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연애를 시작하고 조금은 바뀔줄 알았던 내 삶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일어나 씻고, 학교로 가 조용히 소설을 읽는다.

새하얀 눈 밭에 뿌려진 검은 활자들을 읽을 때면,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나만의 틈이 생긴다.

활자 사이 속 나만의 작은 틈새. 

아무런 괴롭힘도 고통도 복잡한 것도 없는 이야기만이 존재하는 곳.

그것이 왕따를 당해도 버틸 수 있게 해준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인기척이 느껴질리 없는 설원에 왜인지 모를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한 여자가 서있었다.

한수영이었다.


눈 앞에 한수영은 무언가 입으로 말하고 있었는데, 노이즈가 낀 듯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하는거지? 

조심스레 다가가자, 노이즈 걸린 목소리가 점차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나."


뭐라고?


"일어나라고 멍충아."


눈이 번뜩떠진 나는 반사적으로 손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한수영이었다.


"잘 잤냐?"

"..한,한수영?"

"그래 니 여친님이시다."


여친이라는 말에 놀람도 잠시.

정신을 차린 뒤 주변을 둘러보자, 반에는 나와 한수영 둘 밖에 없었다.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노을빛을 보니 시간이 꽤 흐른 듯 보였다.


"지금 몇시야?"

"5시. 같이 갈려고 기다렸어."

"가,같이 가?"
"그럼 사귀는 사이인데 같이 안가냐?"

"아니 그게...."

"조용히 하고 얼굴에 침이나 닦아."


나는 한수영의 말을 듣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 뒤 입가를 손으로 닦자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한수영은 스마트폰으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잘 때 침을 많이 흘림...."

"그런 것까지 메모하는거야?"


한수영이 스마트폰으로 메모하던 도중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뭐해?"


갈색 빛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학생이 교실의 문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늘 웃는 얼굴에 생기가 있어 보이는 강아지 상의 미인.

누구였더라, 분명 처음 봄에도 이상하게 낯이 익다.

여학생의 얼굴을 확인한 한수영이 별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여긴 왜 왔어 유상아."


아 생각났다. 유상아. 우리 고등학교 전교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

모든 사람에게 살갑게 대하며, 전교 1등에, 선생님에게도 인기 만점인 그런 주인공 같은 인물.

몇 번 학교에서 지나칠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났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수영과 인연이 있다니 유상아 답다고 할지 모르겠다.


"누가 교실 불 안끄고 갔나 확인하려다가 너 얼굴 보여서. 근데 옆은...."

"아 내 남자친구. 김독자라고 해."

"...? 뭐?"

"남친. 사귀고 있어 나랑 얘."


유상아의 반응을 보니 아직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다. 

아마 이런 표정의 유상아를 보는 건 내가 처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소의 유상아에게선 볼 수없을 표정을 지었다.

잠시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유상아는 아직까지 충격이 가시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 독자라고 했지? 이야기 좀 잠시만 할 수 있을까?"

"어? 어 그래."


나도 모르게 동의하고 말았다. 

요즘따라 내 의견에 상관없이 동의하는 회수가 많아지는 기분인데.

아무튼 다급해진 유상아를 따라 복도 구석으로 가자. 유상아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취조당할 분위기인데 이거.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수영이랑 사귄다는거 사실이야?"

"응, 맞아."


유사 연애긴 하지만. 

이미 복도 구석으로 안내한 시점부터 이러한 질문은 나올 것이라 예상했기에, 대답은 막히지 않았다.

긍정하자 유상아는 다시금 놀란 반응이었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어딘가 쓸쓸했다. 슬펐기도 하고.


"그래 수영이가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 갑자기? 수영이랑 모르는 사이 아니었어?"

"사람 마음은 보이지 않는거 아닐까?"

"다시 말해 첫눈에 반했다는 거지?"

"그런 거지."


내 대답에 유상아는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짧은 고민이 지난 후, 유상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잘 들어줘."

"어, 그래 알겠어."

"혹시라도 장난 삼아 사귄다거나,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랬으면 미안하지만 고백 취소해주면 안될까?"


예상치 못한 정곡에 나는 유상아를 쳐다봤다. 

촉이 좋은건가, 아님 일진들이 sns에 소문을 퍼뜨린 걸까.

아마 가능성이 있는 건 전자보단 후자같은데 유상아가 아무리 사교성이 좋아도 그런 안 좋은 애들하고 어울릴 거 같진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해?"

"너도 잘 알겠지만, 수영이가 소문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야. 그건 알고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거짓 고백도 한수영의 소문때문이었으니까.


"저렇게 강해보여도 속은 여리니까. 수영이가 상처받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유상아의 눈빛은 평소의 보던 유상아의 눈빛과 달리 싸늘하게 내려가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거짓으로 고백한 것도 사실이고, 거짓으로 연애하고 잇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 그 사실을 유상아에게 말하는 것은 옳은가?

하지만 한수영도 알고 있다. 이 연애는 거짓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나는 유상아에게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조건을 말하지 말라는 것으로 보아, 유상아도 조건에 관해서는 모를 것이다.


"너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꺼야. 걱정하지마."


내 대답에 마음이 놓였는지 표정이 풀려 평소의 유상아로 돌아왔다.


"미안. 놀랐지. 수영이 관련된 일은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버리거든 이상한 사람이지? 다행히 독자 너는 나쁜 사람은 아닌거 같고 상처 줄거 같지도 않아. 진짜 미안해."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좋게 보였다니 다행이야."

"수영이 기다리겠다. 얼른 가자."


교실로 돌아가자, 오래 기다렸는지 한수영은 뾰루퉁하게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둘이 사귀는 줄 알겠어?"


한수영의 농담에 유상아는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식의 농담은 내성이 없는 건가. 


"시간 늦었으니까 가자."


그러고보니 난 한수영을 어떻게 불러야 하지?

한수영처럼 불러야 하나 여친이라고 부르기엔 아직까지 거리감이 컸다.

그렇다고 성을 붙여 부르면 기껏 풀린 유상아의 의심이 다시 피어날것이고.

진퇴양난인 상황 속에 내가 선택한 건 차선이었다.


"......수영아."


성 빼고 이름으로 부르는 게 이렇게 어색했나. 

내 부름에 놀랐는지, 한수영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오 김독자. 맨날 성 붙여서 부르더니 뭔 일이래?"

"...시끄러."

"너희들 엄청 재밌다."


손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웃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우리 셋은 그렇게 반을 나서 정문으로 향했다.


똑같은 복도, 똑같은 창문, 똑같은 소리.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교길이었다.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이 다를 뿐인데.

그 길다고 느껴지던 복도가 짧아진 것 같고, 

창문 밖에 보이는 풍경을 보게 되었으며.

나의 험담이 아닌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나의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 같던 말을.


나는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


시간은 흘러 어느덧 중간고사가 지난 5월이었다.

봄보다 여름이 가깝고, 중간고사라는 큰 언덕을 지나 짧은 휴식이 주어지는 시간.


나는 사각형으로 잘려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통해 온 서늘한 바람이 기분좋게 머리를 흩날리며, 따뜻한 바람이 서늘함 위에 덮여 씌워졌다.


한수영과의 유사 연애도 어느새 한달.

유상아와도 친해졌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나는 더 이상 괴롭힘을 받지 않았다.

애초에 나를 괴롭히던 일진들이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도 하고. 일진들이 없으니 자연스레 나의 학교 생활은 평화로워졌다.

학교 생활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도 있구나.

당연한 사실을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창문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이 한수영에게로 옮겨졌다.


한달이 지나 자리를 바꾸고, 내 자리는 한수영과 같은 열이었다. 같은 분단이 아닌 게 아쉽지만.

규칙을 지켜야 하는 만큼 이만한 변화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거짓 관계라도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있는 한수영.

그러고보니 방과후가 아닌 한수영은 항상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저번 달에는 자리가 멀어서 관찰하기 쉽지 않았지만, 시선에 들어오니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뭐 자세한건 방과 후에 물어봐야지.


그렇게 나는 스마트폰을 켜 소설앱을 켰다.

최근에 감상한 탭으로 들어가, 가장 앞에 있는 소설을 클릭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3가지 방법.


참으로 오그라드는 제목이고 조회수도 나 밖에 보지 않아 1밖에 없지만 나는 이 소설이 좋았다.

비록 휴재중이긴 하지만, 천몇백화나 있기에 분량은 걱정이 되지 않았다.

매일 읽어도 줄어들지 않는 회차라니 꿈만 같지않은가.


「생명교주 김철양이 피를 쏟으며 힘겹게 말했다.


"패왕. 조언 하나 하죠. 당신이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할때면 신은 언제나 시련을 주시죠. 당신도 저처럼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받게 될겁니다."


"상관없다. 시련은."


일검. 세상을 등분하는 듯한 아름다운 직선이 그어지자. 생명교주 김철양의 목은 바닥을 굴러 피를 토해냈다.


"언제나 받고 있으니."」


오 이 자식이 왠일이래 정상적인 말이나 하고.

감탄도 잠시 나는 다시 설원 속 피어난 활자들을 탐닉했다.

그렇게 탐닉을 하는 동안 어느새 구름 뒤에 햇빛이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땡 땡 땡.


학교의 끝을 알리는 종 소리가 울리고 담임 선생님이 종례를 했다.

원래 종례를 짧게 하는 스타일이시기에 학생들은 담임 선생님을 좋아했다.

종례가 끝나고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어느새 반에는 나와 한수영 둘 밖에 없었다.

평소와 같았으면 한수영이 먼저 다가와 같이 가자고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내가 먼저 다가가고 싶었다.


"수영아 같이 가자."

"...오 왠일이래 먼저 같이 가자고 하고."

"한번 쯤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나의 말에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1초 뒤 우린 동시에 웃었다.

작게 웃음 짓던 나를 본 한수영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웃을 때 확실히 웃어 두는 게 좋지."

"어? 뭐라고 했어?"

"아냐 아무것도. 나 화장실 좀."


먼저 교실 문을 나서는 한수영. 나는 그런 한수영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한수영의 말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웃을 때 확실히 웃어 두는 게 좋지.'


한수영이 평소에 말하던 분위기와 사뭇 다른 말에 나는 또 다시 이질감이 느껴졌다.

한수영은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무엇을 읽고 있으며, 방금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러고보니 나는 한수영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

나에 대해선 그렇게 조사하면서 정작 자신의 모습은 들어내는 것을 꺼리는 것.

분명 한수영은 무언가 숨기고 있었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 지 알고 싶었다. 그녀에게 힘이 되주고 싶었다.

형태가 사실을 만드는 걸까. 나는 점점 한수영과의 관계가 달라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나 왔다. 오래 기다렸지?"

"괜찮아. 수영아. 오래 안 기다렸어."

"거짓말하네. 오래 기다린 티 팍팍 내는 구만."

"티났어?"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한수영은 피식 웃었다.

저 자연스런 웃음 뒤에 무엇이 감춰져 있을까.


복도를 걷던 나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수영아. 이번 주 토요일 말인데. 날씨도 좋으니까 너만 괜찮으면.."
"날씨 엄청 좋긴 하지 벌써 5월이니까."


순간적인 변화였지만, 한수영의 표정은 약간 흐려졌다.

그러나 평소와 같이 장난스러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 아 미안 토요일 말이지."

"너만 괜찮으면 공원에서 같이 시간 좀 보내면 어떨까 싶어서."


예상치 못한 제안에 한수영의 눈이 조금 커졌다.

착각이겠지만, 볼도 조금 붉어진 거 같았다.


"그거 지금 데이트 신청 맞지..?"

"그렇게 되겠네."

"너가 싫으면 상관 없고. 토요일은 어쩔까 싶어서 생각한거야."


한수영은 시선을 피했다. 자연스러웠지만 그랬기에 이상했다.


"좋아. 가자. 오전은 안되는데 괜찮아?"

"아, 응 괜찮아."


한수영의 반응을 주시하느라 대답이 조금 늦어졌다.


"돈은 많이 안드는게 나을 거 같지? 학생이니까 우리는."


수중에 남은 돈이 별로 없었는데 다행이었다.

알바비 받으려면 아직 10일이나 남았다고.

잠시 고민하던 한수영은 나에게 제안했다.


"공원 갈래? 도시락 같은 거만 사면 되니까 싸고 괜찮을 거 같은데."

"알았어. 몇시까지 만날까?"

"구원공원 큰 분수대 알지? 거기서 12시에 만나."

"좋아. 그때 괜찮을 거 같아."


그렇게 내 인생 첫 데이트가 그렇게 성사되었다.


작가 후기 : 캐릭터 붕괴가 심하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오랜만에 글을 쓰는지라.....