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 . . 여긴?]

온몸이 걸레처럼 짜이는 격통에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뜨자, 나를 반겨 주는 것은 이질적인 경광이었다.

눈을 뜬 것과 감은 것이 다름없는, 칠흑 같은 어둠. 그림자에 먹힌 세상 속에서 나 홀로 빛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마치 유일한 별이 된 듯한 기분에 눈살이 찌푸러졌다가 문득 샘솟는 궁금증에 도로 완만해졌다.

그래서 여기는 어딜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전에도 비슷한 공간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봉인된 마왕의 성역이 이러했다.

[무저갱.]

[정답 . . . 이다.]

음울한 진언에 뒤를 돌아봤다. 기척을 느끼지 못한 이유는 저자가 강해서인 걸까, 아니면 내가 약해진 걸까.

확실한 것은 눈앞의 마왕은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나도 아직 범접할 수 없는 강자였다.

[오랜만이군요, 무저갱의 지배자.]

[그동안의 기다림에 비하면 . . . 찰나에 불과하다.]

글쎄다. 그런 것 치고는 간접메시지로 나를 독촉하는 빈도 수가 점점 많아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것 말고도 묻고 싶은 게 많았으니까.

[어쨌든,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마지막 남은 43번째 마계의 히든 피스는 중도에 포기했건만.]

[포기했다면 . . . 네가 이곳에 있지도 . . . 않았겠지.]

거 말 참 답답하게 한다. 조상님급 연장자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뒤통수를 후려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예의를 아는 마왕이니 참을성있게 아바돈의 말을 경청했다.  

아바돈이 양상한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너는 . . . 맹세를 이행했다.]

이윽고 손가락이 발밑으로 떨어졌다. 목소리에서 해방감이 묻어났다.

[그리고 내 족쇄를 푸는 데 . . . 성공했지.]

정작 당사자는 들어도 모르는 일이라는 게 흠이다.

[흐음,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요.]

메타트론이 마지막까지 남아 시나리오를 클리어했나? 그럴 가능성은 전무한데 . . . 차라리 도깨비왕이 시나리오 설계를 잘못했을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가설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머릿속에서 각종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을 무렵,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거린 것은 그때였다.

[설화, '이야기를 능멸한 자'가 태동합니다.]

이건, 지구에 강림한 뒤 얻은 설화인가? 

[설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배부른 미소를 짓습니다.]

. . . 설마? 

[전용 스킬, '벽을 넘은 자'가 당신의 추측을 긍정합니다.]

대충 이해했다. 놀랍게도 새로 얻은 설화가 고집불통인 근원설화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뭐, 내 것을 지키기 위해 깽판을 부렸으니 반골 기질이 강한 녀석의 성향에 맞았을지도 모르겠다만 . . . 그래도 신기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41회차 신유승을 구하기 위해 무대에서 이탈한 상태였다. 무대 바깥에서 얻은 설화가 '격노와 정욕의 마신'의 변주로 인정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정말 도깨비왕이 시나리오 설계를 잘못한 거 아닐까.

아무튼 예상치 못한 소득이었다.

지켜보던 아바돈이 말했다.

[뭔가 . . . 깨달았나?]

[대충은요. 여러모로 요행에 불과하다만.]

[본래 이야기는 . . . 우연의 연속이다. 관리국이 주장하는 개연성도 . . . 뜯어보면 빈도수가 높은 우연의 집합에 지나지 않지.]

[그야 현실은 소설이 아니니까요.]

나는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를 피는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윽!]

넘어질뻔하다가 간신히 팔을 앞으로 뻗어 균형을 회복했다. 내가 혼자서 낑낑대고 있자 아바돈이 사악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미친 짓을 . . . 했더구나.]

나는 힘겹게 날숨을 내뱉으며 답했다.

[후우, 원래 이 정도 스릴이 있어야 삶이 재밌는 법입니다.]

[긍정한다 . . . 나도 스타스트림의 3분의 1을 황충으로 뒤덮을 때가 . . .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으니.]

뭔가 스케일이 조금 이상하지만 아무튼 비슷한 맥락이었다. 아바돈이 그땐 그랬지를 시전하며 추억 속으로 빠져들 낌새가 보이자 나는 재빨리 말을 잘랐다.

전처럼 영양가 없는 전래동화를 듣고 앉아 있는 것은 사절이었다. 

[그래서 출구는 어디죠?]

[ . . . 뒤로 돌아서 . . . 나가라.]

예상외로 아바돈은 흔쾌히 나가는 길을 알려 줬다. 그렇게 꽉 막힌 남자는 아닌가.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나는 핓빛 손아귀를 손에 휘감아 만든 임시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빛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바깥으로 항하는 문을 코앞에 두고, 아바돈의 진언이 들려왔다. 

[봉인은 풀렸지만 . . . 나는 당분간 무저갱에서 나가지 않을 것이다.]

[도깨비왕 때문입니까?]

[ . . .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뒤를 돌아봤다. 안색을 굳힌 아바돈이 검은 눈자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같은 배를 탄 이상,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아바돈의 입술이 벌어졌다.

[놈은 이 세상의 주인 . . . 불쾌한 사실이지만, 아직 놈에게 대항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 . . 존재하지 않아.]

[한마디로 쫄은 거군요.]

[맹랑한 것 . . . 이곳에 영원히 . . . 갇히고 싶으냐?]

두렵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진심으로 이곳에 남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말을 조금 순화했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때를 기다리겠다는 소리군요.]

[그렇다 . . . 애당초 그리하도록 . . . 존재를 맹세했지.]

변명처럼 들리는 것과는 별개로, 아바돈의 말마따라 그는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함부로 날뛸 수 없다.

그것이 나와 아바돈이 맺은 계약이었으니까. 나는 약속을 지켰고 이번엔 아바돈의 차례였다.

[그렇다면 그대는 조만간 닥쳐올 전쟁에 대비해 설화를 추스르는 게 좋겠군요. 제대로 싸워 본 게 3만년 전이니 몸을 풀 시간이 필요하겠죠.]

아바돈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기에 개인적인 요구사항을 덧붙였다.

[덤으로 그대의 화신도 성장시키고요.]

[내 화신이라면 . . . ]

[이길영 말입니다.]

잠시 고뇌하던 아바돈이 손을 휘저어 성류방송 채널을 띄웠다. 소인종 크기로 작아진 이길영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 피스랜드인가.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내 성흔을 받기엔 . . . 저 아이는 아직 너무 약하다.]

[누가 성흔을 주라고 했습니까? 주머니에 있는 코인 좀 쓰라구요.]

아바돈의 행적이 행적인 만큼, 그의 설화가 벌어들이는 코인도 어마무시할 터.  3만 년 동안 따로 유희를 즐기지도 못했으니 수중의 코인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양산형 제작자 왈 돈은 쓰라고 있는 것. 나는 썩어가는 코인들에게 자본주의의 자유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르신들 등처먹는 행사꾼의 심정으로 대화를 주도했다. 

[여력이 되면 다른 일행들도 지원해 줘요.]

[특별한 . . . 이유가 . . . 있나?]

[저들은 우리의 아군입니다. 아직 미약한 화신들이나 각자가 품은 잠재력이 개화하면 능히 성좌들에게 닿겠죠.]

[납득하기 . . . 어렵군.]

[납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 . . . 다면?]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켰다.

[저를 신뢰하냐 마냐의 문제죠.]

[더욱 . . . 납득하기 어려워.]

[ . . . ]

이 망할 노친네가? 여기까지 와놓고 이러기야? 어처구니가 없어 이마를 짚자 아바돈이 능글맞게 웃었다. 

[하지만 . . . 네 이야기는 다르지 . . . 네 이야기는 오랫동안 지켜봤으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면에서 화신들이 경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 "왜, 뭔일인데?"
- "아니 갑자기 만 코인을 후원받아서 . . . "

화면에서 손을 뗀 아바돈이 놀란 화신들을 눈여겨봤다. 

[저들의 이야기도 . . . 지켜보겠다 . . . ]

나는 아바돈의 의사를 수긍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시간이 증명해줄 테니까. 나는 작별 인사를 고하며 문을 통과했다.

[다음에는 좀 더 밝은 곳에서 만나길 바라죠.]

배경이 일그러지며 무저갱의 어둠이 순식간에 걷혔다. 대신 마계의 붉은 노을이 시야를 단풍잎 색깔로 물들였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한낮의 밀회를 한번 확인해봤다. 

그리고 이내 모골이 송연해졌다.

[부재중 메시지함 : 999 ]

[허허 . . . ]

돌겠네.


*


[그래서,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나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손길과 다르게 그리고리의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무수히 많은 변명거리를 떠올렸다가 전부 씨알도 안 먹힐 것을 지례짐작하고 준비한 변명들을 파쇄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내 잘못이군요 . . . 마왕 자격 실격입니다. 그러니 나 대신 이제 그대가 마왕 위를 맡아 - ]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십쇼. 그리고 줘도 안 갖습니다.]

어, 그건 조금 곤란한데. 은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다른 의미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안 받을거예요?]

[진정 제가 서류 더미에 깔려 죽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나는 차마 그렇다고 말할 수 없어 그리고리가 깎어 준 사과 한입 베어문 채 침묵했다. 허나 내 침묵을 다르게 이해했는지, 이번엔 그리고리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진짜로?]

['잔짜로'는 반말이고.]

검지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딱밤모션을 취하자 그리고리가 움찔했다. 학습된 공포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죄송합니다. 당황한 나머지 그만 . . .]

아무튼 서로 한대씩 주고받으니 분위기도 아까보다 유해졌다. 나는 침대 머리판에 뒤통수를 비스듬히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부재중 메시지함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주된 고민거리였다. 마계판 '판도라의 상자'랄까. 열었을 때 후폭풍이 두려워 열지를 못하겠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 . . ]

사과껍질을 마력으로 태운 그리고리가 잿더미를 치우며 말했다.

[그냥 연락하시죠. 매도 빨리 맞는 게 낫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리고리의 말이 맞긴 하다. 어차피 한동안 시달릴 거 빨리 끝내버리는 게 낫지. 

하여, 눈 딱 감고 메시지 함을 클릭했다. 내가 확인했다는 것이 상대에게도 전달된 순간, 대화방의 모두가 비슷한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니, 전부 네글자로 간추릴 수 있었다.

- 지금 간다. 

[문 잠궈요, 그리고리.]

내 말에 그리고리가 곤란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그게 . . . 이미 늦었습니다.]

[네?]

[사실 마왕님 지인분들께서 마왕님이 돌아오시면 연락해 달라고 부탁한 터라 . . . ]

츠츠츳!

성 근처에서 격의 파장이 느껴졌다. 칙칙하지만 정겨운, 어두컴컴하지만 아늑한, 낯익은 느낌. 격의 주인들에게 침실이 침공당하는 건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마왕, 성좌가 사이좋게 서 있는 풍경에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그들의 시선이 오로지 나를 향하고 있음에 한숨이 나왔다.

침대에 누워 손님을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허리를 일으켜 세우자 아몬이 말했다.

[그냥 누워 있어라.]

[그럴까요?]

덕분에 편하게 손님을 맞이할 수 있었다. 게티아 측에서는 아몬이, 흑운에서는 염룡이와 샐리맨더, 명계에서는 여왕님이 직접 납시셨다.

쪼르르 달려온 샐리맨더가 나를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 울상일 것이라 짐작했다.

[아스모 미워.]

[음, 미안해요, 샐리맨더.]

[맨날 다쳐서 오고.]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을 꿔서 그래요.]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지?]

나는 말없이 샐리맨더의 댕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것으로 대답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고개를 치켜든 샐리맨더가 눈동자에 불꽃을 피웠다. 그것이 아름다우면서도 살짝 무섭게 느껴진 까닭은 어째서일까?

[죽지 마. 죽으면 용서 안 할 거야.]

애초에 죽어 버리면 용서든 뭐든 하등 무의미해진다는 게 내 지론이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뒷말을 삼켰다. 두 번째로 말을 건 이는 염룡이였다.


그는 내 화신체를 한차례 훑어보더니만 혀를 찼다.

[칫. 약해빠져서는.]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늘어진 손을 만지작거렸다. 옆에서 샐리맨더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괜찮냐?]

질문하면서 정작 내 눈을 마주치지 못 하는 흑염룡의 모습에 의아해하던 참에 페르세포네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후훗, 순박해라.]

[큭!]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뜻모를 웃음을 흘린 페르세포네가 탁상에 자신이 들고 온 아이템을 늘여놓았다. 

[혹시 도움이 될지 몰라 가져 왔어요.]

[고마워요 . . . 음? 근데 이건?]

치료용 아이템을 확인하던 와중 초크처럼 생긴 아이템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페르세포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기능을 설명했다.

[별건 아니고 위급상황 시 그대의 위치를 전송하는 아이템이에요.]

. . . 뭔가 미아방지 목줄 같다만. 주는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의구심을 집어넣은 채 한번 착용해봤다.

평소 입고 다니는 복장이 고스로리풍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패션템으로도 괜찮네.

도로 풀어 침대에 올려놓자 페르세포네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착용하는 게 좋겠지만, 아닐 때는 아공간 코트에 넣어둬요. 그래도 작동은 하니까.]

그 다음은 아몬의 차례였다. 덤덤한 태도만큼 앞선 이들에 비해 문장이 비교적 간결했다.

[곧 게티아의 정기회의가 열린다. 질문은 그때 가서 하지.]

[그러도록 하죠.]

[이젠 네 녀석이 앞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 지 상상이 안 가는구나.]

그 말을 끝으로 아몬은 뒤돌아 문밖을 나섰다. 페르세포네와 흑염룡, 샐리맨더도 내가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줬다. 

[생각했던 것보다 무난하게 지나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대도 이제 볼일봐요.]

[그럼 저도 물러가겠습니다.]

마침내 그리고리까지 퇴장하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방안에는 나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그들이 주고 간 것들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으니까.

그래서 예상치 못한 만남에서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한 여운에 젖어 헤어 나오지 못 하는 나를, 소리 없이 등장한 혹부리왕이 정면에서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


혹부리왕이 망부석처럼 가만히 선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현실성 없는 문장이지만 놀랍게도 현실 그 자체였다. 


턱에 달린 두 개의 혹.


스타스트림에서 저런 외향을 가진 존재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저쪽에서 입을 열 기미가 안 보이길래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요, 혹부리 왕.] 


[너는 . . . 누구지?] 


탁한 음성이 머리를 울렸다. 아무런 격도, 마력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는 상대방을 압도하는 오묘한 힘이 있었다. 


나는 기죽지 않은 채, 혹부리왕의 물음에 답했다. 


[나는 아스모데우스입니다.] 


혹부리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거짓말할 때는 상대를 가려서 하거라.] 


아무래도 나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온 모양이다. 아니면 과거의 미친 마왕과 대비되는 현재의 행적을 꼬집은 것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답변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다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같은 답을 내놓았다간 대화에 진척이 없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고민 끝에 혹부리왕을 납득시키면서도 내 주장을 왜곡하지 않을 문장을 뱉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번 회차에서는 말이죠.]


[. . . 역시 많은 걸 알고 있군.]


[이 정도도 모른다면 '이 세상의 신을 아는 자'라고 자칭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일순, 혹부리왕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자신의 기원을 밝혀내고 싶은 노인에게 '신'이란 단어는 과민반응할 수밖에 없는 활자였으니까.


그가 외마디 탄식을 흘렸다. 


[무지란 . . .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도 하죠.] 


내가 혹부리왕이 32번째 마계를 방문한 이유를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짐작 가는 게 몇 개 있긴 하지만.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죠?] 


혹부리왕은 그제서야 움직였다.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자 내 안의 수많은 설화들이 경종을 울렸다. 


[설화, '마계의 이단아'가 눈앞의 존재를 경계합니다.]


[설화, '선악의 불화'가 당신을 보호합니다.]


[설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비명 소리에 치를 떱니다.] 


비명 소리? 


[설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당신과 청각을 공유합니다.] 


'이런 것도 할 수 있었나?' 라고 감탄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뒤이어 들려온 비통한 귀곡성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 제발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

- 꺼내줘! 


비명 소리는 커다란 혹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왜 설화들이 혹부리왕을 경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으로 치면 지옥에 떨어진 죄수들의 아우성과도 같았다. 


'괜찮아. 너희를 넘겨 주진 않을 테니까.' 


나는 '벽을 넘은 자'를 통해 간신히 설화들을 다독였다. 화신체도 정상이 아닌데 설화들까지 날뛰었다간 정말 큰일이다.


내 눈물겨운 노력을 당연히 알리 없는 혹부리왕은 아까의 질문에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너와 내가 맺은 계약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지.]


[흠, 문제될 게 있나요?]


[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빠뜨렸더군.] 


- 혹부리왕이 세 번의 소원권을 주는 대신, 나는 그가 바라는 시나리오를 보여 줘야 한다. 


그것이 나와 혹부리왕의 계약이었다.

단순하지만 군더더기 하나 없이 명료했다.

여기에 무슨 허점이 있을까? 


[기한은 어디로 갔나, 약삭빠른 마왕이여.] 


[아.] 


. . . 사실 한 개 숨겨 놓긴 했는데, 들켜 버렸다. 누가 혹부리 아닐까, 설화를 거래하는 잡상인답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애써 아쉬운 심정을 감춘 채, 계약서에 새로운 조건을 욱여넣었다. 


[ . . . 제가 요즘 즐겨보는 채널의 화신들에겐 7이란 숫자가 행운을 의미하더군요.]


[허무맹랑한 미신이군.]


[마냥 허무맹랑하진 않습니다. 과거 인간이 맨눈으로 관측할 수 있는 천체의 개수에서 유래했으니까요.] 


태양과 달.

수성과 금성.

화성과 목성. 

그리고 토성. 


비록 별과 성운이 창궐하는 세계에서 그 장엄한 의미가 퇴색되었으나, 인류사적인 측면에서 그들이 가진 힘은 아직 막강했다. 


[적어도 그때의 인간들은 우주가 완전하다고 여겼답니다. 질서정연하고 완전무결한 공간. 천체들은 그 질서에 순응하는 자연의 법칙들 중 하나였겠죠.] 


인류는 천체를 읽어 우주의 질서를 지상에 재현하고자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역법, 혹은 천문학 같은 학문들이었다.


이는 인류의 역사이며, 동시에 기나긴 이야기였다. 


[모든 이야기엔 저마다의 맥락이 있죠.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것보다 '왜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졌을까'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마 혹부리왕도 이 말에는 공감할 것이다. 그는 왜 자신이 탄생했고 존재하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해온 노인이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혹부리왕이 입을 열었다. 


[ . . . 허무맹랑하기 보단 모순적인 이야기다. 애초에 완전한 것이란 없거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밤하늘의 별도, 천체도, 결국 이야기를 존속하기 위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죠.] 


인류가 숭배해마지 않던 우주도 결국 무질서하다. 신은 주사위를 던질뿐더러, 확률적으로 존재 가능한 모든 세계선을 그저 관망하고 있으니.


결국 우주가 완벽할 것이라는 인류의 가정은 틀린 셈이었다.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을 찾으려한 그들의 이야기는 혹부리의 말처럼 모순이 되는 것이고. 


문맥이 그러했다.


나는 창틀에 부서져 산란하는 별빛을 응시했다. 


[그러니 조금 더 어지럽혀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애시당초 불완전한 곳이니까,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장소니까,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속도를 조금만 가속시켜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다소 냉소적인 문장들.


7년은 이를 함축한 숫자였다.


혹부리왕이 곁에서 음침하게 웃었다. 


[클클, 재밌는 마왕이군.]


[마왕치곤 유쾌한 편이죠.] 


일단 첫번째 제안은 혹부리왕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혹부리의 환심을 사는 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 . . 지금 당장은 아군이니까. 


[지구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7년이 지나도 성과가 없다면 네 설화를 거두러 오겠다.] 


당장은 말이다. 


설화들의 귀곡성이 아직 귓가에 선하다. 내 피 같은 설화를 턱에 불알 두짝 붙인 노친네에게 뺏길 수는 없지. 


그나마 속임수가 잘 먹혀서 다행이었다. 


[설화, '불패의 헙잡꾼'이 키득거립니다.] 


7년 뒤면 본편이 끝나 있겠지. 그때 혹부리왕은 이미 이승을 하직한 뒤다. 미래를 안다는 게 이럴 땐 참 편리하구만.


김독자가 이 맛에 사기를 치는구나 . . . 각설하고, 이제 두 번째 방문 목적을 들을 때였다. 


혹부리왕이 뒤이어 내뱉은 말은 대화의 흐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존재가 있다.]


[누굽니까?]


[그것은 알려줄 수 없다.]


[흐음, 명색이 혹부리들의 왕인데 너무 치졸한 것 아닙니까?] 


내 도발에 혹부리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작 내뱉는 문구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나는 뒤늦게 방금 그가 지은 표정이 미소임을 알아차렸다.


혹부리왕이 웃으며 고했다. 


[세상에는 때로 모르는 게 약인 것들이 있지. 정 궁금하면 직접 가서 알아내 봐라. 단언컨대 네가 여태껏 겪어온 문제들 중 가장 난해할 것이다.] 


묘하게 꼬시는 말투였다. 허나 그닥 내키지는 않았다. 만남을 사주한 이의 정체가 얼추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퇴짜를 놨다. 


[흠, 그 정돈가?]


[ . . . ] 


이래도 되나 싶지만 아마 괜찮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혹부리는 시나리오에 간섭할 수 없다. 설령 막대한 개연성을 감수해 나를 해코지할 수 있다고 해도 혹부리왕에겐 그럴 이유가 없었다. 


'가장 오래된 꿈'이란 난제의 유일한 실마리를 쥐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포기할 수 없을 테니까. 


갑은 이쪽이었다. 

분명 그런 줄 알았다. 


혹부리왕이 잠시 상념에 빠졌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단순한 설득은 먹히지 않을 것이라 지레짐작했는지 이어진 문장은 내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추상적인 관형사들로 가득했다. 


[. . . 그는 수레바퀴의 끝에 선 존재이자 고독한 순례자, 가장 오래된 꿈에 맞서는 위대한 신격.] 


혹부리왕의 전략은 훌륭하게 들어맞았다. 마지막 문구를 듣고, 나는 도저히 동요를 감출 수 없었으니까. 


[그런 존재가 네 전생을 알고 있다면, 한번 가봐야 되지 않겠나?] 


[몰입도가 낮아집니다.] 


. . . 불가능하다. 


설사 은밀한 모락가라도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인을, 그것도 다른 세계선의 이방인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모순이고 궤변이었다. 

이제 와서 신경 쓸 것도 아니고.  


- 타인에 의해 정의된 이야기는 어느새부터 타인을 위해 쓰여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그렇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하지만 . . . 마음 한 켠에 아직 불안감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 그 수많은 이야기의 집합이 '나'라는 존재였다.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닌가?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남자의 얼굴과 이름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았으나, 남자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으니.


비유하자면 . . . 그래. 


우리는 마치 '끊어진 필름' 같은 관계였다.


그것이 내가 남자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이유였다. 


[그 말 . . . 진실인가요?]


[의심이 많구나.]


[혹부리를 믿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클클, 오늘 바보가 한 명 늘겠군.] 


혹부리왕이 쐐기를 박았다. 


[내 비원을 걸겠다.] 


그리고 큼지막한 혹을 쓸어내렸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시봐도 기분 나쁜 미소였다. 


[이제 갈 마음이 생겼나?]


[뭐, 한 번쯤 얼굴 봐서 나쁠 건 없겠죠.]


[유감스럽게도, 그는 베일을 쓰고 있다. 맨 얼굴을 볼 순 없겠지.]


[상관없어요.] 


어차피 방송으로 실컷 보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꼭 지금가야 하나요?] 


지금 내 모습을 묘사하자면 막 무덤에서 나온 미라같은 몰골이었다. 몸 이곳저곳을 붕대로 감겨진 상태. 


삭신이 쑤셨다. 


[한번 보겠네.]


일순, 혹부리왕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깜짝이야. 반사적으로 욕이 튀어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필터링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 못생겼군요.]


[ . . . 손목이나 내놓거라.] 


나는 순순히 소매를 걷었다. 혹부리왕은 주름진 손으로 내 이야기 맥을 잡더니만 조근조근한 어조로 노랫말을 읊었다. 


노래가 중단되었을 때, 통증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아일렌 부럽지 않은 치료 솜씨였다. 


['설화 수선가'의 이야기도 가지고 있었군요. 이쯤 되니 그 혹에 담긴 설화의 수가 궁금해집니다.] 


혹부리왕은 꽤 철학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무한에 가깝지. 허나 무한은 아니야. 모든 것엔 끝이 존재하기 마련이니.] 


츠츠츳!


혹부리왕을 중심으로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블랙홀처럼 주변의 빛을 모조리 흡수한 그곳에 검은 게이트가 열렸다. 


[이 앞에 '그'가 있다.]


[그냥 '은밀한 모략가'라고 말해요. 어차피 알고 있으니까.]


멈칫한 혹부리왕이 홉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스스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 . .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군.]


그 말을 끝으로 혹부리왕의 신형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쉰 후, 늙은 혹부리를 따라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