다는 말과 별다를 바 없는 의미였으나 김독자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한수영이 저를 죽게 내버려둘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얼굴. 그 모습에 한수영은 다시 한번 왈칵 올라오는 짜증을 목 뒤로 삼켰다.








 설원에서는 정말 할 일이 없었다. 가장 오래된 꿈으로서 모든 세계선을 둘러보는 데 여념이 없는 김독자와 달리 한수영이 할 수 있는 생산적인 활동이란 글짓기가 유일했다.



 행간 사이를 잇고 공백을 채우다 보면 김독자는 한 번씩 사고를 쳤다. 그러면 한수영은 그걸 수습하고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빈말로도 따분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일상이었지만, 한수영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누구 탓을 하랴. 제삼자의 시선으로 봐도 한수영 인생은 한수영 스스로 꼰 것이 분명했음으로.



 이 허여멀건 한 오징어 녀석 구하겠다고 내 아까운 인생을 송두리째 갖다 바칠 때부터 예상했어야 하는데.



 그렇지만 한수영은 알았다. 설령 한수영이 시나리오의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해도 한수영은 다시 김독자를 만나러 갈 것이며, 그를 위해 펜을 들 것이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한수영은 바로 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정도는 있었다. 처음,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두 번째로 지하철에서 마주한 김독자는 어떤 표정이었더라?



 이렇게 된 이상 한수영은 곰곰이 떠올려보기로 했다.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그런 일그러진 얼굴이었던가. 문득 한수영은 그와 비슷한 표정을 그전에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중혁의 검강이 한수영을 찌르고, 종잇장처럼 무너지는 한수영을 받아내던 김독자. 모든 기억을 아바타로 전송하던 그 찰나에서, 한수영을 내려다보는 김독자의 표정이 딱 그랬던 것도 같았다.



 한수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억의 편린은 한수영을 좀 더 먼 과거로 이끌었다.



 그날도 이렇게 눈이 오고 있었다. 아니, 이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진짜 눈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와서 ‘진짜’를 구분 짓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기에. 한수영은 그런 사소한 오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내리고, 한수영과 김독자는 함께 있었다. 그 사실로 충분했다.



 행간 위로 활자가 내려앉았다. 한수영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사람들 보고 싶네.”


 “나도.”



 언젠가의 대화를 복기하며 김독자와 한수영은 설원 위를 걸었다. 그때는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더라도 반드시 만날 수 있다는 그런 막연한 믿음이라도 가졌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누군가는 이야기를 쓰고, 누군가는 이야기를 읽는다. 작가는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글을 쓸 수 없다. 독자는 작가가 없다면 독자가 될 수 없다.



 「새하얀 설원 위에 활자들이 노니는 세계. 그 세계 위에 김독자가 있었고, 한수영이 있었다.」



 종장과 영원. 그리고 끝나지 않는 이야기.



 “한수영.”



 한수영은 어쩐지 김독자의 다음 말을 알 것 같았다.



 “넌… 후회하지 않아?”



 동의어가 아니라고 해서 반의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이야기를 비로소 끝을 맺고 나서야 영원해지기도 한다.



 그들의 종장이 영원인 걸까, 아니면 영원이 종장이 된 것일까? 하나 확실한 건,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금, 한수영은 김독자가 울 것 같은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한수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독자. 너는 날 원망한 적 없어?”



 이 넓은 스타스트림 속에서, 불행하게도 그들은 만났다. 그 죄로 영원히 반복되는 멸망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멸망한 세상에서 그들은 다시 만났다. 우습게도 다시 사랑을 했다.



 이 끔찍하고도 고결한 비극 속에서 우리는 몇 번이나 만났을까. 몇 번이나 헤어져야만 했을까.



 김독자가 단 한 번도 49%의 자신을 내친 한수영을 원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한수영 역시 단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김독자는 한수영이 필요했다. 한수영도 김독자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지금 두 사람은 이곳에 함께 있었다.



 “중요한 건 여기에 네가 있고, 내가 있다는 거야.”



 한수영이 발끝을 세웠다. 그래도 눈높이가 맞지 않아 김독자의 머리를 밑으로 살짝 잡아당겨야 했다. 창백한 이마 위로 약간의 온기를 머금은 이마가 닿았다. 힐끔거리던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영락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내 머리에서 나오는 외전 최고의 해피엔딩은 이것일 듯...

구독자 1863축전으로 올리고 싶었는데 그냥 지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